오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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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5.18
인터넷을 달군 뜨거운 논쟁 : 빨간 버튼과 파란 버튼
재밌는 생각거리를 하나 가져왔습니다. 주식 얘기는 아닙니다만, 게임이론의 현실 적용과 그 맹점을 다루는 내용이라 관련이 없지는 않을 것 같아 소소하게 적어봤습니다.
최근 인터넷을 달군 '미스터비스트의 버튼 딜레마'를 아시나요? 룰은 단순합니다.
지구상의 모든 사람이 빨간 버튼과 파란 버튼 중 하나를 비밀 투표로 누릅니다. 파란 버튼을 누른 사람이 50%를 넘으면 모두가 생존합니다. 하지만 50%를 넘지 못하면, 빨간 버튼을 누른 사람만 살아남습니다.
여러분이라면 어느 버튼을 누르실 것 같나요?
이 단순한 사고실험은 순식간에 거대한 논쟁으로 번졌습니다.
파란 버튼을 누르겠다는 사람들은 "모두가 살 수 있는 길이 있는데 왜 타인을 희생시키려 하느냐"고 묻고, 빨간 버튼을 누르겠다는 사람들은 "빨간 버튼이야말로 나와 타인 모두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유일하게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반박합니다.
흥미로운 건 빨간 버튼 진영의 논리가 꽤나 날카롭다는 점입니다. 이들의 목소리를 들어보시죠.
"파란 버튼을 누르는 건 80억 명의 타인에게 내 목숨을 거는 도박이다."
"내가 빨간 버튼을 누른다고 파란 버튼을 누른 사람이 죽는 게 아니다. 그들은 50%를 넘기지 못한 집단 전체의 실패로 죽는 것이다."
"어차피 내 한 표가 50%라는 거대한 확률을 바꿀 가능성은 0에 수렴한다."
"어차피 모두가 빨간 버튼을 누르면 모두가 사는 거 아닌가? 파란 버튼 누르는게 이상한 것이다."
이들의 주장은 게임이론의 우월 전략(dominant strategy)을 완벽하게 따릅니다. 불확실성 속에서 타인을 신뢰할 수 없을 때, 내 생존을 100% 보장하는 선택을 하는 건 수학적으로 너무나 타당하니까요. 심지어 한국의 SNS에서는 이런 댓글도 심심찮게 보입니다.
"파란 버튼 누르는 사람들은 지능이 낮아서 어차피 도태될 사람들이다. 그들을 위해 내가 죽을 이유는 없다."
수학적 우월성을 주장하는 논증에서 시작해, 결국 타인에 대한 경멸 섞인 가치관 선언으로 끝나는 이 흐름. 빨간 버튼의 논리는 정말 완벽한 걸까요?
게임이론의 사각지대: 우리는 무엇을 원하는가
빨간 버튼의 논리가 무너지기 시작하는 지점은 논리가 아니라 '전제'에 있습니다. 게임이론은 "모든 인간은 자신의 생존 확률을 극대화하려는 고립된 합리적 개체"라고 가정합니다. 이 전제 안에서 빨간 버튼은 완벽합니다.
그런데 잠깐, 이 전제를 한 번 뜯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게임이론이 말하는 '합리적 개체'란 어떤 존재일까요? 자신의 이익을 정확히 알고, 그것을 극대화하기 위해 냉정하게 계산하며, 타인과의 관계나 감정에 흔들리지 않는 존재입니다. 경제학 교과서에서는 이를 '호모 이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라고 부릅니다. 이 가상의 인간은 사랑하는 사람도, 지키고 싶은 공동체도, 부끄러움도 없습니다. 오직 생존 확률만을 최적화합니다.
하지만 현실의 인간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누군가 파란 버튼을 누르겠다고 결심할 때, 그 이유는 "확률 계산을 못해서"가 아닙니다. "내 주변에 파란 버튼을 누를 소중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들과 같은 편에 서고 싶기 때문입니다. 설령 그 선택이 위험을 수반하더라도요.
이건 목표 자체가 다른 문제입니다. 빨간 버튼은 '생존'이라는 단일 효용함수를 가집니다. 반면 파란 버튼을 누르는 사람들은 이렇게 선언하는 겁니다. "나는 생존만을 원하지 않는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같은 방향을 선택하는 사람이고 싶다." 이건 게임이론이 처음부터 모델링하지 못하는 영역입니다. 게임이론은 '무엇을 선택하면 이기는가'를 계산하지만, '어떤 사람으로 살 것인가'는 계산하지 않으니까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이 딜레마가 사실은 훨씬 오래된 질문과 맞닿아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인간에게 진정한 행복이란 무엇인가? 그의 답은 단순했습니다. 그것은 쾌락도, 재산도, 심지어 생존도 아닙니다. 자신의 덕(arete)을 온전히 발휘하며 사는 삶, 즉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입니다. 그리고 그 삶은 반드시 공동체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인간은 본질적으로 '폴리스적 동물', 즉 공동체 안에서만 완전해지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혼자 살아남는 것은 생물학적 생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공동체로부터 분리된 생존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좋은 삶'이 아닙니다. 파란 버튼을 누르는 사람은 생존 확률을 계산하기 이전에, 자신이 어떤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고 싶은지를 이미 알고 있는 겁니다.
생존만을 유일한 목표로 삼지 않는 사람에게, "빨간 버튼이 생존을 보장한다"는 게임이론의 훈수는 애초에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것입니다. 이들에게 진짜 질문은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가 아니라 "살아남은 뒤 어떤 세계에서 살 것인가"이기 때문입니다.
철학이 파란 버튼을 지지하는 방식
빨간 버튼 진영이 던진 또 하나의 논거가 있습니다. "내 한 표는 의미가 없다"는 무력감입니다. 80억 인구 앞에서 개인의 선택은 모래알처럼 작아 보이죠.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이 논리에 기대어 빨간 버튼을 정당화합니다.
하지만 영국의 철학자 데릭 파핏(Derek Parfit)은 이런 식의 '무의미한 기여'라는 변명을 산산조각 냅니다. 파핏은 저서 『이유와 인격(Reasons and Persons)』에서 개별 행위의 결과가 감지할 수 없을 만큼 미미하더라도, 수많은 작은 행위가 모여 거대한 해악이나 이익을 만들어낸다는 사실을 날카롭게 지적했습니다. 그는 이것을 '미미한 결과의 문제(Problem of Imperceptible Differences)'라고 불렀습니다.
비유를 들어볼까요. 강물을 오염시키는 공장이 수천 개 있을 때, 각 공장의 오염 기여분은 개별적으로는 감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도덕적 면죄부가 되지는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80억 명 중 내 한 표가 통계적으로 0에 가깝다고 해서, 그 행위의 도덕적 무게마저 0이 되는 건 아닙니다. 결과를 0으로 반올림하는 건 수학이 아니라, 책임에서 벗어나기 위한 비겁한 편의주의입니다. "내 표는 의미 없다"는 말은, 사실 내가 짊어져야 할 도덕적 부담을 회피하기 위한 출구 전략에 불과합니다.
칸트의 의무론을 빌려오면 파란 버튼의 논리는 더욱 단단해집니다. 칸트 윤리학의 핵심은 “보편적 법칙이 될 수 있는 행동만이 도덕적이다”라는 정언명령입니다. “모든 사람이 빨간 버튼을 누르면 모두가 산다”는 명제도 보편화 가능해 보이지만, 이건 실제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빨간 버튼의 준칙은 단순히 “빨간을 눌러라”가 아니라 “집단적 위험 분담에 참여하지 않고 개인 생존을 확보한다”이기 때문입니다. 이 준칙을 보편화하면 이 상황뿐 아니라 전쟁, 팬데믹, 기후 위기 등 인류의 모든 도덕적 협력 상황에 적용되고, 집단적 도덕 협력이라는 제도 자체가 붕괴합니다. 빨간 버튼의 논리는 “다른 사람들이 파란 버튼을 눌러줄 것이라는 기대 위에서 나만 빨간 버튼을 누른다”는 무임승차 구조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이 계산을 동시에 하면, 파란 버튼을 누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게 됩니다. 빨간 버튼의 논리는 보편화되는 순간 자기 파괴적입니다.
반면 "모든 사람이 파란 버튼을 누르면 모두가 산다"는 명제는 완벽하게 보편화 가능합니다. 파란 버튼은 타인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우하는 윤리적 태도를 체화하고 있습니다.
파란 버튼은 단순한 이타적 도박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류가 연대하면 모두가 산다"는 거대한 사회적 가설에 내 생명을 명시적으로 등록하는 시민적 의무의 실천입니다. 루소, 롤스, 하버마스로 이어지는 사회계약론의 관점에서 보면, 파란 버튼은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그 공동체를 신뢰하고 그 신뢰에 응답하겠다는 선언입니다. 롤스의 '무지의 베일(veil of ignorance)' 뒤에서, 즉 내가 어떤 사람으로 태어날지 모르는 상태에서 규칙을 정한다면, 합리적인 인간은 모두가 연대하는 파란 버튼의 세계를 선택할 겁니다. 그 세계에서는 누구도 타인의 이기심에 의해 일방적으로 희생당하지 않으니까요.
만약 파란 버튼이 50%를 넘지 못해 세상이 망한다면, 그건 공동체가 이미 실패한 세계입니다. 그런 세계에서 빨간 버튼을 눌러 홀로 생존을 구가하는 것이 과연 인간다운 삶일까요? 파란 버튼을 누르는 사람은 "모두가 살 수 있는 세계"에 자신의 생존을 걸고 있는 겁니다. 단순히 죽음을 감수하는 게 아니라, 인류라는 공동체가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는 믿음에 대한 조건부 베팅이자, 그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책임을 다하겠다는 선언인 셈입니다.
게임판 위의 논리와 삶 속의 전략은 다릅니다
게임이론은 아름다운 도구입니다. 핵전쟁 억지, 경매 설계, 시장 경쟁 분석 — 인간의 상호작용을 수학적으로 모델링하는 데 있어 이보다 강력한 프레임은 없습니다. 하지만 게임이론이 작동하는 조건을 들여다보면, 그것이 현실 세계와 얼마나 다른 가정 위에 서 있는지가 드러납니다.
게임이론의 모델은 기본적으로 '일회성 게임'을 전제로 합니다. 서로 모르는 두 사람이 딱 한 번 만나 선택을 하고 헤어지는 구조입니다. 이 구조에서는 배신이 합리적입니다. 다시 만날 일이 없으니 평판도, 신뢰도, 관계도 고려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그러나 우리가 실제로 살아가는 세계는 일회성 게임이 아닙니다. 우리는 같은 사람들과 반복적으로 만나고, 평판이 쌓이고, 신뢰가 자산이 되는 세계에서 살고 있습니다.
행동경제학자 로버트 액설로드(Robert Axelrod)는 1980년대에 유명한 실험을 진행했습니다. 죄수의 딜레마를 반복적으로 수행하는 컴퓨터 토너먼트에서 어떤 전략이 가장 높은 점수를 얻는지 겨루게 한 것입니다.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수십 가지 정교한 전략들을 모두 제치고 가장 단순한 전략이 우승했습니다. 바로 '팃포탯(Tit-for-Tat)'입니다. 처음에는 협력하고, 이후에는 상대방이 한 것을 그대로 따라 하는 전략입니다. 처음에 신뢰를 내밀고, 배신당하면 응징하고, 상대가 돌아오면 다시 협력하는 이 단순한 전략이, 장기적으로는 어떤 냉혹한 배신 전략보다 강했습니다.
이 실험이 말해주는 건 단순합니다. 반복되는 현실에서는 협력이 이기는 전략이라는 것입니다.
게임이론이 "빨간 버튼이 우월 전략"이라고 말할 때, 그건 일회성 게임의 논리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세계에서 계속 살아가야 합니다. 내가 빨간 버튼을 눌러 살아남은 세계에서, 나는 파란 버튼을 믿었다가 죽은 사람들의 빈자리 속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 세계에서 나를 향한 타인의 신뢰는 어떻게 될까요? 단기적 생존을 위해 협력을 포기한 사람이 장기적으로 얻는 건 생존이 아니라 고립입니다.
더 근본적인 문제도 있습니다. 게임이론은 인간의 선호(preference)를 고정된 것으로 가정합니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는 이미 정해져 있고, 게임이론은 그 선호를 극대화하는 전략을 찾아줍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인간의 선호는 고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우리 자신이 달라집니다. 빨간 버튼을 누르는 연습을 반복한 사람과, 파란 버튼을 누르는 연습을 반복한 사람은 결국 다른 사람이 됩니다.
게임이론은 '지금의 나'가 어떻게 이길 것인가를 계산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진짜 신경 써야 할 건 '앞으로의 나'가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입니다.
요컨대 게임이론은 특정 조건 아래서 특정 목표를 달성하는 최적 전략을 알려주는 도구입니다. 그 도구 자체는 훌륭합니다. 하지만 그 도구를 삶 전체의 지침으로 삼는 순간, 우리는 도구가 설정한 좁은 전제 — 고립된 개체, 일회성 게임, 단일 효용함수 — 안에 스스로를 가두게 됩니다. 현실의 삶은 그보다 훨씬 복잡하고, 훨씬 오래 지속되고, 훨씬 많은 사람들과 얽혀 있으니까요.
말 없는 연대, 그리고 우리의 얼굴
가장 흥미로운 건 이 대결의 실제 결과입니다. 미스터비스트의 투표에서 결국 파란 버튼이 승리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게임이론의 냉혹한 예측을 뒤집고, 어떻게 수억 명이 조율 없이도 50%라는 임계점을 넘을 수 있었을까요?
경제학자 토마스 셸링(Thomas Schelling)이 말한 '포컬 포인트(Focal Point)'가 여기서 작동합니다. 사람들은 사전 합의나 명시적인 대화 없이도 자연스럽게 하나의 선택으로 수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뉴욕에서 모르는 사람과 만나야 한다면 어디로 갈 것인가?"라는 질문에 많은 이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그랜드 센트럴 역을 떠올리는 것처럼 말이죠. 포컬 포인트는 논리가 아니라 문화적 직관과 공유된 기대에서 만들어집니다.
파란 버튼은 바로 이 딜레마의 포컬 포인트였습니다. "선한 사람, 혹은 나와 연결된 소중한 사람은 파란 버튼을 누를 것"이라는 직관적 믿음. 이 믿음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며 거대한 관계망을 형성합니다. 나는 내 가족을 믿고 파란 버튼을 누르고, 내 가족은 또 다른 누군가를 믿고 파란 버튼을 누릅니다. 죄수의 딜레마가 무서운 이유는 두 사람이 소통할 수 없기 때문이지만, 현실의 인간은 대화 없이도 연대할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관계망이 소통을 대신하는 것입니다.
이 관계망의 힘은 생각보다 훨씬 강력합니다. 나와 연결된 사람이 파란 버튼을 누를 것이라는 믿음은 단순한 낙관이 아닙니다. 그것은 내가 그 사람을 알고 있다는 사실, 그 사람이 어떤 가치관을 가졌는지 안다는 사실에서 오는 근거 있는 신뢰입니다. 그리고 그 신뢰는 전염됩니다. 내가 파란 버튼을 누른다는 사실이, 나를 아는 누군가에게 또 다른 파란 버튼을 누를 이유가 됩니다. 말하지 않아도, 서로가 서로를 향하고 있는 겁니다.
결국 이 버튼 딜레마는 우리에게 "인류를 어떻게 바라보는가"를 묻는 잔인하고도 아름다운 거울입니다.
타인을 불확실하고 어리석은 타자로만 본다면 빨간 버튼을 누를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를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된 관계망으로 본다면, 우리는 기꺼이 파란 버튼에 손을 얹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투표 결과가 파란 버튼의 승리였다는 사실은, 아직 이 세상에 서로를 향한 말 없는 믿음이 실재한다는 가장 따뜻한 증거입니다.
마무리하며
주식을 하다 보면 우리는 스스로를 합리적 개체라고 믿게 됩니다. 정보를 분석하고, 확률을 계산하고, 감정을 배제한 채 최적의 베팅을 찾으려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가장 이성적인 전략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삶의 많은 선택들은 주식 차트보다 훨씬 복잡한 변수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어떤 사람과 함께할 것인가, 어떤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 것인가, 내가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가. 이런 것들은 효용함수에 넣을 수 없지만, 우리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베팅입니다. 게임이론은 '지금의 나'가 어떻게 이길 것인가를 계산하지만, 진짜 중요한 건 '앞으로의 나'가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이니까요.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계좌에 찍히는 숫자 말고도 우리 삶을 이루는 다른 가치들을 한 번쯤 더 돌아보는 시간이 되셨으면 합니다.
P.S.
저는 반드시 파란 버튼을 누릅니다.
제 친형은 빨간색보다 파란색을 좋아하는 저희 5세 조카들을 위해 파란버튼을 누를 것이고,
그 조카를 너무 아끼고 사랑하며, 동시에 저희 형제가 파란 버튼을 눌렀을까 걱정하시는 제 어머니와 아버지도 파란버튼을 누르실 거니까..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누군가들도 날 위해 파란 버튼을 누를거라는 걸 믿고.
저도 기꺼이 그들을 위해 파란 버튼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