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론과 인식론 관점에서의 투자
존재론(Ontology)
존재론은 '무엇인가가 존재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냐에 대한 것이다. 투자의 관점에서는 '적정 가치(Value)'라는 것은 존재하는가?'에 대한 물음으로 치환할 수 있다.
실재론(Realism)
가치는 가격과 독립적으로 객관적으로 존재한다는 주장이다. 가격은 가치의 그림자이고, 시간이 지나면 가격이 가치에 수렴한다.
이것이 가치투자의 형이상학적 토대이다. 벤자민 그레이엄의 "Mr. Market" 비유가 이 입장의 가장 명료한 표현이다. 미스터 마켓은 매일 다른 가격을 부르지만 회사의 진짜 가치는 그것과 무관하게 존재한다. 가격과 가치의 괴리가 곧 안전마진이다.
이 입장은 플라톤주의의 직계 후손이다. 플라톤에게 의자라는 개별 사물 너머에 "의자의 이데아"가 실재하듯, 주식이라는 거래 단위 너머에 "이 회사의 진짜 가치", "가치의 이데아"가 실재한다.
명목론(Nominalism)
가치라는 독립적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 "가치"는 그저 시장 참여자들이 일정 가격에 합의했다는 사실에 붙인 이름일 뿐이다.
이것이 효율시장가설의 형이상학적 토대다. 가격이 모든 가용 정보를 반영하므로 가격 외부의 "진짜 가치"라는 것은 의미가 없다. 14세기 윌리엄 오컴(William of Ockham)의 명목론(보편자는 이름일 뿐 실체가 아니다)의 현대적 응용이다.
구성주의(Constructivism)
가치는 실재하지도 않고 단순한 이름도 아니다라는 주장. 가치는 시장 참여자들의 인식·해석·자본 흐름이 상호작용해서 부분적으로 만들어내는 구성물이다.
소로스의 재귀성과 매켄지의 수행성이 이 입장에 속한다. 가치는 객관적 사실도 아니고 단순한 합의도 아니다. 그것은 시장 안에서 끊임없이 생성·변형되는 동적 실체다. 칸트 이후 현상학과 사회적 구성주의의 흐름이 이 입장의 철학적 배경이다.
현금흐름의 유형과 존재론
자산 유형에 따라 어느 입장이 더 잘 작동하는지가 다르다.
현금흐름이 안정적이고 자산이 명확한 자산(성숙 우량주, 부동산, 회사채)
실재론이 가장 잘 작동한다. 객관적이라고 부를 만한 가치의 닻이 존재한다. DCF, NAV, 청산가치 같은 도구가 의미를 가진다.
현금흐름이 없거나 본질적 닻이 없는 자산(통화, 일부 원자재, 크립토)
명목론에 가장 가깝다. 합의된 가격 외부에 "진짜 가치"라고 부를 만한 것이 거의 없거나 매우 약하다.
현금흐름이 불확실하고 미래에 의존하는 자산(성장주, 신흥 기업, 신기술 자산)
구성주의가 더 잘 맞는다. 어떤 서사가 시장에서 받아들여지는가, 어떤 자본이 어떤 시점에 흘러들어오는가가 가치를 부분적으로 만든다. 테슬라의 시가총액 변동이 단순히 "정확한 가치 발견"의 과정으로 설명되지 않는 이유다.
가치투자의 형이상학적 곤란
가치투자자가 직면하는 문제는 자기 자신의 형이상학적 전제를 자주 잊는다는 점이다.
"내재가치가 존재한다"는 명제는 입증 가능한 사실이 아니라 투자자의 형이상학적 선택이다. 그것을 입증할 방법은 없다. 모든 가치 계산은 가정에 의존하고, 그 가정은 다시 검증 불가능하다.
이것이 가치투자가 좌절하는 대표적인 이유다. 어떤 회사에 대해 "내재가치 X"를 계산하고 그것이 객관적 사실이라고 믿는 순간, 시장이 그 가치를 인정하지 않으면 "시장이 틀렸다"고 결론짓는다. 그러나 시장이 영원히 그 가치를 인정하지 않을 수도 있다. 케인스가 말한 "시장은 당신이 지급 능력을 유지하는 기간보다 오래 비합리적일 수 있다"가 가리키는 것이 이 곤란함이다.
정직한 가치투자자는 자기 입장의 형이상학적 성격을 인식한다. "내재가치가 존재한다"는 것은 자기가 선택한 작업 가정이지 검증된 사실이 아님을 안다. 이 인식이 있으면 자기 가치 추정이 빗나갔을 때 사후 합리화 대신 추정 자체를 재검토할 수 있다.
인식론(Epistemology)
가치가 실재한다고 인정하더라도, 그것을 우리가 알 수 있는가, 그리고 "안다"는 것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가는 별개의 문제다.
존재론은 "그것이 있는가"를 묻고, 인식론은 "그것을 어떻게 아는가"를 묻는다. 가치투자자가 자주 혼동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내재가치가 존재한다"는 명제와 "나는 그 내재가치를 안다"는 명제는 전혀 다른 강도를 가진 주장이다.
기초주의(Foundationalism)
여기서 말하는 기초란 안정적이고 흔들리지 않는 기초, 즉 기반(Foundation)을 의미한다.
기초주의는 지식은 흔들리지 않는 토대 위에 논리적으로 쌓아 올릴 때 비로소 지식이 된다는 입장이다. 데카르트가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는 것"에서 출발해 지식 체계를 세우려 했던 시도가 기초주의의 원형이다. 충분한 자료와 올바른 방법론이 있으면 확실한 답에 도달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투자에서 이것은 그레이엄식 내재가치 계산의 인식론적 토대다. 재무제표라는 단단한 사실 위에 표준화된 계산을 적용하면 회사의 내재가치는 객관적 수치로 도출 가능하다는 믿음 혹은 가정이다. DCF(현금흐름할인)의 모든 변수가 정확하기만 하면 답은 하나뿐이라는 믿음도 같은 계열이다.
그러나 기초주의의 문제점은 입력값 그 자체의 확실성을 어디서 가져오느냐이다. 미래 현금흐름, 할인율, 영구성장률 등 인풋값은 모두 추정치다. 추정치 위에 세워진 정밀 계산은 아무리 자릿수를 늘려도 그 토대의 자의성을 상쇄하지 못한다.
Garbage In, Garbage Out이 바로 이 의미이다. 기초주의가 투자 영역에서 거의 항상 무너지는 이유는, 투자라는 영역에서는 데카르트가 찾던 "의심 불가능한 토대"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식의 분류
이처럼 투자의 세계에서는 성립하지 않는 기초주의의 한계에 대응하기 위해, 투자자들은 자신의 투자가설 구성 요소를 인식론의 관점에서 크게 세 종류로 분리해야 한다.
검증 가능한 사실(Verifiable Fact): 공시 자료, 재무제표, 정부 통계, 공인된 가격 데이터. 출처 추적이 되고 다수가 같은 결론에 도달할 수 있는 것. 주로 과거에 관한 것들.
합리적 추론(Reasoned Inference): 사실들로부터 논리적으로 도출한 결론. 예를 들어, "ABF 매출이 4분기 누적 25% 늘었고 마진이 회복되었으므로 영업이익이 X 증가했을 것이다."
신념·기대·서사(Belief): 미래에 대한 예상, 경영진의 의도 추정, 산업 패러다임 변화 가정. 검증되지 않았거나 검증 불가능한 것.
일반적으로 가치주/대형주에서 성장주/소형주로 갈 수록 1번의 비중은 줄어들고 3번의 비중이 늘어난다.
하이에크의 분산된 지식의 문제, 알지 못함의 구분
투자자가 겪는 또 다른 어려움은 어떤 자산의 적정가치를 결정하는 정보는 시장 전체에 분산되어 있다는 것이다.
A는 그 회사의 공급망 변화를 알고,
B는 경쟁사의 내부 전략 변경을 알고,
C는 다가오는 규제 동향을 알고,
D는 핵심 고객사의 발주 계획을 알고 있다.
이 모든 부분 지식을 단일 두뇌가 통합할 방법은 원리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가격이라는 메커니즘은 바로 이 분산된 정보를 신호로 압축해 전달하는 발견 절차다.
자기 분석이 시장 전체의 집계 판단보다 우월하다고 단언하는 것은, 자기가 그 분산 지식을 모두 가지고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며, 대부분의 경우 이 가정은 인식론적 오만이다.
분산된 지식 문제를 인정하면, 자기가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 명시적으로 구분하는 일이 인식론적 의무가 된다.
각 지식을 아래와 같이 분류한다.
알아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아직 안 봐서 모르는 것
알아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리서치를 아무리 해도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결코 알 수 없는 것
알아야 한다는 사실조차도 인지하지 못하는 것 (Unknown Unknowns)
3번은 어차피 내가 뭘 모르는 지도 모르는 것이기 때문에 인지할 수 없다고 치면, 1번과 2번을 구분하여 인풋을 최적화해야 한다. 특히 성장주처럼 내러티브의 비중이 높고 TAM도 함께 성장하고 있다면 2번의 비중은 늘어난다. 그 자체를 받아들여야 한다.
결론
가치란 실재하는가? 그리고 실재한다면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두 질문은 분리되지만, 실제 투자에서는 한 묶음으로 작동한다. 어떤 자산에 대해 어떤 존재론을 채택하느냐가, 그 자산에 대해 무엇을 안다고 주장할 수 있는지를 규정하고, 다시 그것이 어떤 도구를 쓸 수 있는지를 결정한다.
성숙기업이나 우량주에 실재론을 채택한다면, DCF나 NAV가 의미 있는 도구가 된다. 그 다음에 남는 과제는 그 추정을 오류가능주의의 자세로 다루는 것이다. 즉 반증 조건과 시점 한계를 명시하고, 시장의 반증 신호에 귀를 여는 것. 가치는 실재하되 자기 추정은 가설로 다뤄야 한다는 이중적 자세다.
암호화폐와 같은 자산에 명목론을 채택한다면, "내재가치 계산"이라는 시도 자체를 포기해야 한다. 가격 외부에 닻이 없는 자산을 닻이 있는 자산처럼 분석하는 것은 카테고리 혼동이다. 이 영역에서 의미 있는 분석은 가격 자체의 움직임, 자본 흐름, 합의의 구조에 대한 것이지 "진짜 가치"에 대한 것이 아니다.
성장주에 구성주의를 채택한다면, "정확한 가치를 알 수 있다"는 전제를 버리고 서사와 자본 흐름의 변동성 자체를 거래 대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아무리 리서치 해도 알 수 없는 것에 베팅하는 비중이 본질적으로 높기 때문이다.
존재론적 선택이 인식론적 가능성을 규정하고, 인식론적 가능성이 밸류에이션 도구를 결정한다. 반대로 자산 유형 → 존재론 → 인식론 → 도구로 이어지는 이 흐름을 거꾸로 뒤집으면, 자기가 사용하는 도구가 어떤 존재론적·인식론적 전제를 깔고 있는지가 드러난다. 도구 선택은 존재론적 차원에서 중립적이지 않다. 모든 도구는 자기가 의존하는 형이상학을 함께 끌고 들어온다.
어떤 자산을 마주했을 때 우리는 그 자산이 어떤 종류의 가치 닻(Valuation Anchor)을 가지고 있는지부터 판단해야 한다. 그 판단이 존재론적 입장의 선택이다. 그 입장이 정해지면, 그 자산에 대해 무엇을 안다고 주장할 수 있는지, 무엇을 알지 못하는 지의 범위가 정해진다. 그것이 인식론적 가능성이다. 그리고 그 가능성의 범위 안에서만 의미 있게 작동하는 도구가 결정된다.
성숙 우량주를 예로 들어보자. 실재론을 채택하면, 즉 이 회사의 진짜 가치가 가격과 별개로 존재한다고 가정하면 "그 진짜 가치에 접근할 수 있다"는 인식론적 주장이 가능해진다. 이 주장이 성립해야 비로소 DCF, NAV, 청산가치 같은 도구가 의미를 가진다. DCF는 "미래 현금흐름의 현재가치로 환원 가능한 객관적 수치가 존재한다"는 전제 위에 서 있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크립토에서는 다르게 흘러간다. 크립토에 가치란 존재하지 않고 가격만이 존재한다는 명목론을 채택하면, 즉 가격 외부에 닻이 없다고 인정하면 "진짜 가치를 안다"는 주장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면 의미 있게 쓸 수 있는 도구는 가격 자체의 움직임, 자본 흐름, 합의 구조에 대한 분석 도구뿐이다. 차트, 자금 유출입 데이터, 거래소 잔고 분석 같은 것이 이 범주에 속한다.
성장주에서는 또 다르다. 만약 투자자가 구성주의를 채택하면, 즉 가치가 서사와 자본 흐름의 상호작용으로 부분적으로 만들어진다고 인정하면 "정확한 가치를 알 수 있다"는 주장 대신 "가치 형성 과정에 참여한다"는 주장이 가능해진다. 이 관점에서의 투자자는 서사의 강도 측정, 자본 흐름 추적, 변동성 자체를 거래 대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거꾸로 누군가가 어떤 자산에 어떤 도구를 쓰는지를 보면, 그 사람이 자기도 모르게 어떤 존재론적 전제를 깔고 있는지가 드러난다. 도구는 자기가 의존하는 형이상학을 자백한다.
크립토에 DCF를 적용하려는 시도가 좋은 예다. DCF라는 도구를 꺼내는 순간, 그 사람은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이 자산에 가격 외부의 객관적 가치 닻이 존재한다"는 실재론적 전제를 채택한 것이다. 그러나 크립토는 그 전제가 거의 성립하지 않는 자산이다. 도구와 자산의 형이상학이 어긋난 것이다. 결과는 "정밀해 보이는 자의적 숫자"다.
반대 방향의 카테고리 오류도 흔하다. 성숙 우량주에 차트와 모멘텀 지표만 사용하는 경우다. 그 도구들은 "가격 자체가 의미 있는 정보를 담고 있고, 가격 외부의 닻을 무시해도 된다"는 명목론적 전제를 깔고 있다. 그러나 안정적 현금흐름을 가진 우량주는 명목론보다 실재론이 더 잘 작동하는 자산이다. 가격이 가치에서 멀어졌을 때 결국 가치로 수렴하는 힘이 작용한다. 차트만 보는 사람은 그 수렴의 신호를 읽을 도구를 갖고 있지 않다.
이처럼 평가대상에 대한 형이상학적 관점에 따라 아래 사항들이 결정되기에, 비로소 무엇에 집중하고 무엇을 포기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게 된다.
필요한 지식들의 분류
검증 가능한 사실
합리적 추론
신념
알지 못함의 범위
알아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아직 안 봐서 모르는 것
알아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리서치를 아무리 해도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결코 알 수 없는 것
알아야 한다는 사실조차도 인지하지 못하는 것 (Unknown Unknowns)
그에 맞는 평가도구
DCF
차트
내러티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