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녀를 보는 우리 부모님의 모습은 언제봐도 낯설다.
그들은 내가 어릴적엔 자식에게 꽤나 무심한 사람이었기에(어린 내가 잘못 느낀 걸지도)
나와 다르게 손녀에게는 왜 이렇게나 잘 해줄까 하는 고마움과 서운함이 교차된 감정을 곰곰히 되짚어 보다가, 어느날 느끼게 됐다.
아 이 사랑은 사실 내게 주는 거구나.
그땐 그들도 어렸고 그들도 여력이 없었고 그들도 처음이었구나.
만약 그때로 돌아간다면 이런 것들을 내게 주고 싶었구나.

노팬티
2026.05.18
세상의 무심함을 견디는 법에 대하여
1. 우주는 무심하다
지구가 태양을 도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닙니다.
어릴 적 처음 이 사실을 배웠을 때, 저는 이상한 기분을 느꼈습니다.
내가 발 딛고 있는 이 거대한 땅이, 사실은 거대한 항성 주변을 빠른 속도로 돌고 있다는 사실.
그러나 우리 반의 친구들 중 누구도 이 사실 앞에서 슬퍼하지는 않았습니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진실은, 이렇게 이상하리만큼 쉽게 받아들여집니다. (지구평평이들은 아닐 수도...?)
생각해보면 우주에는 나머지 모든 것들을 위해 회전하는 중심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지구는 지구의 궤도를 돌고, 화성은 화성의 궤도를 돕니다. 그것이 우주가 작동하는 원리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원리 앞에서 괴로워하지 않습니다.
반면 우리는 다른 종류의 무심함 앞에서는 자주 무너집니다.
세상이 내 인생에 아무런 관심이 없는 것 같은 막막함. 무언가 버려진 것 같은 야속함.
분명히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데도 세상은 나를 모르는 척하고, 내 노력은 어딘가로 흩어져버리는 것 같은 그 느낌.
누구나 한 번쯤은 이런 시기를 통과하는 것 같습니다. 당연히 저도 그랬구요.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 두 종류의 무심함은 어딘가 닮아 있습니다.
둘 다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지 않는다'는 같은 사실에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한쪽에는 우리가 응답을 기대하지 않고, 다른 한쪽에는 응답을 기대하고 있다는 정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보면 야속함의 정체는 세상의 무심함보다, 우리 안의 기대 쪽에 더 가까이 있는 것 같습니다.
세상이 내 주변을 돌아주기를 바라는 무의식적 가정. 그것이 우리 안에서 야속함을 만드는 정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그 기대를 어떻게 다루느냐가, 우리가 비관에 머무느냐 평온으로 옮겨가느냐를 가르는 것 같습니다.
2. 당연함의 역전
저는 우연한 계기로 스쿠버다이빙을 해본 적이 있는데요. (지금도 어쩌다 한번씩 하고 있습니다.)
장비를 메고 처음 바닷속으로 내려가던 그 순간을 지금도 기억합니다.
익숙한 세계의 경계를 넘어가는 듯한 묘한 기분.
그런데 그게 단순히 바닷속을 구경하는 일이 아니었다는 걸, 점점 내려가면서 알게 됐습니다.
그것은 평소의 세계와 거의 반대의 원리로 작동하는 세계로 들어가는 일이었습니다.
평소에 우리는 호흡을 거의 인지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호흡은 너무 당연한 default이고, 우리의 의식은 그 위에서 시각, 청각, 촉각으로 받아들이는 다른 자극들에 맞춰져 있습니다. 그런데 바닷속에 들어가는 순간, 이 구조가 통째로 뒤집힙니다. 외부 자극은 모두 차단되고, 오로지 내 숨소리만 귓가에 가득 차게 됩니다. 한 번의 들숨과 날숨, 그리고 그 호흡 사이의 간격이 의식의 한가운데로 올라옵니다. 말하자면 당연했던 것이 자극이 되고, 자극이었던 것이 사라지는 경험이었습니다.
이 역전은 호흡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평소에 우리는 중력을 거의 인지하지 않고 삽니다. 그러나 바닷속에서는 중성부력을 맞추기 위해 끊임없이 신경을 써야 합니다. 부력 조절 장치에 공기를 더 넣을지, 뺄지. 호흡의 리듬을 어떻게 맞춰서 미세하게 부력을 조정할지. 그 순간부터 중력은 더 이상 배경이 아니라, 의식의 한가운데로 올라옵니다. 압력 평형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평소엔 존재하지도 않던 감각이, 깊이가 깊어질수록 가장 신경 써야 할 일이 됩니다.
그 경험은 평소에 너무 당연하게 누리던 것들이,
사실은 무수한 원리 위에 서 있었다는 자각이었습니다.
호흡, 중력, 압력.
어느 하나도 내가 만든 것이 아닌, 그러나 어느 하나만 어긋나도 내가 존재할 수 없는 원리들.
평소엔 거리가 너무 가까워서 보이지 않다가, 그 원리들과 거리가 생기는 순간에야 비로소 그것들이 나를 지탱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비로소 유영할 수 있는 상태가 되어 해저면으로 내려가면 수 많은 바닷속 생명들과 마주치게 됩니다.
자기들끼리 유유히 움직이는 물고기 떼, 산호 사이를 지나가는 작은 생물들. 그들 앞에서 저는 늘 묘한 감각을 느낍니다. 이 세계의 진짜 거주민은 그들이고, 저는 다른 원리의 세계에서 잠시 방문한 이방인이라는 감각말이죠. 그리고 그것은, 나라는 존재를 외부에서 돌아보는 흔치 않은 경험이기도 했습니다.
물 밖으로 다시 올라왔을 때, 저는 두 가지를 함께 느꼈습니다.
하나는 나를 사랑할 이유였습니다. 내가 이 순간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것은, 결코 당연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호흡, 중력, 압력, 그리고 셀 수 없이 많은 다른 원리들이 매 순간 나를 지탱하고 있었다는 것. 그 사실을 알고 나면,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나라는 존재가 조금은 더 귀하게 느껴졌습니다.
다른 하나는 겸손해질 이유였습니다. 나를 지탱하는 그 원리들 중 어느 하나도, 내가 만들어낸 것이 없었습니다. 나는 다만 그 원리들이 작동하는 자리에서, 나만의 작은 궤도를 돌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자기애와 겸손이 어떻게 동시에 가능한지를, 저는 그제야 어렴풋이 이해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어쩌면 내가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는 건, 세상이 요구하는 게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호흡과 중력처럼, 작은 것들이 자기 자리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할 일이라는 생각. 그것들이 스쿠버다이빙을 하면서 저에게 남은 깨달음이었습니다.
3. 버티는 것과 유지하는 것
회사든 특정 직업이든 오래 잘 지속하는 사람, 한 사람과 오래 잘 만나는 사람, 취미나 관심사를 진득하게 이어가는 사람, 좋은 습관을 길게 유지하는 사람. 주변을 둘러보면 어느 영역이든 한 가지 일을 오래 해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개인적으로 어떤 공통점이 있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의지가 유달리 강해 보이지도 않고, 특별히 인내심이 뛰어나 보이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의외로 담담합니다. 그럼에도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건, 이들이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 그리 높은 기대를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좀 의아했습니다. 무언가를 오래 한다는 건 그만큼 그 일을 사랑하거나, 그 일에 큰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왔기 때문이죠.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랑하는 것과 기대하는 것은 미묘하게 다른 영역이었습니다.
흔히 우리는 무언가를 오래 하는 걸 보면서 "버틴다"고 표현하곤 합니다.
그런데 버틴다는 말 안에는 그것이 언젠가 깨질 것이라는 전제가 어렴풋이 깔려 있습니다. 무언가를 버틴다는 건, 그것이 자연스럽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의지로 지탱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반면 유지한다는 말은, 그것이 이미 자연스러운 상태라는 의미를 내포합니다. 굳이 힘을 주지 않아도 그 자리에 있는 것. 한끗의 뉘앙스 차이지만, 이 차이가 길게 보면 꽤 다른 풍경으로 이어집니다.
제 생각에 둘을 가르는 결정적 차이는 결국 기대치에 있었습니다.
조금 다른 각도에서 보면, 기대치는 우리가 어떤 대상과 두는 거리의 다른 이름입니다. 기대가 크다는 건 그 대상을 내 삶의 한가운데로 끌어당겨놓았다는 뜻이고, 기대가 작다는 건 그 대상에 적절한 거리를 두고 있다는 뜻입니다. 너무 가까운 것은, 호흡과 중력이 그랬듯, 작은 어긋남에도 우리를 흔들기 마련입니다.
높은 기대는 작은 어긋남도 견디기 어렵게 만듭니다. 직장에서 매번 큰 성취를 기대하면 평범한 하루가 실패처럼 느껴지고, 관계에서 매번 서프라이즈와 깊은 교감을 기대하면 무난한 대화가 권태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기대가 클수록 무리한 행동이 나오기 쉽습니다. 더 큰 성취를 위해 무리하게 자신을 몰아붙이거나, 더 깊은 교감을 위해 상대를 압박하거나. 결국 그 무리함이 관계를, 일을, 자기 자신을 깎아냅니다.
반대로 기대와 적절한 거리를 두면, 평범한 하루에도 작은 만족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무난한 대화에서도 편안함이 느껴지고, 그 작은 감사들이 다시 다음 날을 이어가게 하는 동력이 되어줍니다. 버티는 것이 아니라 유지하는 사람들은, 사실은 작은 감사들이 만들어내는 흐름 위에 자기를 얹어두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원리는 한 영역에만 통하는 얘기가 아닙니다. 직장이든, 관계든, 자기 자신이든. 비슷한 구조가 어디에나 작동하고 있다고 느낄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이 "버팀과 유지"의 차이가 가장 가혹하게 검증되는 영역이 있는 것 같습니다.
작은 기대 하나가 큰 손실로 되돌아오는 영역. 바로 투자입니다.
4. 그저 거기 있을 뿐
투자에서도 같은 원리가 작동합니다.
그리고 이 원리를 가장 잘 보여주는 비유 하나가, 현대 가치투자의 출발점에 있습니다.
벤저민 그레이엄이 남긴 Mr.Market 입니다.
Mr.Market은 매일 우리의 문 앞을 찾아옵니다. 그리고 오늘의 가격을 외칩니다. 어떤 날은 흥분에 차서 비싼 값을 부르고, 어떤 날은 절망에 빠져 헐값을 부릅니다. 같은 회사, 같은 자산인데도 그가 부르는 가격은 매일 다릅니다.
그러나 그 가격은 우리에게 적의를 갖고 있는 것도, 호의를 갖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Mr.Market은 그저 거기 있을 뿐입니다.
시장은 시장의 원리로 작동하고 있을 뿐이고, 그가 부르는 가격을 내 행동으로 받아들일지, 단지 참고할 정보로 다룰지를 정하는 건 우리의 몫입니다.
머리로는 어렵지 않은 얘기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매일 그 가격에 일희일비합니다. 호가가 오르면 들뜨고, 떨어지면 무너집니다. Mr.Market이 원래 그렇게 변덕스러운 존재라는 걸 알면서도, 우리는 그의 변덕에 매번 끌려갑니다.
Palantir 글에서 잠시 빌려왔던 찰리 멍거의 생각을 가져와 보겠습니다.
그때는 그의 사고법을 기업이라는 조직이 풀어야 할 문제를 들여다보는 도구로 빌려왔지만, 사실 멍거 자신은 그 사고법을 더 자주 삶에 대한 advice로 던지곤 했습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한 줄이 이것입니다.
행복한 삶의 첫 번째 규칙은 낮은 기대다.
우리를 시장 앞에서 흔드는 건 결국 외부요인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다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기대치를 너무 높여 놓았기 때문에, 그 가격의 작은 흔들림에도 우리가 흔들리는 것입니다. 흥미로운 건, 멍거가 이걸 투자가 아니라 삶의 advice로 던졌다는 점입니다. 그에게 이 두 영역은 처음부터 같은 원리 위에서 작동하는 세상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 기대치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가장 잘 정리한 사람이 모건 하우절입니다.
하우절은 The Psychology of Money에서 가장 어려운 금융 스킬을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골대가 움직이지 않도록 멈춰두는 일.
1억을 모은 사람은 3억을 가진 사람을 보고, 3억을 모은 사람은 10억을 가진 사람을 봅니다. 누군가의 수익률은 늘 내 것보다 좋아 보이고, 누군가의 포지션은 늘 내 것보다 영리해 보입니다. 하우절의 말처럼 사회적 비교의 천장은 너무 높아서 어느 누구도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가 더 위험하게 본 것은, 가진 것 자체가 적다는 사실보다 더 많은 것을 향한 욕망이 만족보다 빠르게 자라기 시작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자산은 분명히 늘어났는데, 골대가 그보다 더 빨리 움직이기 때문에 결승선은 늘 저 멀리에 있는 거죠.
결국 시장이 우리를 흔드는 게 아닙니다. 우리 안의 골대가 우리를 흔듭니다.
Mr.Market이 부르는 가격이 어떻든, 골대가 움직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휘둘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우절은 이런 말도 남겼습니다.
투자는 금융의 학문이 아니라, 사람이 돈 앞에서 어떻게 행동하는가의 학문이다.
행동을 결정하는 건 결국 기대치이고, 그 기대치를 다루는 일은 분석 능력의 영역이 아니라 다른 영역의 일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필요한 건 시장을 더 정교하게 분석하는 기술 뿐만이 아닙니다. 워런 버핏은 이를 더 짧게 정리했습니다.
투자는 IQ 160이 130을 이기는 게임이 아니다. 보통의 지능이 있다면 필요한 건 기질이다.
기질. 이 단어가 이 모든 가르침의 한가운데에 있습니다. 그리고 기질이라는 단어 안에는, 시장이라는 원리와 자신 사이에 어떤 거리를 두고 살아갈 것인가 하는 문제가 통째로 담겨 있습니다.
다시 Mr.Market으로 돌아와 보면, 그레이엄이 이 비유로 가르치고 싶었던 것은 시장을 분석하는 기술이 아닙니다. 시장이라는 원리 앞에서 어떤 태도를 가질 것이냐의 문제였습니다. 시장의 변덕에 휘둘리지 않으려면 시장을 통제해야 하는 게 아닙니다. 시장이 원래 그렇게 작동하는 원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그 원리와 적절한 거리를 두면서 그것을 input data로 다룰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레이엄이, 그리고 결국 멍거와 하우절과 버핏이 모두 가리키고 있는 곳도 같은 방향이었던 것 같습니다.
받아들임.
시장도, 사이클도, 자기 자신의 감정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것. 더 정확히 말하면, 그것들이 원래 그렇게 작동하는 원리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 원리와 적절한 거리를 두면서 자신의 궤도를 도는 일.
평생 가장 가혹한 시장에서 살아남은 구루들이 도달한 결론이, 무언가를 오래 유지하며 살아가는 사람들과 비슷한 곳을 가리키고 있다는 사실이 저에겐 흥미로웠습니다. 시장이라는 특수한 무대 위에서만 작동하는 원리가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자체가 그런 것이 아닐까 싶었던 거죠. 이런 관점은 시장보다 훨씬 더 가까운 곳에서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5. 시선의 전환
저는 꽤 긴 시간 동안 세상과 제 환경을 비관하며 살았던 적이 있습니다.
자세히 풀어내기엔 멋쩍지만, 10대와 20대를 통과하는 동안 저에게는 경제적인 지원이라는 게 많이 부족했었죠. 학업에 온전히 집중하기보다는 당장의 생계와 생활을 함께 고민해야 했고, 미래에 대한 답도 누구에게 물어볼 곳 없이 혼자 찾아야 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저는 세상이 어딘가 잘못되어 있다는 생각과 제게 주어진 환경에 대한 원망으로 채워져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나이를 한 살씩 더 먹어가면서, 예전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거의 왕래도 없던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였는데, 장례식장에서 저는 평소에는 잘 보지 못하던 아버지의 표정을 한참 봤습니다. 그 표정 안에는 평생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었지만 기대지 못했고, 누군가에게 배우고 싶었지만 결국 혼자 세상을 배워야 했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쩌면 그도 한때 저와 비슷한 상황에 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그때 처음 들었습니다.
그리고 저 자신이 한 아이의 아빠가 될 입장이 되면서, 이 감각은 한층 분명해졌습니다.
아이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무엇을 보여줘야 할지를 매일같이 고민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제가 받은 것과 받지 못한 것들이 다시 떠오릅니다. 그러면서 어렴풋이 알게 됐습니다. 부모가 된다는 건 누구에게나 처음이고, 결국 준비되지 않은 채로 자기 자신도 잘 모르는 것까지 다음 세대에게 건네야 하는 일이라는 것을. 그 무게를 짐작하기 시작하니, 그동안 미워했던 사람들의 입장이 다른 모습으로 보였습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한 가지가 보였습니다.
지금 그들이 저에게 하고 있는 말은, 사실은 막막했던 젊은 시절의 자기 자신에게 하고 있는 말일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저 시대착오적이고 세상 물정 잘 모르는 꼰대의 잔소리처럼 들렸던 것들이 — 노후를 위해 연금보험 빨리 들어라, 주식은 손도 대지 말아라. 사장님께 잘 보이고 열심히 다녀라 같은 말들... ㅎㅎ — 사실은 자기들이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위로와 조언을 뒤늦게 자기에게 건네는 행위였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 그 가능성을 한 번 떠올리고 나니, 같은 말이 다르게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고 보면 부모님이 그렇게 자란 것도, 제가 이렇게 자란 것도, 따지고 보면 우연한 조건들이 겹쳐 만들어낸 결과였습니다. 각자가 각자의 시대와 환경이라는 원리 위에서, 각자의 궤도를 돌면서 한 시기를 통과했을 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자란 사람들이 서로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채로 만났다는 사실은, 어쩌면 거의 필연에 가까운 일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부모님은 여전하십니다.
여전히 저를 만나면 같은 잔소리를 반복하시죠. (내 계좌를 보면 놀라 자빠지실 수도...)
그 모습은 제가 미워하고 원망했던 그 시절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그런데 변한 건 그것을 듣는 저의 자세입니다.
앞서 다룬 그레이엄의 Mr.Market처럼, 그들도 그저 거기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들도 그들의 궤도를 돌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들의 궤도가 제 주변을 돌기를 무의식적으로 기대했기 때문에, 같은 말이 그렇게 가깝게 들렸던 것 같습니다. 그들의 말을 내 삶에 대한 판정으로 받아들일지, 그저 한 시기를 통과한 사람의 input data로 다룰지.
그것을 정하는 건 그들이 아니라 저였습니다.
그때부터 비관으로 가득차있던 자리에 다른 감정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측은함이었습니다. 미워하던 마음이 측은한 마음으로 옮겨가던 어느 순간, 저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누구의 잘못을 따져 묻지 않아도, 누구를 용서한다는 거창한 결심을 하지 않아도, 마음은 그저 한 단계 가벼워질 수 있었습니다. 평온이라는 단어가 가리키는 게 어쩌면 이런 곳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6. 닻을 다루는 법
저는 예전에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어디에 닻을 내리고 있는지를 알아차리는 일에 대해 썼습니다.
그러나 알아차리는 일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그 닻을 어떻게 다룰지가 남아 있습니다.
과거에 있었던 일들, 제게 주어진 환경, 매일 다른 가격을 외치는 시장, 같은 잔소리를 반복하는 부모님.
이것들은 모두 사실에 대한 판정을 기다리는 대상이 아닙니다. 세상의 원리 위에서 각자의 궤도를 돌고 있는, 그저 거기 있는 것들입니다. 그것들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순간 우리는 무너지지만, 그것들과 내가 어떤 거리를 두고 살아갈지는 여전히 저의 영역으로 남아 있습니다.
저는 칼 세이건을 좋아합니다.
그의 코스모스를 통해 우주를 처음 가깝게 상상할 수 있었고, 보이저 1호가 60억 킬로미터 밖에서 찍은 한 장의 사진 앞에서 그가 남긴 "창백한 푸른 점" 연설은 가끔씩 유튜브에서 다시 찾아보곤 합니다. 그의 글 안에는 우주의 광대함을 다루면서도, 그 광대함 앞에 선 인간이라는 작은 존재를 따뜻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있습니다.
그가 쓴 소설 Contact에는 이런 장면이 묘사됩니다.
평생을 외계 지적 생명체 탐사에 바친 천체물리학자 엘리가 어느 날 베가성으로부터 신호를 수신하고, 인류 최초로 외계 문명과 접촉하기 위해 우주의 끝으로 떠납니다. 그러나 그 시공의 끝에서 그녀가 마주한 외계 지성은, 어린 시절 잃은 아버지의 모습으로 그녀 앞에 나타납니다. 평생 가장 먼 곳을 탐색해온 그녀가, 정작 우주가 건네던 가장 가까운 메시지는 놓치고 있었다는 자각의 순간입니다.
소설의 마지막 부근에 등장하는, 꽤 유명한 한 문장이 있습니다.
For small creatures such as we the vastness is bearable only through love."
우리처럼 작은 존재들이 이 광대함을 견뎌낼 수 있는 길은, 오직 사랑을 통해서뿐이다.
세상의 원리는 변한 적이 없습니다. 변할 수 있는 건 그것을 보는 우리의 시선입니다.
지구가 태양 주변을 돈다는 사실을 알게 되더라도, 지구가 아름답다는 사실이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지구는 지구의 궤도를 돌고, 우리는 우리의 궤도를 돕니다. 누구도 누구의 중심이 되어주지 않지만, 그것이 우주의 원리입니다. 그리고 그 원리 안에서, 우리가 서로의 궤도를 인지하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유영할 수 있다면 이 광대함도 견뎌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