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라는 ‘명사’의 감옥

부자라는 ‘명사’의 감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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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론백
2025.11.26조회수 240회

서점 매대를 지나다가

한국의 출판 시장은 기형적이다. 깊이 있는 원제는 사라지고, 그 자리를 '부자 되는 법'이라는 노골적인 욕망이 차지했다. 출판사는 판매량을 위한 선택이라 변명하겠지만, 이는 독자의 지성을 기만하는 행위다. 나는 서점을 점령한 이 '부자 담론'에 반기를 든다.


우리는 정말 부자가 되기를 원하는가? 역설적이게도 사람들은 부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들이 진정으로 욕망하는 것은 미래의 '부'가 아니라 현재의 '소비'와 '쾌락'이기 때문이다. 부자가 되는 길은 이미 널려 있다. 지능이나 환경을 탓하기엔 자수성가한 사례가 너무나 많다. 사람들이 부자가 되지 못하는 이유는 방법의 부재가 아니라, 부자가 되어가는 고단한 '과정'을 견딜 의지가 없기 때문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부자'를 도달해야 할 최종 목적지로 설정하는 사회적 통념에 있다. 절대적 빈곤이 해결된 현대 사회에서 가난은 '현상'이 아니라 '감정'이다. 100억을 가진 자는 1,000억을 가진 자 앞에서 가난을 느끼고, 국내에 별장이 있는 자는 해외에 별장이 있는 자 앞에서 박탈감을 느낀다. 내가 아는 한 지인은 남들이 부러워하는 부를 가졌음에도, 더 거대한 부자들과 자신을 비교하며 늘 허기에 시달린다.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려는 순간, 부에 대한 욕망은 영원히 채워질 수 없는 형벌이 된다.


왜 부자가 되어야 하는가? '더 행복해지기 위해서'라는 답변은 기만이다. ‘부자가 되면’, ‘의사가 되면’ 인생이 완성될 것이라는 믿음은 헛된 망상이다. '부자'는 삶의 결론이 될 수 없다. 목표를 달성한 그 순간에도 삶은 여전히 지루하게 이어진다. 태어날 때부터 부자였던 이들조차 불행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우리는 이제 '부자라는 명사'가 되기 위해 인생을 유예하는 것을 멈춰야 한다. 중요한 것은 도달한 이후의 삶, 그리고 부를 대하는 태도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명사적 존재의 함정

나는 "부자가 된다"는 말을 경계한다. 인간은 '부자'라는 명사로 고정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20세기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는 "실존이 본질을 앞선다"는 명제로 이 문제를 꿰뚫어 보았다.


의자나 키보드 같은 사물은 만들어지기 전부터 '앉기 위한 도구', '입력을 위한 도구'라는 목적, 즉 본질이 먼저 존재한다. 하지만 인간은 다르다. 우리는 세상에 먼저 던져진(피투) 후, 스스로 선택하며 자신을 만들어가는(기투) 존재다. 그런데도 우리는 스스로를 마치 용도가 정해진 사물처럼 착각한다.


사르트르는 <존재와 무>에서 카페 웨이터의 예를 든다. 주문을 받고 쟁반을 나르는 종업원은 마치 '웨이터'라는 본질을 타고난 기계처럼 움직인다. 하지만 그것은 연기일 뿐이다. 그는 퇴근하는 순간 누군가의 연인이 되고, 주말에는 춤을 추거나, 정치적 구호를 외치는 시위자가 될 수도 있다. 그는 '웨이터'라는 명사로 환원될 수 없는 투명하고 텅 빈 그릇이다. 어떤 수식어도 그를 영원히 가둘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실존이 본질을 앞선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다.



그러나 인간은 이 불확정성을 견디기 힘들어한다. 우리는 타인을, 그리고 나 자신을 규정되지 않은 실존으로 마주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불확실성은 불안을 낳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빨리 명사로 환원시키려 든다. "저 사람은 의사야", "이 사람은 대리야"라고 이름표를 붙여야만 비로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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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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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학자이자 금융강사. 단순히 재무적 안정이나 부자되기를 넘어, 물질과 정신 모두 풍요로운 삶을 지향한다. 이를 '멋지게 나이들기'라는 철학으로 삼고, 이곳 <멋나들 연구소>에서 꾸준히 실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