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티 개선에 대한 의견 : 재미 중심주의로
1. "망한 투자 대회"를 다시 열어보면 어떨까요?
굳이 상금은 없어도, 재미로 말이죠.
2. 그리고 트렌딩 토픽에 베스트? 인기 있는 글? 저장한 사람이 많은 글? 아무튼 반응을 만들어내는 글 섹션을 한 개정도 만들어두면 어떨까요?
베스트 글이 있으면 조금 더 가볍게 재밌는 글만 소비하고 싶은 사람들이 접근하기 좋아보입니다.
지금은 탑다운 방식으로 insight 선정 뿐인데, 사람들이 좋아하는 글도 따로 보게 두면 어떨까 싶어요. 뭔가 insight는 없어도 재미만 있어도 좋잖아요^^
지금은 밸리AI의 모든 영역이, 심지어 피드 마져도 뇌에 힘 주고 들어와야 하는 느낌입니다.
일단 뇌 빼고 들어올 수 있는 섹션이 있으면 좋아 보입니다.
이 두개의 제안을 서포트 하기 위해 아래 글을 써봤습니다?

마론백
2026.04.04
시장은 농담을 한다
시작하며
나는 금융 강사이자 문학연구자다. 이 두 가지를 동시에 말하면 대부분 고개를 갸웃한다. 어울리지 않는 조합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이 어울리지 않음이 오히려 두 영역을 함께 보는 데 꽤 쓸모가 있다고 생각한다. 얼마 전 해외문학 편집자로 유명한 한 인플루언서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금융이나 경제 관련 책을 절대 읽지 않는다고 했다. 읽다가 그런 내용이 나오면 책을 덮으면서 이렇게 말한다고 했다.
빨리 다른 책 읽어야지, 하마터면 경제상식 생길 뻔했다!
이 문장이 오래 머릿속에 남았다. 웃겼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뜨끔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나는 그 재미없다는 영역의 강사이니까.
재미는 무시할 수 없는 힘이다. 사람을 움직이는 동기 중에 재미만큼 강력한 것이 많지 않다. 공포도 의무도 사람을 움직이지만, 그것들은 오래가지 않는다. 재미는 다르다. 재미있으면 계속 하게 된다. 투자 공부를 처음 시작할 때의 열정이 왜 식는가. 어렵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재미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뜨끔하면서 동시에 생각했다. 그 편집자의 세계는 재미있는가? 문학은 재미있고, 금융은 재미없는가?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나는 인문학자들을 오래 지켜봤다. 흥미로운 현상이 있다. 대부분 재미가 없다. 특히 철학자 중에 유머가 있는 사람이 있는가 싶다. 희극을 연구하는 사람조차 웃기지 않다. 유머를 분석하고 논문을 쓰지만, 정작 그 자리에서 농담을 하는 사람은 없다. 유머를 논리의 언어로 해부하는 순간, 유머는 이미 유머이기를 멈추기 때문이다. 그들은 훌륭한 연구자가 되었지만, 결코 작가는 되지 못했다.
금융도, 인문학도, 같은 함정에 빠져 있다. 진지함이 전문성의 증거라고 믿는 것이다. 금융인은 숫자와 분석 뒤에 숨고, 인문학자는 이론과 개념 뒤에 숨는다. 양쪽 다 유머가 사라진 자리에 권위를 세운다. 그런데 정작 시장은 진지한 분석을 비웃듯 움직이고, 문학은 논문이 아니라 작품으로 사람을 움직인다. 진지함만으로는 닿지 못하는 곳이 양쪽 모두에 있다.
물론 재미가 곧 유머는 아니다. 재미의 형태는 다양하다. 그러나 재미와 유머 사이에는 분명한 교집합이 있다. 그리고 나는 그 교집합이 투자에서 생각보다 훨씬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공부를 즐겁게 만드는 수준이 아니라, 시장이라는 세계를 제대로 이해하는 방식으로서 작동한다.
우리는 투자 연구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금융 공학도가 아니란 전제하에) 실천가가 되어야 한다. 그 차이는 지식의 양이 아니라 태도에 있다. 논리가 닿지 않는 세계를 어떻게 대하느냐에 있다. 시장은 자주 설명되지 않고, 예측을 비웃으며, 인과관계 없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그 세계에서 진지함만으로 버티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힘들다. 유머는 그 힘을 준다.
카오스를 함께 사는 방식
시장이 불확실하다는 말은 이제 누구나 한다. 분산투자를 하고, 리스크를 관리하고, 장기적으로 보라고 한다. 맞는 말이다. 여태까지 내 글에서 계속 반복하는 말이다. 그런데 이 말들이 실제로 도움이 되는가. 폭락장 한가운데서 "불확실성은 원래 있는 것"이라는 말이 손 떨리는 걸 막아주는가. 지식으로 아는 것과 몸으로 사는 것은 다르다.
1637년 네덜란드에서 있었던 일이다. 한 선원이 항구 창고에서 점심을 먹다가 옆에 있던 것을 양파인 줄 알고 함께 먹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은 튤립 구근이었다. 당시에는 그것이 집 한 채 값이었다. 선원은 감옥에 갔다. 그는 그냥 배가 고팠을 뿐이었다.
이 이야기가 웃긴 이유는 하나다. 버블 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진지했다. 구근 하나에 집 한 채 값을 매기는 것이 완벽하게 합리적인 세계였다. 그런데 그 세계 밖에서 보면 그냥 양파다. 시장의 카오스는 언제나 이런 식이다. 안에서는 논리가 있고, 밖에서 보면 희극이다.
그런데 여기서 멈춰보자. 왜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웃음이 나오는가. 철학자들은 오래전부터 웃음의 기원을 탐구했다. 가장 강력한 답 중 하나는 불일치다. 우리는 기대한 것과 실제가 어긋날 때 웃는다. 양파여야 할 것이 집 한 채 값이 되는 순간, 논리가 갑자기 방향을 트는 순간, 예상이 완전히 빗나가는 순간, 그때 웃음이 나온다.
그런데 이것이 정확히 시장이 작동하는 방식이다. 좋은 실적에 주가가 내리고, 나쁜 소식에 주가가 오른다. 모두가 오를 것이라 믿을 때 꺾이고, 모두가 망했다고 할 때 반등한다. 시장은 끊임없이 불일치를 만들어낸다. 코미디와 시장은 같은 구조로 작동한다.
이것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역발상 투자와 같이 군중과 반대로 가는 투자 철학의 본질은 불일치를 읽는 능력이다. 남들이 기대하는 것과 실제 사이의 간극을 보는 것이다. 그것이 수익의 원천이다. 코미디언이 웃음을 만드는 방식을 생각해보자. 관객의 기대를 읽고, 그 기대가 향하는 방향을 파악한 뒤, 정확히 다른 곳을 찌른다. 역발상 투자자가 하는 일도 같다. 시장의 기대를 읽고, 그 기대가 만들어낸 가격의 쏠림을 파악한 뒤, 반대쪽에 선다. 유머 감각이 있는 사람은 이 간극에 익숙하다. 웃음이 나오는 지점을 본능적으로 감지하는 사람이, 시장이 만들어내는 불일치도 더 잘 본다. 코미디를 이해하는 사람이 시장을 이해한다. 과장처럼 들리지만, 뿌리가 같다.
문제는 우리가 항상 안에 있다는 것이다. 밖에서 보면 희극인 것을, 안에서는 볼 수가 없다. 그래서 투자자들은 설명하려 한다. 주가가 오른 이유, 내린 이유, 반등할 이유. 증권사 리포트는 언제나 화려하다. 거시경제 흐름, 금리 경로, 지정학적 리스크, 섹터별 전망이 쏟아진다. 읽고 나면 뭔가 알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란-미국 전쟁이 터졌을 때도 지정학 전문가들은 분주하게 설명했다. 트럼프가 이 전쟁을 선택한 이유, 미국이 얻는 전략적 이득, 중동 역학의 변화 등. 논리적이고 정교했다. 그런데 한 논평가가 이렇게 말했다. "단 한 번도 농담이라도 비논리적인 얘기를 해본 적이 없으신 분들 (답습니다.), 전쟁에 어떤 논리가 있습니까?" 이 한 문장이 그 모든 분석을 조용히 무너뜨렸다.
분석이 틀리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분석은 틀릴 수 있다. 문제는 틀려도 같은 방식으로 다시 설명한다는 것이다. 다음 리포트에서 새로운 논리를 세우고, 그 논리가 또 틀리면 다시 새로운 논리를 세운다. 한 번도 웃지 않는다. 한 번도 "우리가 틀렸다"를 가볍게 인정하지 않는다. 농담을 못 하는 사람들은 틀려도 멋지게 틀린다. 멋지게 틀리는 것이 습관이 되면, 틀렸다는 사실 자체가 보이지 않게 된다.
주의할 점은, 그렇다고 근거있는 투자와 분석이 무의미하다는 말이 아니다.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고 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말을 설명 불가능한 것은 무시해도 된다는 뜻으로 읽었다. 그러나 그의 요지는 달랐다. 말할 수 없는 것이 오히려 가장 중요할 수 있다. 다만 언어와 논리가 그것을 온전히 담지 못할 뿐이다. 침묵은 포기가 아니라 한계의 인정이다. 시장 분석도 마찬가지다. 분석은 중요하다. 다만 분석이 닿지 않는 곳이 있다는 걸 아는 것과 그 한계 앞에서 침묵 대신 피식 웃을 수 있는 것이 유머가 분석 옆에 있어야 하는 이유다.
마크 트웨인은 이렇게 말했다.
10월은 주식 투기를 하기에 특히 위험한 달이다. 나머지 위험한 달은 7월, 1월, 9월, 4월, 11월, 5월, 3월, 6월, 12월, 8월, 그리고 2월이다.
이것은 분석이 아니다. 그냥 웃음이다. 그런데 이 한 문장이 어떤 정교한 리포트보다 시장의 본질을 정확하게 짚는다. 시장은 언제나 위험하고, 특별한 예외 같은 건 없다는 것. 유머는 설명을 포기한 자리에서 나온다. 그리고 그 포기가 역설적으로 시장을 더 정직하게 본다. 정교한 분석을 하되, 그것이 틀릴 수 있다는 걸 웃으며 알고 있는 것, 시장이 또 말도 안 되는 짓을 할 때 피식 웃을 수 있는 것, 그 한 순간의 여유가 다음 판단을 바꾼다.
흐르게 하는 힘
유머(humor)는 원래 흐른다는 뜻이었다. 중세 의학은 인간의 몸과 감정이 네 가지 체액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믿었다. 혈액, 점액, 황담즙, 흑담즙이 그것이다. 이것들이 균형을 이루면 건강하고, 한쪽으로 쏠리면 병이 된다. 유머는 그 체액이 잘 흐르는 상태, 즉 감정적 균형을 뜻하는 말이었다. 지금 우리가 쓰는 유머라는 단어는 거기서 왔다.
이 오래된 의학은 틀렸다. 체액이 성격을 만든다는 생각은 미신이다. 그러나 한 가지는 심리학적 메타포로 활용할만하다. 감정이 한쪽으로 쏠리면 사람은 병이 들고 다시 흐르게 만들지 않으면 낫지 않는다는 것 말이다.
투자자의 두 가지 병이 여기 있다. 공포와 탐욕이다. 이 둘은 감정이 아니라 감정이 멈춘 상태다. 구분이 중요하다. 두려움은 감정이다. 두려움은 흐른다. 위험을 감지하고, 판단하고, 행동을 바꾸게 한다. 그런데 공포는 다르다. 공포는 두려움이 한곳에 고여서 굳은 것이다. 폭락장에서 매도 버튼 위에 손을 올려놓고 누르지도 떼지도 못하는 상태다. 손절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 계좌를 열지 못한다. 감정이 흐르지 않아서 판단이 멈춘다.
탐욕도 마찬가지다. 욕심은 흐르는 감정이다. 더 벌고 싶다는 마음은 자연스럽고 심지어 건강하다. 그런데 탐욕은 욕심이 한곳에 쏠려서 다른 모든 감각을 마비시킨 상태다. 수익률만 보이고 리스크가 안 보인다. 이미 충분히 올랐는데 "더"가 시야 전체를 채운다. 감정이 흐르지 않아서 시야가 닫힌다.
17세기 프랑스 극작가 몰리에르는 이 멈춤의 병리를 희곡으로 정확하게 그렸다. 희극 《수전노》의 아르파공은 탐욕이 완전히 굳어버린 인간이다. 돈에 지배당한 노인이다. 자식의 결혼도, 손님 접대도, 모든 관계가 돈 앞에서 멈춘다. 결정적 장면은 땅에 묻어둔 돈궤가 사라졌을 때 온다. 그는 무대 위에서 완전히 무너진다. 자기 손을 붙잡고 "도둑이야"를 외친다. 자기 자신을 의심하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아르파공의 감정 상태다. 돈궤를 잃은 뒤 그가 보여주는 것은 슬픔이 아니다. 공포다. 그리고 그 공포는 흐르지 않는다. 아르파공은 울지도, 분노하지도, 포기하지도 못한다. 감정이 한 지점에 완전히 박혀서 꿈쩍도 하지 않는다. 돈궤가 돌아와도 그는 변하지 않는다. 다시 원래의 멈춤으로 돌아갈 뿐이다. 몰리에르는 이 인물을 비극으로 쓰지 않았다. 희극으로 썼다. 왜일까.
비극은 관객의 감정을 함께 멈추게 한다. 비극의 주인공이 무너지면 관객도 같이 무너진다. 카타르시스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지만, 그 순간 관객의 감정도 한쪽으로 완전히 쏠린다. 그런데 희극은 다르다. 아르파공이 무대 위에서 무너질 때, 관객은 웃는다. 그리고 그 웃음 속에서 자기 안의 아르파공을 본다. 나도 저렇게 될 수 있다는 것을, 웃으면서 안다. 비극은 몰입시키고, 희극은 거리를 만든다. 그 거리가 핵심이다.
심리학은 이것을 자기거리두기(self-distancing)라고 부른다. 감정에 압도당하지 않으려면 자기 자신을 한 발짝 떨어져서 볼 수 있어야 한다. 3인칭 시점으로 자기를 돌아 보기다. "내가 지금 공포에 빠져 있다"가 아니라 "저 사람이 지금 공포에 빠져 있다"것이다. 연구에 따르면, 이 전환만으로도 감정적 반응의 강도가 현저하게 줄어든다. 그런데 이 전환을 가장 자연스럽게 만드는 것이 바로 유머다. 웃는 순간, 사람은 자동으로 관찰자가 된다. 웃으려면 상황 밖에 서야 하기 때문이다.
투자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정확히 이것이다. 내 판단이 틀렸다는 걸 인정하고, 내가 논제(thesis)에 갇혀 있다는 걸 알고, 손절해야 할 때 손절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자기 자신을 3인칭으로 볼 수 있을 때만 가능하다. 그런데 공포와 탐욕 한가운데서 3인칭 시점을 확보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감정이 멈춰 있고, 시야가 닫혀 있기 때문이다.
마크 트웨인은 57세에 파산했다. 10년간 전 재산을 쏟아부은 발명품이 상용화 직전에 경쟁사에 밀렸다. 누가 봐도 비극이었다. 공포가 완전히 굳어버릴 만한 사건이었다. 그런데 트웨인은 이 경험을 분노로 쓰지 않았다. 자기 자신을 캐릭터처럼 등장시켜 웃음거리로 만들었다. 빚을 갚기 위해 세계 강연 투어를 돌았고, 그 여행기도 유머로 가득했다. 파산한 사람이 파산을 웃으며 쓴 것이다.
트웨인의 방식은 현대 스탠드업 코미디에서 자주 보이는 패턴이다. 이들은 자기 고통을 3인칭으로 본다. 고통받은 자기 자신을 무대 위의 캐릭터로 만든다. 그 순간 멈춰 있던 감정이 다시 흐르게 된다. 분노도 아니고 체념도 아닌, 웃음이라는 형태로 말이다. 그리고 그 흐름이 다음 행동을 가능하게 한다. 강연을 돌고, 글을 쓰고, 빚을 갚고 삶을 나아가게 만든다. 감정이 멈추면 행동도 멈춘다. 감정이 흐르면 행동도 흐른다.
투자 커뮤니티에서 돌아다니는 농담들도 같은 메커니즘이다.
"10% 손실을 봤을 때 가장 기쁜 순간은? 아는 사람이 30% 손실을 봤을 때."
"제가 주식을 소액으로 하는 이유요? 처음엔 고액이었습니다."
이 농담들이 위로인 것은 맞다. 그러나 단순한 위로가 아니다. 이 농담을 하는 순간 투자자는 자기 손실을 3인칭으로 본다. 고통의 당사자에서 잠시 관찰자로 자리를 옮긴다. 멈춰 있던 것이 조금 흐르기 시작한다. 4체액설의 언어로 하면 정확히 유머가 하는 일이다. 감정의 균형을 회복시키는 것이다. 미신 같지만, 가장 오래된 의미에서 가장 정직한 말이다.
유머는 감정을 억누르는 게 아니다. 없애는 것도 아니다. 흐르게 하는 것이다. 공포가 왔을 때 "내가 또 이러고 있네" 하고 피식 웃을 수 있으면, 얼어붙었던 판단이 조금 녹는다. 탐욕이 올라올 때 자기 자신을 웃음거리로 만들 수 있으면, 닫혀 있던 시야가 조금 열린다. 그 "조금"이 손절을 가능하게 하고, 다음 판단을 열어준다. 아르파공과 트웨인의 차이는 재능의 차이가 아니다. 멈출 것인가, 흐를 것인가의 차이다.
지속가능성과 연결
투자는 단거리 달리기가 아니다. 수십 년짜리 게임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투자 교육은 무엇을 살 것인가에 집중한다. 어떻게 버틸 것인가는 잘 말하지 않는다.
앙드레 코스톨라니는 이렇게 말했다.
주식을 사라. 그리고 수면제를 먹고 자라. 10년 뒤에 깨어나면 부자가 되어 있을 것이다.
농담처럼 들리지만 이게 장기투자의 본질이다. 그런데 이 문장이 웃긴 이유가 있다. 수면제 없이는 못 버틴다는 것을 모두가 알기 때문이다.
버티는 것이 왜 그토록 어려울까. 지식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장기투자가 유리하다는 건 누구나 안다. 복리의 힘도, 시장 타이밍의 불가능성도, 역사적 통계도 모두 안다. 문제는 아는 것과 사는 것 사이에 시간이 있다는 거다. 10년, 20년, 30년. 그 시간 동안 시장은 몇 번이고 무너지고, 내 확신은 몇 번이고 흔들리고, 옆 사람은 몇 번이고 나보다 많이 번다. 지식은 첫 번째 폭락에서 버티게 해줄 수 있다. 두 번째도 가능할 수 있다. 그러나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를 버티게 하는 것은 지식이 아니다.
혼자 진지하게 버티는 투자자의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진지함은 강력한 연료지만 재생되지 않는 연료다. 진지한 사람은 원칙을 세우고, 원칙을 지키고, 틀려도 원칙 안에서 답을 찾으려 한다. 이것은 미덕이다. 그러나 원칙이 시장에 의해 반복적으로 부정당할 때, 진지함은 점점 경직이 된다. 경직은 고집이 되고, 고집은 고립이 된다. 고립된 투자자는 두 가지 중 하나로 끝난다. 시장을 떠나거나, 시장이 틀렸다고 믿으며 파국을 맞는다.
세르반테스의 소설 《돈키호테》는 이 진지함의 비극을 가장 정확하게 그린 작품이다. 돈키호테는 기사도 소설에 너무 깊이 빠진 나머지 현실을 잃어버린 남자다. 풍차를 거인으로 보고 돌진한다. 양 떼를 군대로 보고 칼을 뽑는다. 완전히 틀렸지만 완전히 진지하다. 그의 진지함은 놀라울 만큼 일관적이다. 매번 실패하고, 매번 얻어맞고, 그래도 논제를 수정하지 않는다. 시장이 틀렸다고 확신하는 투자자와 정확히 같은 구조다.
그런데 돈키호테는 수백 페이지에 걸쳐 계속 실패하면서도 소설 끝까지 살아남는다. 비극적 파국을 맞지 않는다. 왜일까? 바로 돈키호테에겐 종자, 산초 판사가 있기 때문이다. 그는 주인이 틀렸다는 걸 안다. 풍차가 거인이 아니라는 걸 안다. 그런데 떠나지 않는다. 대신 웃는다. "나리, 저건 풍차입니다"라고 말하고, 돈키호테가 돌진해서 얻어맞으면 일으켜 세운다. 투덜거리고, 농담을 던지고, 그러면서 따라간다. 산초가 하는 일은 돈키호테의 논제를 바꾸는 것이 아니다. 그의 진지함이 경직으로 굳기 전에 환기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핵심이다. 산초는 돈키호테에게 "당신이 틀렸다"고 논증하지 않는다. 논증은 진지함의 언어다. 진지한 사람에게 진지한 반박을 하면, 그는 더 진지해질 뿐이다. 산초는 대신 웃긴다. 상황의 불일치를 가볍게 드러낸다. 그 웃음이 돈키호테의 진지함을 깨는 것은 아니지만, 잠깐 멈추게는 한다. 완전히 굳기 전에 조금 흐르게 한다. 산초는 돈키호테의 유머다. 멈춘 것을 흐르게 하는 힘이다.
투자자 중에 돈키호테가 많다. 자기 논제를 깊이 믿고, 시장이 비합리적이라 확신하며, 끝까지 진지하게 버티는 사람들이다. 공부를 많이한 사람 중에 특히 많다. 그리고 그 진지함 자체는 틀린 것이 아니다. 문제는 산초가 없을 때 생긴다. 같이 웃어줄 사람, "이번엔 진짜 풍차 아니야?" 하고 물어봐줄 사람 말이다. 그 사람이 없으면 진지함은 고집이 되고, 고집은 고립이 되고, 고립은 파국이 된다. 앞에서 말한 그 경로 그대로다.
워런 버핏은 매년 주주서한을 농담으로 시작한다. 세계에서 가장 진지하게 기업을 분석하는 사람이, 주주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웃음으로 여는 것이다. 이것이 단순한 친근함의 연출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버핏은 70년 넘게 투자를 해왔다. 그 시간 동안 대공황 이후 최악의 폭락도, 닷컴 버블도, 금융위기도 겪었다. 그가 살아남은 이유로 사람들은 분석력을, 원칙을, 인내를 꼽는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나는 그의 유머가 그 인내를 가능하게 했다고 믿는다.
버핏에게는 산초가 있었다. 그의 평생 파트너, 찰리 멍거다. 버핏은 1959년, 멍거와의 첫 만남을 이렇게 회고했다. "저녁 식사 자리였는데, 5분도 안 돼서 멍거가 내(버핏) 농담에 바닥을 구르며 웃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정확히 내가 하려는 짓이기도 했다." 버핏은 그 자리에서 생각했다. "이런 사람은 다시 못 만날 것이다." 60년이 넘는 파트너십이 거기서 시작됐다. 전설적인 만남은 분석 능력이 아니라 웃음에서 시작됐다.
멍거는 버핏의 분석을 보완하는 사람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함께 웃는 사람이었다. 버크셔 해서웨이 주주총회는 투자업계에서 유일하게 관객이 웃으러 오는 행사였다. 수만 명이 오마하에 모여 다섯 시간 넘게 질의응답을 듣는데, 사람들은 투자 조언만큼이나 두 사람의 농담을 기대하고 왔다. 버핏이 길게 분석을 늘어놓으면 멍거는 짧게 쏘아붙였다. "덧붙일 게 없습니다." 그리고 때때로 이렇게 말했다. "워런, 사람들이 그렇게 자주 틀리지 않았으면 우리가 이만큼 부자가 되지 못했을 겁니다." 무대 위에서 주고받는 이 농담들이 단순한 쇼맨십은 아니었을 것이다.
멍거는 유머에 대해 이런 말을 남겼다.
세상을 정확하게 보면 웃길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이 우스꽝스러우니까요.
이 문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멍거는 유머를 세상에 덧붙이는 장식으로 보지 않았다. 세상을 정확하게 보는 것의 결과로 봤다. 앞서 말한 불일치의 감각과 정확히 같은 구조다. 시장이 만들어내는 황당함, 인간이 반복하는 어리석음을 있는 그대로 보면 웃음이 나온다. 그 웃음은 현실 도피가 아니라 현실 직시의 부산물이다.
버핏과 멍거는 서로에게 산초였다. 버핏이 논제에 빠져들 때 멍거가 한마디로 환기했고, 멍거가 너무 냉소적으로 흐를 때 버핏이 농담으로 균형을 잡았다. 이 관계가 60년 넘게 지속됐다는 사실 자체가 증거다. 혼자 진지하게 버틴 것이 아니라, 같이 웃으면서 버틴 것이다. 2023년 멍거가 99세로 세상을 떠난 뒤, 이듬해 버크셔 주주총회는 처음으로 옆자리가 비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한 시대의 끝이라고 했다. 버핏은 산초를 잃은 것이다.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투자자는 버핏이 아니다. 60년을 함께할 멍거를 만나는 것은 행운이고, 그 행운을 기대할 수는 없다. 그래서 투자자에겐 커뮤니티가 필요하다.
이 말을 하는 순간 경계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한국에서 투자 커뮤니티라는 말은 좋은 이미지가 아니다. 누군가의 종목 추천을 따라 사고, 확인되지 않은 정보가 확신처럼 돌아다니고, 서로의 판단을 강화하다가 같이 무너지는 곳이 있다. 그런 곳을 커뮤니티라고 부르기는 어렵다. 그것은 군중이다. 익명 뒤에 숨은 군중은 누군가를 미워하고, 같이 흥분하고 같이 공포에 빠지지만, 같이 웃지는 못한다. 그저 조소만이 있다. 웃으려면 한 발짝 떨어져야 하는데, 군중 안에서는 그 한 발짝이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말하는 커뮤니티는 다르다. 서로의 수익률을 비교하는 곳이 아니라, 서로의 실수를 웃을 수 있는 곳이다. 산초가 돈키호테 옆에서 했던 일을 서로에게 해줄 수 있는 관계가 있다. "이번엔 진짜 풍차 아니야?" 하고 물어봐줄 수 있는 사이가 될 수 있다. 그런 곳이 커뮤니티다.
그런데 이런 커뮤니티에서도 정보만 오가기 시작하면 변질된다. 종목 추천, 시장 분석, 전략 토론만 한다. 물론 이것들도 의미가 있다. 그러나 정보만 오가는 커뮤니티에서는 오래 버티기 어렵다. 왜인가. 정보는 본질적으로 경쟁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누가 더 좋은 종목을 찾았는가, 누가 더 정확하게 예측했는가, 누가 더 높은 수익률을 냈는가. 이 언어 속에서 사람들은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비교된다. 비교는 고립을 만든다.
반면 유머는 연결의 언어다. 같은 것을 보고 같이 웃는 순간, 비교가 사라진다. "나만 물린 게 아니구나"라는 웃음 속에는 수익률의 서열이 없다. 고통의 동질감만 있다. 그 동질감이 고립을 깬다. 투자 커뮤니티에서 돌아다니는 자조적인 농담들이 단순한 위로가 아닌 이유가 여기 있다. 그것은 정보와 다른 종류의 언어다. 같은 고통을 아는 사람들끼리만 나눌 수 있는 언어가 있다. 그 언어를 공유하는 사람들은 정보를 공유하는 사람들보다 오래간다. 정보는 바뀌지만 유머의 기억은 남기 때문이다.
투자를 오래 한다는 것은 결국 이 게임을 계속하기로 선택하는 것이다. 매일 아침 계좌를 열고, 시장의 소음을 듣고, 그래도 원칙을 지키겠다고 다시 결심하는 것이다. 그 선택을 반복하게 만드는 힘은 수익률이 아니다. 혼자가 아니라는 감각이다. 같이 얻어맞고, 같이 투덜거리고, 같이 웃으면서 따라가는 산초가 곁에 있다는 감각이 필요하다. 그 감각이 진지함을 경직으로 굳지 않게 한다. 수면제 없이도 10년을 버틸 수 있게 한다.
마치며
나는 이 글에서 유머의 힘을 아주 재미없게 설명했다. 4체액설을 꺼내고, 몰리에르를 분석하고, 자기거리두기를 논했다. 유머를 연구하면 웃기지 않는다고 했던 그 인문학자들과 내가 다를 게 없다. 이 글 자체가 이 글의 논지를 배반하고 있다. 그걸 알면서도 썼다. 왜냐면 이 고백 자체가 이 글이 할 수 있는 가장 솔직한 마무리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정리는 하자. 시장은 불일치로 작동한다. 좋은 실적에 주가가 내리고, 모두가 확신할 때 꺾인다. 코미디와 같은 구조다. 그리고 그 불일치 앞에서 공포와 탐욕은 감정을 멈추게 한다. 얼어붙거나 눈이 멀거나 한다. 유머는 그 멈춤을 다시 흐르게 하는 힘이 된다. 자기 자신을 3인칭으로 볼 수 있게 해주고, 굳어가는 판단을 한 순간 느슨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유머는 혼자서는 오래가지 못한다. 같이 웃을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버핏에게 멍거가 있었듯이, 산초가 돈키호테 곁에 있었듯이 말이다.
글 서두에서 한 편집자의 말을 인용했다. "하마터면 경제지식을 얻을 뻔 했다." 그가 금융 책을 덮을 때마다 했다는 이 말이 오래 남았던 이유를 이제는 조금 안다. 그 문장이 웃긴 이유는, 경제지식이 재미없다는 데 모두가 동의하기 때문이다. 불일치가 아니라 일치여서 웃긴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일치가 문제다. 금융을 재미없는 것으로 보는 시선에 금융인들 자신도 동의해버렸다. 스스로 재미없는 영역의 사람이 되었다. 분석은 정교해졌지만 유머는 사라졌다. 리포트는 화려해졌지만 웃음은 없어졌다. 아르파공의 집처럼, 모든 것이 진지하고, 모든 것이 돈을 향해 있다.
한번 돌아보자. 우리의 투자 생활에서 웃을 때가 많은가, 고통 받을 때가 많은가. 투자 모임에서 같이 분석한 기억은 많을 것이다. 그런데 같이 웃은 기억은? 내 손실을 웃음거리로 만들었던 순간은? 시장의 황당함에 함께 피식했던 순간은?
유머는 훈련이다. 시장이 말도 안 되는 짓을 할 때 피식 웃는 연습, 내가 틀렸을 때 자기 자신을 한 발짝 떨어져서 보는 연습, 같이 손실을 희화화할 수 있는 관계를 만드는 연습, 이것들도 투자 공부다. 수익률 계산만큼 중요한 공부다.
최고의 MBA를 졸업한 펀드매니저는 금융업의 관점에서 섹시하다. 명함에 박힐 학교 이름은 이 업계에서 신뢰의 언어다. 그곳에서 기업 가치를 평가하는 법은 정교하게 배운다. 그런데 시장은 농담을 한다. 그 농담을 읽는 법은 어디에서도 가르쳐주지 않는다. 찰리 멍거는 이렇게 말했다. "세상을 정확하게 보면 웃길 수밖에 없다." 세상을 정확하게 보지 못하는 사람은, 아무리 정교한 분석을 해도 결국 풍차를 향해 돌진한다. 그리고 옆에서 웃어줄 산초도 없이.
투자에서 한 번의 수익보다 오래 살아남는 게 중요하다. 그리고 오래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가장 좋은 투자 조언이 무엇이었냐고 하면, 아마 한때 같이 웃었던 순간을 떠올릴 것이다. 나는 웃기는 재능이 없다. 그러니 동료(Fellow)가 필요하다. 인생의 다른 모든 영역과 마찬가지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