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론백님의 글을 읽고 문득 든 생각.
어렸을 대 게임을 하는 경험도 참 삶에 여러가지 준 것 같다.
1. 큰 이득을 주겠다고 말하며 다가오는 사람을 조심해라
2. 에디터를 통해 다 얻으면 게임은 재미가 없다. 과정이 재밌는 것이다.
역시 모든 경험은 경험의 순간이 아니라 과거의 기억, 미래의 사건으로 의미가 완성된다.
게임도 새옹지마 ㅋㅋ
온라인 게임도, SNS도 다 마찬가지 아닐까

마론백
2025.11.26
부자라는 ‘명사’의 감옥
서점 매대를 지나다가
한국의 출판 시장은 기형적이다. 깊이 있는 원제는 사라지고, 그 자리를 '부자 되는 법'이라는 노골적인 욕망이 차지했다. 출판사는 판매량을 위한 선택이라 변명하겠지만, 이는 독자의 지성을 기만하는 행위다. 나는 서점을 점령한 이 '부자 담론'에 반기를 든다.
우리는 정말 부자가 되기를 원하는가? 역설적이게도 사람들은 부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들이 진정으로 욕망하는 것은 미래의 '부'가 아니라 현재의 '소비'와 '쾌락'이기 때문이다. 부자가 되는 길은 이미 널려 있다. 지능이나 환경을 탓하기엔 자수성가한 사례가 너무나 많다. 사람들이 부자가 되지 못하는 이유는 방법의 부재가 아니라, 부자가 되어가는 고단한 '과정'을 견딜 의지가 없기 때문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부자'를 도달해야 할 최종 목적지로 설정하는 사회적 통념에 있다. 절대적 빈곤이 해결된 현대 사회에서 가난은 '현상'이 아니라 '감정'이다. 100억을 가진 자는 1,000억을 가진 자 앞에서 가난을 느끼고, 국내에 별장이 있는 자는 해외에 별장이 있는 자 앞에서 박탈감을 느낀다. 내가 아는 한 지인은 남들이 부러워하는 부를 가졌음에도, 더 거대한 부자들과 자신을 비교하며 늘 허기에 시달린다.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려는 순간, 부에 대한 욕망은 영원히 채워질 수 없는 형벌이 된다.
왜 부자가 되어야 하는가? '더 행복해지기 위해서'라는 답변은 기만이다. ‘부자가 되면’, ‘의사가 되면’ 인생이 완성될 것이라는 믿음은 헛된 망상이다. '부자'는 삶의 결론이 될 수 없다. 목표를 달성한 그 순간에도 삶은 여전히 지루하게 이어진다. 태어날 때부터 부자였던 이들조차 불행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우리는 이제 '부자라는 명사'가 되기 위해 인생을 유예하는 것을 멈춰야 한다. 중요한 것은 도달한 이후의 삶, 그리고 부를 대하는 태도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명사적 존재의 함정
나는 "부자가 된다"는 말을 경계한다. 인간은 '부자'라는 명사로 고정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20세기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는 "실존이 본질을 앞선다"는 명제로 이 문제를 꿰뚫어 보았다.
의자나 키보드 같은 사물은 만들어지기 전부터 '앉기 위한 도구', '입력을 위한 도구'라는 목적, 즉 본질이 먼저 존재한다. 하지만 인간은 다르다. 우리는 세상에 먼저 던져진(피투) 후, 스스로 선택하며 자신을 만들어가는(기투) 존재다. 그런데도 우리는 스스로를 마치 용도가 정해진 사물처럼 착각한다.
사르트르는 <존재와 무>에서 카페 웨이터의 예를 든다. 주문을 받고 쟁반을 나르는 종업원은 마치 '웨이터'라는 본질을 타고난 기계처럼 움직인다. 하지만 그것은 연기일 뿐이다. 그는 퇴근하는 순간 누군가의 연인이 되고, 주말에는 춤을 추거나, 정치적 구호를 외치는 시위자가 될 수도 있다. 그는 '웨이터'라는 명사로 환원될 수 없는 투명하고 텅 빈 그릇이다. 어떤 수식어도 그를 영원히 가둘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실존이 본질을 앞선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다.
그러나 인간은 이 불확정성을 견디기 힘들어한다. 우리는 타인을, 그리고 나 자신을 규정되지 않은 실존으로 마주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불확실성은 불안을 낳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빨리 명사로 환원시키려 든다. "저 사람은 의사야", "이 사람은 대리야"라고 이름표를 붙여야만 비로소 안심하고 효율적으로 관계를 맺는다. 서로를 살아있는 주체가 아닌, 예측 가능한 사물로 대하는 것이다.
직장에서 상사는 나를 '대리'라는 기능으로만 바라본다. 나 역시 상사를 한 가정의 가장이나 고뇌하는 인간으로 보지 않고 '부장'이라는 직책으로만 대한다. 우리는 서로의 무한한 가능성을 거세하고, 서로를 죽어있는 고정된 존재로 만든다. 사르트르가 "타인은 지옥이다"라고 말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타인이 나를 괴롭혀서가 아니다. 타인의 시선이 나의 실존을 박제하여 '그저 그런 사물'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들의 시선 속에서 나는 자유를 잃은 돌멩이가 된다.
이 관점에서 보면, 온 사회가 외치는 "부자가 되자", "의사가 되자"는 구호가 얼마나 끔찍한지 알 수 있다. 그것은 스스로를 자유로운 인간에서 '돈을 가진 기능적 사물'로 격하시키려는 시도다. 마치 세상에 대해 복수를 하듯 부를 쫓았을 때 무엇이 남는가? 억울함과 질투를 연료 삼아 악착같이 돈을 벌고, 자녀를 전문직으로 만들기 위해 모든 것을 쏟아붓는 행위는 결국 무엇을 위함인가? 그것은 자신과 자녀를 가장 비싼 명찰을 단 상품으로 진열하고 싶다는 욕망에 불과하다. 그리고 복수극의 끝은 늘 공허할 뿐이다.
우리는 결코 100억을 가진 '부자'라는 본질로 환원될 수 없다. 그렇게 믿는 순간, 우리는 스스로 감옥에 걸어 들어가는 것이다. 인간의 자유와 존엄을 포기하고, 그저 비싼 가격표가 붙은 연필이 되기를 자처하는 것, 이것이 명사적 삶이 가진 치명적인 함정이다.
동사로서의 삶
사르트르가 우리를 고정된 사물로 바라보는 시선에 저항했다면,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에게 "흐르는 동사가 되라"고 제안한다. 그는 우리가 집착하는 '존재(Being)'의 허상을 깨고, 역동적인 '생성(Becoming)'의 삶을 살 것을 주문한다.
들뢰즈는 우리 사고를 지배하는 '이분법적 구분'과 '동일성(Identity)'의 신화에 근본적인 의문을 던진다. 사르트르는 "사물에는 본질이 있다"고 보았지만, 들뢰즈의 눈에는 그 사물조차 고정된 것이 아니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고정된 존재'가 얼마나 허상인지 이해하기 위해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보자.
우리는 '연필'을 명확히 규정된 하나의 사물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하지만 연필이라는 존재는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숲속의 나무가 베어질 때인가? 공장에서 흑심이 박힐 때인가? 아니면 내 손에 쥐어질 때인가? 반대로, 연필을 깎아 몽당연필이 되면 그것은 연필이 아닌가? 다 타버린 재가 되면 연필은 사라지는가? 들뢰즈가 보기에 '연필'이라는 고정된 실체는 없다. 나무와 흑연이 만나고, 깎이고, 쓰이고, 닳아 없어지는 거대한 '변화의 과정'만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편의상 그 과정의 한 단면을 잘라 '연필'이라는 이름을 붙여 고정시켰을 뿐이다.
무지개를 생각해보자. 우리는 무지개를 '빨, 주, 노, 초, 파, 남, 보'의 7가지 색으로 나눈다. 하지만 실제 무지개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빨간색이 끝나는 지점과 주황색이 시작되는 지점에 명확한 선은 없다. 무수히 많은 색의 농도가 연속적으로 변화하는 '스펙트럼'이 있을 뿐이다. 우리가 "이건 빨간색이야"라고 규정하는 순간, 그 색이 가진 수만 가지의 미묘한 차이와 변화는 무시되고 죽어버린다.
이것이 바로 들뢰즈가 비판한 '원자적 사고'이자 '재현적 사고'이다. 과학과 효율성의 세계에서는 수많은 수소 원자를 모두 똑같은 '수소'로 취급해야 계산이 가능하다. 그러나 현실 세계에서, 특히 생명의 세계에서 똑같은 것은 단 하나도 없다. 어제의 강물과 오늘의 강물이 다르듯, 1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세포 단위에서부터 생각의 결까지 미세하게 다르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무한한 차이와 변화를 뭉뚱그려 "나는 김철수다"라는 하나의 고정된 명사(동일성)로 환원시킨다.
들뢰즈는 이러한 환원이 존재의 특수성을 훼손한다고 보았다. 연필과 연필이 아닌 것, 부자와 부자가 아닌 것의 경계에는 0과 1처럼 명확한 선이 있는 것이 아니라, 무한히 진동하는 변화의 스펙트럼이 존재한다. 그렇기에 삶의 진실은 고정된 상태(Being)에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다른 무언가로 변해가는 '되기(Becoming)'의 과정 그 자체에 있다.
마크로스코 Orange and Yellow ▲
이러한 통찰을 우리의 삶, 특히 '부'에 대한 태도에 적용해보자. 우리는 흔히 인생을 A 지점에서 B 지점(부자)으로 이동하는 직선 코스라고 착각한다. "100억을 모으면 행복해질 거야"라는 믿음은 전형적인 '존재'의 사고방식이다. 여기에는 '현재의 나'는 결핍된 상태이고, '미래의 부자가 된 나'는 완성된 상태라는 위험한 이분법이 깔려 있다.
들뢰즈의 경고처럼, 고정된 목표점(부자)을 설정하는 순간 삶은 생명력을 잃는다. 목표에 도달하기 전까지의 모든 과정은 단지 참아야 할 '유예된 시간'이자 '고통'이 되고, 막상 목표에 도달한 후에는 삶의 동력이 멈춰버리기 때문이다.
들뢰즈에게 진정한 삶은 '부자'라는 명사에 안착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비유를 즐겨 사용했다. 앨리스가 몸이 커지는 약을 먹는 순간을 상상해보자. 그 찰나의 순간, 앨리스는 '큰 앨리스'인가 '작은 앨리스'인가? 그녀는 그 무엇도 아니다. 그녀는 과거보다는 크고 미래보다는 작은, 끊임없이 '커지고 있는 중'인 순수한 생성의 시간 속에 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정지된 스냅사진 같은 '부자'라는 타이틀이 아니다. 돈을 매개로 세상의 흐름을 읽고, 투자를 통해 타인과 새로운 관계를 맺으며, 어제와 다른 시야를 가진 사람으로 변모해가는 '부의 생성(Becoming-Wealth)' 과정이다. 이 관점에서 돈은 나를 규정하는 '계급장'이 아니라, 나의 역량을 세상으로 확장시키는 '접속의 도구'가 된다.
"나는 부자가 될 거야"라는 선언은 스스로를 100억짜리 고정된 사물로 박제하겠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오히려 들뢰즈적 관점에서 우리는 "부를 생성하는 과정에 있다"고 말할 때 자유로워진다. 이는 결핍을 채우려는 괴로운 몸부림이 아니라, 새로운 가치를 생산하고 연결하려는 창조적 욕망의 발현이다. 들뢰즈에게 욕망은 부족함의 증거가 아니라, 삶을 확장시키는 긍정적인 에너지이기 때문이다.
춤추는 강물처럼
서점 매대를 가득 채운 '부자 되기' 열풍은 역설적으로 우리 시대의 빈곤한 상상력을 보여준다. 우리는 그토록 '무언가'가 되고 싶어 안달이다. 하지만 사르트르가 지적했듯, 어떤 명사로 자신을 규정하는 순간 우리는 스스로 자유를 반납한 사물이 된다. '부자'라는 목표는 달콤해 보이지만, 실상은 나를 돈 버는 기계로 축소시키는 좁은 감옥일 뿐이다.
이제 시선을 돌려야 한다. 들뢰즈의 말처럼 삶은 고정된 점이 아니라 흐르는 선이다. 인생은 100억이라는 숫자에 깃발을 꽂는다고 해서 완성되는 직선 경주가 아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박제된 '부자'라는 명찰이 아니라, 부를 일구어가는 과정 그 자체다. 돈을 매개로 세상의 흐름을 읽고, 타인과 새롭게 접속하며, 어제의 나와 다른 시야를 가진 사람으로 매일 변모해가는 것. 이 역동적인 '생성'의 과정이야말로 삶의 본질이다.
"나는 부자가 될 거야"라는 강박은 현재를 결핍으로 물들인다. 대신 "나는 가치를 생성하는 중이다"라고 생각하자. 돈은 나를 규정하는 계급장이 아니라, 나의 역량을 세상으로 확장시키는 흥미로운 도구가 될 것이다. 결과가 아닌 과정을 즐길 때, 비로소 돈에 대한 공포와 숭배는 사라진다.
멈춰있는 황금 동상이 되기를 거부하고, 끊임없이 변화하며 춤추는 강물처럼 살아갈 때, 우리는 자본의 노예가 아닌 진정한 삶의 주체로 설 수 있다. 명사라는 감옥을 부수고 나와 흐르는 동사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이 시대에 우리가 부를 대하는 가장 자유롭고 우아한 태도일 것이다.
멋나들 연구소 : 멋지게 나이들기 위한 작은 고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