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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론백
2026.05.01
투자자의 인지적 위생
1. 어떤 감정에 대하여
2026년 4월, 삼성전자 노사 협상이 한동안 뉴스의 한 자리를 차지했다. 노조는 영업이익에 비례해 성과급을 분배해달라고 요구했고, 사측은 불황에 대비한 유보가 필요하다는 입장으로 맞섰다. 어디서 본 듯한 그림이다. 분배의 폭을 둘러싼 노사의 입장 차이는 어느 시대 어느 회사에든 있었다.
내가 이 사건을 며칠 동안 곱씹게 된 건 노사의 입장 차이 자체보다 사건을 둘러싼 한 가지 반응 때문이었다. 인터넷 댓글창에서, 가까운 모임의 대화에, 같은 종류의 문장이 반복되었다.
어떻게 주주보다 노동자가 더 많이 받는다는 거냐.
이 문장이 나올 때마다 묘한 감각이 들었다. 그 의문은 일견 자연스러워 보였다. 회사의 주인은 주주이고, 직원은 회사에서 일하는 사람이고, 그러니 주인이 더 가져가는 게 당연하다는 산수가 머릿속에 빠르게 떠오른다. 한국의 많은 개인투자자들이 이런 산수의 어딘가에 익숙하다. 나도 그렇다. 분노라기보다는 익숙한 감각의 발로에 가까웠다.
그런데 이 익숙함이 거꾸로 마음에 걸렸다. 너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반응일수록 한 번쯤 멈춰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어떤 사고방식을 너무 깊이 내면화하면, 그 사고방식의 한계는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내면화된 감각은 보이지 않는 채로 우리의 판단을 매일 조용히 지배한다. 투자자에게 이건 단순히 세계관의 문제가 아니다. 손익계산서에 직접 영향을 주는 문제다.
이 글은 그 익숙함을 한 번 비스듬히 보려 시도해본다. "어떻게 주주보다 노동자가 더 받느냐"는 생각은 어디서 오는가. 그 감각이 전제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 전제가 우리에게 무엇을 보게 하고, 무엇을 보지 못하게 하는가.
미리 해두고 싶은 말이 하나 있다. 나는 어느 쪽이 옳고 그른지 따지려고 글을 쓴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각자의 판단 영역이다. 또한, 투자라는 행위가 어떻게 따져도 개인적 이익 추구에 가깝고, 그 자체에 잘못이 있지 않다는 것에도 동의한다. 다만 하나의 가설이 있다. 한 가지 프레임으로만 시장을 보는 일은, 그 시각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우리가 그것의 한계를 보지 못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한계는 도덕의 문제이기 전에 실용의 문제다.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이 결국 우리의 수익률을 깎고 있을 수 있다는 뜻이다.
이 가설을 따라가면서, 몇 가지 우회로를 거치게 될 것이다. 회계가 잡지 못하는 가치들, 영국 철학자의 한 문장, 투자업계의 한 좌우명, 그리고 가장 사적인 동기가 갖는 의외의 공적 얼굴까지 살펴본다. 우회가 좀 길어 보일 수 있지만, 도착하는 자리가 처음의 감각을 다르게 보게 해줄 것이라 기대한다.
2. 제로섬 사고의 함정
"어떻게 주주보다 노동자가 더 받느냐"는 문장의 밑바닥에 깔린 사고를 한 번 천천히 풀어보자. 거기에는 의외로 단순한 산수 하나가 있다. 누군가가 더 가져가면 내가 덜 가져간다는 산수다. 회사가 만들어낸 이익은 정해진 크기의 파이로 가정되고, 이 파이를 주주와 직원이 나눠 가져야 하니, 한쪽이 많이 가져가면 다른 쪽 몫이 줄어든다는 그림이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그려진다.
이 산수가 잘못되었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단기적으로 보면 이 산수는 분명히 맞다. 올해의 영업이익에서 직원에게 더 분배하면 주주에게 갈 몫이 줄어든다는 것은 회계적 사실이다. 핵심은 이 산수가 잘못이라는 게 아니라, 너무 자연스러워서 우리가 그 한계를 보지 못한다는 점이다. 모든 산수가 다 똑같은 산수는 아니다. 어떤 산수는 좁은 시간의 창 안에서만 정확하다.
그런데 거시적인 시간 축에서 살펴보면, 우리가 자본주의의 가장 강력한 동력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대부분 정해진 크기의 파이를 다투는 게임이 아니었다. 좋은 회사는 직원에게 더 좋은 보상을 주면서도 주주에게 더 좋은 수익을 돌려준다. 좋은 산업은 한 회사가 다른 회사를 죽이는 영역이 아니라 경쟁사들이 함께 시장을 키우는 영역에서 만들어진다. 좋은 기술 혁신은 누군가의 일자리를 빼앗는 동시에 더 많은 종류의 새 일자리를 만들어낸다.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부의 총량은 인류 역사에서 한 번도 정해진 크기였던 적이 없다.
이 두 풍경, 정해진 파이를 다투는 풍경과 파이 자체가 커지는 풍경은 어느 한쪽이 진실이고 다른 한쪽이 거짓인 관계가 아니다. 둘 다 진실이다. 다만 보이는 시간 지평이 다를 뿐이다. 짧은 시간을 놓고 보면 분명히 정해진 파이를 두고 다투는 그림이 맞고, 긴 시간을 놓고 보면 파이 자체가 커지는 그림이 맞다. 그러므로 내일까지의 수익을 생각하는 사람과 10년 뒤를 생각하는 사람은 같은 회사의 같은 결정을 보고도 완전히 다른 그림을 본다.
여기서 한 가지 자연스러운 질문이 따라온다. 그렇다면 우리는 보통 어느 쪽 그림을 보고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우리가 처한 환경에 따라 꽤 달라진다. 어떤 환경은 자연스럽게 우리에게 긴 시간 지평을 떠올리게 하고, 어떤 환경은 반대로 짧은 시간 지평으로 우리를 끌어당긴다. 그리고 투자라는 활동은 후자에 가까운 환경처럼 보인다.
매수자가 있으면 매도자가 있고, 어떤 종목이 오르면 누군가는 그 차익을 가져가고 다른 누군가는 그만큼 못 벌게 된다. 매일 매시간의 가격 변동이 손익으로 환산되어 눈앞에 표시된다. 차트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세상은 점점 더 정해진 크기의 파이를 두고 다투는 풍경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런 풍경에 오래 노출될수록 우리의 시야는 자연스럽게 짧은 시간 단위에 맞춰진다. 우리가 의식적으로 짧게 보려고 해서가 아니라, 환경 자체가 우리의 시간 감각을 그렇게 빚어낸다.
그러므로 정해진 파이의 사고를 의심한다는 것은 도덕의 문제가 아니다. 잃어버리고 있는 시간축을 회복하는 일이고, 그 결과 자기가 보지 못하던 가치 창출의 경로를 보게 되는 일이다. 정해진 파이의 사고가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만 가지고는 가치의 절반밖에 보지 못한다는 뜻이다.
이 시야에서 다시 처음의 이야기로 돌아가보면, 사건이 조금 다르게 읽힌다. "어떻게 주주보다 노동자가 더 받느냐"는 반응은 잘못된 지적이 아니라, 짧은 시간축으로 압축된 사고가 자연스럽게 만들어낸 풍경에 가깝다. 그 시간축을 한 칸만 더 길게 잡으면 같은 사건이 다른 모양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직원에게 더 분배하는 결정이 단기적으로는 주주의 몫을 줄이지만, 장기적으로는 그 회사가 가진 무형의 가치, 숙련, 신뢰, 인재 풀, 조직의 학습 능력을 지키는 일이 될 수도 있다.
이 가능성을 가장 정직하게 측정하고 관리해보려 했던 동시대의 어휘가 하나 있다. 지금은 너무 닳아서 듣기만 해도 피로감이 드는 단어가 되었지만, 그 어휘가 처음 던진 질문은 여전히 살아 있다. 그 어휘로 잠시 우회해보자.
3. 숫자가 잡지 못한 것들
ESG라는 단어는 최근 몇 년 사이 가장 심하게 닳은 어휘 중 하나가 되었다. 펀드 마케팅의 라벨로 쓰이고, 기업 홍보 페이지의 장식이 되고, 어떤 자리에서는 이 단어를 입에 올리는 것만으로 약간의 멋쩍음이 따라붙기도 한다. 이런 변질에 대한 피로감은 정당하다. 본래의 문제의식이 무엇이었든, 그 단어가 실제로 사용되는 풍경이 너무 많이 변했다.
다만 한 가지를 분리해서 보고 싶다. 단어가 닳았다는 것과 그 단어가 처음 답하려고 했던 질문이 사라졌다는 것은 다른 일이다. 라벨이 너덜너덜해졌다고 해서 라벨이 가리키던 문제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ESG가 처음 던진 질문은 여전히 살아 있고, 어떤 의미에서는 점점 더 절박해지고 있다. 그 질문을 한 번 다시 꺼내보고 싶다.
질문은 의외로 회계의 영역에서 출발한다. 우리가 지금 사용하는 회계 시스템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그 기본 골격이 잡혔다. 그 시대의 기업이 무엇을 가지고 가치를 만들어냈는지를 떠올려보면 이 시스템이 왜 지금의 모양을 갖게 되었는지가 보인다. 공장이 있었고, 기계가 있었고, 재고가 있었다. 자산은 만져지고 셀 수 있는 것들이었고, 이익은 그 자산이 만들어낸 매출에서 비용을 빼면 나오는 것이었다. 회계는 이 환경에 맞게 설계되었다.
그런데 21세기 기업의 풍경은 많이 다르다. 한 추정에 따르면 현재 미국 S&P 500 기업 시가총액의 80% 이상이 무형자산에서 온다(Ocean Tomo, etc.). 인적자본, 브랜드, 연구개발의 축적, 조직 문화, 데이터, 고객과의 신뢰, 플랫폼 안에 형성된 네트워크 같은 것들이다. 만져지지 않고 셀 수 없는 자산들이 기업가치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된 시대다. 그런데 회계 시스템은 여전히 19세기 말에 설계된 골격으로 작동하고 있다. 무형자산은 자산화되지 않고, 그것을 만들고 지키는 데 들어가는 지출은 대부분 '비용'으로만 기록된다.
이 어긋남이 만들어내는 가장 분명한 사례가 인적자본이다. 한 회사가 직원들에게 평균보다 좋은 보상을 주고, 좋은 교육 기회를 제공하고, 안정적으로 고용한다고 해보자. 손익계산서에서 이 모든 것은 '인건비'라는 한 줄의 비용으로 잡힌다. 자산 항목 어디에도 잡히지 않는다. 그러니까 단기적으로 이익을 늘리고 싶은 경영자에게 가장 손쉬운 길은 인건비를 줄이는 것이 된다. 비용이 줄어들면 그 자리에서 이익이 늘어나는 것으로 잡힌다. 그것이 ‘무엇을 잠식하면서 늘어난 이익’인지는 회계가 말해주지 않는다.
정말로 잠식되는 것은 무엇일까. 숙련된 직원이 회사를 떠나고, 남은 직원의 사기가 떨어지고, 우수한 인재가 더 이상 그 회사를 선택하지 않게 되고, 조직 안에 쌓여 있던 학습이 흩어진다. 이 모든 것이 사실은 자산의 손상이다. 그러나 회계 장부에는 단지 '인건비 절감'이라는 좋은 뉴스만 찍힌다. 회계는 단기 이익이 늘었다고 알려주는데, 실제로는 장기 자산이 깎이고 있는 셈이다.
ESG가 처음 답하려 했던 문제가 이 자리에 있다. 단기 회계로는 잡히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가치를, 어떻게 측정하고 관리할 것인가. 환경(E)도 거버넌스(G)도 같은 구조의 문제다. 단기 이익을 위해 환경 외부효과를 사회에 떠넘기거나, 자의적인 의사결정 구조를 방치하거나 한 결과가 결국 기업 자체로 돌아온다. 그러나 그 돌아옴은 회계 장부 어디에도 미리 잡히지 않는다. 사고가 터지고 나서야, 평판이 무너지고 나서야 비로소 비용으로 인식된다. ESG라는 어휘는 이 어긋남을 미리 측정하고 관리해보려는 시도였다. 그 시도가 충분히 정교했는가는 따로 논의할 일이지만, 시도 자체가 답하려 했던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한국에서 ESG의 세 글자 중 가장 저평가된 것이 S(Social), 그중에서도 인적자본 영역이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E는 규제로 어느 정도 강제되는 영역이 되었고, G는 코리아 디스카운트 담론에 힘입어 점차 시장의 관심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S는 여전히 "인건비 절감 = 경영 효율"이라는 오래된 관념 안에 갇혀 있다. 직원에게 잘 대해주는 회사를 보면 좋은 회사라기보다는 비용 통제가 안 되는 회사라는 의심이 먼저 드는 풍토가 있다. 이 풍토가 기업의 의사결정에 미치는 압력은 결코 작지 않다.
이 자리에서 한 가지 연구를 짧게 소개하고 싶다. 런던비즈니스스쿨의 알렉스 에드먼스(Alex Edmans)가 2011년에 발표한 논문이다. 그는 미국에서 매년 발표되는 '일하기 좋은 100대 기업' 명단에 들어간 기업들로 포트폴리오를 만들어 26년간의 수익률을 추적했다. 결과는 분명했다. 이 포트폴리오는 같은 기간 시장 평균을 의미 있게 상회했다.
이 연구가 흥미로운 이유는 결과 자체보다 그가 출발한 질문에 있다. 에드먼스가 처음 가졌던 가설은 오히려 회의적이었다. 효율적 시장 가설이 맞다면, 직원 만족도가 높다는 정보는 이미 주가에 반영되어 있어야 한다. 모두가 알고 있는 정보로는 초과수익을 낼 수 없는 것이 시장의 기본 원리다. 그러므로 이 포트폴리오의 수익률은 시장 평균과 다르지 않아야 한다는 게 그의 처음 생각이었다.
그런데 결과는 달랐다. 의미 있는 초과수익이 나왔다. 그가 이 결과를 어떻게 해석했는가가 그의 후속 작업의 출발점이 되었다. 그의 결론은 이렇다. 시장이 무형자산을, 특히 인적자본을 체계적으로 과소평가한다는 것이다. 회계가 잡지 못하니 가치가 보이지 않고, 보이지 않으니 가격에 반영되지 않고, 그래서 그 자산의 진짜 가치를 알아본 사람만이 초과수익을 가져갈 수 있게 된다.
에드먼스는 이 통찰을 바탕으로 <Grow the Pie>라는 책을 썼다. 제목이 핵심을 담고 있다. 기업가치는 정해진 크기의 파이가 아니라 키울 수 있는 파이다. 직원에게 잘하는 것이 주주의 몫을 깎는 것이 아니라, 파이 자체를 키워서 결과적으로 주주의 몫도 더 커지게 만드는 일이 될 수 있다. 그가 이 책에서 거듭 강조하는 것은 이것이 도덕적 권유가 아니라 실증 연구에서 도출된 관찰이라는 점이다. 좋은 회사가 좋은 주식이 되는 메커니즘이 실제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관찰을 한국으로 옮겨놓고 보면 풍경이 한층 구체적으로 보인다. 지난 몇 년간 한국에서 가장 자주 거론된 산업적 우려 중 하나는 우수한 공학 인재가 의대로 빠져나간다는 흐름이었다. 이 흐름을 막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신호는 결국 무엇인가. 정부의 정책도, 산업계의 호소도 작용하겠지만, 가장 직접적으로 작동하는 신호는 보상 구조다. 공학을 선택한 사람이 그 선택의 대가로 무엇을 받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정직한 지표 말이다.
이 시야에서 보면 한 회사의 성과급 결정은 그 회사의 분배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산업 전체의 인재 풀에 보내는 신호가 된다. 삼성전자가 어떻게 분배하느냐는 지금 이공계 진학을 고민하는 고등학생의 선택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그 고등학생이 10년 뒤 어디서 일하게 되는지가 한국 산업의 다음 10년을 일정 부분 결정한다. 이 긴 인과 사슬이 단기 회계 장부 어디에도 잡히지 않는다.
다시 삼성전자 사건으로 돌아가보자. "어떻게 주주보다 노동자가 더 받느냐"는 반응의 자연스러움은, 회계가 보여주는 영역만 보고 회계가 잡지 못하는 영역을 빠뜨린 시야의 산물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 시야가 잘못되었다는 게 아니다. 다만 그 시야만으로는 가치의 절반밖에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짚어두고 싶다. 보지 못한 절반이 자기 수익률에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를 모른 채로 자신의 시야를 신뢰하는 것은, 투자자에게 가장 위험한 자기 신뢰일 수 있다.
그런데 여기까지 오니 한 가지 더 큰 질문이 따라온다. 이 모든 것이 ESG라는 한 영역의 문제일 뿐일까, 아니면 우리가 세상을 보는 방식 전체에 걸쳐 있는 더 큰 패턴의 한 사례일까.
4. 망치 한 자루의 한계
지금까지 우리는 한 회사의 분배 갈등에서 출발해, 그 분노가 짧은 시간축으로 압축된 사고가 만들어낸 풍경이라는 점, 그리고 이 짧은 시간축의 사고가 회계라는 구체적 장치 안에서 어떻게 단기 이익을 위해 장기 자산을 잠식하는지를 살폈다. 그런데 한 가지 솔직한 의문이 든다. 이 모든 것이 ESG라는 한 영역의 문제, 회계 시스템이라는 기술적 결함의 사례일 뿐일까.
그렇다면 회계 기준이 개정되고 무형자산 측정 기법이 발전하면 우리는 본래의 합리적 산수로 돌아갈 수 있다. 하지만 의심이 드는 지점이 있다. 짧은 시간축으로 모든 것을 환산하고, 정해진 파이의 산수만 자연스럽게 떠올리고, 자기 결정의 비용을 과소평가하는 이 패턴이 정말로 회계 제도 안에서만 작동하는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세상을 보는 방식 전체에 깔려 있는 더 깊은 무엇인가의 표면 효과인가.
이 질문을 본격적으로 다루기 위해 잠시 19세기 영국으로 우회하고 싶다. 존 스튜어트 밀이 1859년에 출간한 <자유론>(On Liberty)은 흔히 표현의 자유에 관한 고전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책을 직접 펼쳐보면 약간 의외의 인상을 받게 된다. 밀이 옹호하려 했던 것은 단순히 사람들이 자기 의견을 말할 수 있는 권리가 아니었다. 그가 더 깊이 우려했던 것은 사회가 다수의 의견에 의해 점차 한 가지 색깔로 물들어가는 풍경이었다.
그는 이것을 '다수의 횡포(tyranny of the majority)'라고 불렀다. 법이 사람을 가두지 않더라도, 사회 전체가 한 가지 의견만 정상으로 여기고 다른 의견을 비정상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형성되면, 사실상의 사상 통제가 일어난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었다. 그리고 이 통제의 가장 큰 피해자는 의외로 다수파 자신이라는 것이 그의 핵심 주장이었다.
왜 다수파 자신이 피해자인가. 이 질문에 대한 그의 답이 <자유론> 제2장의 가장 인상적인 대목이다. 밀은 이렇게 썼다. 자기 의견의 근거만 알고 반대 의견의 가장 강한 형태를 모르는 사람은, 자기 의견을 진정으로 안다고 할 수 없다(He who knows only his own side of the case, knows little of that). 자기 의견이 왜 옳은지를 안다고 믿지만, 사실은 그 의견에 가해질 수 있는 가장 날카로운 반론을 한 번도 견뎌보지 못한 채로 안다고 믿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그가 가진 것은 의견이 아니라 의견의 외피이고, 외피는 한 번 진지하게 두드려보면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드러난다.
이 통찰의 깊이는 이 자리에 있다. 반대 의견을 알아야 하는 이유는 그 반대 의견이 옳을지도 모르기 때문만이 아니다. 그것은 부차적인 이유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반대 의견의 가장 강한 형태를 통과해본 의견만이 진짜로 자기 것이 되기 때문이다. 통과해보지 않은 의견은, 비록 그것이 결과적으로 옳다 하더라도, 우연히 옳은 것에 가깝다. 그것을 가진 사람의 인지 안에서는 검증되지 않은 채로 떠 있는 부유물에 불과하다.
이 통찰을 좀 더 일상의 어휘로 옮겨보면 이런 말이 된다. 신을 진지하게 부정해본 적이 없는 사람의 믿음은 진짜 믿음이라 할 수 없고, 종교의 논리를 끝까지 이해해보지 않은 사람은 제대로 된 무신론을 펼칠 수 없다. 자기 입장의 반대편을 통과해본 사람만이 자기 입장을 진짜로 가질 수 있다는 뜻이다. 이것은 종교에 관한 이야기인 것 같지만 실은 모든 관점에 대한 이야기다. 정치적 입장도, 경제적 입장도, 그리고 투자에 관한 입장도 마찬가지다.
이 명제를 투자자에게 옮기면 꽤 도발적인 문장이 만들어진다. 자기에게 익숙한 한 가지 사고방식만 가지고 있는 투자자는, 사실 그 사고방식조차 제대로 알지 못한다. 자기 시야의 반대편에 한 번도 서보지 않은 사람은, 자기 시야의 한계도 강점도 보지 못한다. 그가 가진 관점은 점검된 관점이 아니라 그저 자동적으로 작동하는 관점이다. 점검을 통과한 관점와 통과하지 않은 관점은, 표면적으로는 같아 보이지만 실제 의사결정의 품질에서 큰 차이를 만든다.
이 통찰이 19세기 영국의 자유주의 철학자에게서만 나온 것이라면, 투자에 관한 글에서 인용하기에는 너무 멀어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거의 같은 통찰이 20세기 후반 미국 투자업계의 한가운데에서도 발견된다. 찰리 멍거의 평생의 좌우명이 그것이다.
"Invert, always invert."
거꾸로 생각하라, 항상 거꾸로. 멍거가 이 문장을 어디서 가져왔는지를 따라가보면 이야기가 더 흥미로워진다. 출처는 19세기 독일의 수학자 카를 야코비(Carl Jacobi)다. 야코비는 어려운 수학 문제를 풀 때 정공법으로 접근하기보다 그 문제의 역(逆)을 먼저 풀어보라는 격언을 남겼다. 답을 직접 찾는 대신 "이 답이 아닌 것은 무엇인가"를 먼저 따져보면 의외로 길이 열린다는 것이다. 멍거는 이 수학자의 사고법을 자기 인생과 투자 전반에 적용했다.
가장 우아한 적용 사례가 1986년 하버드웨스트레이크 졸업식에서 그가 한 연설이다. 졸업생을 앞에 두고 그가 던진 질문은 이랬다.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인생을 가장 비참하게 살 수 있는가". 그는 비참해지는 방법들을 진지하게 나열했다. 자기 일에 신뢰성을 갖지 말 것, 다른 사람의 경험에서 배우지 말 것, 한번 시작한 잘못된 길에서 절대 돌아서지 말 것. 그리고 졸업생들에게 말했다. 이 질문이 행복해지는 법을 직접 묻는 것보다 훨씬 강력하다고. 행복으로 가는 길은 너무 많고 모호하지만, 비참해지는 확실한 길들을 피하는 것은 훨씬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 사고법은 단순한 처세술이 아니다. 그것은 인지편향에 대한 체계적 방어 장치다. 인간의 뇌는 자기가 이미 믿는 것을 강화하는 정보만 자동으로 모은다. 이것을 확증편향이라 부른다. 자기 결정의 비용은 과소평가하고 이익은 과대평가한다. 이것을 과신이라 부른다. 한번 어떤 입장을 취하면 반대 증거가 나와도 잘 바꾸지 않는다. 이것을 앵커링과 일관성 편향이라 부른다. 이 모든 자동 작동은 우리가 의식하지 않는 사이에 매일 매시간 우리의 판단을 깎아낸다. 그리고 이 자동 작동을 멈출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 의식적으로 반대편에 서보는 일이다.
밀과 멍거가 한 세기 반의 시간 차이를 두고 같은 자리에 도착했다는 것이 흥미롭다. 한 사람은 의견의 자유를 옹호하기 위해, 다른 사람은 좋은 투자 결정을 내리기 위해. 출발점은 달랐지만 그들이 도달한 결론은 거의 같다. 자기 사고를 진짜로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다면 그 사고의 반대편을 통과해야 한다. 통과하지 않은 사고는 자동 작동하는 본능에 가깝고, 본능은 어떤 환경에서는 잘 작동하지만 다른 환경에서는 자기를 해친다.
이 자리에서 이 글이 처음부터 던져온 메시지를 한 번 명시적으로 정리해두고 싶다. 이 글이 자꾸 한 가지 시야의 반대편을, 다른 시간축을, 익숙한 사고가 빠뜨리고 있는 영역을 끌어들이는 이유는 독자에게 그 반대편으로 사상 ‘전향’하라고 권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더 도덕적인 투자자가 되어야 한다는 권유도 이 글의 의도가 아니다.
의도는 훨씬 단순하다. 한 가지 사고방식이 자동 작동하는 환경(투자라는 환경)에서, 반대편 사고의 도구를 의식적으로 자기 도구상자에 넣어두는 일이 자기 사고의 점검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도구상자에 한 가지 도구만 들어 있는 사람은 모든 문제를 그 한 도구로 풀려고 한다. 망치만 든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못으로 보인다는 오래된 격언이 가리키는 풍경이다. 도구가 둘만 되어도 풍경은 달라진다. 어떤 문제는 망치로, 어떤 문제는 다른 도구로 풀어야 한다는 판단이 비로소 가능해진다.
그러므로 이 글이 권하는 것은 이념의 전향이 아니라 도구의 추가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인지적 위생(cognitive hygiene) 의 습관화다. 매일 양치질을 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충치가 진행된다. 양치질은 멋있어 보이려고 하는 일이 아니라 이가 빠지는 것을 막으려고 하는 일이다. 인지적 위생도 비슷하다. 자기 사고의 반대편에 의식적으로 서보는 일을 습관으로 만들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기 판단의 품질이 조금씩 깎여나간다. 한 번의 결정에서는 차이가 나지 않을 수 있지만, 수백 번의 결정이 누적되면 그 차이가 자기 자산의 시간 곡선을 다른 모양으로 만든다.
이 점에서 자기 사고의 반대편에 서보는 일은, 도덕적 권유의 어휘이기 전에 인지적 위생의 도구다. 자기 사고의 자동 작동을 멈추고 점검할 수 있게 해주는, 도구상자 안의 한 칸이다. 그 한 칸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의사결정은, 시간이 길어질수록 점점 더 다른 그림을 그린다.
그러면 이제 자연스럽게 다음 질문이 따라온다. 좋다, 도구가 한 칸 더 있으면 좋다는 것은 알겠다. 그런데 그게 실제 투자에서 어떤 차이를 만드는가. 이것이 단지 기분 좋은 자기 위안의 어휘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을 보이려면, 그 도구가 작동하는 구체적인 장면들을 짚어두는 게 좋겠다.
5. 이도류의 실용적 효용
그렇다면 다른 관점을 도구상자에 들여놓는 일이 실제 투자의 어떤 장면에서 어떤 차이를 만드는지를 몇 가지 짚어보자.
첫째는 사건이 다르게 읽힌다는 것이다. 삼성전자 노사 갈등이라는 같은 사건을 두 사람이 본다고 해보자. 한 사람은 정해진 파이의 시야만 가지고 있고, 다른 사람은 무형자산과 인재 풀의 시야를 함께 가지고 있다. 첫 번째 사람에게 이 사건은 단순한 분배 문제다. 노조가 더 가져가면 주주가 덜 가져가니, 주주의 입장에서는 노조의 요구를 가능한 한 억제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이 사람의 머릿속에서 이 사건은 한 회사 안에서 이미 만들어진 이익을 누가 더 가져가느냐의 문제로만 보인다.
두 번째 사람에게 같은 사건은 다른 모양으로 보인다. 그는 이 결정이 한 회사의 분배 문제로 끝나지 않고 산업 전체의 인재 풀에 보내는 신호로 작동한다는 것을 안다. 회계가 잡지 못하는 무형자산들, 숙련, 신뢰, 조직의 학습 능력이 이 결정에 따라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떠올린다. 같은 뉴스 기사가 그에게는 다른 정보를 담아 도착한다. 그가 이 회사의 주주라면, 단순히 이번 분기 배당이 얼마나 나오는지가 아니라 이 회사가 5년 뒤 10년 뒤에도 좋은 인재를 끌어모을 수 있는 회사로 남아 있을지를 함께 묻게 된다.
같은 정보, 다른 그림. 이것이 첫 번째 효용이다. 도구가 한 칸 더 있는 사람은 같은 뉴스에서 더 많은 정보를 추출한다. 사실상 그는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의사결정을 하게 되는 셈이다.
둘째는 자기 결정의 약점을 미리 본다는 것이다. 멍거의 inversion이 가장 직접적으로 작동하는 영역이다. 어떤 종목을 매수하려고 하는 사람이 자기에게 던지는 질문이 "이게 왜 오를까"뿐이라면, 그는 이미 자기 결정의 한쪽 면만 보고 있는 셈이다. 같은 결정에 대해 "이게 무엇 때문에 망할 수 있을까"를 함께 묻는 사람은 다른 위치에 서게 된다. 그는 자기 결정을 지지하는 근거 뿐 아니라 자기 결정을 무너뜨릴 수 있는 시나리오까지 미리 그려둔다.
이 차이는 진입 단계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 두 사람 모두 같은 종목을 같은 가격에 매수했을 수 있다. 차이는 그 이후에 드러난다. 시장이 예상과 다르게 움직였을 때, 첫 번째 사람은 자기 결정의 근거가 흔들리는 경험을 처음 하게 되고 보통 그 충격에 비합리적으로 반응한다. 두 번째 사람은 이 시나리오를 미리 머릿속에 그려뒀던 사람이라, 같은 사건을 자기 사전에 이미 등록되어 있던 가능성의 발현으로 받아들인다. 같은 손실에 대한 반응의 품질이 완전히 달라진다.
투자의 장기 성과를 가르는 것이 진입 시점의 분석 정확도보다 손실 국면의 의사결정 품질이라는 점은 거의 모든 노련한 투자자들이 동의하는 지점이다. 그 의사결정 품질을 결정하는 가장 큰 변수는 자기 결정의 약점을 사전에 얼마나 많이 들여다봤는가이다. 다른 관점의 도구는 이 사전 점검을 가능하게 한다.
셋째는 다수가 보지 못하는 가치를 본다는 것이다. 시장이 효율적이라면 초과수익은 없어야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초과수익이 존재하고, 그 빈틈은 거의 언제나 다수가 공유하는 한 가지 시야의 사각지대에 있다. 모두가 같은 시야로 같은 곳을 보고 있으니 보이지 않는 곳이 생기고, 그 보이지 않는 곳에서 가격과 가치의 괴리가 만들어진다.
앞 장에서 본 에드먼스의 연구가 정확히 이 자리에 있다. 시장이 무형자산을, 특히 인적자본을 체계적으로 과소평가한다는 것은 다수의 시야가 그 자산을 보지 못한다는 뜻이다.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다수를 이루는 한, 그 자산을 보는 능력은 그 자체로 초과수익의 원천이 된다. 좋은 직장이 좋은 주식이 되는 이유가 단순한 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시장 구조의 문제라는 그의 결론이 이 자리에서 다시 한 번 의미를 갖는다.
다른 관점을 도구상자에 들여놓는다는 것은 결국 다수가 공유하는 시야의 사각지대를 발견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운다는 뜻이다. 이것은 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정보 (해석) 우위의 문제다. 모두가 같은 시야로 보는 것에서 우위가 나오기는 어렵다. 우위는 다른 시야를 한 칸 더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넷째는 자기 사고를 자기가 관찰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어쩌면 가장 큰 효용이다. 인지심리학에서 메타인지라고 부르는 능력이다. 자기가 지금 어떤 사고를 하고 있는지를 자기가 한 발 떨어져서 볼 수 있는 능력. 화면 앞에서 갑자기 매수 버튼을 누르고 싶어졌을 때, 한 호흡 멈추고 "지금 내가 보는 세상은 어느 시간축으로 압축된 풍경인가, 어떤 가정을 깔고 있는가, 그 가정의 반대편에는 무엇이 있는가"를 자기에게 물을 수 있는 능력이다.
메타인지 능력은 천성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자기 안에 두 가지 이상의 시야가 공존할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시야가 하나뿐이면 비교할 대상이 없으니 자기 사고를 객관화할 수 없다. 외국에 나가보지 않으면 한국인으로서의 초기 설정값을 인지하기 어렵다. 사업을 직접 해보지 않으면 자기가 그동안 얼마나 근로자의 시야로 세상을 봐왔는지 보이지 않는다. 두 가지 이상의 시야가 있을 때 비로소 "지금 내가 사용하고 있는 시야는 이 둘 중 어느 쪽인가"라는 질문이 성립한다. 이 질문이 성립하는 순간 자동 작동하던 사고가 잠시 멈춘다. 그 한 호흡의 멈춤이 장기적으로 큰 차이를 만든다.
이 네 가지 효용을 통과해 보면 이제 처음의 권유가 좀 더 분명해진다. 다른 관점을 도구상자에 한 칸 들여놓자는 이 글의 제안은 수익률을 깎는 이상주의가 아니다. 수익률을 지키는 실용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수익률의 분산을 줄이고 장기 평균 수익률의 안정성을 높이는 도구다. 양치질이 멋있어 보이려고 하는 일이 아니라 이가 빠지는 것을 막으려고 하는 일이라는 비유로 다시 돌아오면, 다른 관점을 학습하는 일도 비슷한 종류의 일이다. 매일 매일의 결과는 작아 보이지만 누적되면 자기 자산의 시간 곡선이 다른 모양으로 그려진다.
도구의 이름
그렇다면 이제 미뤄둔 작업을 추가로 해두고 싶다. 지금까지 이 글은 "한 가지 사고방식의 한계"라는 일반적인 어휘로 이야기해왔다. 그 한 가지 사고방식이 투자자에게 구체적으로 무엇인가를 짚어둘 필요가 있다.
투자자가 서 있는 지형을 솔직하게 그려보자. 우리가 투자를 하는 이유는 자기 자산을 불리기 위해서다. 가족의 안락을 위해서, 자녀의 더 나은 기회를 위해서, 더 자유로운 노년을 위해서다. 어떻게 포장하든 그 출발점은 사적 이익의 추구다. 이 사실에 어떤 부끄러움도 있을 필요가 없다. 자기 삶을 자기가 책임지겠다는 의지는 그 자체로 존엄한 동기다.
다만 이 출발점이 자연스럽게 만들어내는 시야가 하나 있다는 것을 짚어두고 싶다. 시장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자기 손익으로 환산하고, 모든 거래를 누군가의 이익이 누군가의 손실이 되는 게임으로 보고, 화면 안에서 닫힌 결투의 풍경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다. 이 시야에 이름을 붙이자면 개인주의적 시야다. 우리는 1장과 2장에서 이 시야가 어떻게 자동적으로 작동하는지를 이미 살폈다.
그렇다면 그 반대편에는 무엇이 있는가. 자기 손익을 넘어서 시장 전체를, 그리고 더 긴 시간축을 함께 보는 시야다. 거래를 닫힌 결투가 아니라 더 긴 흐름 안에서 함께 가치를 만들어가는 과정으로 보는 시야다. 자기 이익만이 아니라 시장이든, 산업이든, 다음 세대든 자기가 속한 더 큰 단위의 운명에도 일정한 관심을 가져보는 시야 말이다. 이런 시야를 가리키는 어휘를 정치사상의 오래된 전통에서 빌려올 수 있다. 공화주의적 관점이다. 시민이 자기 이익만이 아니라 자기가 속한 공동체의 운명에도 일정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마키아벨리에서 페티트로 이어지는 정치적 전통의 어휘다.
여기서 잠시 멈춰야 한다. "공동체", "공동선", "공공의 가치" 같은 어휘에 본능적인 거부감을 느끼는 독자가 있을 거라는 걸 안다. 충분히 이해한다. 이 어휘들은 너무 자주 변질되어왔다. ESG가 그랬듯이, 공동선이라는 단어도 어느 순간부터 마케팅의 라벨이 되었고, 어느 자리에서는 도덕적 우월감의 도구가 되었고, 어느 자리에서는 개인의 선택을 강요하는 압력이 되었다. "사회 전체를 생각하라"는 말이 사실은 "내 입장에 동의하라"는 말의 정중한 포장이었던 경험을 우리 모두 한두 번씩은 해봤다. 그래서 이런 어휘가 등장하는 순간 본능적으로 한 발 물러서게 된다. 그건 냉소가 아니라 학습된 자기 방어다.
그러니 미리 분명히 해두고 싶다. 이 글이 공화주의라는 어휘를 빌리는 이유는 독자에게 공화주의자가 되라고 권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사적 이익 추구를 그만두고 공동선을 위해 살라는 권유는 더더욱 아니다. 그런 종류의 어휘 사용이 얼마나 자주 강요와 위선의 도구로 변질되어왔는지를 모르는 사람은 이 글에 없다. 이 글이 빌리는 것은 어휘 그 자체이지, 그 어휘에 따라붙은 도덕적 권유의 무게가 아니다. 투자자에게 가장 자동적으로 작동하는 시야가 개인주의라면, 그 반대편의 어휘로 가장 잘 정리되어 있는 것이 마침 공화주의이기 때문이다. 망치만 든 사람이 도구상자에 다른 도구 한 자루를 들여놓는다는 비유를 다시 가져오자면, 그 다른 도구의 이름을 정확히 부르는 일에 가깝다. 강요가 아니라 제안이고, 도덕이 아니라 도구다.
그런데 여기까지 와서 한 가지 솔직한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이 모든 것이 좋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겠다. 그런데 왜 실제로는 잘 안 되는가. 왜 우리는 다른 관점을 들여놓아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매번 자기 시야 안에 갇히는가. 이 질문에 답하려면 투자라는 활동의 속성을 한 번 더 들여다봐야 한다. 우리는 이미 그 속성의 일부를 짚어왔다. 투자는 본질적으로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일이고, 그 추구가 매일 우리를 한쪽 도구 쪽으로 끌어당긴다. 거기에 한 가지를 더 짚어둘 필요가 있다. 투자는 다른 어떤 활동보다 고독한 활동이라는 점이다. 사적 이익 추구라는 출발점, 한 가지 도구로의 자동적 편향,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외부 검증 없이 혼자 진행되는 환경이다. 이 세 가지가 합쳐질 때 자기 시야 안에 갇히는 일이 일어나기 쉬운 환경이 만들어진다.
6. 고립된 투자자, 그리고 짝의 발견
투자가 고독한 활동이라는 말은 거의 진부한 말처럼 들린다. 그러나 이 진부함의 안쪽을 들여다보면 의외로 깊은 구조가 있다. 다른 어떤 경제 활동과 비교해봐도 이 활동이 갖는 고독의 성질은 좀 특이하다.
회사에서 일하는 사람은 자기 일의 결과를 누군가와 공유한다. 동료가 있고, 상사가 있고, 회의에서 자기 판단의 근거를 설명해야 하는 자리가 있다. 자기 결정이 잘못되었을 때 그것을 알려주는 사람이 곁에 있고, 좋은 결정을 했을 때 그것을 인정해주는 사람도 있다. 자영업을 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손님과의 매일의 상호작용이 있고, 거래처와의 협상이 있고, 같은 업종의 사장들과 경험을 나누는 자리가 있다. 일이 잘 안 풀릴 때 그것을 함께 풀어볼 수 있는 사람들이 일상의 풍경 안에 있다.
투자는 그렇지 않다. 투자자는 화면 앞에 혼자 앉는다. 자기 계좌의 손익은 자기만 본다. 매수와 매도의 결정에 대해 누구에게도 사전에 설명할 의무가 없고, 그 결정의 결과에 대해 누구에게도 사후에 보고할 의무가 없다. 좋은 결정을 했어도 그것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고, 나쁜 결정을 해도 그것을 지적해주는 사람이 없다. 모든 판단의 무게가 한 사람의 어깨에 그대로 얹힌다. 그리고 시장의 상승과 하락이 매일 그 어깨를 두드린다.
이 환경이 인간의 사고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는 행동재무학이 지난 반세기 동안 차곡차곡 쌓아온 발견의 영역이다. 다니엘 카너먼과 아모스 트버스키가 1979년에 발표한 전망이론(Prospect Theory)은 이 분야의 가장 중요한 출발점 중 하나다. 그들이 보여준 것은 인간이 합리적 의사결정자라는 고전 경제학의 가정이 실제 인간의 행동을 잘 설명하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인간은 같은 크기의 이익보다 같은 크기의 손실을 약 두 배 정도로 크게 느낀다(손실회피). 이미 가지고 있는 것에 비합리적으로 더 큰 가치를 부여한다(보유효과). 자기 결정의 근거를 강화하는 정보만 선택적으로 받아들인다(확증편향). 한번 어떤 가격에 익숙해지면 그 가격을 기준으로 모든 판단이 휘어진다(앵커링).
이 편향들이 모든 환경에서 똑같이 작동하지는 않는다는 점이 중요하다. 같은 인간의 같은 뇌라도, 외부 검증이 작동하는 환경에서는 이 편향들이 어느 정도 견제를 받는다. 동료가 "그건 좀 이상한데"라고 말해주는 환경, 회의에서 자기 판단의 근거를 설명해야 하는 환경, 결정의 결과를 누군가와 공유해야 하는 환경에서는 자기 사고의 자동 작동이 한 번씩 멈춰진다. 그러나 외부 검증이 없는 환경에서는 이 편향들이 거의 무방비로 작동한다. 자기가 자기 사고를 점검할 수 있어야 하는데, 앞 장에서 본 것처럼 그 점검은 다른 시야가 있어야 가능하고, 그 다른 시야는 거의 언제나 외부에서 온다.
투자는 정확히 이 외부 검증이 가장 약한 환경이다. 그래서 행동재무학의 발견들이 다른 어느 영역보다 투자자에게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한국 개인투자자가 단타에 휩쓸리고, 테마주에 몰려가고, 리딩방의 종목 추천을 의심 없이 따라가는 패턴은 이 구조의 거의 임상적인 증상이다. 고립이 깊을수록 시간축은 짧아지고, 시간축이 짧아질수록 더 자주 거래하게 되고, 더 자주 거래할수록 다시 고립의 리듬에 더 깊이 빠진다. 화면 앞의 한 사람이 하루에도 수십 번 매수와 매도를 결정하는 풍경은, 거시적으로 보면 외부 검증이 거의 0에 가까운 의사결정의 연속이다.
이 풍경 앞에서 한 가지 관찰을 해보고 싶다. 좋은 사고는 거의 언제나 짝으로 발생했다. 워런 버핏에게는 찰리 멍거가 있었다. 두 사람이 50년 넘게 매일 통화하며 서로의 판단을 두드려본 일은 잘 알려져 있다. 멍거는 한 인터뷰에서 자기 역할을 이렇게 설명한 적이 있다. 자기는 워런이 가져오는 모든 아이디어를 일단 부숴보려고 한다고. 부서지지 않고 살아남는 아이디어만이 진짜로 좋은 아이디어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두 사람의 결합이 만들어낸 의사결정의 품질은, 둘 중 한 명이 혼자 내렸을 결정보다 분명히 더 단단했다.
벤저민 그레이엄에게는 데이비드 도드가 있었다. 가치투자의 고전이 된 <증권분석>Security Analysis은 두 사람의 공저다. 한 사람은 큰 틀의 통찰을 가져오고, 다른 한 사람은 그 통찰을 검증 가능한 형태로 다듬어내는 작업이 두 사람 사이에서 일어났다. 같은 시기 컬럼비아 경영대학원에서 두 사람이 함께 강의를 진행한 풍경이 가치투자라는 학파 자체를 만들어냈다.
전망이론을 만들어낸 카너먼과 트버스키의 관계는 더 인상적이다. 카너먼은 자서전에서 트버스키와의 협업 시절을 회상하며 "내 생애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라고 표현했다. 두 사람은 매일 함께 앉아서 자기들의 가설을 서로 두드려봤고, 어느 쪽이 어떤 아이디어를 처음 냈는지를 더 이상 구분할 수 없게 될 때까지 그 작업을 반복했다. 행동경제학이라는 분야 자체가 이 두 사람의 공저 작업에서 태어났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이 짝들에게 짝은 무엇이었는가. 정서적 위로였는가, 외로움을 달래는 친구였는가. 답은 분명하다. 짝은 무엇보다 추론 검증 장치였다. 자기 사고를 매번 외부에서 두드려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통로였다. 그들의 사고가 그토록 단단해질 수 있었던 이유는 천재성 때문이라기보다 자기 사고를 검증해줄 짝을 곁에 두었기 때문에 가깝다. 자기 머릿속에서 한 번 검증된 사고는, 자기 머리 바깥에서 한 번 더 검증되었을 때 비로소 진짜 자기 것이 된다.
이 관찰을 자기 풍경으로 옮겨오면, 연대라는 단어가 좀 다른 의미로 들리기 시작한다. 연대는 외로움을 달래는 정서적 위안이 아니다. 그것은 인식론적 인프라다. 다른 주주의 존재를 모두 자기 수익을 다투는 경쟁자로만 보던 시야에서, 그중 일부는 같은 시장이라는 무대를 함께 사용하는 동료일 수도 있다는 시야로 한 칸 옮겨놓는 일이다. 그 한 칸의 차이가 자기 사고를 두드려볼 수 있는 짝의 가능성을 만들어낸다.
한국의 투자 문화에서 작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한국 개인투자자의 주된 정보 통로는 리딩방, 종목 추천 단톡방, 텔레그램 채팅방이었다. 이런 통로의 공통점은 정보가 일방향으로 흐르고 비판적 검증이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누군가 종목을 추천하면 그것을 따라가는 것이 기본 동작이고, 추천이 틀렸을 때의 책임은 추천한 사람에게 돌아가지 않는다. 이런 환경에서 의사결정의 품질이 좋아지기는 어렵다.
그런데 최근 몇 년 사이 분위기가 조금씩 다른 방향으로 옮겨가는 모습이 보인다. 책을 함께 읽는 모임, 사업보고서를 함께 분석해보는 스터디, 자기 투자 아이디어를 글로 정리해 서로 피드백을 받는 커뮤니티가 점점 더 자연스러운 풍경이 되고 있다. 이 흐름을 단순히 트렌드의 변화로 읽기보다는, 고립된 의사결정 환경의 위험을 직관적으로 감지한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만들어낸 적응으로 읽고 싶다. 외부 검증이 없는 환경의 비용을 한 번이라도 치러본 사람은, 그 검증을 어디선가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게 된다.
이 절을 마무리하기 전에 한 가지를 짚어두고 싶다. 짝이라는 말이 반드시 사람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자기 사고를 두드려줄 수 있는 무엇이라면 어느 정도 그 역할을 한다. 좋은 책 한 권이 그럴 수 있고, 자기 생각과 정반대 입장을 가진 글 한 편이 그럴 수 있고, 자기 투자 일지를 다시 읽어보는 시간이 그럴 수 있다. 핵심은 자기 사고가 자기 머리 바깥으로 한 번 빠져나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경험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 경험이 매일 한 번씩 일어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사고 품질은, 시간이 길어질수록 점점 더 다른 곡선을 그린다.
투자가 고독한 경기처럼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고독을 끝까지 끌어안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결과를 만들지는 않는다. 자기 사고를 두드려줄 수 있는 한두 사람의 존재(꼭 사람이 아니라 책이든 글이든)를 곁에 두는 일이 결국 자기 사고를 지키는 일이다. 이것이 이 절에서 하고 싶었던 가장 단순한 이야기다.
그리고 이 단순한 이야기가 실은 시간이라는 더 큰 차원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다음 절에서 한 번 더 짚어두고 싶다. 자기 사고를 검증해줄 짝의 문제가 공간의 문제라면, 자기 사고를 어느 길이의 시간 위에 올려놓을 것인가의 문제는 시간의 문제다. 그리고 이 시간의 문제는 마지막에 가장 사적인 자리에서 의외의 모습으로 다시 나타난다.
7. 사적 동기와 공적 효과의 중첩
지금까지 우리가 다뤄온 다른 관점, 도구상자, 짝은 공간의 차원이다. 이제 한 차원이 더 남아 있다. 시간이라는 차원이다. 장기적으로는 양의 합이 보이지만 그 시간축이 가장 먼저 깎여나간다고 앞에서 말한 바 있다. 그렇다면 이 장기는 정확히 얼마나 긴 시간인가. 1년인가, 5년인가, 한 세대인가. 이 질문 앞에서 잠시 18세기 말 영국으로 우회하고 싶다.
에드먼드 버크가 1790년에 출간한 <프랑스 혁명에 관한 성찰>은 보수주의 정치사상의 가장 중요한 고전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그가 이 책을 쓴 직접적 계기는 영국 해협 건너에서 진행되고 있던 프랑스 혁명이었다. 그가 가장 우려했던 것은 혁명 자체보다 그 혁명을 정당화하는 한 가지 사고방식이었다. 한 세대의 의지로 사회 계약을 처음부터 다시 쓸 수 있다는 사고, 지금 살아 있는 사람들의 합의가 사회의 모든 제도를 새로 결정할 수 있다는 사고였다. 버크는 이 사고가 인간 사회의 본질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고 봤다.
이 책의 중간 어디쯤에서 그는 사회를 정의하는 한 문장을 썼다. 사회는 단순히 지금 살아 있는 사람들 사이의 계약이 아니라, "산 자, 죽은 자, 그리고 태어날 자 사이의 동반자 관계"라는 것이다. 이 정의 안에서 한 세대는 사회의 주인이 아니라 일종의 중간 관리자다. 이전 세대로부터 받은 것을 자기 시대에 맞게 운용해 다음 세대로 넘기는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다. 한 세대가 자기 의지만으로 사회 계약을 다시 쓸 수 있다는 발상은, 이미 죽은 사람들이 만들어온 것을 무시하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사람들이 받게 될 것을 고려하지 않는 일종의 시간적 자만이라는 것이 그의 진단이었다.
이 통찰은 정치사상의 영역에 머물지 않는다. 자본이라는 것의 성격에도 거의 그대로 적용된다. 우리가 운용하는 자본 중 순수히 우리 세대가 처음부터 만든 것은 거의 없다. 우리가 가진 자산의 상당 부분은 부모 세대가 일궈낸 것이거나, 그 부모 세대가 태어나기 전부터 사회가 축적해온 인프라와 제도와 지식 위에서 가능해진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운용하는 자본의 상당 부분은 우리가 더 이상 이 세상에 없을 때 다음 세대가 쓰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자본을 운용하는 우리도, 사회를 운영하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본질적으로 중간 관리자에 가깝다.
이 시야에서 보면 단기 트레이딩과 장기 투자의 차이가 좀 다르게 읽힌다. 단기 트레이딩이 도덕적으로 열등하다는 말이 아니다. 다만 시간축이 짧을수록 자본의 세대 간 성격에서 멀어지고, 자기 시대 안에서의 분배 게임에 가까워진다는 사실이다. 시간축이 길어질수록 자본은 점점 더 한 세대를 가로지르는 흐름이 되고, 그 흐름 안에서 운용자의 역할은 점점 더 ‘신탁’(trust)에 가까워진다. 신탁이라는 말의 본래 의미가 그렇다. 누군가 자기 것이 아닌 것을 잠시 맡아서 잘 굴리고 다음 사람에게 넘기는 일이다.
그런데 이 시야를 좀 더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의외의 자리에서 흥미로운 그림이 그려진다. 투자자의 동기는 보통 매우 사적이다. 더 많은 부를 쌓고 싶고, 가족이 더 안락한 환경에서 살게 하고 싶고, 자녀에게 더 좋은 교육 기회를 주고 싶고, 어느 시점부터는 일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는 경제적 자유를 누리고 싶다. 이 모든 동기는 분명히 사적이다. 누구도 사회 전체를 위해 투자하지 않는다. 자기와 자기 가까운 사람들의 삶을 더 낫게 만들기 위해 투자한다. 이 점에서는 어떤 그럴듯한 수사로도 투자자의 본질을 가릴 수 없다.
그런데 여기서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 이 사적 동기들이 충분히 길게 작동했을 때, 그 결과는 의외로 공적인 모양을 갖는다. 가족이 더 안락한 환경에서 살게 하고 싶다는 동기로 한 사람이 자기 자산을 신중하게 운용한다고 해보자. 그는 자기 가족만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그 운용에 성공해 자기 가족의 경제적 안정을 만들어내면, 그의 가족은 사회가 부담했어야 할 어떤 비용을 사회 대신 떠안고 있는 셈이 된다. 자녀의 교육비, 부모의 의료비, 가족 구성원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의 안전망. 이 모든 것이 한 가족 안에서 자체적으로 해결되면, 그만큼의 부담이 사회 시스템에서 빠지게 된다. 본인은 가족을 생각했을 뿐인데, 결과적으로 사회 전체의 비용이 줄어든다.
자녀에게 더 좋은 교육 기회를 주고 싶다는 동기도 비슷한 구조를 갖는다. 한 부모가 자녀에게 좋은 교육을 받게 하기 위해 자기 자산을 운용한다고 해보자. 그 자녀가 그 교육의 결과로 더 좋은 직업을 갖고, 더 높은 생산성을 갖춘 인재가 되고, 사회에 더 큰 가치를 만들어내는 사람이 된다면, 부모의 사적 동기는 결과적으로 다음 세대의 인적자본 풀을 키우는 데 기여한 셈이 된다. 부모는 자기 자녀만 생각했지만, 그 자녀가 자라난 사회 전체가 그 결과의 일부를 가져간다.
경제적 자유를 추구하는 사람의 경우도 그렇다. 어느 시점부터 일하지 않고도 살 수 있게 자산을 쌓아두고 싶다는 동기는 가장 사적인 동기 중 하나다. 그러나 이 동기가 충분히 일찍 그리고 충분히 진지하게 작동하면, 그 사람은 노년에 사회 부양 시스템에 의존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 된다. 그 결과 그 시스템이 더 도움이 절실한 사람들에게 더 두텁게 작동할 수 있게 된다. 본인은 자기의 자유를 추구했을 뿐인데, 그 결과는 사회 안전망의 효율성을 높이는 모양을 갖는다.
이 모든 사례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구조가 있다. 가장 사적인 동기가 가장 공적인 효과를 만들어내는 역설이다. 본인은 사회를 의식하지 않았는데도 결과적으로 사회 전체의 비용이 줄어드는 일이 일어난다.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한가. 답은 시간에 있다. 사적 동기를 짧은 시간축에서 작동시키면 그것은 정해진 파이를 두고 다투는 게임이 된다. 그러나 같은 사적 동기를 긴 시간축에서 작동시키면, 그것은 한 세대를 가로지르는 자본의 흐름이 되고, 그 흐름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사회 전체와 연결된다.
마지막으로, 노후준비라는 가장 부드러운 사례에 도착해보자. 노후준비는 어떻게 봐도 사적인 행위다. 자기 노년의 안정을 위해 자기 자산을 운용하는 일이다. 누구도 사회를 위해 노후준비를 하지 않는다. 자기 자신을 위해 한다. 그리고 이 사적인 동기에는 어떤 부끄러움도 없어야 한다. 자기 노년을 자기가 책임지겠다는 의지는 그 자체로 충분히 존엄한 동기다.
그런데 이 가장 사적인 행위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 의외로 공동체적인 풍경이 자리 잡고 있다. 한 개인이 노후준비를 잘하면 그 개인은 노년에 자녀에게 부양 부담을 지우지 않는 사람이 된다. 자녀 세대가 자기 일과 자기 가족에 더 집중할 수 있게 된다. 더 넓게 보면 그 개인은 사회의 노인 부양 시스템에 부담을 더하지 않는 사람이 된다. 그 시스템이 정말로 도움이 필요한 다른 노인들에게 더 두텁게 작동할 수 있게 된다.
여기서 한 발 더 들어가보면 이렇다. 한 개인의 노후준비는 자기 한 사람의 일로 끝나지 않고, 그 사람을 둘러싼 가족 관계의 결을 바꾼다. 노후 준비가 잘 된 부모는 자녀에게 손을 벌려야 하는 위치에 서지 않는다. 자녀에게 무언가를 강요해야 할 이유도 없어진다. 자녀와의 관계가 의무와 부담의 관계가 아니라 애정과 선택의 관계로 남을 수 있다. 가장 사적인 자기 자산의 운용이 가장 친밀한 인간관계의 결을 결정하는 셈이다.
이 풍경은 노후준비라는 행위에 어떤 새로운 무게를 더한다. 그것은 단순히 자기 노년의 안락을 위한 일이 아니다. 자기 다음 세대에게 어떤 종류의 어른으로 남을 것인가의 문제이고, 자기 가족 안에 어떤 결의 관계를 남길 것인가의 문제이고, 자기가 속한 사회에 어떤 모양의 부담을 남길 것인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가장 사적인 동기로 시작한 일이 가장 공적인 효과로 이어지는 가장 부드러운 사례가 여기 있다.
이 글이 처음부터 던져온 한 가지 메시지가 이 자리에서 다시 한 번 회수된다. 개인주의와 공화주의는 서로의 반대가 아니다. 같은 행위가 짧은 시간축 위에서는 개인주의의 모양으로 보이고, 긴 시간축 위에서는 공동체적인 모양으로 보인다. 노후준비는 그 사실을 가장 부드럽게 보여주는 사례다. 자기를 위한 일이 가장 진지하게 자기를 위한 일이 될 때, 그 일은 어느 순간 자기를 넘어가 있다.
8. 잘 보는 사람이 잘 투자한다
이 글의 마지막 자리에서 한 사람의 이야기로 돌아가고 싶다. 한국 가치투자의 한 흐름을 만들어온 VIP자산운용의 최준철 대표가 어느 자리에서 자기 자신에게 던졌던 질문이 있다. 그는 오랜 시간 자기 자산과 다른 사람의 자산을 굴리며 가치투자라는 한 길을 걸어온 사람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한 가지 의문이 그를 찾아왔다고 한다.
벤처캐피털은 창업가에게 자본을 공급하고, 새로운 산업이 일어서는 데 직접 기여한다. 그렇다면 이미 상장된 주식을 사고파는 자기 같은 투자자는 도대체 어떤 사회적 가치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인가. 자기가 하는 일이 결국 다른 사람에게서 자기에게로 부를 옮기는 일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 그는 이런 의문을 가졌다고 솔직하게 토로한 적이 있다.
이 의문은 가벼운 것이 아니다. 평생 한 길을 걸어온 사람이 자기 일의 의미를 진지하게 묻는 자리에서만 나올 수 있는 의문이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이 의문은 이 글 전체가 처음부터 다뤄온 질문이기도 하다. 투자라는 행위는 결국 사적 이익 추구에 불과한 것인가. 거기에 어떤 공적인 차원이 있을 수 있는가. 한 노련한 투자자의 자문이 이 글에서 던진 질문과 같은 자리에 있다는 것이 흥미롭다.
이 질문에 대해 어느 학자가 그에게 한 가지 답을 주었다고 한다. ‘가격발견’ 기능이라는 답이다. 가치투자자가 좋은 기업을 찾아내 매수하는 행위는, 본인의 의도와 무관하게, 시장 전체의 정보처리 시스템에 한 표를 보태는 일이라는 것이다. 어떤 기업이 어떤 가격을 가져야 하는지에 대한 시장의 집합적 판단은, 결국 그 기업을 진지하게 분석한 사람들의 매수와 매도가 누적되어 만들어진다. 좋은 가치투자자가 많아질수록 가격이 가치를 더 정확히 반영하게 되고, 가격이 가치를 더 정확히 반영할수록 사회 전체의 자본이 더 좋은 곳으로 흘러가게 된다. 본인은 자기 수익을 추구했을 뿐인데, 그 행위가 사회의 자본배분 시스템 전체의 정확도에 기여한 셈이 된다.
이 답이 흥미로운 이유는 이것이 7장에서 본 풍경과 정확히 같은 구조를 갖기 때문이다. 가장 사적인 동기로 시작한 일이, 충분히 진지하게 충분히 길게 작동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공적인 효과를 만들어낸다. 한 개인이 자기 가족의 안정을 위해 자산을 운용하는 일이 사회 전체의 비용을 줄이는 것과 같은 구조로, 좋은 가치투자자는 시장의 가격발견 정확도를 높인다. 본인의 의식 안에서는 자기 수익밖에 보이지 않지만, 한 발 떨어져서 보면 그 행위는 자기를 넘어가 있다.
그런데 한 가지 생각해볼 것이 있다. 최준철 대표가 이런 의문을 가졌다는 사실 자체가 의미하는 바이다. 자기 일이 사적 이익 추구에 불과한 것이 아닌지를 진지하게 묻는다는 것은, 이미 그 사람이 개인주의 일변도의 시야를 한 번 넘어선 자리에 서 있다는 뜻이다. 자기 일에 그런 질문조차 하지 않는 사람과, 그런 질문을 하고 답을 찾으려는 사람의 의사결정은 분명히 다르다. 질문을 가진 사람은 자기 일의 사회적 의미를 의식하면서 일하게 되고, 그 의식이 자기 일의 품질에도 영향을 미친다. 단지 더 도덕적인 투자자가 된다는 뜻이 아니다. 자기 행위의 더 넓은 맥락을 보는 사람의 판단이 그렇지 않은 사람의 판단보다 결과적으로 더 단단할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이 글이 처음부터 끝까지 탐구해온 주제가 이 자리에서 한 호흡으로 회수된다. 우리는 한 회사의 분배 갈등에서 출발해, 그 분노의 정체를 들여다봤고, 회계가 잡지 못하는 무형자산의 영역으로 들어갔다. 자기 관점만 아는 사람은 자기 관점도 모른다는 인식론적 자리에 도달했고, 거기서 다시 다른 관점의 실용적 효용을, 짝의 발견을, 그리고 한 세대를 가로지르는 자본의 시간성을 살폈다.
이 모든 우회가 결국 한 자리로 수렴한다. 어떤 사상을 따르는 ‘00주의자’가 되라는 것이 아니다. 단지 개인주의 일변도의 시야를 한두 칸만 넓혀두자는 것이다. 그 한두 칸이 더 잘 보고 더 길게 가는 데 도움이 된다는 단순한 제안이다. 망치만 든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못으로 보이지만, 도구가 둘만 되어도 풍경은 달라진다.
투자는 결국 세상을 어떻게 보느냐의 문제다. 좁게 보는 사람은 좁게 벌고, 넓게 보는 사람은 넓게 번다. 다만 넓게 본다는 것이 이것저것을 다 끌어안는다는 뜻은 아니다. 자기 시야의 한계를 한 번이라도 의식해본 사람이, 같은 사건 앞에서 한 호흡을 더 가질 수 있다는 정도의 이야기다. 그 한 호흡의 차이가 매번의 결정에서는 작아 보이지만, 수백 번의 결정이 누적되었을 때 자기 자산의 시간 곡선을 다른 모양으로 그려낸다.
그런데 한 가지를 더 짚어두고 싶다. 투자는 결국 자기 시간을 자본의 시간으로 옮겨놓는 일이다. 자기가 일해서 번 시간의 결과를, 자기가 직접 일하지 않는 시간 동안 자본이 대신 굴려주도록 맡기는 일이다. 이 단순한 정의 안에는 의외로 묵직한 함의가 있다. 투자한다는 것은 단순히 자산의 곡선을 그려가는 일이 아니라, 자기 인생의 한 시간을 다른 형태로 바꿔서 살아가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투자라는 활동은 자기 인생의 일부와 분리될 수 없고, 어떤 의미에서는 자기가 나이 들어가는 과정의 한 부분이기도 하다.
이 시야에서 보면 ‘시야의 확장’이라는 이 글의 권유가 좀 다른 무게로 들리기 시작한다. 좁은 시야로 자산을 굴리는 일은 자산만 좁게 키우는 것이 아니라, 그 일에 쓰는 자기 시간을 좁은 시간으로 보내게 한다. 넓은 시야로 자산을 굴리는 일은 자산을 넓게 키울 뿐 아니라, 그 일에 쓰는 자기 시간을 더 넓은 시간으로 살게 해준다. 같은 시간을 쓰는데 한쪽은 자기 계좌 안에 갇혀 보내고, 다른 쪽은 회계가 잡지 못하는 가치를 보고, 한 세대를 가로지르는 자본의 흐름을 의식하고, 자기 사고를 두드려줄 짝을 곁에 두며 보낸다. 같은 시간이지만 그 안에서 자라는 것이 분명히 다르다.
그래서 이 글의 마지막 한 마디는 이런 모양으로 남겨두고 싶다. 잘 보는 사람이 잘 투자한다는 말은 분명히 사실이다. 그리고 그 말의 끝에는 한 가지가 조용히 따라붙는다. 잘 보는 사람은 잘 투자할 뿐 아니라, 그 시간 위에서 조금 더 멋지게 나이 들어간다.
<멋나들 연구소> 마론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