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 반복. 그리고 반복.
기본은 '쉽다'가 아니라 '중요하다'.
늘 중요하지 않은데 어려운 것에 집중하는 것은 아닐까 고민해봐야 함...

서운
2025.12.04
[잡담] 쓰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다시 읽는 것
밸리 내에서 중요하게 부각되는 활동은 아마 '쓰기'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글쓰기의 효용은 굳이 강조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커뮤니티 내에 많이 알려져있고, 많은 뉴런 분들이 이를 인식하고 꾸준하게 써보기 위해 노력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쓰기는 정성과 꾸준함, 심지어 누군가에게는 용기도 필요하기 때문에 진입 장벽이 높은 편입니다. 반면 읽기는 시간만 낸다면 누구나 할 수 있고 누구에게나 당연히 필요한 활동으로 인식되기 때문에 굳이 중요성이 강조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밸리에서의 시간이 흘러가면서, 저는 이제 우리에게 쓰기만큼이나 읽기가 중요해짐을 느낍니다. 그냥 읽는 게 아니라, '다시 읽는 것' 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저는 30년 넘게 살면서 같은 책을 두 번 이상 반복해서 읽어본 적이 별로 없습니다. 생각나는 책들을 열거해보면 대략 열 권 남짓인 것 같습니다. 세상에 제가 아직 읽지 못한 책들은 넘쳐나고, 지금 이 순간에도 인사이트 넘치는 글과 책들이 새롭게 쏟아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시간의 기회비용 측면에서 이미 읽은 책을 다시 보는 것은 새로운 책을 읽는 것보다 효용이 적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한편, 제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복해서 읽은 열 권 정도의 책은 읽을 때마다 새로운 경험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처음엔 미처 집중해서 읽지 못했던 부분이 신선하게 다가왔고, 처음 읽었을 때의 저와 다시 읽을 때의 저 사이에 쌓인 시간과 경험의 프레임이 책과 만나서 만드는 빛의 각도가 다름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생각보다 망각의 힘은 강력하기 때문에 '똑같은 부분 읽으면 지겨울 것 같은데, 새로 배울 게 없을 것 같은데' 라는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는 점을 깨닫기도 합니다. 제 생각에 우리가 진정 해야하는 걱정은 '이렇게 인사이트 넘치고 좋은 글을 한번 읽고 휘발시켜버리면 안 읽는 것과 똑같을텐데' 입니다.
100년도 넘은 이론이지만 아직도 핵심은 유효한 것으로 인정받고 있는 심리학자 에빙 하우스(Hermann Ebbinghaus)의 '망각 이론'에 의하면, 인간은 새롭게 배운 지식의 약 50~70%를 하루 만에 잊어버린다고 합니다. 정확한 기간별 망각 % 에 대해서는 반박 이론이 많지만 지수 함수 형식으로 급격한 망각이 이뤄진다는 사실 그 자체는 지금까지 유효한 팩트로 인정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보면 좀 더 피부에 와닿습니다. 밸리에는 이제 몇 년에 걸친 많은 분석 자료, 글들이 쌓여있습니다. 아무리 투자 관련 글이 시의성이 중요하다고 해도, 과거의 글 중에서 지금도 우리에게 엄청난 인사이트를 줄 수 있는 글은 수없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한 번쯤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 글의 내용을 우리 뇌에 '아직도' 가지고 있을까요? 제목만 보면 '아 나 이 글 알아' 라고 생각하고 다시 읽지 않겠지만, 막상 한 차례 거부감을 이겨내고 다시 그 글을 읽어보면 생각보다 많은 것을 망각했던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심지어 당시에는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던 부분이 핵심으로 다가오기도 하죠.
출처: Forgetting Curve: How To Combat It In Your Corporate Training
위의 이미지에도 나와있지만 망각 이론 (Forgetting Curve)의 해결책은 간단합니다. 다시 읽고 생각해보면 됩니다. 즉 '리뷰'를 하는거죠. 좋은 글을 다시 가져와서 한번 보고 두번 보면 망각의 최대 %는 점점 줄어들게 됩니다. 결국 그렇게 글의 인사이트가 뇌에 안착하게 되죠. 떠올려보면 우린 학창 시절부터 '복습의 중요성'에 대해 귀에 딱지가 앉도록 잔소리를 들은 적이 많습니다. 저는 그날 배운 내용은 그날 저녁에 바로 복습하면 기억력을 최대화할 수 있다며 잔소리를 하던 담임 선생님들이 아직도 가끔 생각납니다.
'오늘 아재님 시황 일주에 너무 좋은 내용이 나와서 감명 깊었다, 나는 여기에 오길 잘 한 것 같다' 라고 박수를 쳤던 사람이 하루가 지나서 자신을 감동시킨 내용의 50%를 잊어버린다면 그것은 웃기면서도 서글픈 일일 겁니다. 그럼에도 자신은 그 글을 흡수해 발전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더 모순적인 것은 그 글의 제목을 다시 마주했을 때 자신이 그 내용을 기억하고 있다고 착각하며 다시 읽기를 망설이는 것이죠. 아마 그 사람은 이럴 시간에 아재님의 최근 시황 일주를 읽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밸리의 시간이 흐르고 내부 글들이 쌓여갈수록, 우린 '새로운 글 뭐 없나' 하고 스크롤만 내리기보다, 1년 전, 2년 전에는 어떤 좋은 글이 있었는지 기억을 더듬어보며 밸리의 백미러를 관찰해보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보통 투자 커뮤니티에서 의미있는 글은 두 유형으로 분류해볼 수 있습니다.
1) 시의성이 중요한 정보 제공 컨텐츠
이런 글은 단기적인 시황을 해석하거나 당시의 정보를 분석하는 것, 혹은 그 정보들을 바탕으로 미래를 예측해보는 성격을 가집니다. 즉각적으로 떠오르는 예시는 다음과 같습니다.
AI cycle: 데이터센터에 대하여
Google AI 현업자의 요즘 시황에 대한 단상 (feat. Gemini)
BofA 랠리 지속 가능성 언급... 닷컴버블의 재림이 그렇게 쉬울까?
이런 글들을 다시 정독하면서 우리는 어떤 것을 배울 수 있을까요.
첫째, 우리는 해당 글들에서 나온 예측, 혹은 독자가 예측할 수 있도록 정보를 제공해주는 파트를 다시 읽어보며 현재 시점에서 그 결과를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예측이 맞았냐 틀렸냐는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결과보다는 일어나는 과정에서의 변수들을 곱씹어보며 우리가 앞으로 할 예측에 적용해보는 과정이 중요합니다.
예컨대 Google AI 현업자의 요즘 시황에 대한 단상 (feat. Gemini) 글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두 가지가 보입니다.
1) 2년이 지난 글인데도 2년 전부터 AI hype 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킬러 제품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는 점. 즉, 이 부분의 갈증이 생각보다 오래되었고 아직도 '킬러'라는 이름을 붙일 만한 제품이 나오지 않았다는 점
14) 빠른 시일 내에 foundational model 을 사용한 킬러 제품 혹은 기능을 만드는 것이 결국 AI 에 대한 투자가 얼마나 장기적으로 정당화할 수 있는지, 그리고 AI 투자가 hype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할 길이 아닌가 싶습니다. 현재로서는 뻔한 기능들 (오피스 챗ai, 생성형 검색 답변, 더 나은 어시스턴트 기능, 등) 외에는 빅테크 안에서도 크게 아이디어가 있지는 않은 듯 합니다. (자잘한 사항들은 물론 셀 수 없이 많습니다). 하지만 결국 돈을 버는 건 플랫폼이니까요.
2) 당시에는 전력 효율에 대해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는 의견도 제기되었음
15) 생각보다 에너지 소비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는 염려가 적습니다. ML이 사용하는 전력은 크게 학습training 혹은 연산inference 중 하나로 귀결할텐데, 학습할 데이터가 무한정 많지가 않습니다. 또한 전력 효율 최적화를 위해 알려진 기법들이 꽤 많이 있습니다. Inference는 training보다 전산적인 복잡도가 낮아 훨씬 하드웨어 최적화가 쉬운 편입니다. 필요한 모델의 능력 수준에 따라 전력효율적인 더 작은 모델을 쓰는 것 역시 너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OCR 분류기가 초인간지능을 필요로 하진 않으니까요. 또한 general purpose가 아니라 구체적인 조건이 붙을수록 최적화가 쉬우니까요.
이런 점들을 보며 '그 때 저 분의 생각이 맞았네, 틀렸네' 라는 판단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것보다는 저 당시에는 최고로 합리적인 것처럼 보였던 생각이 지금까지 흘러오며 어떻게 변할 수 있는지,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부터 해 나갈 사고와 예측에는 어떤 변수가 발생할 수 있는지 등을 스스로 생각해보는 과정 자체가 중요합니다.
둘째, 글을 처음 읽었을 때보다 더 성장한 실력으로 다시 읽을 때 얻는 색다른 효용을 느낄 수 있습니다. 밸리 내의 글들은 뛰어난 통찰력과 우수한 정보를 담고 있는 경우가 많지만, 그 글을 소비하는 독자의 실력과 각자의 환경이 모두 다르다는 이유로 제대로 활용되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저도 펠로우 2기로 처음 밸리에 들어왔을 때는 특히 매크로 관련 분석 아티클은 겨우 겉핧기 이해만 하고 넘어간 글이 많은데요. 아마 지금까지 꾸준하게 활동을 한 뉴런분들은 1~2년 전의 우수한 글들을 다시 읽으면 내용이 확연하게 눈에 잘 들어오는 걸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그 글은 처음 읽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말 그대로 '안 본 눈'이 된 것이죠. 저는 요즘 이 효용을 느끼는 바람에 제 책갈피를 열심히 뒤지며 예전의 좋은 글들을 읽고 있습니다.
2) 시의성에 상관없는 보편적인 내용
이 유형은 제가 주로 다루는 '투자 심리' 관련한 내용이나, 그 외 밸리의 많은 분들이 제공하는 '정보 제공' 성격의 글이 해당합니다. 떠오르는 예시는 다음과 같습니다.
애널리스트 보고서 100% 활용하기 (+가치투자 리서치 출발점 찾기)
신경과학적 베이스로 살펴본 습관성 투기와 그에 대한 아주 간단한 대처방법
저는 이런 글들은 '오~ 맞는 말이지. 너무 좋은 글이다' 라는 감상 정도로 한 번만 읽히면 안되는 유형의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감히 장담까지는 못하겠지만 을오징어님의 습관성 투기에 대한 글을 읽고 지금도 여기서 제시된 내용을 기억하며 곱씹고 계신 분은 거의 없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전 이번에 이 글을 처음 봤습니다..)
우리가 더 나은 사람 및 좋은 투자자가 되기 위해서는 이런 글들을 단순히 읽고 느끼는 데에서 끝나지 않고 '체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체화를 위한 기본 조건은 반복입니다. 물론 단순 반복보다는 깊게 생각하고 요약하고 설명도 해보는 그런 과정이 더 중요하지만, 우리에게 그럴 시간까지는 주어지지 않았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저는 반복 읽기 정도라도 해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생각보다 얻는 것이 많습니다.
마무리하며
제가 이 글을 쓰게 된 계기는 제 블로그에 쌓인 300개 가량의 글에 대한 생각에서 시작했습니다. 저는 가끔 제가 쓴 글을 다시 읽어보려고 하는데, 어떤 때에는 '이걸 내가 썼다고?'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주 새롭게 다가오는 글들이 있어서 스스로 놀라고 민망해합니다. 제가 고민해서 작성한 글조차도 이 정도로 낯설게 느껴지는 걸보면, 아마 제가 여태 읽은 밸리 안의 많은 글들의 좋은 내용들이 그날 제 뇌에 들어왔다가 다음 날 쥐도새도 모르게 사라지지는 않았을까 하는 걱정이 생깁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늘 고민하는 쓰기만큼이나 다시 읽기가 중요해지는 요즘입니다.
앞을 보고 달려가며 '좋은 글 있으면 열심히 읽어야지' 라는 생각을 하는 것도 좋지만, 때로는 '전에 무슨 글이 좋았지?' 라는 생각도 같이 하며 수건을 꺼내 백미러를 한번 닦아보는 것은, 언뜻보면 후진인 것 같지만 알고보면 우리가 더 나은 투자자가 되는 데에 무엇보다 유익한 활동일지도 모릅니다.
아마 다시 읽기는 밸리의 시간이 쌓여갈수록 더욱 중요해질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