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좋은 글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노팬티
2026.03.14
AI에 대한 사내 공지를 보고 든 생각
얼마 전 회사 전체 채널에 공지사항이 하나 올라왔습니다.
이메일, 리포트, 내부 문서 등.. 다양한 곳에서 AI를 활용한 산출물들이 자주 눈에 띕니다.
업무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AI 툴을 사용하는 것은 적극 권장합니다. 하지만 꼭 스스로 검수하세요.
AI 특유의 기계적인 문장 구조나 프로젝트 맥락에 전혀 맞지 않는 단어 선택 등은
실제로 여러분이 들인 노력과 성과와 무관하게 전문성을 훼손하고, 성의마저 의심하게 됩니다.
AI는 더 효율적으로 일하기 위해서, 혹시 놓친 부분을 채우기 위해서 등등 '더 나은 나'를 위해 사용하세요.
검수 없는 AI 사용은, 여러분이 아닌 AI의 가치를 증명하게 되니 스스로 대체되지 않도록 유의하시길 바랍니다.
공지사항의 의도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말을 하려는 건 아닙니다.
검수 없이 AI가 뱉은 결과물을 그대로 붙여넣는 건 분명 문제이고, 저 역시 그런 결과물을 볼 때마다 꽤나 거슬리곤 하니까요.
하지만 이 글을 읽으면서 자꾸 다른 지점이 신경 쓰였습니다.
공지사항의 표면적 내용보다, 이 공지가 전제하고 있는 '생각의 틀'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고 해야 할까요. 이 공지를 올린 분은 — 그리고 아마 지금 이 시각에도 비슷한 공지를 올리고 있을 수많은 조직의 리더들은 — AI가 우리 일에 던지는 질문의 본질을 제대로 짚고 있는 걸까요? 솔직히 말해 저는 그렇지 않다고 느꼈고, 그 불편함의 정체를 풀어보려 합니다.
1. “AI 사용을 유의합시다”라는 말의 해상도
평소에 사람들이 어떤 개념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들으면서 자주 느끼는 게 하나 있습니다. 생각보다 엄밀하게 쪼개서 구분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뭉뚱그려 이해하고, 그걸 언어로 표현하면서 뭉개진 관념이 그대로 고착화됩니다. “일할 때 AI 사용을 유의합시다”라는 문장이 제겐 딱 그런 사례로 보였습니다.
얼핏 보면 별 문제 없는 말 같습니다. 하지만 ‘일’이라는 단어 하나가 축약하고 있는 방대한 워크플로우를 펼쳐보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제가 몸담고 있는 마케팅의 워크플로우를 기준으로 살펴보겠습니다. 프로젝트 하나가 돌아가려면 대략 이런 단계들이 존재합니다. (심지어 이 순서대로 진행되는 것도 아니고 전부 뒤섞여 있습니다.)
판단의 영역: 전략 방향 설정, 타겟 설정, 핵심 메시지 결정
아이데이션의 영역: 컨셉 발상, 크리에이티브 앵글 탐색
정보 수집: 시장 조사, 경쟁사 분석, 소비자 인사이트 리서치
구조화와 분석: 수집된 정보의 정리, 패턴 파악, 의미 부여
재구성: 분석 결과를 전략적 프레임으로 재배치
커뮤니케이션: 내부 보고, 클라이언트 프레젠테이션, 팀 간 협업, 아웃소싱 매니지먼트
크리에이티브 구현: 시안 제작, 카피라이팅, 영상 편집, 디자인 작업
이 단계들 각각에서 AI가 할 수 있는 일의 성격과 효용은 전혀 다릅니다.
예를 들어 정보를 수집하고 구조화하는 단계에서 AI는 압도적입니다.
사람이 3시간 걸릴 리서치를 15분에 끝낼 수 있습니다. 경쟁사 10곳의 최근 캠페인을 비교 분석한다고 해보죠. 각 브랜드의 채널을 돌아다니며 핵심 메시지, 톤앤매너, 타겟 오디언스를 정리하는 건 중요하지만 지극히 반복적인 작업입니다. 사람이 이 기초 작업을 직접 하는 것과, AI에게 초벌을 맡긴 뒤 자신은 '해석과 의미 부여'에 집중하는 건 결과물의 차원이 다릅니다. 100페이지짜리 소비자 조사 리포트를 읽고 핵심 인사이트를 추출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AI가 1차 요약을 해주면, 저는 “이 데이터에서 우리 브랜드에 유의미한 시사점이 뭔지”를 판단하는 데 시간을 쓸 수 있습니다. 이런 영역에서 AI를 적극 활용하는 건 게으름이 아니라 '실행력'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시장은 빠른 실행력을 요구하고, 그 요구에 부응하려면 병목을 극복해야 합니다.
반면 전략적 판단, 컨셉의 방향성, 메시지의 결을 잡는 영역은 성격이 다릅니다.
LLM에게 “Z세대 타겟 스킨케어 브랜드의 SNS 전략을 짜줘”라고 하면 꽤 그럴듯한 답이 나옵니다. 트렌드 키워드도 맞고, 채널별 전략도 논리적이죠.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일반론'입니다. 이 브랜드가 지난 2년간 구축해 온 포지셔닝, 경쟁사 대비 실제로 먹히고 있는 차별점, 최근 소비자 피드백에서 감지되는 미묘한 온도 변화가 뭔지 — 이 맥락 위에서 “그래서 우리는 이쪽으로 가야 한다”고 결정하는 건 여전히 사람의 몫입니다.
그러면 공지사항에서 지적되었던 ‘AI 특유의 어색함’은 주로 어디서 발생할까요? 제 경험상 가장 많이 튀어나오는 지점은 최종 커뮤니케이션 단계입니다. 클라이언트에게 보내는 메일, 기획서의 카피라이팅, 리포트의 서술 — 이런 곳에서 AI가 생성한 텍스트가 필터링 없이 그대로 나가는 경우를 근래 많이 목격합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리서치와 데이터 구조화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보이지 않는 노동'인 반면, 메일 한 통, 기획서 한 장은 누군가의 눈앞에 직접 놓이는 '보이는 결과물'이죠. 바로 이 마지막 단계는 최종 아웃풋이 '글'의 형태를 띠기 때문에, “AI가 써줬으면 좋겠다”는 유혹이 가장 강하고, 동시에 그 엉성한 결과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AI를 가장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는 중간 단계(리서치, 데이터 구조화, 초안의 뼈대 잡기)에서 이를 체계적으로 쓰는 사람은 의외로 드뭅니다. (솔직히 저는 거의 못 봤습니다.)
구조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실무자들은 최종 아웃풋 단계에서 무분별하게 AI를 남용하고, 리더들은 그 어색함만 감지한 채 그저 “유의하라”고 뭉뚱그려 경고합니다. 정작 AI가 필요한 중간 단계의 활용법이나, 정말 경계해야 할 판단 영역에서의 의존 위험성은 짚어내지 못합니다. 양쪽 모두 '일'이라는 워크플로우를 쪼개서 보고 있지 않은 건 마찬가지라는 생각입니다.
저는 현명한 실무자라면 자기 일의 워크플로우를 먼저 쪼개야 한다고 주장합니다.(근데 혼자 속으로 주장함..;;) 어느 단계에서 AI가 나보다 빠르고 정확한지, 어느 단계에서 내 판단이 핵심인지를 구분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래야 공지사항에 나오는 "더 나은 나"가 공허한 구호가 아닌 실제가 됩니다. 리더 역시 단순히 “검수하라”가 아니라 “어느 단계에서 어떻게 레버리지하고, 어느 단계에서는 반드시 너의 판단을 거쳐라”는 뾰족한 가이드를 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해상도가 낮은 이해’는 비단 AI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도 듭니다. 제가 일하는 업계에는 AI 이전부터 존재해온, 훨씬 더 뿌리 깊은 해상도의 문제가 있습니다.
2. 크리에이티브 업계의 오래된 딜레마
저는 이것이 실무자 개인의 역량 문제라기보다, 업계가 가진 구조적 한계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에이전시 비즈니스는 태생적으로 ‘보여주는 것’에 최적화되어 있습니다. 클라이언트에게 피칭할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비주얼입니다. 시안의 완성도, 무드보드의 감도, 레퍼런스의 트렌디함 — 이런 것들이 의사결정자의 첫인상을 크게 좌우합니다. 한정된 시간 안에 임팩트를 만들어내야 하는 구조에서, 시각적으로 강한 것에 무게중심을 두는 건 어찌 보면 매우 합리적인 선택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합리적 선택이 오래 반복되며 일종의 덫이 된 것 같습니다.
업계 전체가 예쁜 것, 있어 보이는 것, 감각적인 것을 중심으로 돌아가다 보니, 어느 순간 그 껍데기가 마케팅의 전부인 것처럼 착각하게 됩니다.
신입 마케터는 선배의 결과물을 보며 “이 정도 비주얼을 만들 수 있어야 한다”고 배우고, 클라이언트는 경쟁 PT에서 가장 비주얼이 강한 시안에 끌리며, 에이전시는 그 반응에 맞춰 더 자극적인 비주얼을 만듭니다. 이것들이 ‘전략’과 ‘내용’을 대체하는 위치까지 올라오면, 마케팅은 본래의 기능에서 멀어집니다.
스티브 잡스가 1997년 애플에 복귀한 직후 한 유명한 Speech가 있습니다. (영상 링크)
파산 직전에 제품 라인업을 70%나 줄이는 뼈아픈 구조조정 한복판에서, 잡스는 마케팅의 본질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잡스는 이 자리에서 나이키를 역사상 가장 위대한 마케팅 사례로 꼽았습니다. 나이키는 신발이라는 일용품을 팔지만, 그들의 광고에는 에어솔이 리복보다 왜 좋은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습니다. 대신 위대한 운동선수를 기리고, 위대한 스포츠 정신을 이야기합니다.
잡스가 말하고 싶었던 요점은 “감성 마케팅이 좋다”가 아니었습니다. 시끄러운 세상에서 소비자가 기억할 수 있는 건 아주 적으니, 그 좁은 틈에 무엇을 남길 것인지 명확히 골라내야 한다는 본질적 통찰이었습니다. 그 철학이 ‘Think Different’ 캠페인이 되었고, 상징적인 브랜드 부활의 시작점이 되었습니다.
잡스가 30년 전에 짚었던 이 지점은 지금 시대에 더욱 절실합니다. 누군가에게 인생 영화를 한 편 꼽아보라고 할 때, 영상미가 가장 훌륭했던 영화를 고르는 사람은 극소수입니다. 10년이 지나도 가슴에 남는 건 결국 스토리입니다. 마블 시리즈를 떠올려보세요. 가장 먼저 생각나는 건 <아이언맨 1>이나 <엔드게임>같은 작품들 아닌가요? 그것이 압도적인 영상미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서사가 주는 감동 때문이었을까요? 장면의 아름다움은 좋은 스토리가 뼈대를 잡고 있을 때 비로소 의미를 갖습니다. 이 순서가 뒤바뀌면 그건 그저 예쁜 껍데기일 뿐입니다.
마케팅도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소비자의 마음에 남는 건 세련된 비주얼이 아니라 내 삶에 와닿는 이야기입니다. 비주얼은 좋은 이야기를 담아내는 그릇이지, 그 자체가 이야기일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에이전시 업계는 단기적인 시각적 임팩트가 의사결정을 좌우한다는 이유로, 그릇의 화려함이 내용물보다 앞서는 습관을 업계 전반에 스며들게 했습니다.
그리고 참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이 지점에서 AI가 다시 등장합니다. 이 업계가 가장 자신 있어 하고, 막대한 자본을 투입해 온 그 영역이야말로 AI가 가장 파괴적인 속도로 침투하고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3. AI가 가장 먼저 따라잡는 건 껍데기입니다
AI 영상 모델들의 발전 과정을 가만히 살펴보면 재밌는 패턴이 보입니다.
초창기 AI 영상은 말 그대로 사진을 이어붙인 수준이었습니다. 그 다음 단계에서는 움직임은 생겼지만 표정이나 물리법칙이 어딘가 이상한 수준으로 발전했습니다. 손가락 개수가 맞지 않고, 중력이 이상하고, 걷는 모습이 미묘하게 삐걱거렸죠. 하지만 지금은 비약적으로 자연스러워지고 있습니다. 불과 1~2년 사이의 변화입니다.
이 궤적은 실제 영화사의 발전 경로를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습니다. 사진에서 무성영화로, 무성영화에서 토키영화로, 흑백에서 컬러로, 미니어쳐에서 CG로, 필름에서 디지털로. 기술이 진보할 때마다 표현의 한계가 걷히고 거부감이 사라졌습니다.
물론 지금도 “아직 불쾌한 골짜기가 있다”, “디테일이 떨어진다” 이런 반응들이 많죠. 하지만 그 실체를 냉정히 따져보면, 대다수는 본질적인 한계가 아닌 데이터 처리 속도와 규모, 모델의 정교함 등 기술적 한계에서 비롯된 것들입니다. 그리고 이는 모두 업데이트를 통해 빠르게 해결되는 영역입니다.
우리는 이미 비슷한 과정을 겪었습니다. 상업 영화에 3D 그래픽이 처음 등장했을 때 사람들은 위화감을 느꼈습니다. 캐릭터의 피부가 플라스틱 같고 움직임이 기계적이라고 했죠. 초기 CG 캐릭터를 보면서 “저건 절대 실사 촬영을 대체 못 한다”고 단언하던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요? CG가 들어가지 않은 블록버스터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고, 관객은 어디까지가 실사이고 어디부터가 렌더링인지 구분조차 하지 못합니다. 그 사이에 바뀐 건 인간의 감수성이 아니라, 오직 기술의 완성도였을 뿐입니다. 지금 AI 영상이 마주한 거부감 역시 같은 맥락의 과도기적 현상일 뿐이라는 생각입니다.
이 사실이 시사하는 바는 명확합니다.
감각적인 결과물을 빠르게 구현하고 비주얼을 예쁘게 뽑아내는 능력 — 업계가 핵심 가치로 여겨왔던 이 영역이야말로 AI가 가장 빠르게 따라잡고 있는 영역이라는 뜻입니다.
지난 번 작성했던 Adobe 분석과도 맥이 닿아 있습니다. Adobe의 펀더멘털이 흔들리는 근본적 이유 중 하나는, 크리에이티브 ‘도구’의 가치가 해체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Photoshop이 20여 년간 쌓아온 기능적 해자를, 생성형 AI 모델들이 불과 몇 년 만에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린 현상은 도구 숙련도의 가치가 근본적으로 재평가 받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같은 논리를 사람에게도 대입할 수 있습니다. 만약 누군가의 핵심 역량이 ‘예쁘게 포장하고 시각화하는 것’에만 머물러 있다면, AI가 그 구현 능력을 대중화시켜버리는 순간, 오랜 시간 갈고닦은 실력 역시 희소가치를 잃게 됩니다. 예전에는 전문 디자이너와 프로덕션만 만들 수 있던 퀄리티의 에셋을, 이제는 기획자와 마케터 심지어 클라이언트가 직접 뽑아낼 수 있는 시대가 되고 있습니다. 당장 내일 모든 것이 뒤집히진 않겠지만, 변화의 방향성만큼은 너무도 분명해 보입니다.
4. 도구는 바뀌어도 이야기꾼은 남습니다
그러면 결국 무엇이 남을까요?
제가 감히 확정적으로 예단할 수는 없지만, 업계에서 관찰해 온 것들을 바탕으로 조심스럽게 얘기해보겠습니다.
제 생각에 오래 살아남을 가능성이 높은 건, 결국 본질적인 ‘내용’을 만들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마케팅의 맥락에서 ‘내용’이란, 단지 카피를 유려하게 쓰거나 세련된 슬로건을 뽑아내는 스킬이 아닙니다. 현상의 이면에서 진짜 ‘문제(Problem)’를 정의하는 능력입니다. 브랜드의 현재 위치를 진단하고, 소비자의 마음을 움직일 트리거가 무엇인지 찾아내며, 왜 하필 지금 이 메시지를 던져야 하는지를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전략적 사고입니다.
이 능력은 데이터를 긁어모은다고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시대적 맥락에 대한 이해, 축적된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직관, 남들이 보지 못하는 한 끗 다른 각도를 찾아내는 창의적 판단이 결합되어야 합니다. AI가 수만 개의 데이터를 순식간에 구조화해 주더라도, “그래서 우리가 왜 이 이야기를 해야만 하는가”라는 존재의 당위성을 부여하는 건 오롯이 사람의 영역에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이 능력의 토대는 자기 일에 대한 깊은 이해입니다. 개념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프로세스가 왜 그런 순서로 돌아가는지, 전체 밸류체인에서 내 역할의 의미를 입체적으로 꿰뚫는 사람이어야 AI를 ‘도구’로 쓸 수 있습니다. 반대로 자기 일의 원리를 피상적으로만 이해하는 사람은 AI에게 무엇을 시켜야 할지도, AI가 뱉은 결과가 맞는지 틀리는지도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이런 방향 설정 없이, AI에게 판단까지 통째로 외주 주려는 태도는 대단히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나침반 없이 노 젓는 기계만 풀가동하면, 겉보기엔 그럴싸하게 파도를 가르지만 정작 어디로 가는지 아무도 모르는 결과물이 탄생할 뿐입니다. 공지사항에서 꼬집었던 ‘맥락 없는 텍스트’ 역시, 애초에 '무엇을 말하려는지' 의도와 전략이 텅 비어 있는 상태에서 generate 버튼만 눌렀기 때문에 발생하는 촌극인 것이죠.
여기서 누군가 해주셨던 하나의 비유를 떠올려 봅니다.
인류는 처음에 돌벽에 그림을 새겼습니다. 시간이 흘러 누군가 먹을 갈아주면 붓에 묻혀 글을 썼고, 만년필을 발명했고, 금속활자로 대량 인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타자기를 거쳐 키보드를 두드렸고, 이제는 화면 너머의 AI에게 말을 걸어 글과 이미지를 쏟아내고 있습니다.
시대가 변할 때마다 도구는 매번 바뀌었습니다. 돌을 깎던 사람, 먹을 갈던 사람, 활자를 조판하던 사람, 타자기를 수리하던 사람 — 안타깝게도 도구에 묶여 있던 사람들은 도구와 함께 역할이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이야기꾼’은 그대로였습니다.
무엇을 말할 것인가를 아는 사람. 왜 이 이야기가 지금 시대에 필요한지를 아는 사람. 듣는 이의 마음에 무엇이 남을지를 헤아리는 사람은 도구가 돌멩이에서 AI로 바뀌는 수천 년 동안에도 계속 필요한 존재였습니다. 도구는 단지 기획을 바깥으로 끄집어내는 매개체이자 효율의 수단이었을 뿐, 이야기 자체의 뼈대와 본질을 발명해 주지는 못했으니까요.
마케팅의 이야기꾼이란 결국, 얽혀있는 비즈니스의 문제를 날카롭게 정의하고, 브랜드의 본질에 맞닿은 해법을 설계하고, 고객의 뇌리에 꽂히는 메시지를 구성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전략가(Planner)든, 기획자(AE)든, 크리에이티브 디렉터(CD)든 직함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건 ‘이 브랜드는 왜 존재하고, 지금 무슨 말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확고한 답을 쥐고 있느냐입니다. 그 답을 쥔 사람은 손에 들린 도구가 붓이든 키보드든 AI든 상관없이 자신만의 이야기를 세상에 내놓을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처음의 공지사항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검수 없는 AI 사용은, 여러분이 아닌 AI의 가치를 증명하게 됩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다만, 지금까지의 생각들을 정리해 본다면 조금 더 본질에 닿아있는 문장으로 고쳐 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AI의 가치만 남고 내 가치가 사라지는 건, 단순히 텍스트 검수를 게을리해서가 아닙니다. 그 이전에 ‘내 손으로 무엇을 만들어내야 하는지, 그 목적과 전략을 스스로 잃어버렸기 때문’에 가까울 것입니다. 시스템의 부품으로 전락(Replace)되지 않으려면, 튀어나온 결과물의 실수를 잡아내는 수동적인 태도를 넘어, 애초에 세상에 내놓을 만한 가치가 있는 내용을 스스로 빚어낼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서 저는 지금 정말 필요한 화두가 “AI 사용을 주의합시다” 같은 1차원적인 경고가 아니라, 자기 일의 해상도를 높이는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워크플로우를 잘게 쪼개어 해부하는 것. 껍데기와 핵심을 분리하는 것. 내가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영역과, 도구에게 기꺼이 레버리지를 맡길 영역의 경계를 냉정하게 직시하는 것. 그리고 그 자기 객관화를 바탕으로, 내가 진짜 집중해야 할 기획과 전략의 영역에서 깊이를 축적해 나가는 것.
물론 이 글은 제가 몸담은 마케팅에 국한된 이야기입니다. 다른 산업의 복잡다단한 지형도에 대해 함부로 가타부타할 생각도 없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매일 뛰어드는 비즈니스의 밑그림을 높은 해상도로 꿰뚫어 볼 수 있는 사람이라면, 시대의 도구가 어떤 낯선 형태로 모습을 바꾸더라도 자신만의 대체 불가능한 자리를 묵묵히 지켜낼 수 있지 않을까 조심스레 생각해 봅니다.
적어도 저에게는, 그것이 다가오는 거대한 변화 속에서 제 스스로를 Replace 시키지 않기 위해 매일 실천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이고도 안전한 해답처럼 느껴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