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lo님 글 정말 잘 읽었습니다!
예전에는 철학과 인문학에 한 때 빠져 살았던 적이 있었지만 최근에는 거의 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글을 읽고 오랜만에 다시 인문학의 책을 읽어보자 마음 먹게 되었습니다.
반항의 의미인revolte의 어원을 살펴보면 volvere 구르다, 돌다의 의미가 있는데 평생 바위를 위로 올려야 하는 형벌을 받은 시지프가 결국 그 바위를 "굴려 올리는" 것은 결국 비극적인 운명을 수용하면서도 굴복하지 않는 반항의 의미가 있네요. ( 소름돋았습니다... 이것도 카뮈의 숨은 장치?) 카뮈가 말하는 부조리란 인간과 그 인간의 외침에 무관심한 거대한 우주 사이의 어긋난 상태를 의미할까요? 우주가 나에게 어떤 답도 주지 않으니 "무엇을 할까?"라는 질문의 답은 무한대이고 그렇기에 우리는 비로소 자유를 얻는 것 같습니다.

tolo
2026.03.02
[시리즈 연재] 9. 무의미한 삶과 자살 (알베르 카뮈)
(Édouard Manet - 자살)
최근에 프랑수아즈 사강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를 읽으며 깊은 생각에 빠졌다. 이 책은 단순한 로맨스 소설로 읽힐 수도 있지만, 동시에 'survive(생존하다)'와 'live(살아가다)'의 차이를 성찰하게 하는 작품이기도 하다는 생각이다.
개인적으로 한국어 번역이 이 단어들의 미묘한 차이를 온전히 담아내지 못한다고 느껴서, 영어 어원에 집중해 보면 그 차이가 더 선명해질지도 모르겠다.
'survive'는 라틴어 'supervivere'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원을 쪼개 보면 'super-(넘어서)'와 'vivere(살다)'가 합쳐진 형태이니, '죽음의 고비를 넘기다' 정도로 이해하면 어떨까? 실제로 <쇼미더머니> 같은 경쟁 프로그램이 'survival program'이지 'live program'이라 불리지 않으니 맞는 말일 것이다.
'live'의 기원은 더 복잡한데, 인도유럽조어의 뿌리인 'leip'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흥미롭게도 이 어근은 '살다'라는 뜻 이전에 '남겨지다'라는 의미를 품고 있었다. 제미나이에게 직관적인 설명을 요청해 보니, 'live'와 'leave(남기다)'가 어원적으로 한 뿌리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지점에서 'survive'와 'live'의 차이는 분명해진다. 'survive'가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무언가를 하길 요구하는 역동적인 '동사'라면, 'live'는 존재 그 자체로 머무르는 '형용사'적 상태에 가깝다는 점이다.
내가 이 미묘한 차이를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는 이것이 현대인들에게 던지는 본질적인 질문이기 때문이다. 이 질문은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에서 남자 주인공인 시몽이 여자 주인공 폴을 묘사하는 대목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그리고 당신, 저는 당신을 인간으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발합니다. 사랑을 스쳐 지나가게 한 죄, 행복해야 할 의무를 소홀히 한 죄, 핑계와 편법과 체념으로 살아온 죄로 당신이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에게는 사형을 선고해야 마땅하지만, 그 대신 고독 형을 선고합니다.
시몽이 보기에 폴은 고독한 사람이다. 왜? 인간으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의무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사랑을 스쳐 지나가게 한 죄', '행복해야 할 의무를 소홀히 한 죄', '핑계와 편법과 체념으로 살아온 죄'다.
이 책은 1959년 프랑스에서 쓰인 작품이지만 2026년 한국을 정확하게 관통한다. 자주 언급되듯이 현대인들은 고독하다. 사강의 말에 따르면, 우리는 사랑을 지나치고 행복을 소홀히 했기에 고독이라는 벌을 받은 것이다. 오늘날의 현대인들은 사랑과 행복 대신 핑계와 편법, 그리고 체념을 선택하며 살아간다.
"대학교만 가면", "취직만 하면", "집만 사면", "결혼만 하면", "아이만 낳으면" 같은 핑계와 체념이 우리의 행복과 사랑을 자꾸만 뒤로 미루게 만든다. 말하자면 우리의 삶은 'survive' 하며 나이에 맞는 허들을 뛰어넘는 과정일 뿐, 제자리에 머물러 자신을 대면하는 'live'는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 이런 이야기는 새로운 논제라기보다 오히려 흔하다. 너무 자주 들어서 이제는 짜증스럽게 느껴질 정도다. 아마 여러분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 짜증의 출처는 다양하겠지만, 우선 한국에서 'survive' 하는 것 자체가 결코 쉽지 않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한국은 출산율은 가장 낮고 자살률은 가장 높은 나라다. 한국을 지옥에 비유하며 '헬조선'이라 부르는 것이 결코 과장이 아닌 이유다.
이런 나라에서 겨우 입에 풀칠하며 살아가고 있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여기저기서 이렇게 말한다. "회사에서 노예처럼 썩지 말고 밖으로 나와 자아를 탐구하라! 진정한 삶을 살아라!"라고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은 막상 가장 중요한 핵심은 회피하거나 미루고 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저 질문이 빗겨나가고 있는 핵심, 즉 "진정한 삶" 을 살라고 주문 했다면 적어도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려줘야하는 책임 그리고 그보다 선행되어야 할 통찰인 '과연 삶은 정말로 가치 있는 것인가'라는 질문이다.
나이브하게 줄이면 '왜 사느냐?'라는 짧은 질문이 되겠는데, 이 질문은 생존의 트랙을 성공적으로 질주하고 있는 이들조차 한 번씩 걸려 넘어지게 만들지만 답을 찾기는 쉽지 않다. 현대 사회에서는 더욱 그러한데, 신형철 평론가의 말을 빌리면 다음과 같다.
효율을 추구하는 사회에서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것은 효율을 위한 노하우(know-how)이지 의미에 관여하는 '노와이(know-why)가 아니다. 인문학이 필요한 이유는 바로 이 대목에서 장렬히 실패하기 위해서다. 자기계발서가 '노하우'를 알려줄때 인문학 서적은 '노와이'를 알려주지 못한다. 인문학은 질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질문에는 원래 답이 없다.
신형철 평론가의 말을 빌리면, "왜 사느냐?"와 같은 실존적인 질문들은 인문학의 영역이 맞다. 하지만 인문학이 그에 대한 명쾌한 답변을 내놓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인문학은 답변으로서 장렬히 실패한다. 인문학의 본질은 답변이 아니라 질문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알쏭달쏭하지만 무슨 뜻인지는 알 것 같다. 사람마다 살아가는 삶의 모습이 모두 다르고 저마다 품은 의미와 가치 또한 다르기에, 철학의 도움을 받아 질문을 던지고 힌트를 얻을 수는 있겠지만, 결국 그에 대한 최종적인 답변은 스스로 내려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런데 이런 고민도 든다. 가령 누군가 삶을 사는 이유가 '가족' 때문이라고 말한다면 나는 충분히 수긍할 것이다. 그런데 만약 그 가족이 불운한 사고로 모두 목숨을 잃는다면, 그 사람에게는 '삶의 이유'가 통째로 사라진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삶의 의미가 없는 이 사람은 이제 죽어야 하는 걸까?
알베르 카뮈 이야기
이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거듭한 사람이 한 명 있다. 바로 프랑스의 작가 알베르 카뮈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소설 <이방인>이 한국에서도 베스트셀러 고전으로 자리 잡았기에 그가 익숙한 사람은 많을 것이다. 하지만 매우 흥미로우면서도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책이 하나 있다. 바로 오늘 이야기하고 싶은 <시지프 신화>다.
시지프 신화는 이렇게 시작한다.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이는 맞는 말이다. 자살은 철학적으로 진지한 문제일 뿐 아니라 가장 '선행해서' 던져야 하는 질문이다. 니체가 말하길 철학자가 존경받으려면 마땅히 자신의 주장을 실천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삶을 의미로 바라보면 둘 중 하나다. 의미가 있거나, 의미가 없거나. 의미가 있다면 이에 대한 증명을 우선으로 해야 할 것이고, 의미가 없다면 니체의 말에 따라서 의미 없는 삶을 처분하고 자살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 카뮈의 말처럼 삶에 의미가 있느냐 없느냐는 매우 중요한 질문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카뮈는 하이데거의 철학을 인용하며 삶이 무의미하다고 보았다. 우선 하이데거 이야기를 짧게 해보자. 하이데거는 우리의 삶이 '지시 연관(Verweisungszusammenhang)'의 그물망에 던져져 있는 것이라고 보았다. 지시 연관은 쉽게 생각하면 '습관' 같은 것이라고 이해하면 좋다.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것은 습관이다.
우리는 아침에 일어난다. 왜? 씻기 위해서다. 그럼 왜 씻을까? 옷을 입기 위해서다. 옷은 왜 입을까? 회사에 출근하기 위해서다. 회사 출근은 왜 하는가? 누구나 그렇듯 돈을 벌기 위해서다. 돈은 왜 벌까? 내가 먹고살기 위해서다.
하이데거는 우리 삶에 있는 이런 행위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궁극적으로 '나(현존재)'라는 존재로 이어진다고 보았다. 그러니까 우리의 삶은 사실 내가 살아있기에 의미를 가지는데, 사람은 모두 죽는다. 앞서 말했듯 아무리 잘 살고 있어도 사람에게 죽음은 필연적인 것이라 우리는 한 번쯤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그러고서 이렇게 자문한다.
'내가 이걸 왜 하고 있지? 어차피 죽는데?'
하이데거의 개념을 빌려오면 이는 지시 연관의 그물망인 움벨트(Umwelt, 주변세계)가 무너지는 순간이다. 매일 자연스럽게 하던 일들이 부자연스러워지고 삶을 움직이던 '습관'이 무너진다.
이 습관이 무너질 때 우리는 본래적 삶을 회복한다. 한번 상상해 보자. 어린 시절부터 매일같이 배에서 노를 젓던 노예가 노예제 폐지로 노 젓기를 멈추고 배 밖으로 나왔을 때, 그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해답을 바로 내놓지 못할 것이다. 끝도 없는 자유 앞에서 간단한 질문 하나를 던졌을 것이다. "이제 뭐 하고 살지?"라고.
움벨트(주변세계)가 무너지자 '질문'이 시작된다. 질문에 대한 답이 본래적 삶이 아니라, 이 질문 자체야말로 본래적 삶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신형철 평론가가 인문학을 질문이라고 말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러니까 앞에서 이야기했던 '진정한 삶(live)'을 시작하려면 역설적으로 두 가지를 인정해야 한다. 첫 번째,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는 것. 두 번째, 그렇기 때문에 이 모든 일은 의미가 없다는 것.
이를 인정하면 비로소 질문이 시작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죽어야 하는가?" 카뮈가 <시지프 신화>에서 끝까지 붙들고 늘어지는 질문은 바로 이것이다. 우선 삶이 의미가 없는 것은 알겠는데, 그렇다면 자살 말고는 선택지가 없는가?
결론부터 말하면 카뮈는 자살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나는 부조리에서 세 가지 귀결을 이끌어 낸다. 그것은 바로 나의 반항, 나의 자유 그리고 나의 열정이다. 오직 의식의 활동을 통해 나는 죽음으로의 초대였던 것을 삶의 법칙으로 바꾸어 놓는다. 그래서 나는 자살을 거부한다. ㅡ 알베르 카뮈 ,<시지프 신화>
우리는 앞으로 여러 가지 논의를 통해 카뮈에게 '삶이 무의미해도 자살을 하지 않는 이유'를 들어볼 수 있을 것이다. 일단 이번 주는 아니다. 다음 주에... To be continued...
Reference
Édouard Manet - <자살>
프랑수아즈 사강 -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신형철 -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하이데거 - <존재와 시간>
알베르 카뮈 - <시지프 신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