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식시장이란 결국 절대적인 '정답'이나 영원한 '가치'가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기업의 본질'과 '사람들의 욕망'이라는 무수한 조건들이 서로 맞물려 매 순간의 가격을 만들어낼 뿐이다. 결국 투자는 고정된 이데아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하는 거대한 조건의 흐름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결국 정신치료의 개념인 "기꺼이 수용하기"와 닮아있다.

마론백
2025.12.12
주식이라는 허깨비와 춤추기
얼마 전, 아내의 사촌 동생이 집에 놀러와 긴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동생은 명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회계사 시험을 준비하다가 최근 처우가 좋은 금융기관에 취업했다는 반가운 소식을 알렸다. 가족 모두가 축하하는 분위기 속에서 나 역시 기쁜 마음으로 저녁을 샀다. 그리고 개인 자산 관리에 관심이 많은 나는 사회초년생이 된 동생에게 자연스레 조언을 건넸다.
"이제 취직도 했으니 연금 계좌도 만들고, 우량한 주식도 조금씩 모아가야지?"
그런데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동생은 고개를 저으며 주식 투자는 하지 않겠다고 했다. 대학 시절, 호기심에 투자를 시작했다가 팬데믹 시국의 폭락장을 겪은 뒤, 시장에 대한 깊은 공포가 생겼다는 것이다. 언제 반토막이 날지 모르는 자산에 힘들게 번 돈을 넣는 것이 망설여진다고 했다.
나는 잠시 의아했다. 동생은 회계와 재무관리는 물론, 거시경제 지식까지 풍부한 전문가다. 나에게 주식이란 곧 '기업의 소유권'이고, 회사의 재무 건전성을 진단하는 능력이야말로 좋은 주식을 고르는 가장 강력한 무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누구보다 훌륭한 분석 도구를 손에 쥐고 있으면서도 투자를 두려워한다니, 못내 아쉬움이 남았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런 경우는 비일비재했던 것 같다. 금융기관에 다닌다고 해서 모두가 탁월한 투자자인 것은 아니더라. 심지어 투자에 관한 박사 학위가 있어도 개인 자산 관리는 엉망인 경우도 많다. 이는 마치 의사라고 해서 모두가 건강 관리에 철저하지 않고, 경찰관이라고 해서 보이스피싱에 면역이 아닌 것과 같다.
왜 이런 괴리가 생길까? 어쩌면 '지식'의 영역과 '믿음'의 영역이 다르기 때문일지 모른다. 나 역시 어린 시절부터 금융업에 종사하셨던 부모님께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던 말이 있다. "주식이 공부해서 되는 거라면, 경제학자나 투자론 교수는 다 재벌이 됐게?" 주식은 위험천만한 도박판이고, 개인이 공부로 이길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는 그 말씀은 꽤나 설득력 있게 들렸다. 그래서 나 또한 오랫동안 주식이라는 자산을 외면한 채, 열심히 저축하고 부동산 같은 실물 자산에 집중하는 전통적인 재테크에만 몰두했었다.
하지만 우연한 계기로 금융의 세계에 깊이 빠져들면서, 나는 뒤늦게 주식과 사랑에 빠졌다. 닥치는 대로 책을 읽고 유튜브를 탐닉하며 깨달은 것은, 주식 투자의 본질이 차트 위에서 춤추는 숫자를 맞히는 게임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주식의 본질이 기업이란 걸 알게 된 나는 기업을 발굴하고 분석하는 과정 자체를 즐기게 되었다. 내가 주식을 살 때, 나는 데이터 쪼가리가 아니라 그 기업의 비즈니스 모델과 미래를 산 기분이 들었다.
재무상담을 하다 보니 이제는 사람들의 마음을 조금은 알게 됐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식을 '기업의 소유권'으로 보지 않는다. 그들은 주식을 매순간 변동하는 '숫자 그 자체'로 바라본다. 그렇기에 아무리 회계 지식이 뛰어나도, 눈앞에서 요동치는 빨간색과 파란색 숫자의 공포를 이겨내지 못하는 것이다.
이 현상을 설명하기에 벤자민 그레이엄의 통찰만큼 정확한 것은 없다. "주식 시장은 단기적으로 보면 인기투표 기계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체중계다." 사람들은 주식을 기업의 체중이 아니라, 그날 그날의 인기를 사고파는 티켓으로 여긴다.
이 두 가지 관점, 즉 '기업의 소유권'과 '욕망의 교환재'라는 시각 차이는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일까? 우리는 어쩌다 기업이라는 실재(Real)를 보지 않고, 숫자라는 환상(Image)에 매몰되게 되었을까? 이 기묘한 분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계를 돌려 주식이 처음 탄생했던 그 순간의 역사를 되짚어 봐야 한다. 그곳에 우리가 잃어버린 '원본'이 있다.
주식의 시뮬라시옹
주식회사의 기원은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대항해시대가 열리면서 무역이 큰 돈이 되자, 사람들은 너도 나도 배를 띄우고자 하였다. 그러나 배를 사는 것에는 큰 자본이 들었다. 배에 투자하고 싶었지만 배를 살 수 없었던 사람들은 획기적인 생각을 해냈다. 투자자들은 가능한 만큼만 각출하여 배를 사고, 선장과 선원을 고용했다. 그리고 무역의 성과를 공유했다. 그 결과 작은 자본으로도 큰 사업을 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자본 효율화에 대한 열망이 주식이란 발명품을 만들어 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그보다 더 근원적인 인간의 욕망에서 주식의 기원을 끌어내고 싶다. 그것은 '불확실한 운명을 통제하고 싶은 욕망'이다. 사람들은 불확실성을 견디지 못한다. 알 수 없는 미래와 현상을 통제하고 싶은 마음은 발명의 가장 강력한 욕망이기도 하다. 미래의 시간을 통제하기 위해 채권을 만들었고, 사업의 불확실성을 통제하고 싶어 주식을 만들었다.
당시 인도로의 항해는 말 그대로 목숨을 건 도박이었다. 배 한 척을 띄우는 데는 막대한 자금이 들었지만, 그 배가 향신료를 가득 싣고 무사히 돌아올 확률은 희박했다. 폭풍우, 해적, 괴혈병이 도사리는 바다에서 배가 침몰하면 선주는 하루아침에 전 재산을 날리고 길거리 나앉게 된다. 하지만 성공하기만 하면? 그 수익은 상상을 초월했다. 소위 '대박'이었다.
여기서 흥미로운 수리적 딜레마가 발생한다. 가령 어떤 항해의 성공 확률이 20%이고, 성공 시 수익이 투자금의 10배라고 가정해보자. 실패 시는 전액 손실이다. 이 게임의 기대값은 [0.2*10 + 0.8*0=2]으로 명백히 양수(+)다. 수학적으로는 무조건 해야 하는 게임이다. 하지만 80%의 확률로 '파산'이라는 결과가 기다리고 있다면, 아무리 기대값이 높아도 전 재산을 '올인'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인간에게 파산은 곧 죽음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이때 인류는 천재적인 발명을 해낸다. "혼자서 배 한 척을 다 사지 말고, 10명이 돈을 모아 배 10척에 나누어 싣자!"
이것이 주식의 근본적 욕망이다. 내 돈을 쪼개어 여러 배에 분산함으로써, 10%라는 낮은 성공 확률을 여러 번 시행하여 통계적 기대값으로 수렴시키려는 시도. 즉, 주식은 신의 영역인 '운'을 인간의 영역인 '대수의 법칙으로 끌어내리기 위해 고안된 시스템이었다. 사람들은 이 증서를 손에 쥐고 안도했다. 이제 바다는 더 이상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계산 가능한 수학의 영역이 된 것이다.
초기의 주식은 이처럼 철저히 '사업의 리스크와 과실을 공유하는 시스템'이었다. 주식의 권리는 곧 바다 위를 항해하는 배의 일부였고, 투자자의 운명은 배의 항해 일지와 정확히 일치했다. 이것이 '실재(Real)'의 세계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 예기치 못한 변화가 일어났다. 항해가 길어지자 당장 현금이 급한 사람들이 생겨났다. "내 배는 아직 인도양을 지나고 있는데, 당장 딸의 결혼 자금이 필요해." 사람들은 커피숍에 모여 자신이 가진 소유권을 남에게 팔기 시작했다. 주식에 '거래가능한 상품'이라는 개념이 더해진 순간이다.
그리고 이 유동성은 주식의 성격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이전까지 주식은 '배가 돌아와야만' 가치가 있는 종이였다. 하지만 거래가 시작되자, 배가 돌아오지 않아도, 심지어 배가 어디 있는지 몰라도 주식 증권은 그 자체로 돈이 되었다. 사람들의 시선은 이제 수평선 너머의 '배'에서 커피숍 테이블 위의 '종이'로 옮겨갔다.
"저 배가 정말 향신료를 가져올까?"라는 질문보다 "이 종이를 내일 더 비싸게 사줄 사람이 있을까?"라는 질문이 더 중요해졌다. 기업의 본질적 가치와는 별개로, 사람들의 기대와 공포, 그리고 욕망이 뒤섞여 새로운 가격, 즉 프리미엄이 생겨난 것이다.
이것은 혁명이었지만, 동시에 거대한 착시의 서막이었다.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가 예견한 '시뮬라크르(Simulacre)'의 세계가 열린 것이다. 시뮬라크르란 원본이 없는 이미지, 혹은 원본보다 더 압도적인 실재감을 가진 가상을 의미한다. 보드리야르는 모방에 불과했던 이미지가 원본과의 연결고리를 끊고, 스스로 독립적인 실재가 되어버리는 과정에 주목했다. 그리고 이 기묘한 대체 과정을 '시뮬라시옹(Simulation)'이라 불렀다.
주식의 역사야말로 이 시뮬라시옹의 가장 극적인 무대다. 태초의 주식은 단지 바다를 항해하는 배의 옅은 그림자에 불과했다. 하지만 유동성이라는 날개를 달자, 주식이라는 '이미지'는 배라는 '원본'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이제 사람들에게 중요한 건 실제 배가 인도양에서 폭풍우를 만났느냐가 아니다. 그 배에 대해 시장 참여자들이 어떤 이야기를 속삭이는가, 즉 거품처럼 부풀어 오르는 '내러티브'가 더 중요해졌다. 원본은 저 멀리 보이지 않는 바다 위에 떠 있는데, 사람들은 육지에서 종이 티켓이라는 환상을 부여잡고 환호하거나 절망한다.
어느새 주식은 기업의 소유권을 넘어, 그 자체로 독립된 생명력을 가진 '욕망의 상품'이 되어버렸다. 누군가는 이것을 금융의 고도화라 칭송하지만, 철학의 눈으로 보면 그것은 '기호(Sign)가 실재(Reality)를 대체해버린 사건'이다. 이미지가 현실을 집어삼킨 이 초현실(Hyperreality)의 세계. 과연 우리는 이 환상 속에서 무엇을 놓치고 있는 것일까? 이제 그 본질적인 질문을 마주해 보자.
다락방 속 실재와의 직면
19세기 영국 소설가 오스카 와일드는 인간의 위선과 욕망을 적나라하게 파헤친 문제작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을 세상에 내놓았다. 이 기묘한 이야기의 시작은 런던의 한 화실에서 시작된다. 화가는 자신의 모든 예술혼을 쏟아부어, 눈부시게 아름다운 청년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화를 완성한다. 캔버스에 담긴 도리안은 신이 빚은 듯 완벽했다.
하지만 그 순간, 곁에 있던 누군가 도리안에게 악마 같은 속삭임을 건넨다. "젊음은 찰나에 불과하고, 이 찬란한 아름다움도 곧 시들어 추해질 것"이라고. 자신의 가장 완벽한 시절이 박제된 그림을 보며, 도리안은 전율과 함께 끔찍한 질투를 느낀다. 그리고 끓어오르는 욕망에 사로잡혀 무심코 금단의 소원을 내뱉는다.
"나 대신 저 그림이 늙을 수만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내 영혼이라도 바칠 텐데!"
그것은 악마와의 계약, 즉 파우스트적 거래였다. 놀랍게도 그 간절하고도 위험한 소원은 현실이 된다. 이후 도리안이 한 여인의 사랑을 짓밟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경악스러운 현상을 경험하게 된다.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은 여전히 순수했지만, 초상화 속 입가에는 비릿하고 잔인한 조소가 떠올라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그림은 도리안을 대신해 세월과 죄악을 흡수하는 괴물이 되었다. 도리안이 사교계에서 방탕한 쾌락을 즐기고 타락의 길을 걸을 때마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스무 살의 꽃미남으로 남았지만, 그림 속 얼굴은 흉측한 노인으로, 욕망에 찌든 악귀로 변해갔다. 도리안은 이 끔찍한 비밀을 들키지 않기 위해 그림을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는 다락방 깊숙이 숨겨버린다.
나는 이 마술적이고도 섬뜩한 이야기가 현대의 주식 시장을 설명하는 하나의 메타포가 된다 생각한다. 우리가 매일 스마트폰 화면에서 마주하는 '주가'는 도리안 그레이의 겉모습처럼 매혹적이다. 사람들은 그 화려한 상승 곡선에 열광하며, 그 뒤에 무엇이 있는지 묻지 않는다. 도리안이 사교계의 아이돌이었듯, 급등하는 주식은 시장의 주인공이 되어 사람들의 숭배를 받는다.
하지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모든 주식에게는 다락방에 숨겨진 '초상화'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바로 기업의 펀더멘털이다. 재무제표, 현금흐름, 비즈니스 모델의 건전성, 그리고 경영진의 도덕성. 이것들은 도리안의 겉모습처럼 화려하지 않다. 때로는 적자라는 깊은 주름이 패여 있고, 때로는 과도한 부채라는 검버섯이 피어 있기도 하다. 사람들은 이 흉측한 초상화를 보는 것을 싫어한다. 그것은 파티의 흥을 깨고, "이 주식은 계속 오를 거야"라는 달콤한 환상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이미지만을 추앙하다보면, 다락방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도리안 그레이의 얼굴만 바라보게 된다. "남들이 다 좋다고 하니까", "지금 가장 뜨거운 테마니까"라는 이유로 주식을 산다. 그들은 시뮬라크르가 주는 쾌락에 취해, 초상화가 썩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한다.
하지만 소설의 결말은 정직하다. 도리안 그레이는 결국 자신의 추악한 내면이 담긴 초상화를 견디다 못해 칼로 찌르게 되고, 그 순간 마법은 풀린다. 하인들이 발견한 것은 가슴에 칼이 꽂힌 채 흉측하게 늙어 죽은 노인과,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의 모습을 회복한 초상화뿐이었다. 거짓된 젊음은 사라지고, 실재했던 세월의 무게가 육체로 돌아온 것이다. 이것이 바로 금융 시장에서 말하는 '평균으로의 회귀', 즉 '수렴'이다.
주식 시장도 마찬가지다. 단기적으로는 사람들의 욕망과 광기가 주가를 하늘 높이 띄울 수 있다. 하지만 파티가 끝나고 음악이 멈추는 순간, 주가는 반드시 다락방에 숨겨져 있던 기업의 본질로 돌아오게 되어 있다. 이것은 중력과도 같은 법칙이다. 펀더멘털이 뒷받침되지 않는 상승은 결국 흉측한 노인의 시체로 발견될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혼란스러운 시뮬라크르의 세계에서 어떻게 투자해야 하는가? 나는 채권 편에서 언급했던 중세 유대인 대부업자들의 태도를 다시금 소환하고 싶다. 그들의 냉철한 감각은 비단 돈을 빌려주는 채권의 영역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주식 투자 또한, 나의 목숨 같은 돈을 걸고 거친 바다를 건너올 배를 고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현명한 유대인들은 투자를 결정할 때, 뱃머리에 '왕의 배'라는 화려한 깃발이 꽂혀 있다고 해서 덜컥 돈을 내주지 않았다. 그들은 화려한 명성이나 이미지가 폭풍우를 막아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그리고 아무리 고귀한 선장이라도 언제든 배신하거나 난파될 수 있다는 냉혹한 현실을 뼈저리게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신 그들은 화려한 깃발 너머의 실체를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낡아 보이는 선체라도 이음새가 튼튼한지, 선장의 지난 항해 일지에 거짓은 없는지, 그리고 동방의 향신료 수요가 정말로 존재하는지... 그들에게 투자는 낭만이 아니라 생존을 건 비즈니스였기에, 겉모습이 아닌 '배의 진짜 상태'를 파악하는 것만이 유일한 살길이었다.
우리가 주식이라는 자산을 대하는 태도 또한 이와 같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중세 유대인의 냉철한 눈으로 시뮬라크르의 장막을 걷어내고 다락방의 초상화를 발견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오늘날의 금융 시스템은 시뮬라크르를 더욱 정교하게 다듬고 스스로를 강화하며, 우리를 빠져나갈 수 없는 초실재의 감옥에 가두려 하기 때문이다. 냉정히 말해 금융 세계의 생리는 우리가 다락방의 진실을 파헤치기보다, 거실의 파티에 머물기를 원한다. 증권사가 MTS의 버튼 하나로 거래를 게임처럼 만들고, 매일 수천 장의 무료 리포트를 쏟아내며 새로운 테마를 소개하는 이유는 명백하다. 우리가 기업의 주인이 되어 진득하게 기다리기보다, 기호를 소비하는 트레이더가 되어 잦은 매매를 반복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스마트폰 화면 속에서 매초 깜빡이는 붉은 숫자는 그들이 만든 달콤한 기호다. 의미 없어 보이는 인터페이스의 배치 모두 우리를 가상의 세계로 유혹하는 최면 기법이다. 이런 기법이 발전할 수록 그 숫자 너머, 저 현실 세계 어딘가에서 묵묵히 공장을 돌리고, 치열하게 경쟁하며, 땀 흘려 이윤을 남기는 '리얼', 즉 기업의 본질이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사실에 도달하는 건 점점 더 힘든 일이 되어 간다.
내가 산 주식이 시세 차익을 노리는 단순한 '종이 티켓'이 아니라, 치열한 자본주의 현장에서 살아남으려 애쓰는 '기업의 조각'임을 깨닫는 것. 그리고 남들이 도리안 그레이의 화려한 겉모습에 취해 축배를 들 때, 홀로 조용히 다락방 문을 열고 초상화의 상태를 점검하는 용기. 그것이 투자의 핵심이다.
무엇보다 우리는 소설의 마지막, 도리안이 결국 견디지 못하고 자신의 초상화에 칼을 꽂았던 그 운명적인 순간을 기억해야 한다. 그 칼날이 캔버스를 찢는 순간, 거짓된 젊음은 사라지고 육체는 초상화의 흉측한 모습으로 돌아갔다. 주식 시장에서도 이 '칼을 꽂는 순간'은 반드시 온다. 화려하게 치솟던 주가는 언젠가 반드시 기업의 실제 성적표와 일치하게 된다. 이것은 중력과도 같은 수렴의 법칙이다.
우리가 펀더멘털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이 법칙을 믿기 위해서다. 이 믿음이 단단히 서 있을 때라야 비로소, 도리안의 미소에 현혹되어 과한 욕심을 부리지 않고, 도리안의 눈물에 속아 헐값에 자산을 던지는 실수를 범하지 않을 수 있다. 즉, 폭락을 두려하지도, 폭등에 욕심을 내지도 않는 길은 기업이라는 실재와 얼마나 더 철저하게 직면했느냐에 달렸다.
초상화 또한 물감일 뿐
나는 주가의 화려함에 속지 말고, 다락방의 초상화, 즉 펀더멘털을 직시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것이 투자의 정석이자, 거품에 휩쓸리지 않는 유일한 길처럼 말하였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한 걸음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야 한다.
만약 우리가 그토록 신봉하는 '다락방의 초상화'조차 또 하나의 환상이라면? 여기서 나는 시뮬라크르에 대한 논의를 조금 더 심화시키고자 한다. 앞서 소개한 장 보드리야르는 시뮬라크르를 '실재를 은폐하거나 왜곡하는 가짜'라는 다소 부정적인 뉘앙스로 설명했다. 즉, 원본이 있고 그것을 흉내 낸 가짜가 있다는 이분법적 사고다. 이 관점에서 우리는 가짜인 주가를 버리고 진짜인 기업 가치를 찾아야 했다.
하지만 철학자 질 들뢰즈(Gilles Deleuze)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플라톤 이래 서양 철학을 지배해 온 '이데아(Idea, 원본)'라는 개념 자체를 전복시킨다. 들뢰즈에게 시뮬라크르는 단순한 가짜나 복제물이 아니다. 그는 이렇게 묻는다. "도대체 그 '진짜(원본)'라는 것은 누가 정하는가?"
들뢰즈의 관점에서 세상에 고정된 원본, 즉 이데아는 없다.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생성되는 '차이'들의 연속일 뿐이다. 그러므로 시뮬라크르들 사이에는 진짜와 가짜라는 위계(Hierarchy)가 존재하지 않는다. 모두가 동등한 권리를 가진, 서로 다른 형태의 실재일 뿐이다.
이 난해한 철학을 주식 시장으로 가져와 보자. 우리는 흔히 재무제표나 적정 주가 계산 모델(DCF, PER 등)을 '기업의 본질'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냉정하게 따져보자. 재무제표는 기업이라는 거대하고 역동적인 실체를 '회계 기준'이라는 붓으로 그려낸 또 하나의 그림일 뿐이다. 애널리스트가 산출한 '목표 주가' 역시 미래에 대한 수많은 가정과 편향이 섞인 시뮬라크르다.
많은 가치투자자가 범하는 치명적인 실수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들은 자신이 계산한 가치를 절대적인 '이데아'로 착각한다. 그래서 시장의 가격이 자신의 계산과 다르면 "시장이 틀렸다", "사람들이 미쳤다"라고 비난하며 고집을 부린다. 하지만 소설 속 그림이 화가의 해석이 들어간 예술품이듯, 우리가 믿는 펀더멘털 역시 '가치'라는 이름의 또 다른 시뮬라크르에 불과하다.
극단적인 펀더멘털주의자들은 "기업의 실적만이 진짜이고, 사람들의 기대감이나 유행은 거품일 뿐"이라고 폄하한다. 하지만 들뢰즈의 눈으로 보면 이것은 오만이다. 주식 시장에서 사람들의 욕망, 열망, 기대감은 거짓이 아니다. 그것은 주가를 움직이고, 때로는 그 높아진 주가가 기업에게 자금 조달의 기회를 주어 실제로 기업을 성장시키기도 한다.
테슬라를 예로 들어보자. 초기 테슬라의 초상화는 엉망이었다. 전통적인 가치투자의 잣대로 보면 그것은 사기극에 가까웠다. 하지만 "전기차가 세상을 바꿀 것"이라는 사람들의 열망이 주가를 밀어 올렸고, 그것을 기반으로한 거대한 자본 덕분에 테슬라는 실제로 공장을 짓고 기술을 개발해 혁신을 이뤄냈다. 이미지가 실재를 만들어낸 것이다. 이것을 단순히 '거품'이라 매도할 수 있을까? 들뢰즈라면 이를 두고 시뮬라크르가 가진 '생성(Becoming)의 힘'이라 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가는 가짜고 실적은 진짜다"라는 낡은 이분법에서 벗어나야 한다. 다락방의 초상화도 중요하지만, 거실에서 춤추는 도리안 역시 무시해선 안 될 또 하나의 실재다. 도리안의 아름다움과 내러티브에 사람들이 열광하는 것 자체가 이미 시장에서는 강력한 힘이자 가치다.
우리는 양극단을 모두 경계해야 한다. 사람들의 욕망만을 쫓으며 "숫자는 필요 없다"고 외치는 것은 맹목적인 도박이다. 반대로, 자신의 엑셀 파일 속에 갇혀 "시장의 욕망은 모두 허상이다"라고 외치는 것은 지적인 오만이다. 주식과 금융 세상을 대하는 현명한 태도는 '이데아 없는 세상'을 인정하는 것에 있다. 절대적인 내재 가치란 없다. 오직 존재하는 것은 '기업의 활동이라는 하나의 시뮬라크르'와 '사람들의 해석이라는 또 다른 시뮬라크르'가 끊임없이 부딪치며 만들어내는 '차이의 파동'뿐이다.
다락방의 초상화가 진실을 말해주긴 하지만, 그것 역시 캔버스 위에 칠해진 물감일 뿐임을 잊지 말자. 우리는 초상화 앞에서 기도를 올리는 사제가 되어서는 안 된다. 대신, 초상화와 도리안 사이를 유연하게 오가며, 그 둘이 빚어내는 긴장과 에너지를 읽어내는 관찰자가 되어야 한다. 가치조차 고정된 실체가 아닌, 끊임없이 생성되는 시뮬라크르임을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초실재의 숲을 건너는 안전한 방법이다.
주식 시장에서 춤추기
명문대를 졸업하고 회계사 공부를 했던 그 총명한 친구는 왜 주식 투자를 그토록 두려워했을까? 단순히 폭락장이 무서워서였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 이유는 조금 더 근본적인 곳에 있었다. 우리는 학교에서 늘 '정답이 있는 세계'만을 배웠기 때문이다.
시험지에는 항상 출제자가 숨겨둔 명확한 답이 있었고, 회계 장부는 차변과 대변이 1원 한 푼 틀리지 않고 딱 맞아떨어져야 했다. 우리 세상에서 '불확실성'은 곧 '오답'이나 '실패'를 의미한다. 그러니 주식 시장은 원래 견디기 어려운 곳이다. 도리안 그레이의 기분처럼 수시로 변덕을 부리고, 공식대로 움직이지 않으며, 누구도 100% 확실한 정답을 주지 않는 모호한 세계. 그 불확실성의 안개 속으로 자신의 피 같은 돈을 던지는 건, 평생 정답만을 찾아온 모범생에게는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드는 곳이다.
나 또한 그랬다. 나는 원래 수학과 과학을 사랑했던 소년이었다. F=ma처럼 딱 떨어지는 공식, 원인과 결과가 명쾌하게 연결되는 인과율이 좋았다. 나에게 세상은 잘 짜인 기계장치였고, 나는 그 설계도를 이해하고 싶었다. 흐릿하고 모호한 건 딱 질색이었다. 그런데 인생은 참 알 수 없다. 어쩌다 보니 영문학과 철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읽고, 니체의 철학과 씨름하면서 큰 충격을 받았다. 내가 그토록 명증하다고 믿었던 세상이, 사실은 수많은 모호함과 해석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렴풋한 개념을 잡기 위해 집요하게 파고들다 보니, 깨달은 진실이 하나 있었다. 우리가 너무 이데아적 관점에 치우쳐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내가 그토록 좋아했던 과학조차 이제는 '불확실성'을 받아들이고 있다. 양자역학은 위치와 속도를 동시에 정확히 알 수 없다고 말하고, 현대 과학은 결정론적 세계관을 폐기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이 복잡한 금융 세계에 잘 적응할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이 지점에 있었다. 영문법에 어긋나는 말을 한다고 항의하던 과거의 내가 주식시장을 접했다면, 나는 매일 밤 잠들지 못했을 것이다. "왜 실적이 좋은데 주가가 떨어지지?", "왜 공식대로 움직이지 않지?"라며 세상의 불합리함을 탓했을 테니까.
하지만 나는 금융 시장을 정답이 있는 수학 문제가 아니라, 끊임없이 살아서 움직이는 거대한 서사, 혹은 여러 각도에서 포착해야만 겨우 윤곽이 드러나는 입체적인 대상으로 바라보았다. 그러자 비로소 마음이 편안해지고 시장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주식 투자를 망설였던 건 지식이 부족해서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정답 없는 세상'에 나를 노출시키는 것은 나이가 들어도 두렵긴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원금 보장'이라는 팻말이 붙은 현금의 세계로 도망친다. 숫자가 변하지 않는 그곳만이 유일한 정답지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뮬라크르의 관점에서 보자면 현금이라는 정답지 또한 이데아가 아니다. 우리는 통장에 찍힌 숫자가 영원히 안전할 거라 믿지만, 그 배후에는 '인플레이션'이라는 보이지 않는 실재가 끊임없이 돈의 가치를 갉아먹고 있다. 10년 전의 1억 원과 지금의 1억 원은 숫자만 같을 뿐, 구매력은 완전히 다른 돈이다. 현금을 쥐고 있는 것은 안전한 동굴에 숨은 것이 아니라, 서서히 가라앉고 있는 배 위에서 "나는 움직이지 않았으니 안전해"라고 최면을 거는 것과 같다. 그리고 최면은 우리를 또 다른 가상세계로 인도한다.
결국, 받아들여야 한다. 주식 시장이 변동성이라는 파도가 치는 위험한 바다라면, 현금이라는 육지는 지반이 서서히 꺼지는 늪지대다. 이 세상 어디에도 우리가 학교에서 배웠던 '완벽하게 안전하고 명증한 정답'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이가 든다는 건 무엇일까? 그것은 세상이 내 뜻대로 되지 않음을, 삶에는 정해진 답이 없음을 천천히 받아들이는 과정일 수 있다. 건강도, 관계도, 남은 시간도 모든 것이 불확실해진다. 나이듦에 대한 준비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안전한 정답을 찾아 숨는 과정이 아니라, 불확실성이라는 파도를 피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그 위에 올라타 균형을 잡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다.
나는 주식 투자를 통해서도 이 연습을 할 수 있다고 믿는다. 확실하지 않은 것에 나를 노출시키는 연습. 시장의 변덕에 흔들리면서도, 펀더멘털이라는 북극성 믿고 항해하는 연습 말이다. 가짜와 진짜, 위험과 안전을 칼로 무 자르듯 구분하려는 이분법을 내려놓고, "절대적인 안전은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용기. 그 용기야말로 자본주의라는 거친 바다에서 표류하는 나를 지켜줄 가장 단단한 자산이 될 것이다.
-멋나들 연구소, <셀프 노후준비> 연재 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