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의 극치는 무형이다.
복잡계에서 의사 결정의 핵심 원칙은 간결하다.
"유리한 확률 분포로 다수 시행을 할 수 있느냐"가 전부다.
이를 달성하기 위해 수많은 과거 사례를 공부하고 꾸역 꾸역 실패를 극복해야 하지만....

JUB
2025.12.12
초식의 끝은 무초식 📃투자칼럼 ep.69
오랜만에 차분히 글 쓸 환경이 되어서, 최근 생각하는 점을 글로 남겨봅니다.
국제회계기준(IFRS)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원칙 중심(principle-based accounting standards)'이라는 점입니다. 이는 기존의 회계처리 기준이나 일반기업회계기준(K-GAAP)이 '규칙 중심(rule-based accounting standards)'인 것과 대비되는 차이점입니다.
각 나라의 세부적인 지침을 모두 반영한 K-GAAP과 같은 회계기준은 국제적인 통용이라는 IFRS의 목적에 부합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국제회계기준의 목적을 고려할 때는 '원칙 중심'의 접근이 더 적합합니다. 이에 따라 IFRS는 '재무보고를 위한 개념체계'의 기본 개념과 각 기준서의 '원칙'을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기업이 재량적으로 회계처리를 할 수 있도록 허용합니다.
즉, 규칙 중심이 정해진 규정에 따른 '기계적인 회계처리'를 요구하는 반면, 원칙 중심은 '전문가적 판단에 따른 세부적인 처리'를 중시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규칙 중심'의 대표적인 사례는 세법입니다. 그중에서도 규칙 중심의 폐해가 가장 극단적으로 드러나는 분야는 '상속세 및 증여세법(이하 상증세법)'과 '양도소득세법(이하 양도세법)'입니다.
다른 세법들도 그러한 측면이 있지만, 특히 상증세법과 양도세법은 납세자와 과세당국 간의 치열한 공방을 바탕으로 형성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납세자들은 법의 허점을 찾아 어떻게든 조세를 회피하려 하고, 과세당국은 이를 막기 위해 예외 사항들을 지속적으로 찾아내어 법을 개정하고 규칙을 추가합니다. 그 결과 상증세법과 양도세법은 계속해서 방대해지고 복잡해집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전문가적 판단은 '원칙 중심'에서 필수적입니다. 세법이 전반적으로 규칙 중심이긴 하지만, 상증세법에 비해 '법인세법'과 '소득세법'은 상대적으로 원칙 중심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법인세나 소득세 상담을 진행할 때는 전문가의 판단이 필요한 영역이 꽤 많은 편입니다.
반면 상증세법과 양도세법은 내용은 복잡하지만, 전문가적 판단이 개입할 여지는 적습니다. 세세한 규정이 워낙 많다 보니, 상담을 요청하는 분들이 본인의 케이스에 대해 깊이 연구해 와서 오히려 전문가보다 더 많이 알고 있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올해 저는 '투자 철학'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그런데 철학에 대한 고민이 깊어지다 보면, 이를 '원칙'으로 남기기보다 자꾸 '규칙'화하려는 경향이 생깁니다.
습관적으로 모든 투자를 하나의 일관된 '규칙'으로 규정하여, 기계적으로 투자하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그러한 정형화된 방법을 찾고, 이를 기계적으로 반복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게 됩니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세법처럼 아무리 고민해서 '규칙'을 정해도 그것은 완벽할 수 없습니다. 현실에서는 항상 예외 사항들이 발생하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복잡계 환경 속에 살고 있으며, 경제는 계속 변하고 그 속의 기업들의 성격 또한 끊임없이 변화합니다. 심지어 같은 기업이라도 시기에 따라 그 색깔이 완전히 달라지기도 합니다.
모든 상황에 일관되게 적용할 수 있는 '규칙'을 찾아 헤매지만, 사실상 그러한 만능 '규칙'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든 완벽한 규칙을 만들려고 예외 사항들을 계속 추가하다 보면, 규칙서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두꺼워집니다. 이것이 투자를 하는 것인지 학문 연구를 하는 것인지 모를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저 역시 지금 그러한 경계선에서, '규칙'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원칙'을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다시금 되새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원칙'의 수는 점점 줄어들어야 합니다. 결국에는 가장 핵심적인 '개념체계'만 남을 정도로 간소화되어야 합니다.
무협지에 나오는 고수들은 매일같이 수많은 초식을 연마하지만, 결국 그 끝에 다다르면 초식 자체가 의미 없는 '무초식(無招式)'의 반열에 오릅니다.
투자 경험을 쌓으면서 목표로 해야 할 길 역시 화려한 '초식'의 고수가 아니라, 형식을 초월한 '무초식'의 경지일 것입니다.
구체적인 예시를 들어보겠습니다. 이는 저의 최근 실제 경험이기도 합니다. 과거에 너무 급하게 매수했다가 물려서 오랜 기간 고통받았던 경험을 바탕으로, '좋은 투자 아이디어가 생기면 40일 동안 분할 매수한다'는 기계적인 원칙을 세울 수 있습니다.
그러던 중 최근 매수를 시작하여 목표 비중의 10% 정도만 채운 종목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전날 장 종료 후 촉매(Catalyst)가 발현되어 시초가가 5% 정도 상승했습니다. 제가 보기에 해당 촉매는 의미가 커 보였지만, 미리 세워둔 '40일 분할 매수' 원칙 때문에 급하게 추격 매수하지 않고 당일 계획된 물량만 매수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주가는 20% 가까이 상승했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재차 20% 가까운 상승을 보였습니다. 촉매가 발현된 이후 흔히 나타나는 '긍정적 피드백 루프(Positive Feedback Loop)'의 결과였습니다. 좋은 뉴스들이 서로 긍정적인 영향을 주며 주가를 밀어 올린 것입니다.
이런 경험을 하고 나면, 기존 매수 원칙에 "촉매가 발현되었는데 주가가 충분히 오르지 않았다면, 목표 비중을 바로 채운다"라는 예외 조항을 추가하게 됩니다.
원칙을 이렇게 수정하고 나면 이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것 같아, 아쉬움은 남지만 한편으론 든든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 후 동일한 상황에서 또 다른 촉매가 발생했습니다. 장 초반에 주가가 10% 급등했습니다. 저는 수정해 둔 원칙에 따라 목표 비중을 빠르게 다 채웠습니다.
하지만 이번 촉매에는 시장의 오해가 섞여 있었거나,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라 차익 실현(Sell-on) 물량이 쏟아지는 경우였습니다. 15%까지 오르던 주식은 갑자기 -10%까지 급락했습니다.
상승 모멘텀을 잃은 주식은 그 이후로 20%가 더 하락했습니다.
이러면 다시 원칙을 수정하게 됩니다. '촉매의 종류가 A라면 이렇게, B라면 저렇게 대응한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저도 한때는 이렇게 원칙을 정교하게 수정해 나가는 것이 정답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하다 보면 끝이 없습니다. 예외는 계속 발생하고, 그 예외의 예외 또한 발생합니다.
결국 원칙이라고 부르기 민망할 정도로 분량이 방대해지고 맙니다.
처음의 회계 이야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IFRS가 원칙 중심이라고는 하지만 기준서의 분량 자체는 상당합니다. 오히려 규칙 중심인 K-GAAP보다 기준서의 두께가 더 두껍기도 합니다.
하지만 제가 실무를 할 때 예외적인 상황에 막혀 기준서를 다시 찾아봐야 하는 경우는 대부분 K-GAAP인 경우가 많습니다.
IFRS는 제가 그 기저에 깔린 원칙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예외 사항이 발생해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판단이 서고, 대부분 그 판단이 정답인 경우가 많습니다.
반면 K-GAAP은 제 상식이나 논리와 규칙 간에 차이가 있는 경우가 많아, 반드시 규정을 하나하나 확인해야 합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IFRS의 원칙들이 기본적으로 '경제적 실질'이라는 대원칙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저는 IFRS의 관점에서 '경제적 실질'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다양한 경험을 통해 이해하고 있기에, 매번 기준서를 들여다보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저는 투자 원칙도 이와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해야 할 일은 규칙들을 끊임없이 늘려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원칙들을 통합하여 하나의 대원칙으로 수렴시키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앞서 언급한 매수 원칙에 대한 저의 현재 생각은 다음과 같습니다. 매수 원칙을 세우는 것은 '내 능력 범위'에 대한 인지에서 시작하며, 제 능력 범위는 '기업에 대한 리서치와 평가'로 제한됩니다.
이 리서치와 평가의 과정에는 '촉매'에 대한 분석도 포함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리서치 결과, 실적 외에는 특별한 촉매가 없고 예외적인 이슈 발생 가능성도 낮은 주식이지만 다른 이유로 매수를 결정했다면, 천천히 분할 매수로 접근해야 합니다. 이는 내 능력 범위 밖인 복잡계 내의 리스크에 대비하기 위함입니다.
반면, 리서치 결과 빠른 시일 내에 촉매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된다면, 그 시기를 고려하여 매수 속도를 높일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촉매 발생 가능성은 높지만 시점을 특정하기 어렵다면, 천천히 매수하다가 촉매가 가시화되는 시점에서 비중을 빠르게 채우는 것이 적합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촉매가 내가 예상한 것과 다르거나, 그 영향력의 크기를 판단할 수 없는 경우라면, 이는 '내 능력 범위 밖'의 일이므로 추격 매수하지 않고 관망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이러한 대응 방식들은 하나하나가 개별적인 규칙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저 '철저한 리서치와 평가'를 바탕으로 한 '합리적인 사고'의 자연스러운 결과여야 합니다.
만약 대처를 잘못했다면, 해당 시점에 맞는 새로운 규칙을 추가할 것이 아니라, 나의 '리서치'와 '사고 체계' 자체의 문제점을 점검하고 부족한 부분을 채워야 합니다.
실수의 경험들 속에서 '주식의 실질'을 읽어낼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합니다. 상황을 유형화하고 세분화하여 규칙을 만들 것이 아니라, 주식의 본질을 이루는 요소들과 그 요소들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에 대해 깊이 고민해야 합니다.
이렇게 접근해야만 수많은 규칙을 원칙으로 묶어내고, 그 원칙들을 다시 하나의 개념체계로 통합할 수 있습니다. 비로소 어떤 예외 사항이 닥쳐도 내 능력 범위 안에서 적절하게 대처할 수 있는 투자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내 투자의 귀결점은 '초식의 완성'이 아니라, 형식을 넘어선 '무초식(無招式)의 묘'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것은 결국 '전문가적 판단'이 가능해지는 투자가 되는 길과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