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직관을 사용할 수 있게 된 대신에, 불확실성을 더 예민하게 느끼는 뇌를 갖게 되었다. 대니얼 카너먼이 '생각에 관한 생각'에서 지적했듯, 인간은 기대값상 더 유리한 선택(90% 확률의 10원)보다, 비록 이익이 줄어들더라도 확실한 보상(100% 확률의 7원)에 더 끌리는 경향이 있다. 이 차이는 ‘합리성’의 문제가 아니라, 불안을 줄이려는 마음의 자동 반응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참기 어려운 불안을 ‘확실성’으로 바꿔주는 장치를 끊임없이 찾아왔다. 과거에는 종교와 금이 그 역할을 했다면, 오늘날에는 국채와 비트코인 같은 자산이 비슷한 기능을 수행한다. 그것들은 단순히 ‘가치 있는 물건’이라기보다, 불확실한 세계에서 믿고 매달릴 수 있는 형태를 제공하기 위해 발명된 도구들인 것이다.

마론백
2025.12.16
‘믿음’이라는 자산
예언자의 대한 갈망
얼마 전 아내가 영어 말하기 시험을 보고 왔다. 그날부터 아내는 매일같이 인터넷 커뮤니티를 뒤지며 시험 난이도에 대한 남들의 평을 읽고, 자신의 점수가 어떻게 나올지 예측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러면서 결과 발표가 왜 이렇게 늦냐며 답답해했다.
옆에서 지켜보던 내 입장에서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전전긍긍한다고 점수가 바뀌는 것도 아니고,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으니 그저 담담하게 기다리면 될 일 아닌가? 나는 짐짓 이성적인 척하며 "어쩔 수 없는 일이니 편하게 마음 먹고 기다리라"고 조언했다. 하지만 만약 이 자리에 부부 상담사가 있었다면 나를 이렇게 타박했을 것이다. "남편분, 지금 아내에게 필요한 건 차가운 사실이 아니라, 힘든 마음에 대한 공감입니다!"
그렇다. 상담사의 말이 맞다. 아내는 지금 단순한 기다림이 아니라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었을 것이다. 현대 뇌과학자들에 따르면 인간이 가장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는 순간은 육체적으로 ‘고통스러운 상황’이 아니라, 바로 ‘예측 불가능한 상황’에 놓였을 때라고 한다. 차라리 확실하게 매를 맞는 게 낫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안고 사는 건 인간이 견딜 수 있는 일이 못 된다.
굳이 뇌 사진이나 호르몬 수치를 들이밀지 않아도 우리는 경험적으로 이 사실을 안다. 병원에서 조직 검사를 받고 결과를 기다리는 그 일주일의 시간을 떠올려보자. 차라리 "수술하면 낫는다"라는 확진을 받은 환자의 마음이, "도대체 무슨 병인지 아직 모른다"는 대기자의 마음보다 훨씬 평온하다. 공포 영화에서도 귀신이 화면에 등장해 주인공을 쫓아올 때보다,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고요한 정적의 시간이 관객의 심장을 더 옥죄는 법이다.
이처럼 인간은 본능적으로 ‘알 수 없음’을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미래를 확정 짓고 싶어 한다. 내일의 날씨를 알고 싶고, 게임의 승패를 미리 보고 싶으며, 자식의 미래를 점쳐보고 싶어 한다. 고대부터 사람들이 선각자나 예언자를 추앙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들이 제시하는 미래의 답안지는, 불확실성이라는 고통스러운 감옥에서 우리를 꺼내주는 유일한 해방구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예언자에 대한 갈망’은 자본주의의 정점인 투자 세계에서도 그대로 관찰된다. 주식 시장은 내일 오를지 내릴지 알 수 없는, 그야말로 ‘불확실성의 우주’다. 이 곳에서 투자자들은 불안을 잠재워 줄 확실한 목소리를 찾아 헤맨다. 미디어에 나오는 수많은 경제 전문가와 차트 분석가들은 현대판 예언자들이다. 대중은 그들의 예측이 맞는지 틀리는지 검증하기보다, 확신에 찬 그들의 목소리를 통해 심리적 위안을 얻는다. 그들이 제공하는 전망치는 흔들리는 멘탈을 잡아주는 훌륭한 보호막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믿음의 성전에 아주 독특한 이단아가 한 명 있다. 평생을 시장에 몸담았으면서도 "나는 시장을 예측할 수 없다"고 공공연히 말하는 사람. 예언자가 되기를 거부하고, 불확실성을 제거하는 대신 그것을 있는 그대로 껴안은 사람. 바로 워렌 버핏이다.
그는 마치 인간의 근원적 불안을 초월한 사람처럼 보인다. 그는 알 수 없는 미래를 예측하려 애쓰는 대신, 눈에 보이는 확실한 생산물에 집중한다. 과거에 훌륭한 성과를 냈고 앞으로도 물건을 팔아 돈을 벌 기업에 투자하는 그의 전략은, 미래를 점치느라 바쁜 예언자들보다 늘 더 높은 성과를 냈다.
철저한 실용주의자인 그에게 '생산물'이 없는 자산은 가치가 없다. 그래서 그는 금이나 비트코인 같은 것에는 억만금을 줘도 투자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것들은 아무런 이자도, 배당도, 물건도 생산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정말 금은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을까? 나는 이번 글에서 워렌 버핏이 간과한, 금이나 비트코인이 생산하는 ‘무형의 생산물’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그것은 바로 불안을 잠재우는 ‘심리적 안정제’다. 인간에게 불안을 회피하려는 욕구가 식욕만큼이나 필수 불가결한 생존 본능임을 인정한다면, 그 불안을 해소해주는 자산 역시 분명한 가치를 지닌다. 이글에서는 먼저 불안을 회피하려는 근원적 욕망에 대해 깊이있게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금과 비트코인이라는 자산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불안 회피제 역할을 수행해 왔는지 검토하고, 동시에 그 믿음이 가진 한계에 대해서도 살펴볼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금과 비트코인 같은 대체 자산을 맹신이나 배척이 아닌,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고 활용해야 하는지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해 보고자 한다.
‘믿음의 집’을 짓는 인간
인간이 예측 불가능한 상황에서 큰 고통을 느낀다. 그렇다면 인류는 이 고통을 어떻게 해결해 왔을까? 인류학자 말리노프스키는 남태평양 원주민들을 관찰하며 아주 흥미로운 단서를 발견했다. 원주민들이 사는 섬에는 호수와 바다, 두 종류의 어장이 있었다. 원주민들은 호수에서 낚시할 때는 그저 편한 노동요를 부르며 낚싯대만 던졌다. 그곳은 물고기가 어디 있는지 뻔히 보이고 위험이 없는, ‘예측 가능한 세계’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어가 출몰하고 날씨가 급변하는 바다로 나갈 때는 달랐다. 그들은 출항 전부터 엄숙하게 온갖 주술과 기도를 올렸다. 즉, 믿음은 먼 바다에서 탄생한다. 내 힘과 기술로 통제할 수 없는 불확실한 영역, 그 검은 공포를 메우기 위해 인간은 ‘신’이라는 존재를, ‘운명’이라는 개념을, 그리고 ‘종교’라는 시스템을 발명해 낸 것이다. 다시말해, 종교나 미신은 인간이 나약하거나 무지해서 생긴 것이 아니다. 거대한 불확실성 속에서 정신이 붕괴되지 않고 생존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작동시킨 ‘심리적 방어 기제’였다.
인간이 진정으로 견딜 수 없는 것은 파도나 상어 같은 물리적 고통 그 자체가 아니다. 이 고통이 아무런 이유도, 끝도, 의미도 없는 ‘무질서(Chaos)’라는 사실이다. 사회학자 피터 버거는 그의 저서 <신성한 지붕>(The Sacred Canopy)에서 인간의 방어 기제가 쌓여 어떻게 무질서를 ‘관리 가능한 질서’로 바꾸는지 분석한다. 그는 인간과 동물의 결정적 차이에서 논의를 시작한다.
동물의 세계는 ‘본능’의 영역이다. 사자는 "나는 왜 사자로 태어났는가?", "어떻게 사냥해야 도덕적인가?"를 고민하지 않는다. 그들의 삶은 유전자에 각인된 명령에 따라 완벽하게 세팅되어 있다. 하지만 인간은 다르다. 인간은 ‘본능이 고장 난 채’ 태어난 동물이다. 태어날 때부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 세계는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맨몸으로 직면한다. 본능이 비어있는 그 자리에서, 인간은 무질서(아노미)라는 죽음과 같은 공포를 느낀다.
이 공포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인간은 본능이 없는 자리를 대신할 ‘문화와 사회’라는 집을 짓기 시작한다. 피터 버거는 이 집짓기 과정을 세 단계로 설명한다.
첫번째는 외재화 (Externalization)다. 인간은 자신의 생각과 필요를 도구, 언어, 제도 같은 형태로 세상 밖으로 쏟아낸다. 예를 들어, 물물교환의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 '조개껍데기'를 화폐로 쓰자고 약속하는 단계다. 그 다음은 객관화(Objectivation) 과정이다. 내가 만든 것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것이 마치 원래부터 있었던 객관적인 현실처럼 굳어진다. 이제 조개껍데기는 단순한 껍질이 아니라 '돈'이라는 객관적 실체가 되어 인간을 통제하기 시작한다. 우리가 만든 언어 규칙에 도리어 우리의 사고가 지배당하는 것과 같다. 마지막으로 내면화(Internalization)가 이어진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단계다. 인간은 사회적 약속을 다시 자신의 의식 깊숙이 받아들인다. "돈은 원래 소중한 거야", "법은 지켜야 해"라고 믿으며, 그것을 세상의 절대적인 진리로 인식하게 된다. 버거는 인간이 3단계의 과정을 통해 ‘노모스(Nomos)’, 즉 의미 있는 질서를 구축한다고 보았다. 우리는 이 질서 안에서 비로소 안도감을 느낀다.
[무질서 : 아노미] → [외재화] → [객관화] → [내면화] → [질서 : 노모스]
하지만 인간의 불안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사회적 규칙이나 법만으로는 어딘가 부족하다. 살다 보면 문득 이런 의심이 들기 때문이다. "이건 결국 우리끼리 정한 약속일 뿐이잖아? 상황이 바뀌면 깨질 수도 있는 거 아냐?"
인간이 만든 질서가 ‘인위적’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그 권위는 흔들리고 다시 불안이 찾아온다. 그래서 인간은 이 불안을 영원히 잠재울 최후의 수단을 쓴다. 인간이 만든 불완전한 사회적 질서 위에, 감히 의심할 수 없는 ‘성스러운 지붕(Sacred Canopy)’을 덮어씌우는 것이다. "가족 제도는 인간의 편리한 약속이 아니라, 신이 정해준 섭리다.""왕의 권력은 힘센 사람이 쟁취한 것이 아니라, 하늘이 내려준 것이다."
이처럼 인간의 질서를 우주의 법칙이나 신의 뜻으로 연결할 때, 비로소 사회는 인간이 마음대로 바꿀 수 없는 절대적인 세계가 된다. 즉, 종교란 인간이 혼돈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 만든 튼튼하고 성스러운 지붕인 셈이다. 이 ‘신성한 천막’ 아래 있을 때, 인간은 비로소 미래를 예측할 수 있고 통제할 수 있다는 안정감을 얻는다.
이제 우리는 불안을 다스리기 위한 인간의 심리 기제를 알았다. 우리가 절대적이라고 믿는 가치는 여러 단계를 거쳐서 나온 불안 회피의 발명품일 수도 있다. 이 렌즈를 끼고, 다시 금을 바라보자. 금이라는 자산이 어떻게 단순한 광물에서 '부의 절대적 기준'으로 승격되었는지를 검토해볼 수 있다.
신이 된 돌덩이
태초의 인류에게 금은 그저 강가에서 발견된, 조금 특이하고 노란 돌멩이에 불과했다. 먹을 수도 없고, 무기로 쓰기엔 너무 무른 이 금속은 생존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대항해시대 유럽 사람들과 신대륙 원주민들이 황금을 대하는 태도를 비교해보면 이는 더욱 명백히 드러난다. 금은 원래 그저 노란 광물에 불과했다.
그런데 어느순간 인간은 자신의 욕망을 이 돌덩이에 쏟아내기 시작했다. 인간은 늙고 병들고 죽어가는 유한한 존재다. 그와 달리 이 노란 금속은 달랐다. 시간이 지나도 녹슬지 않고, 영원히 빛났다. 죽음이 두려운 인간은 자신의 결핍을 메우기 위해, '영원불멸'이라는 추상적 욕망을 금이라는 물질에 투영했다. 이때부터 금은 단순한 광물이 아니게 되었다. 인간이 닿을 수 없는 '신성한 영역'을 상징하는 그릇이 되었다. 인간의 욕망이 밖으로 표출되어 새로운 가치가 부여된 것, 즉 외재화 과정이 일어난 것이다.
시간이 흘러 객관화가 진행된다. 사람들이 하나둘씩 금의 가치에 동의하기 시작하자, 금은 개인의 손을 떠나 사회적 실체가 된다. 인류는 약속했다. "이 변하지 않는 금속을 가치의 척도로 삼자." 이제 금은 단순한 장신구가 아니라 '화폐'라는 객관적인 제도가 되었다. 왕들은 자신의 얼굴을 금화에 새겨 권위를 과시했고, 시장의 모든 물건은 금의 무게로 환산되었다.
이 단계에 이르면 주객이 전도된다. 인간이 금을 만든 것이 아니라, 금이 인간을 지배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람들은 금을 얻기 위해 전쟁을 하고, 배신을 하고, 평생을 노동한다. 금은 이제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 스스로 존재하는 거대한 사회적 사실로 굳어진다.
그리고 가장 무서운 3단계, 내면화가 일어난다. 현대인 중 누구도 "왜 금이 비싸지?"라고 진지하게 의심하지 않는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금=부"라는 공식을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인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문법을 고민하지 않고 모국어를 쓰는 것과 같다. 사회가 만든 질서가 내 의식 깊숙이 들어와 나를 세뇌한 것이다. 우리는 금이 희소해서 가치 있다고 믿지만, 사실은 '우리가 가치 있다고 믿기로 합의했기 때문에' 희소해진 것이다. 피터 버거가 말한 대로, 인간이 만든 약속이 마치 자연의 섭리처럼 굳어진 단계다.
여기까지는 '화폐'로서의 금 이야기다. 금이 진정한 '종교적 산물'이 되는 것은,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거대한 공포와 마주했을 때다. 전쟁이 터지고, 국가가 망하고, 정부가 찍어낸 지폐가 휴지 조각이 되는 순간이 온다. 인간이 만든 사회적 질서, 즉 노모스가 붕괴하는 아노미 상태다. 이때 인간은 본능적으로 나를 지켜줄 ‘성스러운 보호막’을 찾는다.
사람들은 생각한다. "국가는 망해도 금은 남는다." 정부의 신용이라는 얇은 지붕이 찢겨 나갈 때, 사람들은 절대 녹슬지 않는 금이라는 종교적 우상, ‘토템’을 붙잡는다. 대해로 떠난 뱃사람들이 뱃머리에 매달았던 그 조각상과 똑같다.
이 순간 금은 '교환 수단'을 넘어선다. 썩어 없어질 속된 세상에서, 유일하게 나를 지켜줄 성스러운 구원자로 승격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위기의 순간마다 금값이 치솟는 이유다. 사람들은 금을 사는 것이 아니라, '무너지지 않는 질서'를 사는 것이다.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워렌 버핏의 말처럼 금은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가? 그렇다. 금은 쌀을 생산하지도, 이자를 낳지도 않는다. 경제학적 관점에서 금의 생산성은 '0'이다. 하지만 인간 심리적 관점에서 금의 효용은 막대하다. 금은 불안에 떠는 인간에게 ‘마음의 안정’이라는 무형의 배당금을 지급한다.
세상이 불확실해질수록, 화폐 가치가 의심스러울수록, 내 금고에 묵직하게 자리 잡은 금괴는 인간의 가장 취약한 부분인 '불안'을 잠재운다. 마치 아이가 천둥 치는 밤에 애착 인형을 꼭 껴안고 잠들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가 금에 지불하는 돈은 미래의 부가 아니라, 불확실성이라는 공포를 잊기 위해 바치는 ‘헌금’이자,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한 ‘비용’이다. 보험사가 진정으로 판매하는 그것과 같은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류가 6,000년 동안 이 차가운 금속을 숭배해 온 진짜 이유다.
디지털 토템
이야기의 시작은 2008년, 자본주의의 심장인 월스트리트가 붕괴하던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거대 은행들이 파산하고, 금융 시스템이 무너지는 ‘아노미’가 닥친 것이다. 바로 그 혼돈의 속에서, 사토시 나카모토라는 익명의 예언자가 등장해 9쪽짜리 논문을 세상에 내놓는다. 이것은 일종의 ‘디지털 백서’였다.
"더 이상 탐욕스러운 은행과 무능한 정부를 믿지 마라. 여기, 인간의 개입 없이 수학과 코드로만 작동하는 완벽한 장부가 있다."
초기의 비트코인은 화폐가 아니었다. 그것은 기존 시스템에 대한 분노와 불신, 그리고 "국가의 간섭 없는 완전한 자유"를 꿈꾸는 사이퍼펑크들의 욕망이 투사된 기호였다. 금이 처음엔 그저 반짝이는 돌이었듯, 비트코인도 처음엔 그저 반항적인 분출에 불과했다.
그 다음 단계가 진행되었다. 소수의 괴짜들이 이 코드를 컴퓨터에 깔고 채굴을 시작하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실체가 없던 데이터 조각에 '가격'이 매겨지고, 피자 두 판과 교환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수많은 해킹 사건과 정부의 규제와 사기라는 비난 속에서도 비트코인은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 무언가 오래 지속될수록 더 수명이 길어진다는 “린다 법칙”처럼, 비트코인은 죽지 않고 버틴 시간만큼 그 생명력이 강해졌다.
나아가 사람들은 이제 비트코인을 '결제 수단'으로만 보지 않는다. 새로운 서사가 탄생했다. ‘바로 디지털 금’이다. 발행량이 2100만 개로 고정되어 있다는 수리적 한계가 금의 희소성과 겹쳐지며 ‘절대 타락하지 않는 가치’라는 객관적 믿음으로 굳어졌다. 이제 비트코인은 발명자의 손을 떠나, 금융 시장 한복판에 실재하는 거대한 자산이 되었다.
마지막, 단계는 더욱 강렬하다. 비트코인 투자자들, 소위 '비트코이너'들의 언어를 들어보자. 그들의 논리는 종교적 교리와 놀랍도록 흡사하다. 그들은 디스토피아를 예언한다."정부는 빚을 갚기 위해 무한정 돈을 찍어낼 것이다. 결국 법정 화폐는 휴지 조각이 될 것이다. 국가라는 시스템은 붕괴할 것이다."
이 공포스러운 종말론 앞에서 비트코인은 유일한 ‘노아의 방주’가 된다. 그들에게 비트코인을 사는 행위는 투자가 아니라, 다가올 재앙으로부터 내 자산을 지키는 ‘구원의 의식’이다. "팔지 않고 버틴다"라는 구호는 그들의 신앙 고백이다.
과거의 인간이 "금은 신이 만든 물질"이라며 숭배했다면, 디지털 네이티브들은 “비트코인은 기술이 보증하는 진리”라며 숭배한다. 대상만 바뀌었을 뿐, 불확실한 세상을 믿지 못하고 절대적인 무언가에 의탁하려는 마음의 구조는 금과 완벽하게 일치한다.
여기서 냉철한 투자자가 던져야 할 질문이 있다. "과연 그들의 예언대로 국가가 망하고 달러가 사라질까?" 나는 확신하진 않는다. 언젠간 그렇게 될 수도 있지만 오랫동안 국가는 여전히 강력하고, 법정화폐는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비트코인 신봉자들의 주장은 다소 급진적이고 극단적이다. 하지만 투자의 관점에서 중요한 건, 내가 그들의 교리에 동의하느냐가 아니다. 중요한 건, "이 새로운 토템을 믿고 자신의 부를 기꺼이 바치는 사람들의 숫자가 늘어나고 있는가?"이다.
우리는 금이 아무런 생산물이 없어도 인간의 불안을 먹고 거대한 자산으로 자라나는 것을 확인했다. 비트코인 역시 마찬가지다. 전 세계의 수많은 사람이 기존 금융 시스템에 불안을 느끼고 있고, 그 대안으로 비트코인이라는 ‘디지털 토템’을 선택했다면, 이것은 더 이상 가상의 데이터가 아니다. 수천만 명의 믿음이 응축된 ‘사회적 실체’이자, ‘자산화된 신흥 종교’다. 종교의 자유가 있듯, 투자의 세계에서도 우리는 신도가 되지 않고도 교회의 벽돌에 투자할 수 있다.
워렌 버핏은 금을 싫어했고, 찰리 멍거는 비트코인을 혐오했다. 그들은 미국의 힘, 달러의 위상 같은 구시대의 질서가 견고하다고 믿는 세대였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새로운 토템'이 필요 없었다. 하지만 지금의 2030 세대, 디지털 환경에서 자라나고 계층 사다리가 끊어진 시대를 사는 이들에게 기성세대의 질서는 더 이상 안전한 지붕이 아니다. 그들이 느끼는 새로운 종류의 불안은 새로운 형태의 토템을 필요로 한다.
그것의 후보 중 하나가 바로 비트코인이다. 이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불안의 총량이 보존되는 한, 그 불안을 받아줄 그릇은 언제나 필요하다. 과거에 그것이 금이었다면, 디지털 시대에는 비트코인이 그 지위를 나누어 가지고 있을 뿐이다. 실제로 법정화폐가 제대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일부 국가에서는 비트코인이 이미 교환수단으로서 활용되고 있다. 이젠 부정할 수 없는 실체가 존재한다. 그러므로 만약 세상의 불확실성에 대비하고 싶다면, 이 새로운 신흥 종교의 성장성에 자산의 일부를 베팅해볼 수다 있다. 이것은 미친 짓이 아니라 지극히 합리적인 ‘심리적 헤지’다.
꼭 제우스일 필요가 있을까?
앞서 인간의 본질이 텅 빈 그릇처럼 공허하며, 그 불안을 채우기 위해 절대적인 무언가를 갈망한다는 사실을 살펴봤다. 시대가 변해도 인간이 느끼는 이 '불안의 총량'은 일정하게 보존될 것이다. 따라서 자산 일부를 '안정제'에 투입하는 일은 훌륭한 심리적 헤지 수단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투자자가 반드시 던져야 할 질문이 있다. “그래, 토템은 필요하다. 그런데 그게 꼭 금이나 비트코인이어야 하는가?"
인류 역사에서 종교는 필수 불가결한 요소였을지 모르지만, 그 종교가 반드시 '기독교'나 '불교'여야 할 필연적인 이유는 없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제우스가 없으면 세상이 무너질 줄 알았지만, 지금 제우스 신전은 관광지가 되었다. 인간은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신을 찾지만, 그 ‘대상의 이름’은 언제든 바뀔 수 있다.
이것은 투자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금과 비트코인에 부여한 가치는 논리적 필연이 아니라, 우연한 역사적 선택과 합의의 결과일 뿐이다. 금이 아니라 백금일 수도 있었고, 비트코인이 아니라 이더리움일 수도 있었다.
누군가 만약 "비트코인만이 유일한 구원"이라고 믿는다면, 그것은 자산을 메타적 차원에서 바라보는 투자자의 관점이라 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것은 마치 특정 교리에 심취한 신도가 되어버린 것과도 같다. 이미 '내면화'라는 최면에 걸려, 이것이 우연히 선택된 도구임을 잊어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믿음은 강력하지만, 동시에 가변적이다. 우리가 "비트코인은 혁신이다", "금은 영원하다"라고 굳게 믿고 있는 이 내면화의 최면은 언제든지 깨질 수 있다.
생각해보자. 기독교인은 예수가 물 위를 걸어서 믿는 것이 아니다. 그저 믿고 싶어서 믿는 것이다. 현대 과학은 스마트폰으로 물 위를 걷는 것보다 더한 기적을 매일 보여주지만, 우리는 스마트폰을 숭배하지 않는다. 즉, 금의 불변성이나 비트코인의 블록체인 기술 같은 ‘속성’ 자체가 영원한 가치를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인간의 결핍과 욕망이 다른 곳으로 이동하면, 거대했던 신전도 순식간에 텅 빌 수 있다. 만약 인류가 우주로 진출해 금이 흔한 행성을 발견한다면? 혹은 양자 컴퓨터가 등장해 암호 체계에 대한 근원적 공포가 생긴다면? 그때도 우리는 이 노란 돌멩이와 데이터 쪼가리를 숭배할까? 믿음이 사라진 자리에는 아무런 내재 가치도 없는 차가운 광물과 코드만 남게 된다.
또한 역사를 돌이켜보면, 아노미를 잠재운 실질적인 힘은 금이나 코인이 아니라 인간이 만든 ‘제도’였다. 왕정이 무너졌을 때 질서를 잡은 것은 황금이 아니라 민주정이었고, 금융 위기가 왔을 때 시스템을 복구한 것은 비트코인이 아니라 새로운 금융 규제였다. 실제로 현 시스템의 위기가 온다고 해도 이런 자산이 날 지켜줄 수 있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토템은 마음을 달래주는 '진정제'일 뿐, 문제를 해결하는 '치료제'는 아니다.
한편 워렌 버핏이 금을 싫어하는 이유가 단순히 "생산물이 없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진짜 문제는 "도대체 이 자산의 적정 가격을 얼마로 매겨야 하는가?"에 있다. 생산물이 있는 기업은 이익을 계산해 주가를 산정할 수 있다. 하지만 금과 비트코인의 가격은 오직 '사람들의 불안 크기'와 '믿음의 강도'에 달려 있다.
예컨대 누군가 당신에게 "전 세계 기독교인들의 헌금을 수취할 권리의 0.001%"를 판다고 제안한다면, 당신은 얼마를 지불하겠는가? 현재 교세가 크니 현금 흐름은 좋을 것이다. 하지만 미래에도 신도 수가 유지될지, 사람들이 헌금을 얼마나 낼지, 혹시 다른 종교로 개종하지 않을지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욕망과 믿음은 세상의 변동성에 가장 취약하다. 평화로운 시대가 오면 사람들은 신을 찾지 않는다. 반대로 공포가 닥치면 광적으로 매달린다. 이처럼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인간의 마음에 내 자산의 가치를 온전히 맡기는 것은, 어쩌면 가장 위험한 도박일 수 있다. 불안의 크기라는 본질을 측정하지 않고 금의 전체 시장 규모와 그 추세만으로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인식과 문화의 변화, 즉 레짐 체인지에 그대로 노출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 개인의 인생은 자산의 역사 보다 훨씬 짧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금은 결국 우상향한다", "비트코인은 100년 뒤 미래 화폐가 될 것이다"라는 주장이 맞다고 치자. 인류 역사적 관점에서 금과 비트코인은 훌륭한 헷지 수단일 수 있다. 하지만 우리의 노후 준비 기간 기껏해야 20~30년이다. 내가 은퇴 자금을 써야 하는 그 시점에, 하필이면 금에 대한 대중의 믿음이 식어버리는 '단기적 패러다임의 변화'가 온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100년의 그래프를 평탄화하면 우상향일지 몰라도, 그 중간에는 믿음이 흔들리고 가격이 반토막 나는 '지옥의 구간'이 반드시 존재한다. 자산을 매각해야 하는 순간에 닥친 폭락, 즉 '시퀀스 리스크' 앞에서 "역사적으로 회복된다"는 말은 아무런 위로가 되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안정제는 안정제일 뿐이다. 그것을 맹신하여 내 삶의 전부를 건다면, 그것은 투자를 하는 것이 아니라 기우제를 지내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우리는 신이 필요해서 신전을 찾을 수 있지만, 제우스 신전의 화석이 되지 않으려면 언제든 도망칠 준비도 되어 있어야 한다.
거리 두기의 미학
나는 노후 준비 클래스를 시작할 때마다 수강생들에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당부하는 말이 있다. "제발 저에게 이런 질문은 하지 말아 주세요. '그래서 금 사요, 팔아요? 비트코인 지금 들어가요, 말아요?''" 무책임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나는 그 답을 알 수 없다. 아니, 세상 그 누구도 정답을 줄 수 없다. 왜냐하면 어떤 자산이든 완벽히 객관적 지표로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마음'에 따라 가치가 요동치기 때문이다.
나는 누군가 얼마나 겁이 많은 사람인지 모른다. 그 사람이 세상의 붕괴를 얼마나 진지하게 걱정하는지, 혹은 비트코인에 대한 믿음이 얼마나 깊은지, 그리고 결정적으로 수명이 얼마나 남았는지 알 수 없다. 보험을 예로 들어보자. 암에 걸릴까 봐 불안해서 암 보험을 5개씩 드는 사람도 있고, 건강을 확신하며 하나도 들지 않는 사람도 있다. 누구도 전자를 겁쟁이라 비웃을 수 없고, 후자를 용감하다고 칭송할 수 없다. 그것은 각자가 감당할 수 있는 '불안의 크기'와 지불할 용의가 있는 '비용의 문제'일 뿐이다. 대체 자산의 본질은 물리적 생산물이 아니라 무형의 생산물, 바로 ‘심리적 헤징’에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 글을 통해 대체 자산들의 이면을 파헤쳐 보았다. 먼저 피터 버거의 관점에서 인간성의 단편과 종교현상으로 진단해보았다. 그에 따르면 우리는 본능이 결여된 동물이다. 불확실한 미래 앞에서 극심한 공포를 느끼며, 이를 잠재울 절대적인 무언가를 끊임없이 갈망한다. 이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인류는 '신성한 지붕'을 만들었다. 과거에는 그것이 종교였고, 자본주의 시대에는 금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리고 디지털 시대에는 비트코인이 새로운 토템으로 떠오르고 있다. 이로써 워렌 버핏의 논의를 반박해봤다. 그는 금이 생산물이 없다며 비판했지만, 우리는 알게 되었다. 이 자산들은 이자를 낳지 않는 대신, '마음의 평화'라는 무형의 가치를 생산한다는 것을. 하지만 이 모든 것은 결국 인간의 약속이자 믿음일 뿐이다. 영원한 신전은 없다. 패러다임이 바뀌거나 믿음이 깨지면, 자산은 언제든 차가운 돌덩이와 데이터 조각으로 돌아갈 수 있다.
결국 결론은 하나다. 어떤 자산과도 마찬가지로, 금과 비트코인은 그저 '도구'의 일종이다. 도구는 도구일 뿐, 숭배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여기서 필요한 태도는 독일의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말한 ‘소격 효과’, 즉 ‘거리 두기’다. 그는 무대 위 배우의 연기에 너무 몰입해 울고 불고 하지 말고, 한 걸음 물러서서 "저건 연극이야"라고 냉철하게 바라보는 관객이 되어야 한다고 주문했다.
투자도 마찬가지다. 금이나 비트코인이 주는 '영원불멸의 환상'에 취해 전 재산을 헌금하듯 바치는 광신도가 되어서는 안 된다. 반대로 "생산성이 없다"며 무조건 배척하는 꽉 막힌 회의론자가 될 필요도 없다. 그저 도구로서 이용하면 된다.
"세상이 좀 불안하네? 내 마음의 평화를 위해 보험료 내는 셈 치고 자산의 5% 정도만 금을 사둘까?" 혹은 "금의 가격이 오르네, 사람들이 미래에 대해 더 불안하게 생각하고 있나 보다. 나는 어떻게 대비를 할까?"
딱 이 정도의 '적당한 거리두기'가 우리의 계좌와 멘탈을 모두 지키는 대체자산에 대한 최적의 포지션이 아닐까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