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 현대 중동의 탄생 - 데이비드 프롬킨




원제 A Peace to End All Peace
독서모임에서 읽은 책인데, 다 읽어낸 뿌듯함을 주체할 수 없어 헉헉거리다가 여기에도 올려봄
--
책장에 꽂아두기 좋은, 읽어서 뿌듯한, (어디 가서 읽었다고 뽐내기 좋은) 책들이 여럿 있다.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케인스의 일반 이론 같은 경제 고전, 데카르트나 홉스 루소 같은 철학 고전에서 포퍼 같은 근현대 사상가들의 책까지.
국제정세 관련 '이런 종류'의 책들로는 키신저 시리즈가 있는데, 세계 질서, 중국 이야기, 몇 년 전 외교 까지 읽었다. 그와중에 항상 눈에 밟히던 책이 바로 이 책, 현대 중동의 탄생. 1판 3쇄, 2015년 2월 23일 발행인 걸 보면, 아랍의 봄과 IS 등 잊을만하면 등장하는 중동 사태를 제대로 공부하겠다며 30대 초반의 열기로 구매했던 것 같다. 그리고 10년 넘게 책장 간지를 뽐내며 '언젠가 읽어야지' 목록의 최상단에 자리잡았고, 드디어 '해치웠다.' (이 클리셰가 늘 그렇듯, 해치웠나를 외칠 땐 해치운 게 아니라는 함정이 있지만.)
중동에 대해서 기존에 알고 있던 건, OPEC, 한국 건설사, 미국 관계 등의 단편적인 지식과, 과거 몇몇 책과 영화를 통해 접한 이슬람에 대한 지식들 정도였다. 거칠게 요약하자면 이슬람이라는 종교가 있고, 오랜 기간 유목민 생활을 했고, 오스만의 지배를 받다가, 1차대전 이후 강대국의 입맛에 맞게 갈갈이 찢어지고, 국가를 경험해보지 못한 채 수천 년을 살다가 갑자기 현대 국가 체제에 '던져진' 사람들, 그래서 분쟁은 필연이다, 라는 정도?
이 책을 읽으며, 기존의 관념이 얼마나 나이브했는지 깨달았고, 아직도 알아야 할 것들이 터무니 없이 많지만, 그래도 명왕성을 바라보는 정도의 해상도에서 화성을 바라보는 정도까지는 온 것 같아서 나름 뿌듯하다.
아무리 AI 시대라도, 아니 오히려, AI 시대일수록, 나의 언어로 내가 원점에서부터 스토리텔링하는 능력은 중요하다. 그 자체로서도, 역량 강화를 위한 훈련으로서도. 자 그래서 현대 중동은 어떻게 탄생되었나.
책은 1914-1922 시기를 다룬다. 세계사를 약간이라도 공부한 사람은 바로 알겠지만, 1914년은 1차대전이 발발한 시기다. 1차대전이 끝난 시기는? 이게 좀 모호한데. 휴전협상은 1918년에 되었고, 베르사유조약은 1919년에 채택된다. 일단 총을 거둬들인 건 1918년인데, 그렇다고 1919년에 모든 게 끝났느냐, 그렇지는 않고, '전리품'을 확보하기 위한 투쟁으로서 후속전쟁이 좀 더 있긴 했다.
1914년은 어떤 시대였느냐. 1871년 독일 통일, 패권국 영국은 미국과 독일 중 누가 더 위협적인가를 저울질, 독일이 더 위험하다고 판단, 독일을 봉쇄하기 시작. 프랑스, 러시아와 동맹을 맺으며 독일을 포위함. 그간 프로이센의 천재 비스마르크는 주변 강대국을 '서로 간에는 멀게, 독일과는 가깝게' 만드는 천재적인 외교술을 펼쳤으나, 비스마르크 경질 이후 후임자들은 그런 기술을 이어받지 못함. 비스마르크의 'Realpolitik'의 섬세함을 체화하지 못하고 표면적인 '힘의 논리'만을 계승하여, 안 되면 군대로 밀어버리면 되지 뭐 하는 외교를 펼쳤음
1차대전의 발발 원인은 여러 해석이 있으나 넘어가고(키신저는 동맹의 형태와 전쟁 발발 조건 두 가지를 꼽음), 경과만 보자면, 오스트리아 황태자 암살,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최후통첩, 선전포고, 세르비아의 보호국인 러시아가 동원령 선포, 독일이 러시아에 선전포고, 그리고는 갑자기 프랑스를 공격하겠다며 벨기에를 침공, 벨기에의 보호국인 영국이 참전. 대충 이런 식으로 흘러갔음
이와중에 오스만은 왜 낀 거냐가 약간의 미스터리 중 하나인데, 두 가지 설이 있음. 첫 번째는 처칠이 영국에서 건조중이던 오스만 배를 압류해서 오스만의 반영 감정을 자극했다는 것, 두 번째는 오스만이 이미 독일 편으로 기울어져 있어서 처칠이 자국에서 건조한 배가 적국으로 넘어가는 걸 그냥 둘 수 없어서 배를 압류했다는 것
국제분쟁이라는 게 딱 어느 한 쪽의 인과만으로 설명할 수 없고, 또한 많은 설명은 사후에 상대측에 책임을 묻기 위한 용도, 즉 설명 자체가 정치적 의도를 띄는 경우가 많음. 그러므로 뭐가 진실인지는 '모른다'라고 두는 게 대체로 현명한 판단일 것임. 그리고 대체로 둘 다 기여했을 것임
정황상 오스만 입장에서 가장 큰 위협은 러시아의 남하였음. 이미 민족주의다 뭐다 해서 발칸 국가들이 독립하고 이집트는 영국이랑 손을 잡고, 영토가 하나씩 뜯겨나가던 오스만이었음. 러시아는 상대적으로 뒤늦게 식민지 쟁탈전에 참가하여, 매우 빠르게 영토를 넓혀나가던 중이었고, 가장 좋은 먹잇감이 오스만. 오스만 입장에서는 누가 되었든 러시아의 남하를 막아주기만 하면 감사한 상황이었고, 한때는 영국이 그 역할을 해주었으나, 전쟁을 치밀하게 준비하던 독일이 오스만에 적극적으로 손을 내밀었음. 추측컨대 오스만 내에서도 친독과 친영이 왔다갔다했을 거고, 해석에 따라서 친독으로 이미 기울었다고 볼 수 있음. 처칠은 그 해석을 믿었고, 군함을 압류함으로써 그 진실을 현실화, 즉 자기실현적 예언으로 만들어버린 것일 수도 있음
본 책에서 오스만은 영국에 빈정상하긴 했지만, 끝까지 미적거리는 태도를 보이면서 참전을 거부했고, 오스만군으로 편입된 독일 함대가 일부러 러시아에 발포하면서 오스만의 참전을 획책하는 등, 멀리서 보면 희극인 상황이 벌어짐. 각종 오해와 오판이 쌓이긴 했지만, 어쨌거나 1914년 11월, 전쟁 발발 4개월 만에 오스만도 참전
1차대전 초기 전투는 슐리펜 계획에 따라 이루어짐. (과장되었다는 설도 있는데, 어쨌거나 초기 기동이 수정된 슐리펜 계획을 따라 갔으므로 슐리펜 계획이 실존했다고 보아도 무방.) 독일이 가장 두려워한 건 양면전쟁. 유럽 중부의 강대국이 가지는 가장 큰 난제임. 독일의 해법은, 러시아는 동원이 오래 걸리고, 독일은 도로망이 잘 깔려있으니, 빠르게 프랑스를 점령하고 동부전선으로 군을 돌려서 러시아를 상대한다였음. 근데 여기서 오판은 영국의 빠른 참전
1914년 9월 마른 전투에서 독일의 진격이 저지되고, 독일은 북쪽으로 계속 우회, 연합군도 북쪽으로 따라서 계속 전선을 늘림. 지옥같은 참호전. 교착상태.
이후 이걸 타개할 방안은, (지도를 보자) 북해, 발칸 서부, 발칸 동부, 흑해 등 다양한 루트가 있음. 처칠은 최초에 북해쪽을 주장했음. 어느 쪽이든 만만치 않음. 북해쪽은 독일 해군의 본진이라 방어가 철저함. 발칸 서부는 이탈리아의 피아식별이 애매하고 산맥을 또 넘어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둘러싸여서 집중포화를 맞을 수 있음. 발칸 동부, 다르다넬스를 거쳐서 동맹국의 배후를 치는 안이 채택됨
이 안도 단점이 매우 많은데, 오스만이 참전한 상태에서 다르다넬스를 뚫어내기 어려움. 거길 뚫더라도 전선이 길어지고 동맹국의 반격에 압살당하기 딱 좋음
그럼에도 이 안이 채택된 건, 일단 오스만이 캅카스를 넘어서 러시아를 공격하면서 동부전선이 취약해졌음. 서부전선이 버티는 건 그나마 동부전선으로 독일군이 분산되어있기 때문이었는데, 동부전선이 밀리면 끝장남. 그리고 오스만군은 정예 영국군이 쉽게 이길 수 있을 거라고 봤음. 이 판단은 모순적인데, 오스만군이 오합지졸이면 러시아를 도와주지 않아도 되는 거고, 오스만군이 잘 싸운다면 다르다넬스를 그렇게 헐렁하게 공격해서는 안 됐음. 여기서 이 책의 디테일이 잘 나오는데, 오스만군은 오합지졸이 맞았는데, 러시아는 그 못지않은 쫄보여서 다급하게 지원요청을 보냈던 거고, 영국군은 잘 싸우긴 하지만 중동에 대한 정보망이 부실 + 이집트성의 야망 덕분에 다르다넬스를 공격하게 됨
그리고 전투는 폭망. 이후 드러난 정보를 보면 다르다넬스의 수비군은 퇴각 일보직전이었는데, 영국함대가 기뢰에 몇번 격침되고 의기소침해서, 야 쟤네도 꽤 잘 싸우네, 어떡하지 하다가 지상군 파견하고, 지상군도 진지 점령 다 해놓고는 후속조치가 이루어지지 않아서, 동맹군이 집결해서 반격할 시간을 벌어줌. 동맹군에서도 상당한 변화가 있었는데, 독일군이 전쟁수행을 위임받았고, 유능한 장교를 뽑고, 체계적인 지휘를 함. 이 때 두각을 보인 사람이 훗날의 터키 건국영웅 케말 아타튀르크
이렇게 다르다넬스가 막히고 나니까, 영국은 중동 본진을 처리해야겠다 싶었음. 오스만을 먼저 처리하면 아나톨리아-보스포로스-카프카스 전역을 통제할 수 있음. 그럼 동부전선에서 러시아와 함께해서 승리. 근데 이게 딱 봐도 말이 안 되는 게,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함. 오스만을 수장만 빠르게 제거하고 항복을 받아내는 형태의 빠른 승리를 얻을 수 있어야 하고, 그때까지 서부전선이 버틸 수 있어야 하는 거. 일종의 영국판 슐리펜 ...

중동 짬밥이 부족하다...

19세기~20세기초의 서양 기준으로 명백하게 부도덕하다고 여겨진 행위들에는 다음과 같은 행위가 있었습니다. 1. 불쌍하고 모자란 흑인들을 노예로 착취해서 같은 백인 자영농의 일자리를 빼앗는 일(남북전쟁 발발원인1) 2. 흑인 노예들을 성적으로 착취해서 백인의 피를 더럽히는 일(남북전쟁 발발원인2) 3. 문명을 전파한다는 명목으로 아편을 팔아먹는 일 4. 불쌍한 아프리카인들에게 주님의 말씀을 전파하겠다고 선전해서 영토를 인정받은 다음 고무 할당량을 채워오지 않으면 손목을 자르던 일...당장은 이정도만 생각이 나네요.

그리고 중동의 낙후성(?)에 대해 또다른 견해를 얹자면, 중동은 인류 문명이 가장 먼저 시작된 공간이고 그래서 해당 지역의 사람들이 수천년에 걸쳐서 발달시켜온 고유한 감성과 문화, 인식들이 있습니다. 이걸 영국이나 프랑스가 와서 100년정도 간접통치했다고 바꿀 능력이 있다고 보기는 어렵지 않나 싶습니다. 즉, 현재 중동의 혼란은 특정한 국가나 민족, 종교의 귀책이 아니라 중동이라는 땅이 만들어내는 역학 그자체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합니다.

984페이지.. 저도 며칠 날 잡고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토론 주제들도 너무 좋네요!

재미있게 잘읽었습니다. 알파고 유트브를 봤던터라 읽으니 좀 더 이해가 잘되네요 .
중동의 비극은 국가주의라는 시대적 흐름 , 그리고 영국의 전세이중계약 사기, 석유를 둘러싼 여러 제후,토착민들의 권력다툼 이로 인한 통치수단과 명분으로써 코란해석의 다양성 ,에너지 패권국의 출현을 원치않는 미국의 교묘한 농간 .그리고 이러한 종교적 해석을 통한 엘리트들의 컨트롤에 놀아나는 여러 무장단체들,,

잘 읽었습니다.

중동에서 한동안 근무하면서 중동의 역사와 문화, 종교관 등에 대해서 생각해 볼 시간이 있었지만, 이렇게 넓은 시계열로 펼쳐본 적은 없었습니다. 참 도움이 많이 되는 글입니다. 특히 중동 사람들에게 부족했던 것은 '시간'이었을 거라는 이야기에 상당한 동감을 했습니다.
독서토론에 제시할 질문들에 저도 스스로의 답을 달아봐야겠습니다.

반가운 글을 16시간이나 늦게 확인하다니! 숙원의 퀘스트를 클리어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항상 감사감사드립니다!

이렇게 긴~~~~~~~~ 책은 정독하시나요? 아는 건 넘어가고 모르는 것만 쓱- 읽으시나요?
순수한 독서 질문입니다..

너무 재밌습니다.
중동의 분쟁이 유럽 열강 때문이라고 하도 들어서 그런가보다 했는데 써주신 글을 보니까 그게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