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nzeen의 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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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zeen
2026.04.09

이미 많은 분들의 공유를 받은 글인것 같지만, 나도 두고두고 읽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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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KOHO
2026.04.06

인생의 최적해

우리는 인생을 풀어야 할 문제처럼 대한다. 더 좋은 대학, 더 좋은 직장, 더 높은 연봉, 더 넓은 집. 마치 어딘가에 정답이 있고, 그 정답에 가까워지는 것이 삶의 목적인 것처럼. 나보다 대단한 사람의 인생이 모범답안인 것처럼. 사회가 제시하는 기준을 따라 올라가기만 하면, 언젠가 꼭대기에 도달할 수 있을 것처럼. 이 사고방식에는 이름이 있다. 수학에서는 이것을 optimization(최적화)이라 부른다. 수학이 말하는 최적해 최적화는 수학에서 가장 오래되고 널리 쓰이는 프레임워크 중 하나이다. 핵심은 간단하다. 어떤 목적함수(objective function)가 있고, 그 함수의 값을 최대화하거나 최소화하는 점을 찾는 것이다. 이때 등장하는 개념이 local maximum과 global maximum이다. Local maximum은 "주변보다는 높은 봉우리"이다. 산 위에 서 있으면 사방이 다 내리막이니까, 여기가 꼭대기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조금 더 넓은 지도를 펼쳐보면, 저 멀리 더 높은 봉우리가 있을 수 있다. 그곳이 global maximum이다. 문제는, local maximum에서는 어떤 방향으로 한 걸음을 내딛어도 내려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gradient ascent처럼 국소적인 기울기만 따라가는 방법으로는 local maximum을 빠져나올 수 없다. 더 높은 봉우리로 가려면 일단 내려가야 한다. 잠시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 최적화 이론에서는 이를 위해 simulated annealing 같은 기법을 쓴다. 일부러 무작위로 점프하거나, 일정 확률로 안 좋은 방향도 수용하는 것이다. 인생에 대입하면 이런 뜻이 된다. 지금 자리가 나쁘지 않더라도, 더 좋은 자리로 가기 위해서는 일단 지금보다 나빠지는 것을 감수해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안정적인 직장을 떠나 창업하거나, 잘 나가는 커리어를 접고 전혀 다른 분야를 시작하거나. 매력적인 비유이다. 자기계발서 한 권이 나올 법하다. "리스크를 감수하라, 안전지대를 벗어나라, 그래야 더 높이 갈 수 있다." 하지만 이 비유를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아주 불편한 질문이 고개를 든다. 인생은 어떤 종류의 함수인가 최적화가 작동하려면 세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 목적함수를 알아야 한다. 뭘 최대화하고 있는지를 모르면 gradient(기울기)를 계산할 수 없다. 인생에서 목적함수는 무엇인가? 돈인가, 명예인가, 행복인가, 의미인가? 이 질문에 답하는 것 자체가 이미 인생의 절반이다. 그리고 그 답은 시간에 따라 바뀐다. 둘째, 함수의 형태가 고정되어 있어야 한다. 그래야 한 걸음 내딛는 방향을 정할 수 있다. 그런데 인생의 목적함수는 비정상(non-stationary)이다. 25살의 봉우리와 35살의 봉우리가 다르다. 더 심하게는, 어떤 봉우리에 올라서면 landscape 자체가 바뀌어서 전에 보이지 않던 봉우리가 새로 나타난다. 돈을 벌고 나면 돈이 목적이 아니었음을 깨닫고, 안정을 얻고 나면 모험이 그리워지는 것이다. 셋째, 공간이 연속이어야 한다. 국소적 기울기를 따라가는 방법은 미분 가능한 연속 공간에서만 작동한다. 하지만 인생의 중요한 결정들은 연속이 아니라 이산(discrete)이다. 결혼할 것인가 말 것인가. 퇴사할 것인가 말 것인가. 아이를 가질 것인가 말 것인가. 여기에는 gradient가 존재하지 않는다. "결혼을 0.7만큼 해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미분 불가능한 절벽 앞에서, 뛰어내릴 것인가 말 것인가의 문제인 것이다. 세 조건을 모두 충족하지 못한다. 함수의 형태도 모르고, 형태가 계속 바뀌고, 공간도 연속이 아니다. 이것은 "인생에서 최적해를 찾기 어렵다"는 뜻이 아니다. 더 근본적으로, 인생 전체를 관통하는 단일하고 고정된 최적해를 상정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Sharpe Ratio의 함정 그래도 포기하기 어렵다. 최적해가 없다면, 적어도 "효율적인 삶"은 가능하지 않을까? 투자에서 쓰는 Sharpe ratio라는 지표가 있다. "위험 한 단위당 얼마나 높은 수익을 거두었는가"를 측정하는 것이다. 같은 수익이라면 변동성이 낮을수록, 같은 변동성이라면 수익이 높을수록 좋은 전략이다. 인생에도 비슷한 전략이 있다. 실패 확률이 낮은 선택만 골라서, 효율적으로 괜찮은 결과들을 축적하는 것이다. 좋은 전략처럼 보인다. 하지만 여기에도 맹점이 존재한다. 모두가 비슷한 기준으로 실패 확률을 낮추는 선택만 반복하면, 결과는 중간값 주변으로 모이기 쉽다. 그렇다고 해서 남들과 다른 결과가 반드시 더 큰 변동성에서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차이는 더 큰 리스크뿐 아니라, 더 깊은 숙련, 더 긴 몰입, 더 나은 정보, 더 집요한 실행에서도 생긴다. 다만 그런 선택들은 대개 초기에 비효율적이거나 불안정해 보인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인생에서 더 중요한 것은 변동성 자체가 아니라 망함의 가능성이다. 반복 가능한 확률 게임에서는 손실을 다음 시행에서 만회할 수 있지만, 인생은 샘플이 1개이다. 한 번의 경로에서 회복 불가능한 하방을 맞으면 기대값은 의미를 잃는다. +3σ의 상방을 노리는 전략에는 -3σ의 하방도 함께 들어 있고, 인생에서 그 하방은 단순한 아쉬움이 아니라 삶 전체의 붕괴일 수 있다. 그래서 인생을 Sharpe ratio로만 설명하는 것도, 반대로 큰 성취를 위해서는 무조건 큰 변동성을 감수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도 둘 다 불완전하다. 더 적절한 질문은 이것이다. 어떻게 회복 불가능한 하방은 피하면서도, 나만의 비대칭성은 축적할 것인가. 그런데 그렇다면 이것이 정답인가? 그것도 아니다. 결국 이 역시 또 하나의 optimization일 뿐이다. Explore-Exploit, 그리고 끝나지 않는 최적화 또 다른 프레임워크가 있다. Multi-armed bandit 문제의 explore-exploit tradeoff이다. 여러 대의 슬롯머신 앞에 서 있다. 각 머신의 수익률은 모른다. 지금까지 가장 잘 나온 머신을 계속 당길 것인가(exploit), 아직 안 당겨본 머신을 시도할 것인가(explore). 너무 exploit만 하면 더 좋은 기회를 놓치고, 너무 explore만 하면 이미 좋은 기회를 낭비한다. 인생에 잘 맞는 비유처럼 보인다. "지금 하는 일을 더 파고들 것인가, 해보지 않은 것을 시도할 것인가"는 누구에게나 익숙한 질문이니까. 그런데 한 발 더 들어가면 문제가 보인다. Explore-exploit tradeoff의 이론적 목적은 cumulative reward(누적 보상합)의 최대화이다. 탐색과 활용의 균형을 고민하는 이유는, 결국 전체 보상의 합을 극대화하기 위해서이다. 옷만 바꿔 입었을 뿐, 이것 역시 optimization이다. 여기서 한 가지 재미있는 패턴이 드러난다. 분석적 사고에 익숙한 사람일수록 이 루프에서 빠져나오기 어렵다는 것이다. "인생은 optimization이 아니다"라고 선언한 다음에도, 무의식적으로 이렇게 묻게 된다 : "그러면 optimization이 아닌 방식 중 최적의 방식은 무엇인가?" 한 단계 위로 올라갔을 뿐, meta-optimization*의 루프 안에 여전히 갇혀 있는 것이다. 프레임워크라는 도구가 손에 익은 사람은 모든 것에 프레임워크를 씌우고 싶어 한다. 해가 있다고 믿고, 그 해를 향해 수렴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meta-optimization: 최적화를 최적화하는 과정 남의 함수로 미분하지 말 것 여기서 한 가지 더 불편한 진실이 있다. 인생을 optimization 문제로 대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자기가 설계한 목적함수를 최적화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서 건네받은 목적함수를 최적화하고 있다. 한국 사회는 이 착각을 특히 강화하는 구조를 갖고 있다. 수능 점수 → 대학 서열 → 기업 서열 → 연봉 → 아파트 평수. 마치 단일 목적함수가 존재하고, 모두가 같은 산을 오르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그래서 "나보다 그 함수값이 높은 사람 = 정답에 가까운 사람"이라는 등식이 자연스럽게 성립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봉우리에 선 사람들도 다른 봉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어떤 봉우리에 도달하든, 거기에 서면 전에 보이지 않던 다른 봉우리가 눈에 들어온다. 이것이 인생의 landscape가 non-stationary라는 말의 체감적 의미이다*. 남의 목적함수로 자기 인생의 방향을 정하는 것. 열심히 수렴했는데, 도착해보니 내 산이 아닌 것. 이것이 "인생의 최적해를 찾겠다"는 태도의 진짜 위험이다. 해를 찾는 데 너무 몰입한 나머지, 그 함수가 정말 자기 것인지를 점검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인생이란 지형 자체가 고정되어 있지 않다 Satisficing : 충분함의 기술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Herbert Simon이라는 경제학자가 있다. 그는 Satisficing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satisfy(만족)와 suffice(충분하다)를 합친 조어이다. 인간은 optimization machine(최적화 기계)이 아니다. 모든 선택지를 비교 분석하여 최선을 고르는 것은 이론적으로는 가능할지 모르나, 현실에서는 정보도 부족하고 시간도 부족하고 인지 자원도 부족하다. 그래서 실제 인간의 의사결정은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기준을 정하고, 그 기준을 넘는 선택지를 택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이것이 satisficing이다. 단일하고 고정된 최적해를 상정할 수 없는 문제에서 최적해를 찾으려 하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끝나지 않는 탐색이 벌어진다. 어떤 봉우리에 올라도 다른 봉우리가 보이고, 어떤 선택을 해도 하지 않은 선택이 신경 쓰이고, 어떤 자리에 서도 "여기가 정말 최선인가"라는 질문이 떠나지 않는다. "충분하다"를 인정하는 것은 포기가 아니다. 단일하고 고정된 최적해를 전제할 수 없는 문제를, 그런 문제로 올바르게 인식하는 것이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여기가 충분하다"고 받아들인 사람이 오히려 탐색을 더 잘한다. 불안에서 출발하는 탐색은 무엇을 찾아도 만족하지 못한다. 안정된 베이스캠프가 있는 사람이 더 멀리까지 등반할 수 있는 법이다. 인생은 optimization이 아니다 결국 돌고 돌아 결론에 도달한다. 인생에는 단일하고 고정된 최적해가 없다. 목적함수를 모르고, 함수의 형태가 바뀌고, 결정 공간이 연속이지도 않다. 이 조건에서 "최적해를 찾겠다"는 것은, 함수의 형태도 모르면서 수렴을 선언하는 것과 같다. Global maximum은 도달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인생이라는 문제에서는 상정하기 어려운 개념인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 것인가? 여기에 깔끔한 답을 제시하는 순간, 다시 optimization의 루프에 빠진다. "최적이 아닌 삶을 사는 최적의 방법"이라는 모순 속으로. 답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냥 사는 것이다. 관심 가는 것을 해보고, 아니면 그만두고, 좋은 사람 옆에 있고, 가끔 후회하고,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 굳이 이 비유를 이어가자면, 지금 서 있는 곳이 꽤 괜찮은 봉우리일 수도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 수학은 아름답고, 프레임워크는 유용하다. 하지만 인생은 풀어야 할 문제가 아니다. 이 글 자체가 "인생은 optimization이 아니다"를 논리적으로 증명하려는 시도인 셈이니, 아이러니하기 짝이 없다. 프레임워크로 프레임워크의 한계를 논하는 모순. 하지만 그 모순을 알아차리는 것만으로도, 한 발짝은 빠져나온 것이라 믿고 싶다. -KIKO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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