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연재] Reel: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다중우주의 포커판에서 살아남는 법”






해당 포스팅은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미국에서 세탁소를 운영하며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중년의 중국계 이민자 여성 '에블린 왕’(Evelyn Quan Wang)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에블린의 영화속 처해진 현실은 제목처럼 모든 곳에서(Everywhere), 모든 것을(Everything), 한꺼번에(All at once)' 감당해야 하는 혼돈 그 자체였다. 그녀는 국세청(IRS)으로 부터 세무 조사를 받고 있으며, 유약한 남편 웨이먼드는 이혼 서류를 내밀려 한다. 또한 그녀는 아버지 공공(Gong Gong)의 수발을 들어야 하는 동시에, 동성 연인 베키를 데려온 우울증 걸린 딸 조이와는 깊은 갈등을 겪고 있었다.
이토록 팍팍한 현실을 마주하던 어느 날, 국세청 건물 엘리베이터에서 남편 웨이먼드의 몸에 다른 평행 우주(알파버스)에서 온 ‘알파 웨이먼드’가 접속하면서 에블린은 다중우주의 존재를 깨닫게 된다. 인간의 모든 선택의 순간마다 새로운 우주가 분기되며, 다른 우주의 에블린은 과거에 다른 선택을 함으로써 쿵푸 액션스타가 되기도 하고, 철판구이 요리사가 되기도 하는 등 수많은 다른 인생을 살고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 다른 우주의 자신과 연결되어 그들의 기술과 기억을 불러오는 기술인 ‘버스-점핑(verse-jumping)’을 하기 위해서는, 통계적으로 전혀 개연성이 없는 기상천외하고 어처구니 없는 행동을 해야만 했다.
영화 내에서 이 다중우주 전체를 위협하는 절대악은 다름 아닌 알파버스의 딸 조이, 즉 ‘조부 투파키(Jobu Tupaki)’다. 알파 에블린의 강압적인 훈련으로 인해 모든 다중우주를 동시에 경험하게 된 조부 투파키는, 세상의 모든 가능성과 경험을 맛본 후 “어떤 것도 의미가 없다(Nothings Matters)”는 허무주의에 빠져버린다. 그녀는 세상의 모든 것을 올려놓은 블랙홀 같은 검은색 ‘에브리씽 베이글(Everything Bagel)을 창조하며, 다중우주 전체를 소멸시키고자 한다.
또 다른 흥미로운 지점은 이러한 조부 투파키의 허무주의를 막기 위해 평행우주를 건너온 이들이 선택한 구원자는 수많은 다중우주의 에블린 중 ‘가장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최악의 실패를 거듭한 에블린’이었다. 영화는 가장 보잘것없는 에블린이 조부 투파키의 베이글에 맞서, 장난스럽고 사소한 다정함(인형 눈알)을 무기로 맞서 싸워나간다.
인생은 B(Birth)와 D(Death) 사이의 수많은 선택(C)이다.
영화’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핵심 장치인 다중우주는 모든 선택의 순간마다 새로운 우주가 분기된다는 점에서, ‘확률론적 세계관’을 보여준다.

(이미지 출처: https://sketchplanations.com/laplaces-demon)
만약 에블린의 삶을 고전적인 결정론적 세계관에서 본다면, 그녀의 고단한 현실은 이미 태초부터 정해진 필연에 불과한다. 1814년 피에르시몽 라플라스는 우주를 구성하는 모든 입자의 위치와 자연을 움직이는 모든 힘을 아는 거대한 지성이 있다면, 과거와 미래의 모든 움직임을 단 하나의 공식으로 압축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훗날 이를 ‘라플라스의 악마(Laplace's demon)’라 불리며, 이 지성에게 불확실성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미래는 과거와 마찬가지로 눈앞에 명백히 알 수 있는 것이다. 라플라스를 비롯한 고전적 결정론자들에게 ‘우연’이나 ‘확률’이란 실제로 존재하는 힘이 아니라 단지 진정한 원인을 파악하지 못한 인간의 ‘무지에 대한 척도’였다. 이처럼 엄격한 결정론의 관점에서 우주는 결말이 정해진 ‘닫힌 세계’이며, 다중우주는 존재할 수 없다.
하지만 인류는 라플라스의 악마에서 벗어나, 점차 확률을 통해 미래의 불확실성을 스스로 선택하고 통제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르네상스 이후 인류는 확률 이론을 발전시켜 가면서, 인간이 더 이상 자연 앞에서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리스크를 합리적으로 관리하게 되었다. <우연 길들이기>의 저자 이언 해킹은 19세기를 거치며 결정론이 서서히 침식되고, 그 자리에 ‘우연’의 자율적 법칙이 들어서게된 패러다임의 전환을 짚어냈다. 통계와 확률이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으로 자리 잡으면서 우연과 확률이야 말로 자연과 사회의 근본적인 과정을 구성하는 실체임을 밝혀졌다. 즉, 라플라스의 악마가 써 놓은 단일 궤도는 무너지고 확률론이 새로운 세계의 법칙으로 부상한 것이다.
이러한 확률론적 세계관은 칼포퍼(Karl Popper)의 사상에서 가장 역동적인 형태로 피어난다. 포퍼는 과거나 현재가 미래에 엄격한 제한을 가할 수 있지만, 결코 미래가 과거나 현재에 이미 포함되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열린 우주(open universe)’를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는 신이 태초부터 모든 것이 결정된 죽은 세계를 창조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도 예측 불가능한 사건들로 가득 찬 살아있는 우주를 더욱 흥미롭게 생각하셨을 것”이라며 비결정론에 입각한 생동감 넘치는 세계관을 옹호했다.
그렇기에, 영화에서는 다른 우주의 자신과 연결(verse-jumping)되기 위한 행동으로, 립밤을 씹어 먹거나 종이에 손을 베이는 등의 기상천외한 예측불가능한 이상행동은 열린우주 설정에서 중요하다. 이는 라플라스의 악마가 묶어놓은 인과율의 닫힌 사슬을 억지로 끊어내고, ‘절대적 우연과 확률’을 세계의 틈새로 끌어들이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 실존주의자 사르트르의 말로 알려져 있으나, 정확한 출처를 확인할 수 없다.

이러한 확률적 세계관은 투자자에게는 익숙하면서도, 중요하다. 과거의 결정론적 세계관에서 벗어나 미래를 확률과 우연의 공간으로 인식하는 것은 인간이 능동적으로 ‘리스크’를 통제하고 선택할 수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며, 또 투자란 결국 아직 오지않은 불확실한 미래의 여러 시나리오 중 가장 유리한 곳에 자원을 배분하는 확률적 의사결정 과정이기 때문이다.
우리 삶에서 내리는 결정들—비즈니스, 저축과 소비, 건강과 생활 방식의 선택, 자녀 양육, 그리고 인간관계 등—은 “게임”에 쉽게 부합한다. (중략)… 반면 포커는 불완전한 정보가 존재하는 게임이다. 이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불확실성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결정을 내려야 하는 게임이다. (중략)… 하지만 인생은 (체스보다) 포커와 더 비슷하다. -애니 듀크, <Thinking in Bets>
전미 포커 챔피언이자 인지심리학자인 애니 듀크는 세상과 투자는 ‘체스’가 아니라 ‘포커’에 가깝다고 주장한다. 체스는 숨겨진 정보가 없고 우연이 개입할 여지가 없는 결정론적인 게임이다. 반면 포커는 불완전한 정보와 ...

영화가 보고 싶어지네요. 한번 봐야 겠어요
감사합니다..

요즘 스타일로 세련되게 잘 만들어진 드라마 영화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적어주신 고찰 덕에 한층 더 깊이 되새겨볼 수 있었어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능동적 허무주의. 다정한 태도는 허무주의가 만연한 세상에 반항하며 싸울 수 있는 나의 무기이다. 잘 읽었습니다.
슈루룩 가볍게 봤던 영화였는데 정말 잘 해석해주신 것 같아요.

'다정함'을 찾아와야겠습니다. 부족함을 채울 방법을 생각해보겠습니다. 참 좋은 감상문을 감상한 기분입니다.
그리고 재밌는 멜로디를 들려준 노래 소개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