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지평이 좁아진 국가들
편집자가 되어 작가(Claude)를 열심히 다독이며 썼습니다. 글은 좀 쓰는것 같은데, 논리의 정합성은 좀 부족하더군요. 저도 글은 써본적이 없지만, 편집자가 된 것처럼 열심히 피드백하면서 배웠습니다.
호르무즈 위기가 드러낸 것, 그리고 한국의 선택
— 단극 체제의 정중한 재편인가, 혼란스러운 붕괴인가 —
프롤로그: 2026년 봄, 조용한 풍경
2026년 4월 현재, 호르무즈 해협은 사실상 닫혀 있다. 2월 28일 미국·이스라엘의 이란 주요 시설 타격 이후, 이란 혁명수비대(IRGC)는 해협을 선별적으로 통제한다. 중국·인도·파키스탄·터키·말레이시아·태국·필리핀 선박은 통과를 허용하고, 미국·영국·이스라엘 선적은 봉쇄된다. 통과하는 선박은 위안화로 통행료를 낸다. 선박당 100만~200만 달러.
평상시 하루 130척이 통과하던 이 해협에, 지금은 3척이 지난다. 전체의 10% 미만.
그런데 이상한 일이 있다. 브렌트유는 배럴당 96.32달러. 전년 대비 42% 상승이지만, 시장이 예상했던 150~200달러 수준에는 한참 못 미친다. 6월 선물 99달러에서 12월 선물 82달러로 떨어지는 극단적 백워데이션. 시장이 이 상황을 '일시적 위기'로 보고 있다는 신호다.
4월 말 마지막 휴전 시한이 도래한다. 이슬라마바드 협상은 4월 11일 결렬됐다. 카타르 라스라판 LNG 시설은 피격됐고, 불가항력 선언으로 LNG와 헬륨 공급이 중단됐다. GCC 국가들의 경제 모델은 흔들린다. 아랍에미리트는 연준 스왑라인을 요청하면서 동시에 중국과의 관계를 심화한다. 전 세계 3억 1,800만 명이 식량 위기 위험에 처했다. 비료 공급망이 무너진 것이다. USAID는 이미 폐쇄됐다.
이 모든 일이 일어나고 있는데, 시장은 상대적으로 조용하다. 정말 그런가? 어디서 보느냐에 따라 답이 달라진다.
1부. 여섯 가지 신호 — 단극 체제의 해체
1-1. 호르무즈 — 페트로달러의 시험대
호르무즈 상황은 단순한 중동 분쟁이 아니다. 1974년 이후 세계 경제 질서를 떠받쳐온 페트로달러 체제의 직접적 시험이다.
페트로달러 체제의 본질은 이랬다.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주요 산유국이 석유를 오직 달러로만 거래하고, 그 달러 잉여금을 미국 국채에 투자한다. 이 구조가 달러의 세계 기축 지위를 뒷받침했고, 미국은 사실상 '무제한 신용카드'를 갖게 됐다.
이 체제가 흔들리는 신호들은 2020년대 초부터 누적됐다. 러시아가 제재 회피를 위해 비달러 결제망을 구축했고, 이란이 중국·인도와의 유가 결제를 위안화·루피로 전환했고, BRICS+ 확장으로 대안 결제 시스템이 논의됐다.
여기서 흔한 분석의 한계가 있다. 많은 논평가들이 이런 변화를 '소비자 측 이탈'로만 이해한다. 그러나 이 관점은 가장 중요한 변화를 놓친다 — 공급자 측의 이탈이 이미 시작됐다는 사실.
1-2. 공급자 측의 조용한 헤지
사우디의 움직임이 대표적이다. 2000년 사우디 원유 수출 중 미국·유럽이 차지하는 비중은 38%였다. 2022년에는 18%로 떨어졌다. 같은 기간 중국·인도 비중은 6%에서 48%로 증가했다. 고객이 바뀌면 결제 통화도 바뀐다 — 자연스러운 상업적 논리다.
사우디는 전면 탈달러를 선언하지 않는다. 기존 달러 자산도 유지한다. 그러나 동시에 비달러 인프라를 병행 구축한다. 2024년 6월 BIS 주도 mBridge 프로젝트에 가입했고, 2025년 중국과 70억 달러 통화 스왑을 체결했다. 이것을 '이중 전략' 또는 '조용한 헤지'라 부른다. 기존 체제 내 자산은 유지하되 체제 밖 대안 인프라를 병행 구축한다. 헤지를 한다는 것 자체가 기존 체제에 대한 불신의 증거다. 보험을 드는 사람은 화재를 예상하기 때문이다.
주목할 것은 이런 헤지가 언제 본격화됐는지다. 시간표가 의미심장하다. 2018년 카슈끄지 사건 후 미국 정치권의 MBS '왕따' 언사, 2019년 아람코 피격 시 미국의 미온적 방어, 2021년 예멘 지원 철회,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 중 증산 요청을 MBS가 공개 거부, 2023년 가자 작전 전면 지원으로 사우디 만류 무시. 각 사건의 공통점은 이것이다. 미국이 동맹의 이익을 점점 덜 고려하며 움직인다. 국내 정치 논리가 동맹 관리를 초과한다. 정권 이익과 국가 이익이 갈라지는 현상이 외교에 그대로 드러난 것인데, 이 분기 자체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본격적으로 다룬다.
공급자 측 이탈은 소비자 측 이탈보다 훨씬 구조적이다. 공급자가 거래 구조 자체를 바꾸기 시작하면 전체 시스템의 기저층이 흔들린다. 호르무즈에서 이란이 위안화 통행료를 받는 것은 돌출 행동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대안 시스템의 공식화다.
1-3. GCC의 균열 — 가장 오래된 동맹의 재조정
사우디·UAE·카타르 — 지난 50년간 미국의 중동 질서를 뒷받침한 세 기둥이 흔들린다.
UAE는 연준 스왑라인을 요청하면서 동시에 중국 디지털 위안 실험에 참여한다. 카타르는 라스라판 피격 이후 LNG 수출 포트폴리오를 재편 중이다. 유럽 의존을 줄이고 아시아 비중을 높이는 방향.
이들의 공통점은 헤지다. 미국에 전면 등을 돌리진 않는다. 그러나 중국·러시아·인도와의 관계를 실질적으로 심화한다. 이 이중 노선이 가능하다는 것 자체가, 미국의 중동 독점력이 소진됐음을 의미한다.
1-4. 이란 — 저항의 지속가능성
많은 분석가들이 예상한 것은 이랬다. 미국·이스라엘 타격 이후 이란 정권은 붕괴하거나 급속 협상에 나서거나. 그러나 2개월이 지난 지금, 이란은 오히려 자신의 영향권을 공고화했다. 호르무즈를 닫고, 위안화를 받고, 러시아·중국의 실질 지원을 확보했다.
이란 정권의 국내 정당성도 역설적으로 강화됐다. 외부 공격은 내부 결속을 만든다 — 현대 민족국가의 오래된 법칙이다. 정권 교체 시나리오는 당분간 봉인됐다.
1-5. 글로벌 사우스의 이탈
USAID가 폐쇄된 상태에서, 3억 1,800만 명이 식량 위기에 직면했다. 비료 공급망 붕괴, 곡물 수송 차질, 에너지 가격 상승의 삼중 충격이다. 이들 국가들 — 이집트,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 의 반응이 의미심장하다.
'미국은 어디 있는가?'를 묻지 않는다. 이미 답을 안다. 대신 중국, 인도, 러시아, 걸프 산유국들에게 지원을 요청한다. 위기의 구호자가 바뀐 것이다. 그리고 한 번 바뀐 구호 네트워크는 쉽게 되돌아가지 않는다.
1-6. 한국의 대미 의존 심화 — 역설적 신호
다른 신호들이 미국 중심 질서의 이탈을 보여준다면, 한국에서는 역설적으로 의존 심화가 관찰된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2026년 초 — 이란 전쟁 발발과 카타르 라스라판 피격 직후 — 미국 린데·에어프로덕츠와 장기 헬륨 공급 계약을 체결했다. 중동발 헬륨 공급 위기에 대한 긴급 대응이다.
이것은 한국의 전략적 판단이다. 그러나 동시에 구조적 딜레마를 드러낸다. 반도체 공급망이 미국 자원에 의존할수록, 한국은 미국의 지정학적 선택에 연동된다. 안정성을 얻는 대신 자율성을 내준다.
이 여섯 신호를 종합하면, 단극 체제는 일시적 위기가 아니라 구조적 재편 국면에 있다. 그렇다면 다음 질문은 이것이다 — 왜 이 재편이 이토록 혼란스러운가? 왜 '정중한 재편'이 아니라 '어색한 이행'의 모습을 띠는가?
2부. 왜 기회를 놓치는가 — 국가의 시간 지평 축소
모든 질서 전환기에는 정중한 재편의 기회가 있다. 쇠락하는 패권이 품위 있게 자리를 조정하고, 새로운 세력이 책임을 분담하며, 기존 구조의 좋은 부분은 유지되는 경로.
1925년 영국은 금본위 복귀 대신 점진적 재편을 택할 수 있었다. 1956년 영국은 질서 있는 탈식민지화를 선택할 수 있었다. 1991년 소련 붕괴 후 러시아는 점진적 시장 전환을 택할 수 있었다. 모두 놓쳤다.
왜 놓치는가?
흔한 답은 '리더십의 실패'다. 그러나 이 설명은 피상적이다. 각 시기마다 영리한 정치인들이 있었다. 그들의 무능이 아니라 구조의 문제였다.
2-1. 정권 이익과 국가 이익의 분리
문제의 핵심은 이것이다.
국가가 강성할 때는 두 이익이 대체로 일치한다. 경제가 성장하고 국제적 위상이 높아지면 집권 세력도 자연스럽게 혜택을 본다. 정권 유지의 최선의 방법이 국가 이익 증진이다.
그러나 쇠락기나 전환기에는 두 이익이 갈라진다. 국가의 장기 생존을 위해서는 고통스러운 조정이 필요한데, 그 조정은 현 세대의 엘리트에게 손실이다. 그리고 민주주의 정치인에게는 재선 유인이 작동한다. 불편한 진실 — '우리 나라는 예전 같지 않다, 조정이 필요하다' — 보다 편안한 거짓 — '우리는 여전히 위대하다, 외부 적만 없애면 된다' — 이 훨씬 잘 팔린다. 과거 영광의 서사는 유권자에게 파는 정치 상품이 된다.
'Make America Great Again'이 이 메커니즘의 가장 선명한 사례다. 제조업 일자리 상실, 지위 하락 불안, 이민 반감 — 시민이 이미 품고 있던 불만을 '과거 영광 복원'이라는 서사로 묶어 정치 자산으로 전환한 것이다. 엘리트는 이 서사의 생산자가 아니라 중개자다. 시민의 불안을 포장해 되판다. 이 거래가 성립하는 동안 정치인은 권력을 유지하고, 국가의 고통스러운 조정은 미뤄진다. 재편의 기회는 그 사이에 빠져나간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전환의 단기 이익을 누리는 세력이 생겨난다 — 방산 산업, 변동성에서 수익을 내는 금융, 영구 갈등을 원하는 국내외 로비. 이들에게 국가의 정중한 재편은 사업 기회의 종료다.
이런 분리는 개인 악의가 아니다. 체제의 구조적 질환이다. 그리고 이 질환의 가장 무서운 증상은 — 정치가 더 이상 국가 전체 이익을 조율하는 메커니즘으로 작동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2-2. 쇠락기·전환기 국가들이 잃어가는 것
MAGA가 이 메커니즘의 국내 정치적 얼굴이라면, 호르무즈 위기는 그것이 외교에서 만들어내는 결과다. 위기 장기화는 미국 국가 이익에 명백한 손해다. 페트로달러 체제가 흔들리고, 동맹이 이탈하고, 유가 인플레이션이 국내 경제를 위협한다. 그러나 특정 행위자들에게는 이 상황이 유리하다. 네타냐후 연정에는 전쟁 지속이 정치적 수명이다. 트럼프에게 '이란 굴복' 서사는 국내 정치 자산이다. 방산 기업에 이것은 수주 기회다. 월가 일부에게 변동성은 수수료다.
과거에는 중대한 외교 위기 앞에서 미국 정치는 대체로 한 목소리를 냈다. 마셜플랜, 쿠바 미사일 위기, 냉전 종식 처리 — 모두 초당적 합의가 작동했다. 오늘날에는 그렇지 않다. 외교 정책조차 당파적 무기가 됐다. 전 정권의 합의는 다음 정권이 뒤집는다. 동맹국들은 미국과 거래할 때 '어느 미국인가'를 먼저 묻는다.
이 상태에서 체계적으로 잃어가는 것이 있다. 국가의 장기 이익을 중심으로 정치 세력을 조율하는 능력이다. 강성기에는 덜 문제가 된다. 쇠락기나 전환기에는 이 능력이 결정적으로 중요해지고, 동시에 쉽게 잃어버린다.
그리고 이것은 패권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일본의 잃어버린 30년, 이탈리아의 만성 정치 불안, 아르헨티나의 반복되는 실패, 프랑스의 연금 개혁 좌절 — 모두 같은 구조를 공유한다.
국가의 시간 지평이 선거 주기로 축소된 상태에서, 장기 문제들을 해결할 정치적 연합을 만들지 못한다.
왜 이런 일이 생기는가? 한 가지 답은 없다. 세계화로 인한 국가 권력 약화, 디지털 미디어에 의한 정치 단편화, 불평등 증가로 인한 엘리트-대중 분리, 복잡한 문제의 증가와 시민 이해력의 한계. 민주주의에도, 권위주의에도 나타난다. 민주주의에서는 양극화와 선거 주기의 형태로, 권위주의에서는 후계 불확실성과 지도자 개인 리스크의 형태로.
2-3. 이 진단은 한국에도 적용된다
미국만의 문제인가? 아니다. 한국도 같은 증상을 보인다.
한국 국가의 시간 지평 축소는 부동산, 인구, 연금, 노동, 교육 등 여러 영역에서 관찰되지만, 이 글은 그중에서도 외교 영역에 초점을 맞춘다. 앞 장의 단극 체제 해체 논의와 직접 연결된다는 이유도 있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한국 시민이 지난 10년간 학습해온 3축 — 성과·도덕성·절차 — 으로 접근하기에 외교가 가장 쉬운 영역이기 때문이다. 부동산·연금 같은 분야는 가치 충돌이 깊어 정치력 소모가 크지만, 외교에서는 국익이라는 기준이 진영을 덜 갈라놓을 수 있다.
사실 미국 중심 프레임은 오랫동안 한국에 이익이었다. 압도적 단극 체제에서 미국의 안보 우산과 시장 접근은 한국 번영의 토대였다. 바뀔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현재 상황은 그 전제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미국 자신이 단극 체제를 떠받치지 못하고, 동맹 관리보다 국내 정치를 앞세우며, 일방적 요구를 압박 카드로 쓴다. 대외 환경이 변했으니 내부 조정도 필요해진다.
한국 외교의 큰 축은 정권이 바뀌어도 흔들리지 않았었다. 미국 중심성이다. 과거에는 이 프레임이 흔들릴 이유도, 흔들 환경적 요인도 적었다. 그러나 환경이 바뀌는 지금도 이 프레임은 '친미냐 반미냐'의 이분법에 의해 보호받는다. 러시아, 인도, 글로벌 사우스와의 실질적 다축 관계를 논의하는 공론장이 여전히 협소한 이유다.
이제 이 관성을 벗어나 새로운 선택지를 모색하는 것이 한국의 국익에 부합한다. 단극 체제에 기대는 것이 최적 전략이었던 시대는 지나갔고, 여러 축을 동시에 관리하는 국가가 재편기의 비용을 낮춘다. 문제는 이런 재조정이 한 정권의 과제로는 완성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외교 관계는 수년, 수십 년에 걸쳐 축적되는 자산이다. 이념 진영의 교체에 따라 뒤집히면 아무것도 자라지 않는다. 따라서 필요한 것은 다축 외교라는 방향 자체만큼이나, 그 방향을 이념 변동에도 유지할 수 있는 국내 정치적 기반이다.
이 기반이 바로 한국 시민이 지난 10년간 학습해온 3축 평가 역량이다. 성과·도덕성·절차라는 이념 외부의 평가 축이 작동하면, 외교도 '어느 진영의 입장인가'가 아니라 '국익에 부합하는가'로 평가된다. 이것이 외교를 진영 논리에서 분리시켜 장기 구조로 정착시키는 길이다. 지금이 과거와 다른 것은 외부 조건과 내부 조건이 동시에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전자는 재편의 신호들이고, 후자는 시민 평가 역량의 성숙이다. 3부는 이 후자가 실제로 어떤 모양을 하고 있는지를 데이터로 검토한다.
3부. 한국의 독특한 위치 — 다차원 평가의 확장 가능성
3-0. 다차원 평가라는 자산
한국 시민은 지난 10년간 정치를 다차원으로 평가하는 능력을 학습해왔다. 이념 하나가 아니라, 이념에 더해 도덕성·절차·성과의 축으로 정권을 본다. 이 능력이 국가의 다른 영역 — 국제 구조를 읽고 외교 전략을 짜는 힘 — 으로 확장될 수 있는가. 이것이 3·4·5부가 차례로 다룰 질문이다.
'다차원'은 이 글 전체를 관통하는 개념이다. 두 층위에서 같은 종류의 인지가 요구된다. 다만 두 층위의 증명 정도는 같지 않다. 이 차이를 먼저 인정하고 시작하자.
첫 번째 층위 — 시민 정치 평가. 한국 시민은 정권을 이념 하나가 아닌 여러 축으로 평가한다. 도덕성과 절차에서는 진영을 초월하는 기준이 작동하고, 성과 평가에서만 이념적 차이가 유지된다. 이 이원적 구조가 정치인의 시간 지평을 강제로 확장시키고, 포퓰리즘과 극단주의에 대한 저항력을 만든다. 두 층위 중 유일하게 데이터로 확인되는 부분이다. 10년간 누적된 시민 학습의 결과다.
두 번째 층위 — 국가의 대외 인지와 대응. 현재 진행 중인 단극 체제 재편은 유가나 주가로 감지되지 않는다. 결제 인프라, 외환보유고 구성, 동맹의 이중화, 자원 흐름 — 여러 곳을 동시에 봐야 읽힌다. 그리고 관측만으로는 부족하다. 관측이 국가 전략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미·중 이분법을 넘어 러시아·인도·ASEAN·중동·글로벌 사우스를 동시에 관리하는 다축 외교가 다극화되는 세계에서 한국에 요구되는 과제다. 미국의 분석가·학자·전문가들도 재편의 신호를 본다. 관측 능력 자체가 없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정권 이익과 국가 이익의 분리 때문에 관측이 전략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미국은 재편의 기회를 놓칠 가능성이 높다. 한국도 이 위험에서 자유롭지 않다. 다만 시민의 다차원 평가가 이 전환을 떠받칠 수 있는가 — 이것이 열린 질문이다.
두 층위의 관계는 이렇게 정리된다. 첫째 층위는 이미 확인된 자산이고, 둘째 층위는 그 자산이 확장될 수 있는 영역이다. 두 층위가 같은 인지 능력을 공유한다기보다, 첫째 층위의 능력이 둘째 층위의 기반이 된다는 논리에 가깝다. 여러 신호를 동시에 읽고, 단일 축의 유혹을 거부하며, 표면과 기저를 구분하는 — 시민에게서 확인된 이 역량이 국가 역량으로 확장될 수 있을까. 한국이 그 가능성을 가진 사회일 수 있다는 것이, 이 글의 논증이자 출발점이다.
3-1. 한국 시민사회는 성숙해왔다
한국은 민주주의 제도와 외부 환경이 비교적 양호한 편이다. 1987년 헌법은 민주화 세력이 주도한 결과물이고, 대통령 단임제는 권력 집중을 구조적으로 방지하며, 헌법재판소는 2024년 계엄 사태에서 작동함을 증명했다. 그 양호한 그릇 위에서 내용물이 되는 것은 시민 문화다. 그리고 한국 시민사회의 실제 궤적은 데이터가 분명하게 보여준다.
지역주의는 옅어지고 있다. 1992년 14대 대선부터 2022년 20대 대선까지 30년 시계열 분석은, '영남 블록'이 'TK(대구·경북)'로 축소됐고 부산·울산·경남은 수도권과 비슷한 유동적 투표 성향을 보이게 됐음을 확인한다. 거주지 정체성이 출신지 정체성을 대체하고 있으며, 지리적 이동성과 소셜 미디어의 교량형 역할이 이 변화를 가속한다.
위기 대응 역량도 증명됐다. 2016-2017년 촛불 집회가 대통령 탄핵을 이끌었고, 2024년 12월 비상계엄 선포가 단 6시간 만에 국회 표결로 무효화됐다. 시민의 즉각적 저항, 국회의 절차적 대응, 헌법재판소의 탄핵 결정 — 제도와 시민이 결정적 순간에 함께 작동하는 능력을 두 차례 증명했다.
국제 지표에서 한국은 2024년 EIU 민주주의 지수에서 '완전한 민주주의'에서 '결함 있는 민주주의'로 강등됐다. 그러나 이것은 계엄 사태 자체를 반영한 것이고, 그 사태를 시민과 제도가 해결한 역량은 아직 충분히 반영되지 않았다. 비교정치학의 긴 관점에서 보면, 위기를 통과한 민주주의는 위기를 겪지 않은 민주주의보다 견고해지는 경향이 있다.
이 성숙이 구체적으로 어떤 능력의 집적인지 보려면, 지난 10년간 시민이 정권을 평가해온 방식의 변화를 추적하는 것이 가장 분명하다.
3-2. 학습된 시민 — 시민 평가 능력의 10년 진화
한국 시민의 정치 평가 능력이 어떻게 진화해왔는지는 역대 정권의 지지·반대 이유를 시계열로 추적하면 명확히 드러난다. 각 정권 시기마다 시민이 어떤 평가 축을 학습했고, 그 학습이 어떻게 누적됐는지가 보인다.
박근혜 (2013-2017) — 절차라는 결정타
박근혜 정부 초기 지지층은 이념 정체성(박정희 계승)에 주로 의존했다. 취임 후 40% 안정, 2013년 9월 최고 67%. 긍정 요인은 주로 대북·외교 강경 기조로, 전형적 보수 지지층 결집형이었다.
하락의 시발점은 2014년 4월 세월호 참사였다. 이때 부정평가의 지배적 프레임은 '무능과 책임 회피' — 즉 성과 축의 실패였다. 이후 2015년 메르스, 연말정산 논란도 같은 성과 축에서의 하락을 만들었다.
그러나 결정적 붕괴는 절차 축에서 왔다. 2016년 10월 최순실 국정농단 보도 이후 4주 연속 최저치 갱신. 11월 1주 5%, 11월 2주 4% — 한국 역대 대통령 최저치. 부정평가 93%. 광주·전라에서 긍정 0%, 20-30대에서 긍정 0%.
주목할 점은 이 분노의 정확한 성격이다. 단순 부패 스캔들이 아니었다. 비선 실세인 최순실이 연설문을 수정하고, 인사에 개입하고, 국정 결정 과정에 참여했다. 문제는 '돈'이 아니라 '절차'였다. 대통령이 헌법 밖 인물에게 국정 권한을 공유했다는 것. 시민이 위임한 권한의 경로가 훼손됐다는 것. 실제 탄핵 사유도 도덕성이 아니라 '헌법 위반'과 '직권 남용' — 전형적 절차 위반이었다.
박근혜 정부가 남긴 학습은 이것이다. 이념 정체성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국가 의사결정 절차를 오염시키는 것은 용서되지 않는다.
문재인 (2017-2022) — 자기 진영 도덕성 요구의 탄생
문재인 정부는 탄핵 정국 직후 취임해 80%+ 역대 최고 지지율로 출발했다. 초기 긍정 요인은 이념 + 개혁 의제의 결합 — '촛불 민심' 대표자라는 정체성.
그러나 하락 요인들의 성격이 의미심장하다.
2019년 조국 사태. 부정평가 1위 이유는 '공정성·도덕성'이었다. 주목할 점: 이 하락을 주도한 것이 보수가 아니라 진보층 일부와 중도층이었다는 것. 민주당 지지층 내에서도 조국 임명에 대한 부정 의견이 상당했다. 이것이 한국 시민사회의 중요한 분기점이다 — '자기 진영 도덕성에도 엄격한 기준'이 시작된 순간.
2020-21년 부동산과 LH 사태. 두 성격이 결합됐다. 부동산 정책은 장기적으로 부정평가 1위 이유 — 성과 축 실패. LH 투기 사태는 공직자 내부 정보 이용 — 도덕성 축 실패. 더 중요한 것은 민주당 지지층에서도 부정 시각이 우세했다는 점이다. 이념적 지지자들조차 성과 미달과 공직 부패는 인정하지 않았다.
문재인 정부가 남긴 학습은 이것이다. 자기 진영이라도 도덕성과 성과에서 예외는 없다. 조국 사태는 '진보가 진보의 도덕성을 요구한' 첫 대규모 사건이었고, 부동산·LH 실패는 '이념이 맞아도 성과와 청렴이 나쁘면 이탈'을 가르쳤다.
이로써 박근혜 시기에 학습된 절차 축에 더해, 성과와 도덕성이 진영을 초월해 요구되는 평가 축으로 합류했다. 성과·도덕성·절차의 3축이 명확히 작동하기 시작했다.
윤석열 (2022-2025) — 3축 모두의 실패와 최단기 몰락
윤석열 정부는 매우 독특한 사례다. 3축 모두에서 거의 동시에 실패한 최초의 정권.
취임 직후(2022년 7-8월)부터 부정평가 이유 1위는 '인사'(23%)였다. 여기에 '자질 부족/무능'(10%), '독단적·일방적 태도'(8%)가 뒤따랐다. 즉 시작부터 역량·절차 양축 모두 미달.
이전 정권들이 특정 이슈로 하락했다면, 윤석열은 구조적 저평가에서 출발. 취임 2개월 만에 30% 붕괴 — 역대 최단기간 하락.
이후 2년간 평가 축이 변화·누적됐다:
2023년: '경제·민생·물가' 부각 → 성과 축
2024년 초: 김건희 여사 명품백 수수 의혹 → 도덕성 축
2024년 중: 의대 증원 강행 → 소통 미흡(11%), 독단(7%) → 절차 축 악화
2024년 11월: 김건희 문제 부정평가 이유 3위(9%)로 급상승
2024년 12월: 비상계엄 선포 → 절차 축의 극단 위반
2024년 12월 계엄 직후 13%. 박근혜 탄핵 직전(14%)과 유사. 직무정지 직전 11% — 역대 최저. 그리고 탄핵 후 2025년 11월 갤럽 역대 대통령 평가에서 전두환을 밑도는 역대 최하위.
윤석열이 남긴 학습은 이것이다. 시민이 요구하는 3축 중 하나라도 결정적으로 어기면 용인되지 않는다. 그리고 절차 축의 극단 위반(계엄)은 즉시 퇴출 사유다. 이전 정권들은 시간을 두고 몰락했지만, 윤석열은 구조적 실패였기에 가장 빠르게 추락했다.
이재명 (2025-) — 3축 평가의 표준화와 결정체
10년의 학습이 이제 표준이 된 모습을 보자.
2025년 6월 출범한 이재명 정부의 국정 지지율은 흥미로운 궤적을 그렸다. 출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