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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의 벽'에 대한 걱정
멋나들 연구소인문학과 투자

'걱정의 벽'에 대한 걱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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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론백
2025.12.05조회수 23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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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론백
구독자 514명구독중 61명
영문학자이자 금융강사. 단순히 재무적 안정이나 부자되기를 넘어, 물질과 정신 모두 풍요로운 삶을 지향한다. 이를 '멋지게 나이들기'라는 철학으로 삼고, 이곳 <멋나들 연구소>에서 꾸준히 실천하고 있다.

저렴해진 욕망

나는 ‘죄악’을 파는 기업에 투자하길 좋아한다. 이건 단순히 술, 담배, 도박 같은 주식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제대로 대중이 원하는 것을 파악한 기업을 의미한다. 기업의 본질은 누군가의 필요를 대신하고 돈을 버는 것이다. 그러나 단순한 ‘필요(Needs)’는 재미가 없다. 인간의 생물학적 위장은 한계가 명확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부자라도 하루에 다섯 끼를 먹을 수는 없다. 1,000만 원짜리 식사가 1만 원짜리 식사보다 1,000배 더 배부른 것도 아니다.


하지만 ‘욕망(Desires)’의 영역으로 넘어가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1,000만 원짜리 식사는 허영심을 채워주거나, 미식이라는 탐닉을 충족시킨다. 이것은 배고픔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다. 투자자의 관점에서 볼 때, 필요는 닫힌 구간이지만 욕망은 열린 구간이다. 무한대다.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은 이 지점을 정확히 꿰뚫었다. 그는 욕망을 ‘결핍’으로 정의했다. 인간은 대상을 원한다고 착각하지만, 사실은 그 대상이 채워줄 것이라 믿는 ‘환상’을 욕망한다. 하지만 그 환상은 대상을 손에 넣는 순간 증발한다. 충족되지 않은 결핍은 즉시 또 다른 대상으로 옮겨간다. 밑 빠진 독. 이것이 라캉이 말한 욕망의 구조다.


단테의 신곡 제대로 배워봅시다] ⑦ 지옥의 지형도



단테는 <신곡>에서 이 끝없는 갈증을 ‘지옥’이라 불렀다. 7가지 죄악-교만, 질투, 분노, 나태, 탐욕, 식탐, 정욕-은 모두 채워지지 않는 항아리와 같다. 자신을 파괴할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 현대 자본주의는 이 ‘지옥의 속성’을 기가 막히게 상품화했다. 기업들은 7대 죄악을 비즈니스 모델로 삼아 우리를 유혹한다. ‘나태’하고 싶은 마음은 ‘편리함’이라는 구독 서비스가 되고, 타인에 대한 ‘질투’는 SNS 속 명품 광고가 된다. ‘정욕’이 돈이 되는 건 두말할 필요도 없다. 기업은 우리의 결핍을 집요하게 파고들어, 지옥의 불구덩이 대신 결제 창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이 욕망의 끝은 어디일까? 상상력을 조금 더 밀어붙여 본다. 영화 <매트릭스> 속 인간 배터리가 떠오른다. 기계가 주입하는 전기 신호만으로 뇌는 완벽한 쾌락을 느낀다. 혹은 영화 <인셉션>의 꿈속 세상. 그곳은 물리적 한계가 없는 궁극의 도파민 천국이다.


누군가는 가상보다 현실의 육체가 중요하다고, 지적인 성취가 중요하다고 반박할지 모른다. 하지만 뇌과학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느끼는 현실 또한 감각 기관이 보내온 신호를 뇌가 재구성한 시뮬레이션일 뿐이다. 우리는 절대로 ‘현실’을 마주할 수 없다. 그저 주어진 신호로 상상할 뿐이다. 그러니 정교하게 속일 수만 있다면, 가짜와 진짜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어쩌면 인류의 종착지는 매트릭스 속 배터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50억 년 뒤 태양이 폭발해 지구가 멸망한다는 예언처럼 너무 먼 이야기다. 투자자인 내가 주목하는 것은 그 종말의 풍경이 아니다. 그곳으로 향해가는 ‘과정’이다.


태양이 식기 전에, 우리가 먼저 마주할 현실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욕망 충족 비용의 하락’이다. 기업은 끊임없이 혁신한다. 경쟁자를 이기기 위해 더 싸고, 더 빠르고, 더 자극적으로 욕망을 공급한다. 그 결과, 과거에는 귀족이나 왕족만 누릴 수 있었던 쾌락들이 헐값이 되었다. 옛날에는 ‘미식(Gourmet)’이 상위 1%의 전유물이었으나, 지금은 설탕과 지방으로 범벅된 가공식품이 편의점에 넘쳐난다. 뇌가 느끼는 쾌락의 강도는 비슷하지만, 비용은 수백 분의 일로 줄었다.


이것이 현대인이 점점 내향적으로 변해가는 진짜 이유다. 굳이 밖으로 나가 비싼 돈을 쓰고 정서적 에너지를 쓸 필요가 없다. 배달 음식을 시켜 놓고 넷플릭스를 켜는 것. 단돈 몇 만 원이면 황제 부럽지 않은 도파민 샤워가 가능하다. 우리는 역사상 가장 저렴하게 욕망을 소비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바로 여기서 거대한 모순이 발생한다. 욕망을 채우는 비용이 0에 수렴해 간다면, 남는 돈은 어디로 가는가? 우리는 적은 돈으로 충분히 만족하고 있다. 그런데 소득은, 자본은 계속 쌓인다. 매트릭스의 배터리가 되기 전, 우리는 먼저 ‘돈이 갈 곳을 잃어버린 시대’를 통과해야 한다.



세상에 돈이 많다. 나 빼고.

‘돈이 갈 곳을 잃었다’는 말에 코웃음 칠 사람이 있을 것이다. 당장 스마트폰을 켜면 SNS 속 세상은 욕망의 용광로처럼 보인다. 1억 원짜리 스포츠카를 타고, 하룻밤에 수백만 원짜리 호텔에서 샴페인을 터뜨리는 사람들. 우리는 그들을 보며 생각한다. "내가 집에서 넷플릭스를 보는 건 돈이 부족하기 때문이지, 돈만 있다면 언제든 도파민의 파도 위에서 서핑을 탈 것이다."

개인적 관점에서 이 믿음은 유효하다. 그러나 거시적 현실은 조금 다르다. 나라는 개인의 욕망은 무한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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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0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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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라는 ‘명사’의 감옥

서점 매대를 지나다가 한국의 출판 시장은 기형적이다. 깊이 있는 원제는 사라지고, 그 자리를 '부자 되는 법'이라는 노골적인 욕망이 차지했다. 출판사는 판매량을 위한 선택이라 변명하겠지만, 이는 독자의 지성을 기만하는 행위다. 나는 서점을 점령한 이 '부자 담론'에 반기를 든다. 우리는 정말 부자가 되기를 원하는가? 역설적이게도 사람들은 부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들이 진정으로 욕망하는 것은 미래의 '부'가 아니라 현재의 '소비'와 '쾌락'이기 때문이다. 부자가 되는 길은 이미 널려 있다. 지능이나 환경을 탓하기엔 자수성가한 사례가 너무나 많다. 사람들이 부자가 되지 못하는 이유는 방법의 부재가 아니라, 부자가 되어가는 고단한 '과정'을 견딜 의지가 없기 때문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부자'를 도달해야 할 최종 목적지로 설정하는 사회적 통념에 있다. 절대적 빈곤이 해결된 현대 사회에서 가난은 '현상'이 아니라 '감정'이다. 100억을 가진 자는 1,000억을 가진 자 앞에서 가난을 느끼고, 국내에 별장이 있는 자는 해외에 별장이 있는 자 앞에서 박탈감을 느낀다. 내가 아는 한 지인은 남들이 부러워하는 부를 가졌음에도, 더 거대한 부자들과 자신을 비교하며 늘 허기에 시달린다.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려는 순간, 부에 대한 욕망은 영원히 채워질 수 없는 형벌이 된다. 왜 부자가 되어야 하는가? '더 행복해지기 위해서'라는 답변은 기만이다. ‘부자가 되면’, ‘의사가 되면’ 인생이 완성될 것이라는 믿음은 헛된 망상이다. '부자'는 삶의 결론이 될 수 없다. 목표를 달성한 그 순간에도 삶은 여전히 지루하게 이어진다. 태어날 때부터 부자였던 이들조차 불행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우리는 이제 '부자라는 명사'가 되기 위해 인생을 유예하는 것을 멈춰야 한다. 중요한 것은 도달한 이후의 삶, 그리고 부를 대하는 태도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명사적 존재의 함정 나는 "부자가 된다"는 말을 경계한다. 인간은 '부자'라는 명사로 고정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20세기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는 "실존이 본질을 앞선다"는 명제로 이 문제를 꿰뚫어 보았다. 의자나 키보드 같은 사물은 만들어지기 전부터 '앉기 위한 도구', '입력을 위한 도구'라는 목적, 즉 본질이 먼저 존재한다. 하지만 인간은 다르다. 우리는 세상에 먼저 던져진(피투) 후, 스스로 선택하며 자신을 만들어가는(기투) 존재다. 그런데도 우리는 스스로를 마치 용도가 정해진 사물처럼 착각한다. 사르트르는 <존재와 무>에서 카페 웨이터의 예를 든다. 주문을 받고 쟁반을 나르는 종업원은 마치 '웨이터'라는 본질을 타고난 기계처럼 움직인다. 하지만 그것은 연기일 뿐이다. 그는 퇴근하는 순간 누군가의 연인이 되고, 주말에는 춤을 추거나, 정치적 구호를 외치는 시위자가 될 수도 있다. 그는 '웨이터'라는 명사로 환원될 수 없는 투명하고 텅 빈 그릇이다. 어떤 수식어도 그를 영원히 가둘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실존이 본질을 앞선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다. 그러나 인간은 이 불확정성을 견디기 힘들어한다. 우리는 타인을, 그리고 나 자신을 규정되지 않은 실존으로 마주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불확실성은 불안을 낳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빨리 명사로 환원시키려 든다. "저 사람은 의사야", "이 사람은 대리야"라고 이름표를 ...
인문학과 투자
2025. 1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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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VANS
2025.12.05

와 이런 글을 ...이렇게 봐도 되는걸까요 너무 대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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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롱사이다
2025.12.05

와 감동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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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당주 투자
2025.12.05

책 한권 읽은듯한 느낌입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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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고기 요리
2025.12.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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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공
2025.12.05

무릎을 탁치게 만드는 인사이트 넘치는 글 잘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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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빛
2025.12.05

사회학 에세이를 읽은 듯한 느낌..ㅎㅎ미래에 대한 낙관이 아니라 낙오의 두려움이 자산시장을 끌어올리는 역설이라니..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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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라프
2025.12.06

와...멋진 글 감사합니다.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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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LEY_jbc03_947
2025.12.08

정말 글을 잘봤습니다. 인사이트도 좋고, 읽는 즐거움이 있는 글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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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2025.12.09

와. 명문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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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리
2025.12.11

엄청난 필력에 숨도 안쉬고 읽었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몰입해서 읽은 글이었어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