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면을 쓴 철학자] - F , 글항아리.




전에도 말했듯,
나는 지식노동자라면 마땅히 일과 후 육체활동을 해야 하고
육체노동자라면 마땅히 일과 후 지적활동을 해야
삶이 풍요롭게 유지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오늘은 연휴고 해서 지적활동 재료를 위해 서점에 갔다.
지난 주에 신문에 소개된 신간을 사려고 해서였는데...
사실 이건 책이라기보다는 굿즈다.

아주 얇다. LP판 같은 느낌이다.
나도 실물을 보고서 ‘뭐야, 내가 이거 살려고 온거야?’ 했다.
저자 이름은 F 라고만 나와 있다.
1980년 프랑스, 당시 <르몽드>지는 일요일 특별판에서
사상적 토론과 관련해 지면을 상당 부분 할애하고 있었는데..
<르몽드>에서 이 저자에게 대담을 요청했고, 저자는 이 인터뷰를 수용했다.
단, 자신의 이름이 절대 언급되어서는 안되며 자신을 추측할 수 있는 모든 단서를 삭제한다는 전제로.
이 책, [가면을 쓴 철학자] 는 그렇게 <르몽드>와 저자가 1980년에 진행한 대담을 옮긴 한 권, 아니 '한 장‘의 책이다.

커다란 종이 한장이 세번 접힌채로 얇게 포장되어 있다.
(고급스러운 포장지 중심에 검은색 무늬 부분이 있는데.. 이건 즉석복권과 같은 기능이다.
포장지 안에 들어있는 동전으로 복권 부분을 긁으면 저자 F의 초상화 일러스트가 드러난다고 한다. 난 아까워서 안 긁음.)
그나저나 15,000원에 종이 한 장 이라니…
후덜덜
나도 책이 아니라 일종의 기념품이라는 생각으로 구매한 것이다…
15000원 이면 맛있는 식사 한끼 되지 않나?
그냥 나의 뇌에 그런 식사 한끼 대접했다고 생각하자.
다만 양이 좀 적은… 도서계의 핑거푸드..
뭐 그런 느낌으로..

책 본문을 다 펼치면 이렇다. 내용은 이게 다이다. 해상도는 일부러 흐리게 했다.
사진에 찍힌 것이 곧 책 전문이기 때문..
종이 한 장 치고 가격이 후덜덜하지만 그래도 시도 자체가 대담하고 재밌다.
고급진 포장 안에 들어있는 물품은 3개다.
(1) 책 본문 (2) 동전
그리고 (3) 초록색 명함재질의 종이에는
이 책(?)을 소개하는 에디터의 짧은 이야기가 들어있다.

<... 책을 만들며 우리는 매 단계 곤란한 질문에 직면했습니다. 낱장의 종이를 모아서 제책한 코덱스는 2000년도 더 된 것이어서 그것과 다른 형태를 상상하기가 아득합니다. 독자로서 저 또한 ‘이것도 책이냐‘ 며 볼멘소리를 한 적도 여러 번 있습니다..만, 이 지점은 좀더 들여다봐야겠습니다.
어디까지 책일 수 있느냐는 질문을 받으면서도 한 장의 책을 만든 건 반발심이나 반항심이 아닌, 조금 촌스러운 믿음에서였습니다.
본질로 내려가다보면 편집자의 대답은 거의 정해져있는 듯합니다. 저는 그러한 질문에 대거리하듯 ’일단 읽어보시라‘ 라고 답합니다.
이 글의 저자는 익명을 자처합니다. 말하는 바가 그 자체로 인정받기보다는 누가 한 말인지가 더 중요한 시대이기에 그는 가면을 씁니다. 그리고 막힘없이 사유를 밀어붙이죠.
우리가 이 한 장을 책이라고 부르지 ...






아니 형님, 안 뵌 사이에 사유가 깊어지신 것 아닙네까...ㄷㄷ

흥미로운 책 소개 감사합니다!
인생이라는 게임을 언젠간 풀옵으로 돌려보고 싶네요 ㅎㅎ

마지막 문장이 가장 와닿네요.
그리고 디자인적으로 힘을 많이 준 책인 것 같습니다.
저도 갖고 싶네요..

계절마다 같은 포맷으로 낼 계획이라는데
여유로우면 LP판 모으듯 수집해도 괜찮을 거 같음..
색감이 이쁩니다..

큰일났다
일단 이쁘고 책상위에 올릴만하면
사고 싶어지는 악질적인 병이 다시 재발한다...

이니셜이 F면.. 미셸 푸코일까요ㅋㅋㅋㅋ

이니셜도 상당한 힌트이지만 그뿐만이 아닙니다.
번역한 <옮긴이> 소개에.. 파리OO대학에서 <푸코-마르크스주의 ...>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저서로는 <푸코..> 블라블라..
이건 국내 출판사의 배려인지 실수인지..

ㅋㅋㅋㅋㅋ소비자한테는 배려이지만 저자한테는 실례겠네요

끊임없는 지적 탐구! 명심하겠습니다!

80년대 이미 편가르기와 억까에 지쳐버리셨던 F님ㅠㅠ 요즘 주변을 둘러보면 비평가들이 사라진게 대중들 개개인이 비평가가 되어서 힘을 가진것 같지가 않다는 느낌입니다. 비평가들이 논리를 가지고 비평하면, 그것마저 복잡해서 싫다 안 읽겠다?!에 가까워 보여요. 극도로 단순화 시키고(물론 그 과정에서 제 입맛대로 편집) 감정적으로 해소할 수 있는 무엇인가에만 대중의 관심이 쏠리고 있음을 느끼고 있습니다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누군가의 권위와 평가를 빌려 값싸게 정보를 처리하는 것이 효율적일 수는 있지만, 분명 자기만의 해석과 사유를 하는 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경험만으로도 온갖 감상과 해석을 뽑아내는 깊고 오묘한 감각들을 이끌어내는 즐거운 행위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장의 책을 오롯이 읽어내기 위해서는 작가와 시대상의 맥락이라는 두꺼운 백과사전을 한 장 두 장 넘겨나아가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닭고기요리님의 생각을 읽고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며 참 즐거운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메시지와 메신저를 분리해서 생각하기가 참 어렵다는 점은 어쩔 수 없지만 닭고기요리님과 같이 종이신문을 읽는 등의 부수적인 노력을 하는 분들이 계시기에 이 세상이 아직도 굴러가고 있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시 한 번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지적인 탐구야말로 무책임한 쾌락 아닐까!?

킬포가 너무 많지만.. 아래 문장이 가장 와닿네요
"정신적으로 음미할 수 있는 능력이 퇴화하기 때문"
지식이 범람하는 세상이지만 오히려 너무 많은 인풋때문에 깊게 사고하기는 힘들어진것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