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적인 헬스케어 섹터 및 개별 기업 분석에 앞서, 이 거대한 산업을 관통하는 비즈니스 모델(BM)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를 위해 카카오벤처스 부대표이자 내과 전문의이신 김치원 선생님의 저서, <디지털 헬스케어는 어떻게 비즈니스가 되는가 1>을 탐독했다. 임상 현장에서 막연하게만 체감했던 헬스케어 산업의 구조적 장벽들을 이 책을 통해 명확한 언어로 구체화할 수 있었다. 이번 글은 책의 내용 중 헬스케어 기업 분석에 도움이 될 만한 내용에 개인적인 생각을 덧붙여 정리한 결과물이다. 헬스케어 분야 창업이나 투자를 준비하는 플레이어라면 원 책의 일독을 강력히 권한다.
현재 헬스케어 산업은 생성형 AI 붐을 위시하여 전례 없는 기술적 도약을 맞이하고 있다. 인공지능(AI), IoT, 빅데이터, 클라우드 등 첨단 디지털 기술들은 기존의 의사-환자 대면 중심 전통적 의료 패러다임을 송두리째 바꿀 것만 같은 기대감을 준다. 그러나 이러한 '장밋빛 전망'의 이면에는 뚜렷한 수익화 모델을 찾지 못한 채 데스밸리에서 고전하는 수많은 디지털 헬스케어 스타트업들의 냉혹한 현실이 공존한다. "기술의 혁신성이 곧 사업의 성공을 담보하지 않는다"는 문장은 헬스케어, 그중에서도 디지털 헬스케어 도메인에서 더욱 뼈아프게 다가온다.
특히, '단일 건강보험’ 하에서 저렴한 의료를 제공하는 한국의 특수한 의료 제도 하에서는 BM에 대한 더욱 치열한 고민이 요구된다. 많은 디지털 헬스케어 서비스의 실패는 결국 '지불 주체', 즉 "누가 돈을 내는가?"에 대한 명확한 해답을 내놓지 못한 데서 기인한다.
우리는 의료 시장이 사용자가 곧 구매자가 되어 지갑을 여는 일반 소비재 시장과 근본적으로 다름을 인지해야 한다. 의료는 환자(사용자), 병원(공급자), 그리고 보험자(소비자)가 복잡하게 얽힌 시장이다. 또한, 일반적인 재화와 달리 전문가의 판단에 의존해야 하는 ‘신용재’의 성격을 띠며, 규제가 산업의 명운을 가르는 철저한 규제 산업이다. 따라서 헬스케어 투자를 검토함에 있어 단순한 기술적 타당성 검증을 넘어, 시장의 '지불 용의'와 '비용 효과성'을 냉철하게 따져보는 것이야말로 분석의 핵심이 되어야 할 것이다.
1장. 지불 주체
모든 비즈니스의 본질은 고객을 정의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하지만 헬스케어 산업의 고객 정의는 까다롭다. 앞서 언급했듯 서비스를 실제로 사용하는 주체(환자)와 비용을 지불하는 주체(보험자, 고용주 등)가 분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용자-지불자 불일치'는 디지털 헬스케어의 명확한 비즈니스 모델 수립을 어렵게 만드는 가장 큰 허들이다. 이 책에서는 헬스케어의 지불 주체를 보험자, 고용주, 제약회사, 소비자, 병원 등 5가지로 분류하고, 각 주체별 특성을 분석하고 있다.
a. 보험자
보험자는 헬스케어 생태계에서 가장 막강한 자금력, 즉 바잉 파워를 가진 지불 주체이다. 한국의 국민건강보험공단이나 미국의 메디케어, 메디케이드, 그리고 수많은 사보험사들은 막대한 의료비를 지출하고 관리하는 주체로서, 디지털 헬스케어 기업들이 궁극적으로 공략해야 할 대상이다. 그러나 명심해야 할 점은 보험자는 태생적으로 보수적이라는 사실이다. 단순히 기술이 혁신적이라고 해서 지갑을 열지는 않는다. 그들에게는 '비용 절감'이나 확실한 '치료 효과'가 입증되어야만 넘을 수 있는 높은 장벽이 존재한다.
디지털 헬스케어 서비스가 건강보험 수가라는 제도권 내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표준 치료 대비 우월한 임상적 유효성을 입증하거나, 최소한 동등한 효과를 내면서도 비용을 절감할 수 있음을 증명해야 한다. 이는 신약 개발 과정에 버금가는 대규모 무작위 대조 임상시험과 엄밀한 경제성 평가를 요구하는 험난한 과정이다.
의료의 핵심 언어는 결국 근거 중심 의학이다. "이 서비스를 활용하면 건강해진다"는 식의 정성적이고 막연한 주장은 통하지 않는다. "이 앱을 사용하면 당화혈색소가 0.5% 감소하여 5년 내 합병증 발생률이 10% 줄어들고, 결과적으로 보험 재정이 인당 100만 원 절감된다"는 식의 구체적이고 정량적인 데이터가 필요하다. 비즈니스를 뒷받침할 수 있는 탄탄한 연구와 논문이 필수적인 이유다.
하지만 근거가 마련되었다고 해서 모두 수가를 적용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한국과 같이 행위별 수가제가 지배적인 의료 시스템에서는 의사가 수행하는 물리적인 '행위'에 가격이 매겨진다. 환자가 집에서 앱을 통해 스스로 건강을 관리하는 것은 의사의 직접적인 행위로 간주되기 어려워 수가 산정이 쉽지 않다. 바로 이 지점이 디지털 헬스케어의 핵심 가치인 '예방'과 '관리'가 실제 비즈니스 모델로 연결되기 어려운 구조적 원인이다.
b. 고용주
미국과 한국 디지털 헬스케어 시장을 가르는 가장 결정적인 차이는 바로 '고용주 시장'의 존재 유무다.
미국은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공적 보험이 부재하여, 대부분의 근로자가 고용주가 지원하는 사보험에 의존한다. 구조적으로 고용주가 직원의 건강 악화로 인한 의료비 지출 증가를 직접 감당해야 하는 '실질적 지불 주체'인 셈이다. 따라서 미국 기업들은 의료비 절감뿐만 아니라, 질병으로 인한 결근이나 근무 중 생산성 저하를 방지하는 데 사활을 건다. 만약 당뇨병 관리 앱이나 정신건강 상담 솔루션이 직원의 병원 방문 시간을 줄이고 업무 몰입도를 높일 수 있다면, 미국 고용주는 기꺼이 지갑을 연다. 확실한 투자 대비 효과가 보장되기 때문이다.
반면, 한국의 상황은 다르다. 고용주가 건강보험료의 절반을 부담하는 것은 사실이나, 개별 직원의 의료비 리스크를 기업이 직접 관리하거나 책임지지는 않는다. 직원의 의료비가 증가한다고 해서 기업의 재무제표에 즉각적인 손실로 기록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러한 구조적 차이로 인해 한국의 기업 대상(B2B) 헬스케어는 '필수적인 비용 절감 솔루션'이라기보다는 선택적인 '임직원 복지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접근하게 된다. 이는 미국 시장 대비 국내 시장의 규모와 지불 용의가 현저히 낮을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원인이다.
c. 제약회사: 신약 개발의 파트너로서의 기회
제약회사는 헬스케어 생태계에서 가장 풍부한 유동성을 보유하고 있으며, 기존 신약 비즈니스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디지털 헬스케어를 적극적으로 도입하려는 강력한 니즈가 있다.
첫째, 임상시험의 효율화다. 신약 개발 비용의 상당 부분은 임상시험 환자 모집과 관리에 소요된다. 디지털 플랫폼을 활용해 임상 조건에 부합하는 환자를 빠르게 스크리닝하고, 웨어러블 기기로 데이터를 원격 모니터링하여 불필요한 병원 방문을 줄일 수 있다면, 천문학적인 개발 비용과 시간을 획기적으로 단축할 수 있다.
둘째, 임상 성공률 제고와 정밀 의료다. 고가의 표적 항암제나 면역 항암제는 특정 유전자 변이가 있는 환자에게만 효과가 나타난다. 이때 AI 기반의 디지털 병리 서비스 등을 통해 약효가 있을 환자군을 정밀하게 선별해내는 기술은 제약사의 리스크를 줄여준다. 이를 업계에서는 '동반 진단'이라 하며, 제약회사가 기꺼이 비용을 지불할 용의가 있는 핵심 영역이다.
< 동반 진단이란? - 특정 약물이 환자에게 효과가 있을지 미리 판별하여 치료 반응을 예측하는 진단 기술을 말한다. >
셋째, 복약 순응도 개선을 통한 매출 방어다. 아무리 혁신적인 신약이라도 환자가 제때 복용하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다. 이는 환자의 건강 악화 뿐만 아니라 제약사의 매출 감소로 직결된다. 최근 주목 받는 디지털 알약이나 복약 관리 앱은 환자의 복약 순응도를 높여 약의 실제 효과를 입증하고, 매출 방어의 역할을 수행한다.
< 디지털 알약이란> - 일반적인 정제 내부에 인체에 무해한 미세 센서를 내장한 약물이다. 환자가 알약을 삼키면 센서가 위액과 반응하여 전기 신호를 발생시키고, 이 신호를 웨어러블 패치가 감지하여 스마트폰으로 전송한다. 복용 날짜와 시간이 자동으로 기록되어 환자의 복약 순응도를 확인할 수 있다. >
d. 소비자
헬스케어 산업에서 B2C 모델은 가장 직관적인 접근 같지만, 실상은 가장 공략하기 어려운 시장이다. 이 책에서는 그 구조적 원인을 두 가지로 제시한다.
첫째, 소비자의 낮은 지불 의향이다. 대다수의 대중은 '건강해지고 싶다'는 욕구만 가질 뿐, 이를 위해 구체적인 노력을 하거나 비용을 지불하는 데는 인색하다. 특히 한국처럼 공적 보험이 강력한 국가에서 환자는 의료 서비스에 대해 직접 제 값을 지불하는 경험에 익숙하지 않다.
둘째, 의료 서비스가 갖는 '신용재'로서의 특성이다. 일반적인 상품이나 서비스, 즉 '경험재'는 소비자가 써보면 즉각적으로 품질이나 효용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혈압 관리나 당뇨 관리 앱은 사용한다고 해서 당장 몸이 좋아지는 것을 체감하기 어렵다. 그 효과는 먼 미래에 예방의 형태로 나타나거나, 의사의 검진을 통해서만 사후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소비자는 효용을 즉각적으로 체감할 수 없는 제품에 돈을 쓰려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예외는 없을까? 소비자가 기꺼이 자기 돈을 쓰는 영역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된다.
하나는 '프라이버시와 편의성'이 강조되는, 이른바 '민망함'을 덜어주는 서비스다. 피임, 탈모, 조루, 성기능 개선 등은 병원 방문 자체에 심리적 장벽이 존재하는 영역이다. 현재 B2C 플랫폼들은 이러한 민망함을 비대면으로 해결해 주는 방식에 집중하고 있다. 소비자들이 이러한 문제 해결 방식에 익숙해진다면, 향후에는 민망함을 넘어 고혈압, 고지혈증과 같은 만성질환 영역에서도 '편의성'을 무기로 시장을 확장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질병 치료가 아닌, '웰니스'의 영역이다. 미용, 운동, 체중 감량 등은 사용자가 효과를 비교적 빠르게 체감할 수 있고, 자아실현 욕구와 맞물려 상대적으로 높은 지불 의향을 보인다. 영양제, 명상 앱, 성형 정보 플랫폼 등이 대표적인 예시로, 이들은 '질병 관리'보다는 '라이프스타일 개선'으로 접근하여 B2C 시장을 열어가고 있다.
e. 병원
병원은 디지털 헬스케어 솔루션의 최종 소비처이자 도입의 관문이다. 병원의 경우 철저히 경제적 합리성에 기반하여 지갑을 열며, 크게 세 가지 경우로 나뉜다.
첫째, 매출 증대이다. 새로운 검사나 시술을 도입함으로써 건강보험 수가를 청구할 수 있거나 비급여 수익을 창출할 수 있을 때 병원은 움직인다. 둘째, 비용 절감이다. 환자에게 직접 돈을 받지 못하더라도, AI 영상 판독 보조 등을 통해 의료진의 시간을 단축하거나 자동화된 시스템으로 인건비를 줄일 수 있다면 병원은 이를 '투자'로 인식하고 도입한다. 셋째, 규제 준수이다. 정부의 인증 평가 기준을 맞추거나 법적 의무를 다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도입해야 하는 경우다.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핵심은 바로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