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은 정확하게만 하려면 시시해지고, 의미를 두고만 말하려 하면 모호해진다.
내 불운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이 난폭한 질문에 답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읽는다.
영국 기숙사 학교에서 혼자 방을 썼을 때, 침대 왼쪽 벽을 존경하는 혹은 존경해야 할 것 같은 위인들의 초상화로 덮었었다. 수십 개 사진을 생선 비늘처럼 겹겹이 접착제로 붙였다. 그 얼굴들을 보며 잠들고, 일어나고, 때론 기도도 했다. 방이 작은 신전 같아서 마음이 편하기도 했지만, 깊고 푸른 하늘을 올려다 볼 때 그렇듯이 기분을 벅차게 했다. 사람은 분명 누군가를 흠모할 때 가장 많이 배우고 변한다.
아무리 얄팍한 모방이라도 존경하는 사람이 있다면 흉내내라고 추천하고 싶다. 베케트의 언어를 빌려 쓸때 나는 잠시나마 그의 눈높이에서 세상을 볼 수 있었다.
죽은 자들처럼 차가워져라. 어쩌면 델포이의 사제는 제논에게 젊은 열기를 좀 식히라고 권했는지도 모른다.
트로이의 목마에 침입자를 매복시키듯이, 젊은이는 자신의 고유한 생각을 형식과 정통 안에 숨겨야 한다.
누구라도 쓸 수 있는 평범한 글은 내 성에 차지 않았다. 새로운 해석, 새로운 세계관으로 얼른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싶었다.
예언자처럼 부연 설명 없이 명령하고 싶었다.
파격적인 세계관과 그에 걸맞는 형식을 둘 다 발견한 사람만이 돌풍을 일으킬 수 있다. 베케트의 절망하는 세계관을 담아내는 특유한 문체가 그렇다.
그들은 무덤 양쪽에 다리를 걸치고 아이를 낳는다, 순간 빛이 번득인다. 그리곤 다시 밤이 찾아온다.
플라톤이 없었다면 소크라테스는, 쇼팽처럼 되지 않았을까? 쇼팽 역시 누구나 한 구절만 들어도 알아챌 수 있는 독창성과 자신만의 구체적인 언어를 구축했지만, 전통을 만들진 못했다. 사뮈엘 베케트 역시 20세기 최고의 극작가치고는, 그가 한때 일으켰던 파도도 이제는 잔물결 정도로 가라앉았다.
형식에 집착하는 사회에서 이익을 보는 사람은 거짓말하는 사람뿐이다.
요즘 아침마다 세수하면서도 죽음을 생각하라고 권하는 학자도 있는데, 이건 그리스 로마에서도, 특히 르네상스 시대에서도 흔히 던져지던 화두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속 실천하기 어려운 조언 같다. 어떻게 새 아침을 보며 죽음을 생각하고, 누가 어딘가에서 실제로 죽음을 앞두고 있는데 내가 죽음에 대한 생각을 이용해서 건강의 기쁨을 중화시킨단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