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니키안 스킴>, 주권적 개인의 시선으로





비행기가 추락하고 있다. 이것은 비유가 아니다. 엔진에서는 검은 연기가 뿜어져 나오고, 경고음이 귀를 찢으며, 조종사는 필사적으로 조종간과 씨름하고 있다. 생사가 오가는 이 절체절명의 순간, 주인공 자자 코르다는 놀랍도록 태연하다.
웨스 앤더슨의 카메라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고정되어 있다. 완벽한 90도 정면 앵글, 강박적인 좌우 대칭. 비행기 내부는 추락이라는 물리적 혼돈이 범접할 수 없는 완벽한 질서의 공간으로 박제되어 있다. 미학적 통제와 실존적 위기 사이의 이 극적인 긴장감. 이것이 바로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이다.

이 고요한 질서 속에서, 조종사의 절규만이 유일한 혼돈이다.
PILOT: "Wet tarmac! Short runway! 25-knot crosswind! Lightning! You disallowed me to complete a proper safety check despite credible threats of sabotage. You forced me to take off and needled me and teased me and bullied me, but I managed to get us airborne anyway. And now, needless to say, we've been blown up by somebody trying to assassinate you again, and we're gonna crash after all!"
("젖은 활주로! 짧은 활주로! 25노트 측풍! 번개! 당신은 사보타주의 신빙성 있는 위협에도 불구하고 안전 점검을 허가하지 않았고, 이륙을 강요했으며, 날 쿡쿡 찌르고 조롱하고 못살게 굴었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이륙시켰습니다. 그리고 이제, 말할 것도 없이, 또 당신을 암살하려는 누군가에게 비행기가 터져버렸고, 결국 우린 추락하고 마는 겁니다!")
추락하는 비행기는 법과 제도의 정상적인 작동이 정지된 극한의 상황, 정치철학자 카를 슈미트가 말한 '예외상태'의 가장 문자적인 구현이다. 슈미트는 주권자를 "예외상태에 관해 결단하는 자"로 정의했다.¹ 즉, 누가 진짜 권력자인지는 평화로운 시기가 아니라, 법이 침묵하는 위기의 순간에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조종사의 고발장에서 드러나듯, 코르다는 단순히 위기에 대응하는 주권자를 넘어선다. 이 재난은 우연이 아니다. 그는 안전 점검을 거부했고("You disallowed me"), 무리한 이륙을 강요했다("You forced me"). 그는 기존의 규범(안전 수칙)을 의도적으로 파괴함으로써 스스로 예외상태를 '초래'한 더 급진적인 주권자다. 그의 권력은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기 위해 기존 질서를 파괴하고 혼돈을 유발하는 능력까지 포함한다. 이는 니체가 예언한, 기존 가치 체계를 넘어서려는 초인의 디스토피아적 변주다.²
그리고 바로 이 순간, 결정적인 대화가 오간다.

PILOT: "If we survive, I'm reporting you to the Trans-European Aviation Authority."
(만약 우리가 살아남는다면, 범유럽 항공 당국에 당신을 고발하겠소.)
ZSA-ZSA: "You're fired." (넌 해고야.)
"You're fired." 이 두 단어는 영화 전체의 DNA를 압축한다. 관객은 웃는다. 극단적 위기 상황과 지극히 일상적인 언어 사이의 기괴한 부조화가 블랙 코미디를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웃음의 이면을 해부해야 한다. 프로이트가 분석했듯, 유머는 우리가 인정하고 싶지 않은 진실(권력은 타인의 생명보다 자신의 권위를 우선시한다)을 승화하는 메커니즘이다.³
슈미트의 관점에서 이것은 순수한 주권 행사다. 생존조차 불확실한 상황에서, 코르다는 국가의 법적 권위(항공 당국)보다 자신의 사적 규율(해고)을 절대적으로 우선시한다. 그 어떤 외부 규범에도 구속되지 않는 순수한 의지의 발현. 그러나 동시에 이것은 주권의 공허함을 드러낸다. 조르조 아감벤이 분석했듯, 현대 주권은 실질적 내용 없이 법적 효력만 있는 '법의 힘'에 가깝다.⁴ 코르다의 해고 통보는 추락을 막지 못한다.
여기서 우리는 웨스 앤더슨의 스타일이 단순한 장식이 아님을 직시해야 한다. 그의 미학은 권력의 정당화 메커니즘으로 기능한다. 이것을 ‘미학적 규율화’라고 부르고자 한다.
앤더슨 특유의 인형의 집 같은 구도, 파스텔 색조, 그리고 무표정한 연기는 극단적인 폭력과 그 폭력이 행사되는 상황 사이의 거리를 만들어낸다. 조종사가 해고당하는 장면에서 우리가 웃는 순간, 코르다의 폭력성은 희석되고 우리의 윤리적 판단은 마비된다. 이는 수잔 손탁이 파시즘의 미학을 분석하며 경고했던 메커니즘의 현대적 변주다.⁵ 미학적 통제는 폭력을 미화하지는 않지만 희화화함으로써 그 심각성을 은폐한다.
더욱이, 앤더슨의 시각 스타일은 코르다의 세계관과 완벽하게 일치한다. 코르다는 자신의 행동 원칙을 이렇게 설명한다.
ZSA-ZSA: "My father always said, 'If something gets in your way, flatten it' ...before he cut me out of the will."
("아버지는 늘 말씀하셨지. '눈앞에 거슬리는 게 있으면, 납작하게 밟아버려라' ... 유언장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리기 전까지는 말이야.")
"Flatten it." 세계를 납작하게 만들라. 이것은 문자 그대로 앤더슨의 시각적 스타일과 공명한다. 영화의 평면적인 구도, 깊이감의 제거, 대칭성에 대한 강박은 세계를 납작하게 만들려는 주권적 의지의 시각적 등가물이다. 3차원의 복잡한 현실을 2차원의 디오라마로 환원하는 것. 이것은 단순한 미학적 선택이 아니라, 혼돈을 질서로 강제하고 타자를 통제 가능한 대상으로 환원하려는 권력 의지의 시각화다.
앤더슨은 코르다의 폭력적인 세계관을 가장 아름다운 형식으로 보여줌으로써, 그 형식 자체의 폭력성을 역설적으로 폭로한다. 우리는 웃지만 동시에 불편하다. 이 불편함이야말로 우리가 감지한 권력의 실체다.
코르다는 기적적으로 생존한다. 무려 여섯 번째 비행기 추락에서도. 기자들이 잔해 더미 사이에서 그를 발견했을 때의 모습은 그로테스크하다.

REPORTER: "What's that in your hand?"
(손에 든 게 뭡니까?)
ZSA-ZSA: "I don't know. I think it's a vestigial organ. I tried to get it back in. It's not as easy as it looks."
(모르겠어요. 흔적 기관 같은데요. 다시 넣으려고 했는데, 보기만큼 쉽지가 않네요.)
그는 자신의 몸에서 떨어져 나온 기관을 마치 잃어버린 물건처럼 다룬다. 죽음조차 블랙 유머의 소재가 되는 세계. 심지어 추락한 조종사조차 아직 살아있다고 항변한다.
REPORTER: "Surely a horrific display of..."
(분명 끔찍한 광경이었을 텐데요...)
SOMEONE: "Actually, no. He's still alive."
(사실, 아뇨. 그는 아직 살아있습니다.)
REPORTER: "This was Korda's sixth recorded airplane crash."
(이것은 코르다의 기록상 여섯 번째 비행기 추락이었다.)
여섯 번. 이 반복되는 생존은 단순한 행운을 넘어선다. 나심 탈레브가 <블랙 스완>에서 분석한 극단적 사건조차 여섯 번 연속되기는 어렵다.⁶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코르다는 혼돈과 충격으로부터 오히려 이익을 얻는 존재다. 탈레브가 말한 '안티프래질리티'(충격을 받을수록 더 강해지는 속성)의 극단적 형태다.⁷ 각각의 암살 시도는 코르다를 죽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여섯 번 추락에서 살아남은 남자"라는 그의 신화를 강화한다.
이는 코르다의 존재 자체가 영구적인 위기를 필요로 함을 의미한다. 아감벤이 분석했듯, 현대 정치에서 예외상태는 더 이상 예외가 아니라 규범이 되었다.⁸ 코르다의 권력은 위기를 전제로 하기에, 그는 끊임없이 위기를 재생산한다. 그는 나오미 클라인이 폭로한 '재난 자본주의'의 개인화된 버전이다.⁹ 그는 재난을 이용하는 것을 넘어 재난을 창조한다.
그러나 그의 적들도 가만있지 않는다. 어두운 회의실 어딘가에서, 세계 각국의 정보 기관 수장들이 모인다. 냉전 시대의 유물 같은 분위기 속에서 그들은 '엑스칼리버'를 결성한다.

의장이 선언한다.
EXCALIBUR CHAIRMAN: "Subject: Zsa-zsa Korda, our single common enemy who works consistently and relentlessly against the interests of all our competing nations."
(대상: 자자 코르다. 우리의 유일한 공동의 적, 자자 코르다입니다. 그는 경쟁 관계에 있는 우리 모든 국가들의 이익에 맞서 끈질기고 무자비하게 움직입니다.)
EXCALIBUR MEMBER: "He swindles our banks. He dodges our tariffs. He ties up our courtrooms in tactical lawsuits. He provokes war as well as peace, in direct conflict with our shared diplomatic agenda."
(그는 은행을 사취하고, 관세를 회피하며, 전술적 소송으로 법정을 마비시킵니다. 우리의 공유된 외교 의제와 직접적으로 충돌하면서, 전쟁과 평화를 모두 유발합니다.)
이것은 슈미트의 정치 이론을 완벽하게 구현한다. 슈미트는 정치의 본질을 '친구-적' 구별로 정의했다.¹⁰ 적이란 단순한 경쟁자가 아니라 실존적 위협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서로 경쟁하던 국가들("all our competing nations")이 한 개인을 제거하기 위해 연합한다. 이것은 코르다가 특정 국가의 적이 아니라, 국가 시스템 자체의 적이라는 뜻이다. 베버 이후 근대 국가는 폭력의 독점을 통해 정의되었다.¹¹ 그러나 코르다는 국가가 독점해 온 핵심 기능들 경제 통제(은행, 관세), 법 집행(법정), 안보(전쟁과 평화) 체계적으로 무력화한다. 그는 단순한 범죄자가 아니라, 국가를 대체하려는 새로운 주권자다.
EXCALIBUR CHAIRMAN: "All in favor?" (찬성하시는 분?)
ALL: "Aye!" (찬성!)
이것은 전쟁 선언이다. 낡은 주권(국가)과 새로운 주권(개인) 사이의 전쟁.
코르다는 진공 상태에서 출현하지 않았다. 그는 이미 예언된 존재다. 1997년 출간된 제임스 데일 데이비슨과 윌리엄 리스-모그의 <주권적 개인(The Sovereign Individual)>는 정보 기술이 권력의 본질을 근본적으로 바꿀 것이라 선언했다.¹²
그들의 핵심 주장은 이렇다. 정보화 시대에 자본과 정보는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들지만, 국가의 과세와 규제 권력은 영토에 묶여 있다. 소수의 인지 엘리트들은 암호화 기술과 네트워크를 이용해 국가를 우회하고, 가장 유리한 관할권에 머물며(코르다의 선언 "I don't live anywhere"의 기원이다), 사적으로 안보를 구매할 것이다. 국가의 시대는 저물고, 새로운 봉건주의가 도래할 것이다.
1997년, 이 책은 실리콘밸리 엘리트들에게 복음처럼 받아들여졌다. 피터 틸은 "나는 이 책을 읽고 미래를 보았다"고 회고했다.¹³ 그리고 2025년 현재, 우리는 이 예언이 실현되는 것을 목격하고 있다. 비트코인은 국가의 화폐 독점에 도전했고(사토시 나카모토의 백서는 명시적으로 중앙은행에 대한 불신을 표명했다¹⁴), 디지털 노마드는 물리적 거주를 거부하며, 테크 억만장자들은 재앙에 대비해 뉴질랜드 시민권을 사들인다.
예언은 실현되었지만, 해방이 아니라 새로운 형태의 지배로 나타났다. <페니키안 스킴>은 바로 이 실패한 유토피아를 해부한다. 코르다는 현실에 존재하는 수많은 '주권적 개인들'의 극단적 버전이다. 그의 탈영토성은 피터 틸의 씨스테딩(해상 도시 건설)을, 그의 안하무인격 행동은 일론 머스크의 기행을 과장되게 재현한다.
영화는 추락하는 비행기라는 강렬한 이미지로 시작하여, 우리 시대의 가장 강력한 신화 중 하나인 '주권적 개인'의 탄생과 그 이면에 숨겨진 폭력성을 폭로한다. 이제 우리는 이 새로운 주권자가 국가 시스템과의 전쟁에서 어떻게 승리하는지, 그리고 그 승리 이후에 그가 건설한 사적 왕국이 어떤 모습인지를 살펴볼 것이다.
엑스칼리버가 코르다를 공동의 적으로 지정한 순간, 전쟁은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20세기의 전쟁이 아니다. 탱크와 군대가 국경을 넘는 대신, 국가와 네트워크가 충돌한다. 그리고 이 전쟁에서 국가는 시작부터 불리했다. 한쪽은 영토에 묶여 있고, 다른 쪽은 영토를 초월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고정된 것과 유동적인 것의 전쟁, 즉 영토성과 네트워크의 비대칭 전쟁이다.
전쟁의 본질은 코르다의 존재론적 위치에서부터 결정된다. 비행기 안, 구름 위를 나는 공간. 이곳은 어떤 국가의 영토에도 속하지 않는 '비-장소'다. 이 상징적인 공간에서 코르다는 자신의 위치를 선언한다. 동승한 리즐과 칼슨(가명 비요른)이 그의 여권 부재에 대해 물을 때, 카메라는 세 사람을 정확히 삼등분하는 대칭 구도로 포착한다.

BJORN: "Passports? Where's yours?" (여권은요? 당신 것은 어디 있습니까?)
ZSA-ZSA: "I don't have a passport." (나는 여권이 없어.)
BJORN: "Normal people want the basic human rights that accompany citizenship in any sovereign nation."
(보통 사람들은 주권 국가의 시민권이 부여하는 기본적 인권을 원합니다.)
ZSA-ZSA: "I don't. My legal residence is a shack in Portugal. My official domicile is a hut on the Black Sea. My certificated abode is a lodge perched on the edge of a cliff overlooking the sub-Saharan rainforest accessible only by goat path. I don't live anywhere. I'm not a citizen at all. I don't need my human rights."
(난 아니지. 내 법적 거주지는 포르투갈의 판잣집이고, 공식 주소는 흑해의 오두막, 증명서상 거처는 염소나 다니는 길로만 갈 수 있는 사하라 사막 남쪽 열대우림 절벽 끝의 산장이야. 나는 어디에도 살지 않아. 난 시민이 아니라고. 인권 같은 건 필요 없어.)
이 대사는 단순한 조세 회피 전략의 고백이 아니다. 이것은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 이래 국제 질서의 근간을 이루어온 영토 주권 원칙에 대한 정면 거부다.¹⁵ 베스트팔렌 체제는 국가는 명확한 영토를 가지며, 그 영토 내에서 배타적 주권을 행사한다는 원칙 위에 세워졌다. 이 체제 하에서 개인은 필연적으로 특정 국가의 시민으로서 권리와 의무를 진다.
그러나 코르다는 이 전제를 거부한다. 그는 세 개의 법적 주소지를 나열하지만, 실제로는 어디에도 살지 않는다. 그는 끊임없이 이동하며 고정을 거부하는 자본 그 자체가 되었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용어로, 이것은 극단적인 탈영토화(Deterritorialization)다.¹⁶
더욱 급진적인 것은 "I don't need my human rights"라는 선언이다. 한나 아렌트는 무국적자를 "권리를 가질 권리"조차 박탈당한 가장 취약한 존재로 분석했다.¹⁷ 그러나 코르다는 이 취약성을 역전시킨다. 그는 국가가 제공하는 보호(인권, 안전망)가 필요 없다. 그는 사적으로 안보를 구매하고, 사적으로 분쟁을 해결하며, 사적으로 인프라를 건설한다. 이것이 <주권적 개인>이 예견한 미래다: 부유한 엘리트들이 국가 시스템에서 이탈하여 새로운 봉건주의를 구축하는 것.¹⁸ 영화는 이것이 해방이 아니라 독재임을 폭로한다.
국가 연합체인 엑스칼리버는 이 탈영토적 적을 제거하기 위해 끊임없이 시도한다. 그러나 이 암살 시도들은 스파이 스릴러가 아니라 버스터 키튼의 슬랩스틱 코미디처럼 연출된다.

장 보드리야르는 현대 사회를 실체는 사라지고 그 기호만이 과잉 생산되는 세계로 묘사했다.¹⁹ 엑스칼리버의 암살 시도는 바로 이 시뮬라시옹이다. 그들은 실제 권력이 아니라 권력의 기호를 수행한다. 그들은 스파이처럼 행동하지만, 효과적인 스파이가 아니다.
구조적 이유가 있다. 첫째, 조직의 비대칭성. 국가 정보 기관은 계층적이고 관료적인 거대 조직이다. 반면 코르다는 혼자 결정하는 네트워크의 중심이다. 에릭 레이먼드가 오픈소스 운동을 분석하며 지적했듯, 중앙집권적 "성당"은 분산된 "시장"의 속도와 유연성을 따라잡기 어렵다.²⁰
둘째, 폭력의 시장화. 엑스칼리버는 여전히 20세기의 방법론(물리적 감시, 대면 암살)에 의존한다. 그러나 코르다는 폭력조차 외주화하고 시장화했다.
ZSA-ZSA: "I think I recognize that assassin. He used to work for me, maybe."
(저 암살자, 얼굴이 익은데. 아마 예전에 내 밑에서 일했던 놈일 거야.)
이 대사는 농담이 아니다. 과거 국가가 독점하던 폭력(암살)이 이제 사적으로 거래되는 서비스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사적 군사 기업(PMC)의 부상이 개인 수준으로 내려온 것이다.²¹
셋째, 영토성의 한계. 국가는 국경 안에서만 주권을 온전히 행사할 수 있다. 그러나 코르다는 어디에도 없기 때문에, 어디서든 공격받지만 어디서도 완전히 포획되지 않는다. 그는 양자적 존재다—동시에 여러 장소에, 그리고 어느 곳에도 없다.
엑스칼리버의 실패는 단순히 기술적이거나 구조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데올로기적이다. 국가는 더 이상 개인의 충성심을 독점하지 못한다.
정글 추락 후, 문명(국가)의 바깥인 자연 상태에서 칼슨의 진실이 드러난다.

LIESL: "Are you still an enemy spy?" (아직도 적의 스파이세요?)
KARLSEN: "At the moment, no. I thought I might be more useful as a double agent."
(지금 이 순간은 아닙니다. 이중 스파이가 더 쓸모 있을 것 같아서요.)
ZSA-ZSA: "I couldn't pay you any extra." (추가 수당을 줄 순 없는데.)
KARLSEN: "Oh, no, naturally it would be included in my tutorial fees."
(아, 아뇨. 당연히 제 과외비에 포함되는 걸로 하겠습니다.)
칼슨은 국가에 대한 독점적 충성심을 거부하고, 자신의 노동(정보)을 시장에서 판매할 수 있는 상품으로 인식한다. 이것은 막스 베버가 분석한 근대적 직업 윤리의 극단이다.²² 베버에게 근대 자본주의는 노동을 신성한 소명에서 거래 가능한 상품으로 전환했다. 칼슨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충성심조차 거래 가능하다.
그러나 이 전환에는 윤리적 고뇌가 선행한다. 그의 보고서를 보라.
EXCALIBUR REPORT (Karlsen's voice-over): "Target repeatedly places significant cash funds directly into operative's personal possession. Tried to misplace. However, operative does not have heart to steal or destroy. Too cruel under circumstances."
(대상은 반복적으로 상당한 현금을 요원인 제 손에 직접 맡깁니다. 잃어버리려 했습니다. 그러나 요원은 그걸 훔치거나 파괴할 마음이 없습니다. 상황상 너무 잔인합니다.)
"Too cruel under circumstances." 이것은 국가의 비인격적 명령 체계가 개인의 윤리적 판단 앞에서 무력화되는 순간이다. 그는 명령(코르다의 자금 파괴)과 양심 사이에서 후자를 선택했다. 이것은 스탠리 밀그램의 유명한 복종 실험의 역전이다.²³ 밀그램은 보통 사람들이 권위에 복종하여 타인에게 고통을 가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지만, 칼슨은 반대로 행동한다.
이것은 긍정적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만약 개인의 양심이 국가의 명령을 무력화할 수 있다면, 국가는 더 이상 집단 행동을 조직할 수 없다. 이것은 홉스가 <리바이어던>에서 경고한 시나리오다 국가 없이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시작된다.²⁴
칼슨은 단순히 불복종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중 스파이가 된다. 이것은 배신이 아니라 시장 논리의 내면화다. 그는 더 이상 국가에 복무하는 관료가 아니라, 정보를 판매하는 프리랜서다. 주권적 개인의 예언처럼, 그는 최고 입찰자에게 자신의 기술을 판매한다.²⁵ 이것은 긱 경제의 극단이다, 스파이조차 우버 운전사처럼 일한다.
이 비대칭 전쟁을 이해하려면 권력의 위상학적 변화를 파악해야 한다. 마누엘 카스텔은 <네트워크 사회의 도래>에서 권력이 장소의 공간에서 흐름의 공간으로 이동하고 있다고 주장했다.²⁶
국가는 장소의 권력이다. 그것은 영토, 국경, 수도라는 고정된 지리적 지점들에 의존한다. 반면 코르다는 흐름의 권력을 행사한다. 그의 권력은 고정된 장소가 아니라 자본, 정보, 네트워크의 끊임없는 이동 속에 존재한다.
이것은 실질적인 전략적 우위를 의미한다. 군사적으로, 클라우제비츠 이래 전쟁의 핵심은 영토 장악이었다.²⁷ 그러나 21세기 전쟁에서 사이버 공격이나 금융 전쟁은 영토 점령 없이도 국가를 마비시킬 수 있다. 코르다는 이 새로운 전쟁을 수행한다.
경제적으로, 국가는 영토 내 경제 활동에 과세한다. 그러나 디지털 경제에서 경제 활동은 어디에서 일어나는가? 이익은 법인세가 가장 낮은 관할권으로 이전된다. 다국적 기업들은 연간 수천억 달러의 세금을 회피한다.²⁸ 코르다는 이 시스템의 극단이다. 그는 관세를 회피하고("He dodges our tariffs"), 은행을 사취한다("He swindles our banks").
사회적으로, 국가는 국민 정체성을 통해 충성심을 확보한다. 베네딕트 앤더슨이 분석했듯, 민족은 "상상의 공동체"다.²⁹ 그러나 디지털 시대에 정체성은 점차 탈영토화된다. 사람들은 국가보다 온라인 커뮤니티나 크립토 프로젝트에서 더 강한 소속감을 느낀다. 코르다는 이 흐름 속에 존재한다.
물론 현실에서 국가는 여전히 강력하다(중국의 기술 통제, EU의 GDPR 등). 그러나 국가의 대응은 항상 반응적이다. 기술은 법보다 빠르게 진화한다. 로렌스 레식이 경고했듯, "코드가 법이다(Code is law)" 기술적 아키텍처가 법적 규제보다 더 강력한 통제를 행사한다.³⁰
엑스칼리버와 코르다의 전쟁은 국가 시스템의 쇠퇴와 새로운 권력의 등장이 교차하는 주권의 공백(Sovereignty Vacuum) 상태를 드러낸다. 코르다는 국가라는 외부의 적과의 투쟁에서 사실상 우위를 점했다. 정치적인 것의 중심은 국가에서 개인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이것이 주권의 완성인가? 슈미트가 지적했듯, 주권은 예외상태를 결단하는 능력만이 아니라, 정상 상태를 유지하고 복원하는 능력까지 포함한다.³¹ 코르다는 혼돈을 만들어내고 그 속에서 생존하는 데는 능숙하지만, 안정적인 질서를 구축할 수 있는가?
이제 우리는 시선을 내부로 돌릴 것이다. 코르다의 제국 안으로. 그의 가족으로. 그리고 거기서 우리는 주권적 개인 모델의 가장 심오한 모순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절대적 자유를 추구한 자가 어떻게 가장 전제적인 사적 독재를 구축하는가?
외부의 적, 즉 국가 시스템(엑스칼리버)을 무력화하는 데 성공한 코르다는 이제 자신의 제국 내부로 시선을 돌린다. 여기서 우리는 주권적 개인 모델이 가진 가장 심오한 모순과 마주한다. 국가의 간섭으로부터 절대적 자유를 추구한 주권자가 역설적으로 가장 자의적이고 비합리적인 사적 독재를 구축한다는 사실이다. 자유지상주의의 유토피아가 어떻게 신봉건주의적 디스토피아로 변질되는가?
근대 국가는 보편성을 주장한다. 미셸 푸코가 분석한 '생명관리권력'은 인구 전체를 대상으로 출생률, 건강, 위생을 관리하고 최적화하려는 통치 기술이다.³² 그것은 통계에 기반하고 합리성을 추구한다. 그러나 코르다의 통치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것은 철저히 선택적이고 자의적이다.
코르다가 오랫동안 떨어져 있던 딸 리즐과 재회한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부드러운 자연광이 리즐의 수녀복을 밝힌다. 이전 장면들의 차갑고 인위적인 조명과 대비되는 이 시각적 설정은 코르다가 리즐 앞에서만 무장해제됨을 암시한다. 그러나 그의 제안은 부드럽지 않다.

ZSA-ZSA: "I've appointed you sole heir to my estate and manager of my affairs after the event of my actual demise. On a trial basis, meaning for the time being. You can move into the penthouse immediately."
(널 내 재산의 유일한 상속인으로 임명했다. 시험적으로 말이다. 즉 당분간. 당장 펜트하우스로 이사해도 돼.)
LIESL: "Like a trial period. Of being your daughter." (시험 기간 같은 거네요. 당신의 딸이 되는 시험 기간.)
ZSA-ZSA: "Of being sole heir to my estate and manager of my affairs after the event of my actual demise."
(내 재산의 유일한 상속인이 되는 시험 기간.)
"On a trial basis." 시험적으로. 후계자 지명조차 조건부이고 가역적이다. 이것은 사랑이 아니라 거래다. 그리고 계약 조건은 코르다가 일방적으로 결정한다. 리즐은 묻는다: "딸이 되는 시험 기간인가요?" 코르다는 정정한다: "상속인이 되는." 이 미묘한 차이가 결정적이다. 코르다에게 리즐은 딸이기 이전에 기능적 존재다.

LIESL: "You have other children, too." (다른 자녀들도 있잖아요.)
ZSA-ZSA: "The nine boys live in the dormitory across the street." (아홉 아들들은 길 건너 기숙사에 살아.)
LIESL: "What are they doing here?" (그들은 여기서 뭐 하는 건가요?)
ZSA-ZSA: "I don't know, I don't know what they're doing here. Is today a Saturday? That might explain it."
(모르겠어, 그들이 여기서 뭘 하는지 모르겠어. 오늘 토요일이야? 그럼 설명이 되겠네.)
충격적인 무관심이다. 그는 아들들이 왜 거기 있는지조차 모른다. 그들은 인격적 존재가 아니라 통계적 잉여다. 코르다는 나중에 그 이유를 설명한다. "나는 확률을 따져(I play the odds)." 아이들을 투자 포트폴리오로 취급하는 이 발언은 신자유주의 인간관의 그로테스크한 극단이다.³³ 이것은 벤처 캐피털의 논리다. 열 명에게 투자하면 그중 하나가 유니콘이 될 것이다. 나머지 아홉? 실패한 투자다.
이것이 바로 선택적 생명관리권력이다. 푸코의 권력이 인구 전체를 대상으로 한 보편적 통치라면, 코르다의 권력은 자의적 선택에 기반한 차등적 통치다. 리즐은 특권화되고, 아들들은 방치된다. 이것은 합리적 계획이 아니라 감정적 집착이며, 바로 이 비합리성이 사적 주권의 본질이다. 그것은 어떤 보편적 규범에도 구속되지 않는다.

그는 아들들에게 직접 말한다. "너희는 내 상속자가 아냐! 그래도 너희를 매우 귀하게 여긴다." 인정은 하되 분배는 거부하는 것. 현대 자본주의의 모순이 가족 단위로 재현된다.³⁴ 이것이 사적 독재의 통치 논리다.
그러나 코르다의 통치는 단순한 방치에 그치지 않는다. 리즐에게는 극단적으로 침습적이다. 여기서 우리는 푸코의 또 다른 핵심 개념인 판옵티콘이 사적 영역에서 재구성되는 것을 목격한다.
판옵티콘은 중앙 감시탑에서 모든 수감자를 볼 수 있지만, 수감자는 자신이 언제 관찰되는지 알 수 없는 감옥 구조다.³⁵ 핵심은 가시성의 비대칭이다. 수감자는 항상 관찰될 수 있다고 가정하고 스스로를 규율한다. 권력은 물리적 폭력이 아니라 내면화된 감시를 통해 작동한다.

LIESL: "You've been spying on me all my entire life?" (제 평생을 염탐해 오신 건가요?)
ZSA-ZSA: "It's not called spying when you're the parent. It's called nurturing. Or at the very least, ...



덕분에 올 한해를 이 영화로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