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박완서의 소설 "나목"은 박수근의 삶에서 시작되었다.-
박수근과 박완서
2021년 11월,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박수근(1914-1965)의 회고전이 개최되었다. '국민화가'라는 타이틀을 달 만한 화가 박수근의 개인전이 어찌 된 일인지 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처음 열렸다. 당시 코르나 기간이라 입장 인원을 제한했는데도, 미술관이 개관하는 아침 10시보다 더 전에 도착해, 추운 야외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는 관객들의 모습이 장사진을 이루었다.
박수근은 1965년5월 작고했는데, 같은 해 10월 유작전이 열렸다. 유작전이 열린다는 신문 기사를 접하고 전시회에 갔다가 박수근의 작품 앞에서 옴짝달싹할 수 없는 감동을 받은 이가 있었다. 바로 소설가 박완서(1931-2011)였다. 그녀는 주체할 수 없는 심정을 안고서, 박수근과의 인연을 소재로 한 소설 <나목>을 썼다. 그리고 이 소설이 1970년 여성동아 현상 공모에 당선되면서, 주부로 살아가던 박완서는 소설가로 등단하게 된다. 나이 39세가 될 때까지 주부였던 사람이 이런 훌륭한 소설을 썼을 리 없다며, 잡지사에서 집으로 찾아가 진짜 박완서가 쓴 것인지 증명해 보이라고 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박완서와 박수근의 운명적인 만남
박완서와 박수근이 처음 만난 것은 1951년 겨울, 미군 PX에서였다. 6.25전쟁이 한창일 때라 많은 사람이 대구와 부산으로 피란을 갔기 때문에 서울은 거의 '공동화'상태였다.
일자리라고는 거의 찾을 수 없던 때, 박완서는 소녀 가장이 되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아버지는 이미 어릴 때 돌아가신 데다가. 전쟁중에 오빠와 숙부가 비명횡사했기 때문이었다. 1950년6월 서울대학교 국문과에 당당히 합격하면서 여대생이 되나 싶었지만, 한 달도 채 안 되어 전쟁이 발발했고 그것이 그녀의 삶을 졸지에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세상의 불행을 한데 모아 때려 부은 것 같은 자신이 삶을 경멸하며 불행감에 도취된 채, 박완서는 현재의 휘황천란한 신세계백화점 건물에 있었던 미군 PX 기념품 가게에서 점원으로 일했다. 박완서가 미군들에게 서툰 영어로 일종의 호객 행위를 하면, 그 뒤에서 박수근이 스카프나 손수건 귀통이에 손님의 애인이나 가족의 사진을 보고 초상화를 그려 넣은 식이었다. 이 위대한 소설가와 화가가 콤비를 이루어, 1951년 겨울 서울의 쇼핑센터 구석에서 이런 일을 하고 있었다니!
예민하고 섬세한 감각을 지닌 스무 살 박완서에게 이 상황은 몸시 치욕적으로 느껴졌다. 이 치욕의 대가로 박완서는 밥벌이하는 화가들에게 쓸데없이 분풀이도 하기도 했단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도 박수근은 온갖 굴욕을 감내하며 바보스러울 정도로 우직하고 성실하게 자신의 소박한 임무를 다했다. 박완서는 그의 이런 의연한 태도를 보면서 차차 깊은 감명을 받게 된다. 조금의 우월의식도 없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