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회사 전체 채널에 공지사항이 하나 올라왔습니다.
이메일, 리포트, 내부 문서 등.. 다양한 곳에서 AI를 활용한 산출물들이 자주 눈에 띕니다.
업무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AI 툴을 사용하는 것은 적극 권장합니다. 하지만 꼭 스스로 검수하세요.
AI 특유의 기계적인 문장 구조나 프로젝트 맥락에 전혀 맞지 않는 단어 선택 등은
실제로 여러분이 들인 노력과 성과와 무관하게 전문성을 훼손하고, 성의마저 의심하게 됩니다.
AI는 더 효율적으로 일하기 위해서, 혹시 놓친 부분을 채우기 위해서 등등 '더 나은 나'를 위해 사용하세요.
검수 없는 AI 사용은, 여러분이 아닌 AI의 가치를 증명하게 되니 스스로 대체되지 않도록 유의하시길 바랍니다.
공지사항의 의도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말을 하려는 건 아닙니다.
검수 없이 AI가 뱉은 결과물을 그대로 붙여넣는 건 분명 문제이고, 저 역시 그런 결과물을 볼 때마다 꽤나 거슬리곤 하니까요.
하지만 이 글을 읽으면서 자꾸 다른 지점이 신경 쓰였습니다.
공지사항의 표면적 내용보다, 이 공지가 전제하고 있는 '생각의 틀'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고 해야 할까요. 이 공지를 올린 분은 — 그리고 아마 지금 이 시각에도 비슷한 공지를 올리고 있을 수많은 조직의 리더들은 — AI가 우리 일에 던지는 질문의 본질을 제대로 짚고 있는 걸까요? 솔직히 말해 저는 그렇지 않다고 느꼈고, 그 불편함의 정체를 풀어보려 합니다.
1. “AI 사용을 유의합시다”라는 말의 해상도
평소에 사람들이 어떤 개념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들으면서 자주 느끼는 게 하나 있습니다. 생각보다 엄밀하게 쪼개서 구분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뭉뚱그려 이해하고, 그걸 언어로 표현하면서 뭉개진 관념이 그대로 고착화됩니다. “일할 때 AI 사용을 유의합시다”라는 문장이 제겐 딱 그런 사례로 보였습니다.
얼핏 보면 별 문제 없는 말 같습니다. 하지만 ‘일’이라는 단어 하나가 축약하고 있는 방대한 워크플로우를 펼쳐보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제가 몸담고 있는 마케팅의 워크플로우를 기준으로 살펴보겠습니다. 프로젝트 하나가 돌아가려면 대략 이런 단계들이 존재합니다. (심지어 이 순서대로 진행되는 것도 아니고 전부 뒤섞여 있습니다.)

판단의 영역: 전략 방향 설정, 타겟 설정, 핵심 메시지 결정
아이데이션의 영역: 컨셉 발상, 크리에이티브 앵글 탐색
정보 수집: 시장 조사, 경쟁사 분석, 소비자 인사이트 리서치
구조화와 분석: 수집된 정보의 정리, 패턴 파악, 의미 부여
재구성: 분석 결과를 전략적 프레임으로 재배치
커뮤니케이션: 내부 보고, 클라이언트 프레젠테이션, 팀 간 협업, 아웃소싱 매니지먼트
크리에이티브 구현: 시안 제작, 카피라이팅, 영상 편집, 디자인 작업
이 단계들 각각에서 AI가 할 수 있는 일의 성격과 효용은 전혀 다릅니다.
예를 들어 정보를 수집하고 구조화하는 단계에서 AI는 압도적입니다.
사람이 3시간 걸릴 리서치를 15분에 끝낼 수 있습니다. 경쟁사 10곳의 최근 캠페인을 비교 분석한다고 해보죠. 각 브랜드의 채널을 돌아다니며 핵심 메시지, 톤앤매너, 타겟 오디언스를 정리하는 건 중요하지만 지극히 반복적인 작업입니다. 사람이 이 기초 작업을 직접 하는 것과, AI에게 초벌을 맡긴 뒤 자신은 '해석과 의미 부여'에 집중하는 건 결과물의 차원이 다릅니다. 100페이지짜리 소비자 조사 리포트를 읽고 핵심 인사이트를 추출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AI가 1차 요약을 해주면, 저는 “이 데이터에서 우리 브랜드에 유의미한 시사점이 뭔지”를 판단하는 데 시간을 쓸 수 있습니다. 이런 영역에서 AI를 적극 활용하는 건 게으름이 아니라 '실행력'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시장은 빠른 실행력을 요구하고, 그 요구에 부응하려면 병목을 극복해야 합니다.
반면 전략적 판단, 컨셉의 방향성, 메시지의 결을 잡는 영역은 성격이 다릅니다.
LLM에게 “Z세대 타겟 스킨케어 브랜드의 SNS 전략을 짜줘”라고 하면 꽤 그럴듯한 답이 나옵니다. 트렌드 키워드도 맞고, 채널별 전략도 논리적이죠.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일반론'입니다. 이 브랜드가 지난 2년간 구축해 온 포지셔닝, 경쟁사 대비 실제로 먹히고 있는 차별점, 최근 소비자 피드백에서 감지되는 미묘한 온도 변화가 뭔지 — 이 맥락 위에서 “그래서 우리는 이쪽으로 가야 한다”고 결정하는 건 여전히 사람의 몫입니다.
그러면 공지사항에서 지적되었던 ‘AI 특유의 어색함’은 주로 어디서 발생할까요? 제 경험상 가장 많이 튀어나오는 지점은 최종 커뮤니케이션 단계입니다. 클라이언트에게 보내는 메일, 기획서의 카피라이팅, 리포트의 서술 — 이런 곳에서 AI가 생성한 텍스트가 필터링 없이 그대로 나가는 경우를 근래 많이 목격합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리서치와 데이터 구조화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보이지 않는 노동'인 반면, 메일 한 통, 기획서 한 장은 누군가의 눈앞에 직접 놓이는 '보이는 결과물'이죠. 바로 이 마지막 단계는 최종 아웃풋이 '글'의 형태를 띠기 때문에, “AI가 써줬으면 좋겠다”는 유혹이 가장 강하고, 동시에 그 엉성한 결과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AI를 가장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는 중간 단계(리서치, 데이터 구조화, 초안의 뼈대 잡기)에서 이를 체계적으로 쓰는 사람은 의외로 드뭅니다. (솔직히 저는 거의 못 봤습니다.)
구조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실무자들은 최종 아웃풋 단계에서 무분별하게 AI를 남용하고, 리더들은 그 어색함만 감지한 채 그저 “유의하라”고 뭉뚱그려 경고합니다. 정작 AI가 필요한 중간 단계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