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의 퇴장과 신먼로주의의 공포

2024년 11월, 도널드 트럼프가 다시 백악관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그의 'America First' 기치는 이번엔 단순한 슬로건이 아니었습니다. 70년간 유럽의 하늘을 덮어주던 미국이라는 거대한 우산이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접히기 시작한 겁니다.
NATO 정상회의에서 트럼프는 방위비 분담금을 제대로 내지 않는 동맹국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러시아가 공격해도 우린 돕지 않을 것"이라고요. 농담처럼 들렸지만, 아무도 웃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진심이라는 걸 모두가 알았거든요.
유럽 각국 정상들의 표정을 상상해보십시오. 마치 70년간 부모님 집에 얹혀살던 중년이 갑자기 "내일부터 독립해"라는 통보를 받은 것과 같은 심정이었을 겁니다. 문제는 이 중년이 집 밖 세상이 얼마나 위험한지 까맣게 잊고 살았다는 점이죠.
미국의 안보 외주가 종료되는 순간, 유럽은 자신들이 벌거벗은 채로 서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머리 위로는 거대한 먹구름 하나가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바로 러시아라는 이름의.
실존적 위협, 소련러시아라는 오래된 적

2022년 2월 24일, 블라디미르 푸틴은 전 세계에 명확한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제국주의는 죽지 않았다"고요. 우크라이나 침공은 단순한 국지전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냉전 이후 유럽이 믿고 싶어했던 모든 환상을 산산조각 낸 사건이었죠.
잠깐, 우리는 러시아를 너무 가볍게 봤던 게 아닐까요? 소련 붕괴 후 30년이 지나며 많은 사람들이 착각했습니다. '저 곰은 이제 늙었고 이빨도 다 빠졌다'고요. 하지만 보시죠.
소련은 냉전 시절 550만 명의 상비군을 보유했습니다. 전차만 5만 대, 전투기 1만 대, 핵탄두 4만 발. 말 그대로 유럽 전체를 단독으로 상대할 수 있는 군사력이었죠. 그래서 NATO가 만들어졌던 겁니다. 소련 하나를 막기 위해 서방 16개국이 손을 잡아야 했으니까요.
소련이 무너지면서 그 군사적 유산은 어디로 갔을까요? 대부분을 러시아가 승계받았습니다. 1991년 12월, 옐친은 소련군의 70% 이상을 러시아군으로 흡수했습니다. 핵무기는 물론이고, 첨단 미사일 기술, 전략폭격기, 전략 잠수함... 소련 방산 단지의 85%가 러시아 영토에 있었거든요.
더 중요한 건 소련 시절의 군사 교리와 전략적 사고방식까지 고스란히 이어받았다는 점입니다. 서방의 전쟁 개념과 근본적으로 다른, 그 독특한 방식 말이죠. 그것이 러시아가 전쟁하는 방식입니다. 러시아는 전쟁을 '전선'이 아니라 '체계 전체'에서 수행합니다. 소련 군사 이론가였던 게라시모프 장군의 이름을 딴 '게라시모프 독트린'을 아십니까? 군사적 수단과 비군사적 수단의 비율을 1:4로 보는 전략입니다. 즉, 탱크 한 대 굴리는 동안 사이버 공격, 에너지 차단, 정보전, 외교 압박을 네 배로 가한다는 거죠.
실제로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을 보십시오. 겨울이 오기 전 천연가스 공급을 끊어 시민들을 얼어붙게 만들고, 사이버 공격으로 발전소를 마비시키며, SNS에 가짜뉴스를 퍼뜨려 사회를 분열시킵니다. 2023년 한 해 동안만 우크라이나는 2,194건의 대규모 사이버 공격을 받았습니다. 하루 평균 6건입니다.
어느 유럽 안보 전문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러시아는 전쟁을 교향곡처럼 지휘한다"고 합니다. 군사, 에너지, 정보, 사이버, 외교... 모든 악기가 하나의 목표를 향해 연주되는 거죠.
문제는 유럽이 이런 하이브리드전에 완전히 무방비라는 점입니다. 냉전이 끝난 1990년부터 유럽 국가들은 '평화의 배당금'이라는 달콤한 함정에 빠졌습니다. "이제 전쟁은 없을 거야. 국방비를 줄이고 복지에 쓰자!"

그 결과가 어땠을까요? 독일군은 한때 빗자루을 총 대신 들고 훈련했습니다. 농담이 아닙니다. 2014년 NATO 훈련에서 독일군이 실제 무기가 부족해서 나무로 만든 가짜 총을 장착했던 일화는 이제 전설이 되었죠.
영국 해군의 구축함들은 부품 부족으로 항구에 묶여 있고, 프랑스는 정예 부대는 있지만 대규모 지상전을 치를 예비군이 없습니다. 이탈리아와 스페인은... 뭐, 말할 필요도 없겠죠.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습니다. 고령화와 전의(戰意) 상실입니다. 러시아는 단기적 위협이 아닙니다. 앞으로 20년, 30년을 내다봐야 하는 구조적 위협입니다. 푸틴이 사라져도 러시아라는 시스템은 남습니다. 러시아 국방대학 교과서에는 아직도 "유럽 평원은 러시아의 전략적 완충 지대"라는 표현이 버젓이 남아있습니다. 제국의 영광을 되찾으려는 DNA는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유럽은 녹슬어버린 무기를 다시 갈고닦아야 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무기보다 더 큰 문제가 있었으니...
2. 복지 천국 유럽, '누가 전장으로 갈 것인가?'
20세기 초반의 유럽을 떠올려봅시다. 유럽은 수백년 지속된 열강으로, 대륙 밖의 모든 나라를 손쉽게 두들겨패고 다녔습니다. 대영제국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였습니다. 프랑스는 나폴레옹의 영광을 계승한 대륙의 패권국이었고, 독일 제국은 프로이센 군국주의의 정점에 있었죠. 이들의 군사력은 가히 세계를 호령했습니다.
숫자로 볼까요?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프랑스는 동원령 하루 만에 390만 명을 소집했습니다. 영국은 전쟁 기간 동안 자원입대자만 250만 명이었습니다. 독일은? 1,300만 명을 동원했죠. 독일답죠? 인구 대비 20%입니다.
이들의 산업 생산력도 무시무시했습니다. 영국은 전쟁 기간 동안 전차 2,636대, 항공기 5만 5,000대를 생산했습니다. 프랑스는 포탄만 2억 9,000만 발을 찍어냈죠. 독일 크루프 공장은 3교대로 돌아가며 하루에 대포 100문을 생산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은 어땠을까요?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영국은 13만 2,500대의 항공기를 만들었습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영국 여성 노동자만 650만 명이 군수 공장에서 일했습니다. 프랑스는 비록 1940년에 항복했지만, 자유 프랑스군은 아프리카와 중동에서 계속 싸웠고, 레지스탕스는 독일군을 끊임없이 괴롭혔죠.
이게 바로 제국주의 열강의 전투력이었습니다. 단순히 병력만 많은 게 아니라, 전쟁을 '시스템'으로 수행할 수 있는 산업 기반과 국가 동원 능력이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2024년의 유럽을 보십시오.
프랑스군 현역은 20만 3,000명입니다. 1914년의 20분의 1 수준입니다. 영국군은? 8만 2,000명입니다. 2차 대전 말기 영국군이 300만 명이었던 걸 생각하면 97%가 증발한 겁니다. 독일 연방군은 18만 3,000명. 나치 독일 국방군 1,300만 명의 1.4%입니다.
더 충격적인 건 이 숫자마저 제대로 채우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2023년 영국군은 모집 목표의 79%만 달성했습니다. 독일은 71%입니다. 프랑스는 그나마 나은 편이지만, 그것도 아프리카 출신 흑인 이민자들로 간신히 채우는 수준이죠.
상상해보십시오. 연금이 보장되고, 무상 의료가 제공되며, 주당 35시간만 일하면 되는 나라에서 자란 젊은이들에게 "이제 총 들고 전쟁터로 가야 한다"고 말하는 상황을요.

2023년 어느 여론조사 결과는 충격적이었습니다. "당신의 나라가 침략받으면 무기를 들고 싸울 의향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독일 청년의 23%만이 "그렇다"고 답했습니다. 프랑스는 29%, 이탈리아는 14%, 영국은 33%였죠. 참고로 같은 질문에 폴란드 청년들은 45%가, 핀란드 청년들은 74%가 "그렇다"고 답했습니다. 러시아를 이웃에 둔 나라와 그렇지 않은 나라의 차이가 이렇게 극명하게 드러난 겁니다.
1916년 솜 전투에서 영국군은 하루에만 2만 명이 전사했지만 다음 날도 공격을 계속했습니다. 또 수만 명이 희생됐지만 다음 날도 여전히 똑같은 돌격명령이 떨어졌습니다. 베르됭에서 프랑스군은 "On ne passe pas(적은 통과하지 못한다)"를 외치며 10개월간 버텼습니다. 그 시절 유럽인들은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걸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프랑스에서 병역을 거부하면 벌금 1,500유로만 내면 됩니다. 독일은 아예 징병제를 폐지했다가 2024년에야 재도입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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