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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왜 그것을 반대하는가?
Suldanessellar철학

너는 왜 그것을 반대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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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renicus
2025.06.14조회수 3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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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renic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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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이렇게 말한다.


우주는 거대하다. 그리고 그 거대함은 원자에서 비롯되었다.



어떤 이는 이것을 듣고 코웃음 친다.


웃기지 마라.
우주는 내가 내 눈의 시야에서 포착되는 만큼만이고, 그것을 지성으로 갑절로 배했을 때만 우주다.
고로, 우주는 내가 세계를 의식하는 만큼만의 것이다. 물론 외부의 것은 있으나, 그것은 내가 의식할 때에만 성립된다."




우리는 이들의 논쟁을 지켜본다.


보통 사람들은 '주장이 뭐고, 근거가 뭔지' 찾으라는 사고방식에 익숙하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그것도 중요하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런 질문일 수 있다.



"그렇다면 왜 하필 너는 그것을 반대하는가?"


즉, 첫번째 사람에게서는
"너는 왜 경험이 아닌 것에서 우주가 있다고 보는가? 경험이 중심이 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두번째 사람에게서는
"왜 너는 외부 자체보다 경험을 중시하는가? 왜 외부 자체는 경험만큼이 아닌가?"


이렇게 질문 가능하다.



이것은 일상에서도 질문이 가능하다.



"나는 예쁘고 섹시하고 말 잘듣는 여자가 좋다" 라고 말을 하는 게 자연스럽겠지만,



너는 이렇게 물어봐야 한다.



"왜 나는 추녀는 안되는가?"






어떤 것을 '하겠다'는 것은, 다른 것은 안하겠다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너는 왜 그것을 안하려 하는지,



그 질문을 해야 한다.



그 질문 속에, 너에게 있어 내밀한  "계기'가 들어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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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베충의 탄생에 대해서

사견이고 일베충 까는 글 아니고 일베충에 대한 관심글도 아니고 일베충에 대한 역사적 분석도 아니다 단순하게 [외부존재-관측자-인식작용]이라는 배경틀을 깔고서 접근해보는 것이다. 이렇게 접근할 때 무엇이 나오는가? 그 때에 나타나는 것은 한 사람의 '선택'이다.  선택에서 일베충이냐 아니냐가 갈린다. 따라서 이 글은 인간 유형을 다룬다.  제목과 접근법의 명시대로 일베충의 탄생을 다루되, 상호작용의 관점에서 다룬다. 원래 이 글은 언어의 틀을 설정하고서 접근해야 마땅하다. 왜? 이 글을 읽는 방법이 있거든. 이 글을 표음으로 읽으면 곤란하다. 이 글을 표의로 읽어야 하는데 이 글을 표의로 읽는다는 건 '회화적'으로 읽는다는 거다. 머리속에 이미지를 스케치하면서 시뮬레이션하지 않으면 이 글은 읽히지 않는다. 근데 그 이유와 접근법을 설명하자니 분량이 너무나 과해지는 탓에 설명을 짜르고 간다. 따라서 이 글은 오해의 여지가 다분하다. 그러나 쓴다. 어쩔 수 없다. 난독은 버리고 간다. 일베충을 얘기하는 사람들은 많다. 분석하는 사람들도 많다. 예컨대 표창원 교수는 발견된 사실을 나열하면서 정리와 분석을 해두고 있는데 크게 보면 3가지가 잡힌다. - 부정적 사고방식 및 감정 - 욕설과 폭력성, 약자에 대한 공격성 분출 - 조직화  그러나 접근방식에 약간 문제가 있다. 그들이 접근하는 방식은 특징을 잡고, +/-를 구별하고, 그에 따라 규정한다. 그런 쪽으로 접근하기 때문에 '일베충'이라고 규정을 하고, 교화를 하려 하거나, 딱지를 붙인다. 그러나 이 접근은 상호작용에 대해서 말하기가 힘들다. 실제로 현실에서 가장 중요하게 고려되는 게 뭐냐? '타이밍'이다. 선택을 내리는 시점 결정을 내리는 순간 갈림길에 놓인 상황 이것이 실제 현실에서 매번 마주하는 것이고 경우에 따라 사람을 짜증나게 하고, 사색에 빠져들게 하는 것이다. 이 지점을 고려하지 않은 상태에서의 설명은, 마치 앎은 주는 것 같은데, 막상 그걸로 어떻게 해야하지? 하는 의문을 준다. 따라서 '규정'하고 '분류'하는 것으로서 이어가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만 접근하진 않는다. 상호작용의 순간,  타이밍을 고려함으로써, 이 역동적 상황을 드러내고자 한다. 이게 더 현실적이라고 본다. 물론 위의 접근대로 해도 된다. 왜? 상호작용의 순간에 놓였을 때 '규정하는 행동'을 함으로써, 일베충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행동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의 행동일 뿐, 나는 이런 행동으로만은 가지 않는다. 물론 이것도 버리진 않는다. 이게 있다는 건 인식하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ㅁㅁㅁㅁㅁㅁㅁ                                                       ㅁㅁㅁ          ㅁㅁㅁ                                                         ㅁㅁ     ㅇ     ㅁㅁ                                                          ㅁㅁ           ㅁㅁ                                                              ㅁㅁㅁㅁㅁ 다음을 보라. ㅁ = 일베충 ㅇ = 외부존재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이 그림을 머리속에 박아둬라. 이건 실제 상황에 놓인 것을 표현한 것이다. 이걸 기저에 깔고 가야된다. 인간의 사고는 기본적으로 유추의 형식으로 되어있기 때문이다.  (니가 이 글을 읽을 줄 안다는 건, 기저로 투영이 된다는 전제 하에서 아는 것이다.) 다음의 3가지가 고려된다. 1. 상황 통제의 실패 2. 프레임 워크 3. 조직화 및 인지부조화 (패권장악) 시작은 상황 통제에 실패했다는데서 시작한다. 이건 굉장히 사소하다. 경미한 수준에서 경이적인 수준까지 간다. 경미한 수준은 단순한 통제 실패다. 매번 겪는 건데, 언어 분석부터 잠깐 들어가자. 통제統制에서의 한자형태를 분석하면 (자세하게 다루진 않겠다. 내 노동의 회수를 생각해서 말이지.) 실, 머리에 묶은 비녀, (統을 회화로 분석하면 그렇게 나온다고 한다.) 나무가지와 칼 (制를 분석하면 그렇게 나온다고 한다) 따라서 이를 몽타주시키면 실뭉치를 꽉 묶는 것. 꽉 잡은 것. 이를 옛날에는 혼기 나이가 꽉 찬, 가득하다는 뜻으로 썼다고 하는데, 이건 부수적인 표현이고, 실뭉치를 꽉 묶는 것. 이 이미지를 잡아둬라. 그리고 자연과의 모방관계를 맞춰라. 머리속에서 '아하!'가 일어나면, 된 거다. 더 설명하려 하지 마라.  한글은 혀의 움직임을 모방한 것일 뿐이니. 나무가지와 칼을 잘 봐라. 나무가지가 칼로 정리가 된다는 것이다. 즉 잘랐다는 것이지. 그래서 정리가 된 것이다. 이것은 곧 준비한다는 것과도 연결된다. 니가 면접을 보기전에 머리카락을 치거나, 면도를 해서 털을 자르기도 할 거다. 왜 그런지 생각해봐라. 어쨌건 이런 이유에서 이 단어는 제작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상황 통제에 실패했다는 것. 이것은 상황을 내가 꽉 묶는 것에 실패했다는 것이다. 실失이란 뭐냐? 수手에서 온 것인데, '손'을 말한다.  이 手의 혀의 움직임 모방은 '손'에 해당한다. 근데 이것의 왼쪽 상단에 빗금쳐져있는 걸 보자.  그게 失이다. 중앙에 뭔가가 있는 건 '균형'을 말한다. 줄타기를 생각하면 알거다. 中에서 세로줄은 꿰뚫는 것이다.  꼬챙이가 그렇다고 하지. 患 꼬챙이가 심장을 찌르고 들어온 것이다.  중심에 놓였던 것이라고 본다면, 그것이 위치가 옮겨져서 왼쪽 상단에 (게다가 왼쪽은 대개 안좋은 의미로 쓰이지) 빗금이 쳐져있다는 것, 이게 관건인데,  이는 그래서 손에서 뭔가를 놓쳤다는 거다. 실이라는 표음의 회화는 그렇게 되어있는 것이다. 과학에 중독되지 마라. 과학이 그 보고서 자체로 너한테 알려주는 건 거의 없다. 통계 데이터? 니 머리속에 집어넣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단다. 형식적 검증에 불과하다. 심리 실험은 대개 사건에 대한 것을 보여준다. 사건에 대한 것을 습득 하지 못한다면 심리학 책 펴놔도 이해할 건 없단다. 그렇다고 이 표현을 심리학의 무용론으로 받아들이진 마라. 그렇게 보라고 쓴 것이 아니니까 말이다. 심리학이 주는 건 상당히 많다.  통제된 상황에서의 '사건'관찰, 이것이 심리학 실험의 또 다른 정의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어쨌건 이 사건에 대한 기록 이것이 기호로서 잡히게 된 것인데, 이 단어들을 이렇게 설명한 이유는 이미지를 잡아주려고 한 것이다. 지금부터는 필요에 의해서만 한다. 필요하지 않으면 설명하지 않는다. 알아서 찾아라. 상황 통제에 실패했다는 건, 니가 놓인 그곳에서의 상호작용의 주도권이 너에게 있지 않다는 것이다. 너는 갖고 싶었으나 갖지 못했다는 것이지. 그 때에 마음속에 억눌리는 것들, 불만들이 쌓이게 된다.  차지 못했다는 것이지. 근데 나는 이것보다 불교에서 말하는 '慢'이 더 설명을 많이 해준다고 보는데,  이것 역시 한자로 풀이하면 마음이 늘어지는 것을 말하는데, 위의 눈이 밑에 손으로 인해, 끌어내려가는 걸 말한다. 졸린 눈처럼 말이다. http://ko.wikipedia.org/wiki/%EB%A7%8C_(%EB%B6%88%EA%B5%90) 자세한 걸 여길 참조해라. 그리고 해설서를 참조해라. 이제 언어놀이는 그만하고. 지금까지 설명한 이미지들을 머리속에 집어넣길 바란다. 이제부터 그냥 간다.  이런 상황에 놓였을 때 사람들은 불만을 갖는다는 것인데, 이건 매번 생기는 상황이다. 왜? 사람을 만나면 주-객의 상호작용의 관계에 놓이게 된다.  내가 너와 현실에서 직접 만나면 알게 모르게 주도권 싸움이 생긴다는 것이다. 설령 그게 없다 하더라도 타이밍의 오고감이 있다는 것이다. 타이밍의 오고감에서 누가 주도권을 잡는가? 이 문제가 들어선다. 내 쪽에서 발언할 기회가 있고, 니 쪽에서 발언할 기회가 있다는 얘기다. 동시에 발언이 가능할까? 가능하다 하더라도 불가능함에 가깝다. 동시에 동시로 말하면, 소통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거다. 물리적인 이유로 불가능하다. 소리가 겹쳐서 안들리기 때문이다. 또한 어떤 행동이 동시에 터질 수도 없다. 누군가가 '밥 먹으러 가자'고 했다면, 그것을 하던가 하지 않던가 둘 중 하나다. 누군가가 여기에다 두고 '야 우리 춤추러 가자' 이렇게 해버렸다고 해보자. 밥을 먹으면서 춤을 출 수는 없다. 니가 밥을 입에 물고 춤추고 이렇게는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설렁탕을 먹으면서 클럽에서 춤출 수는 없다는 얘기다. 또한 비보잉을 하면서 삼계탕을 먹을 수는 없다. 이건 물리적인 문제다. 넌 윈드밀하면서 치킨을 먹을 수 있냐? 니가 강남스타일 말춤을 추면서 설렁탕을 먹을 수 있을까?  입에서 밥알 튀어나온다. 위의 경우는 동시에 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한 것이고 다른 경우를 보자. 이번에는 니가 원하는 것이 실패하는 경우다. 근데 동시가 아니라 턴플레이식이다. 니 현실의 모습을 떠올려봐라. 이게 맞다. 서로 다른 행동이 충돌된다 하여도, 어느 순간에는 둘 중 누가 먼저 신호를 보내는지 합의를 봐야한다. 대표적인 경우는 이렇다. 둘이 동시에 말을 꺼냈다고 해보자. 그러면 이렇게 된다. "너부터 말해." 또는 "나부터 먼저 말할게." 이것은 마치 턴플레이 게임과 비슷하다. 어쩔 수 없다. 이렇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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