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왜' 사십니까?라는 글을 썼고, 정말 많은 뉴런 이웃분들께서 댓글을 달아주셨습니다. 짤막한 댓글로는 감사의 말씀을 이루 전할 수 없어서 글을 새로 쓰게 되었습니다.
근 일주일에 걸쳐서 하나도 빠뜨림없이 세번, 네번씩 읽어보기도 했습니다. 댓글 중에는 제 식견이 부족하여 미처 그 내용의 깊이를 다 헤아리지 못한 글들도 있었습니다. 읽으면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즉흥적인 글에 대한 즉흥적인 댓글의 수준이 이 정도라면 평소에 얼마나 스스로에 대한 생각을 깊이있게 하면서 살아오신걸까 하는 존경의 마음이었습니다. Valley 커뮤니티는 정말 놀라운 분들의 연속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생각해보면, 얼굴 한번도 본 적 없는 남에게 나의 소중한 여가시간에 일부러 시간을 내어 이렇게 글을 달아주셨다는 것에서부터 말로 다 전할 수 없는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제가 뭐라고... 그저 평소에 글만 자주 쓸 뿐, 나이는 서른 중반이 되었지만 멘탈은 여전히 어린아이인 사람의 투정을 이렇게 보듬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댓글 중에는 제 식견이 부족하여 '아직은' 미처 말씀해주신 의미를 다 이해하지 못한 깊은 댓글들도 꽤 있었습니다. 아마 제가 살면서 그 내용을 이해하는 날이 오려면 꽤나 긴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마음이 힘들때마다, 또다시 같은 고민이 머리를 들 때 마다 몇번이고 돌아와 읽어보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철학자 알베르 카뮈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남겨주셔서 그의 저서인 시지프 신화에 대해서 대략적으로 알아보았습니다.
카뮈는 저처럼 잘 살다말고 갑자기 반복되는 일상에 "왜?"라는 의문을 가지게 되는 순간이 바로 삶의 '부조리'를 발견한 순간이라고 하더라구요. 이렇게 부조리를 발견한 사람들은 이 끝없는 삶의 의미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다가 자살로 이어지곤 한다고 합니다.
본문에 적었던
"존재란 그저 있는 것이다. 주어진 것일 뿐이고 주어진 것은 애초에 목적을 가지고 부여된 것이 아니기에 "왜"를 자꾸 찾다보면 그 종착역은 결국 자살 뿐이다"
라는 법륜스님의 말씀과도 정확히 일맥상통하는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생각해보건데, 살아간다는 것은 곧 죽어가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나는 오늘 하루도 살았다'라는 것은 '나는 오늘도 죽음을 향해 한발짝 나아갔다'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그렇기에 삶에 대한 생각은 곧 죽음에 대한 생각이며, '왜 사는가?'에 대한 생각은 곧 '왜 죽어야 하는가?'에 대한 생각인 것입니다.
그럼, 삶의 의미에 대해 의문을 가지는 자에게 주어진 길은 오로지 '죽음'이라는 결말뿐인가? 저 '왜'라는 의문을 가지고 삶의 부조리에 대해 의식한 순간부터 그 사람의 인생은 죽음을 향해 달려갈 뿐, 다른 결말은 없는 것인가?
카뮈는 이 물음에 대해서 그건 아니라고 대답합니다. 자살은 부조리에 대한 해답이 될 수 없으며, 회피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이 부조리에 저항하는, '왜' 사느냐에 대한 해답의 예시로 세가지 인간 군상을 제시합니다.
돈 후안(Don Juan) - 욕망의 끝을 탐하는 자
돈 후안은 끊임없이 여성을 유혹하며 사랑을 추구하는 인물입니다. 하지만 그는 단지 한 여자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정착하려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새로운 대상과 사랑을 경험하며 삶을 채워갑니다.
카뮈는 돈 후안의 행동을 단순히 쾌락을 추구하는 것으로 보지 않고, 오히려 순간적인 경험과 욕망의 완벽한 충족을 추구하는 삶의 방식으로 해석합니다. 돈 후안은 과거와 미래에 얽매이지 않고 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