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동안 가졌던 '왜 사는가?'에 대한 고민의 답은 결국 내 질문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아마 내가 찾는 '왜'라는 이유는 "내가 왜 잉태되었는지, 생명체로서 왜 착상이 되고 수정이 되어 이 세상에 나왔는지" 그런 정말로 원초적인 질문이 아니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나는 그게 궁금한 것이 아니다. 그런 '왜'는 당연히 이유가 없는 우연의 산물이라는 것은 이해하기에 어려움이 없다.
그렇다면 나는, 어느분이 달아주신 댓글처럼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 지를 잘 모르겠다는 질문을 지금까지 "왜"라고 잘못 묻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두가지를 분리해서 생각해본다면, "왜"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내가 지금까지 주변에서 들어온 대로 "이유가 없다"라는 것이 자명하다. 사람이 만든 것과는 다르게 생명에는 이유가 없고 그저 우연히 잉태되어 태어난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럼 다시 본래 의문의 취지인 "무엇을 위해" 사는가에 대한 고민으로 돌아가 보면, 결국 그토록 진부한 "행복하기 위해"라는 대답이 나온다. 근데 이건 사람들의 대답이 진부한 게 아니라, 나의 질문자체가 그런 답이 나올 수 밖에 없는 질문이었던 것 같다. 어차피 결국 이유없이 태어났다면, 최대한 행복하게 사는 게 최선이지 불행하게 살고 싶은 사람은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여기서 말하는 행복이란 굉장히 주관적인 것이라는 점인데, 그 자유도가 무궁무진하며 때로는 남들이 보기엔 불행해보이는데 본인은 행복하다고 답하는 삶의 방식도 있다. 심지어는 남이 이해못하는 방식으로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들도 있다. 속세의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운 열반의 종교인, 주7일을 미친듯이 갈아넣으며 세상을 선도하는 기업인, 하다 못해 사회의 도덕적 관념을 한참 벗어난 연쇄살인마까지. 이 셋을 같은 선상에 두고 보는 것은 도덕적 관념에서 전혀 옳지 않지만, 인간이 얼마나 각자의 방식으로 행복을 추구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시가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결국 논리의 흐름을 정리해보면,
"왜" 사는가? → 우연히 태어났기 때문에
"무엇을 위해" 사는가? → 행복해지기 위해
그럼 "행복"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 개인마다 다름
그럼 결국 나는 무엇을 할 때 행복한가?를 스스로 찾아야 함.
단, 남의 행복을 직접적으로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
여기서 말하는 행복의 범위는 굉장히 광범위하다. 인생 전체의 행복의 총량인건지, 순간적인 행복의 절대치인 것인지 정해진 답도 없고 알기 힘들다. 가령, 운동을 하는 데에 수반되는 고통은 순간적인 행복에는 반하는 행동일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 건강을 유지시켜 줄 것이므로 행복의 총량에 있어서는 합리적인 행동이다.

단적인 예로, 격투기도 운동이 끝나고 나서는 정말 기분이 너무 상쾌하고 뿌듯하지만, 그건 '오늘도 해냈다'는 성취감에 의한 것이지 그 과정이 결코 행복하다 말하기에는 너무 고되다. 훈련하는 날은 항상 신체적 한계까지 몰아쳐야 하고, 스파링 하는 날은 고통도 감내해야 하기 때문에 말 그대로 순수 재미를 위한 취미라기 보다는 신체와 정신의 '수련'에 가까운 느낌이 든다. 사실, 시작한 지 1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여전히 스파링을 하는 날에는 은근히 체육관 가기가 스트레스 받을 때가 있다. 남을 때리는 것도, 맞는 것도 여전히 적응이 잘 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할때도 재미있으면서 건강에도 좋은 운동, 가령 한창 좋아했던 농구와 같은 구기종목들은 다치지만 않는다면 여러모로 행복해지는 데에 많은 도움을 줬던 것 같다. 특히나 3:3이나 5:5를 통해 팀원들간의 관계와 유대감도 형성해주었던, 돌아보면 여러모로 좋은 취미였다.
비슷한 관점에서 책임없는 쾌락이라는 말을 굉장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