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하는 투자자




— 판단을 돌아보는 유일한 도구
투자는 맞히는 게임이 아니다 | Valley AI(본편)
반증 불가능한 Prior는 신앙이다 | Valley AI(2편)
확신이 나를 망치는 메커니즘 | Valley AI(3편)

복기가 중요하다는 말은 누구나 한다. 나도 앞선 글들에서 반복했다. 좋은 복기는 반성이 아니라 분해라고. 판단의 어디서 오류가 생겼는지를 찾아내는 작업이라고.
문제는 막상 복기를 하려고 앉으면, 대부분이 똑같은 벽에 부딪힌다는 것이다. 그때 내가 왜 그렇게 판단했는지가 기억나지 않는다.
6개월 전에 어떤 종목을 샀을 때, 그때 무슨 근거로 좋다고 봤는지, 어떤 가설 위에서 들어갔는지, 당시의 산업관이나 매크로 뷰는 어땠는지. 이런 것들이 남아 있지 않으면 복기는 시작조차 할 수 없다. 남아 있는 것은 계좌의 손익뿐이고, 손익만 보면 복기는 자동으로 결과론에 빠진다. 돈을 벌었으면 좋은 판단, 잃었으면 나쁜 판단. 이것은 복기가 아니라 채점이다.
나도 이것을 겪었다. 어떤 종목에서 -15%를 찍고 나온 적이 있는데, 몇 달 뒤에 "왜 샀지?"를 떠올리려 하니 구체적인 이유가 나오지 않았다. "그때 뭔가 좋아 보였던 것 같은데"라는 인상만 남아 있었다. 결국 복기는 "다음엔 더 조심해야지"로 끝났다. 이것은 복기가 아니다. 감정 처리다. "더 조심해야지"에서 "구체적으로 뭘 어떻게 다르게 해야 하는가"로 넘어가려면 재료가 필요한데, 그 재료가 없었던 것이다.
기억에 의존한 복기는 거의 항상 사후적 합리화로 변질된다. 인간의 기억은 현재의 감정과 결과에 의해 끊임없이 재구성된다. 돈을 벌고 나면 "그때 확신이 있었다"고 기억하고, 돈을 잃고 나면 "사실 좀 불안했다"고 기억한다. 둘 다 실제 그때의 심리 상태와 다를 수 있다. 인간의 기억은 사실의 저장소가 아니라 서사의 편집실이다. 결과를 알고 난 뒤에 기억이 결과에 맞게 편집된다. 기록만이 이 편집을 막는다.
투자 기록이라고 하면 대부분 매매일지를 떠올린다. 날짜, 종목, 매수가, 매도가, 수익률. 이것은 기록이긴 하지만 복기에는 거의 쓸모가 없다. 거래의 기록이지 판단의 기록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서 한 가지 더 짚어야 할 것이 있다. 매매일지라는 형식 자체가 트레이더에게 맞는 형식이다. 한 달에 수십 번 거래하는 사람이라면 매매일지가 의미가 있다. 건수가 충분하니까 "어떤 패턴에서 자주 손실이 났다"는 통계적 관찰이 가능하다. 하지만 종목을 깊게 분석하고 오래 보유하는 투자자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1년에 신규 매수가 서너 건밖에 안 될 수 있다. 이 정도 표본에서 "확신이 강할 때 수익률이 낮았다" 같은 패턴을 뽑는 것은 무의미하다.
투자자에게 필요한 기록은 매매의 기록이 아니라 가설의 기록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가설이 시간에 따라 어떻게 변했는가의 기록이다.
한 종목을 6개월 들고 있다고 해보자. 매수 시점에는 "실적 턴어라운드"가 핵심 가설이었다. 하지만 3개월이 지나면서 실적은 기대만큼 안 나왔는데, 대신 "신사업이 예상보다 빨리 크고 있다"는 새로운 근거가 생겼다. 그래서 계속 들고 있다. 이때 기록이 없으면, 6개월 뒤에 "왜 계속 들고 있었지?"를 물으면 "신사업이 좋아서"라고 대답하게 된다. 하지만 처음에 산 이유는 신사업이 아니었다. 가설이 중간에 바뀐 것이다.
이 가설의 이동이 의식적이었다면 괜찮다. "원래 가설은 무너졌지만, 새로운 가설이 충분히 설득력 있어서 유지한다"는 판단을 명시적으로 했다면 그것은 합리적인 업데이트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이 이동은 무의식적으로 일어난다. 원래 가설이 약해지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새로운 긍정적 근거를 슬쩍 가져다 붙이는 것이다. 이것은 업데이트가 아니라 합리화다. 기록이 없으면 이 둘을 구분할 방법이 없다.
기록해야 할 것은 크게 두 가지다. 진입 시점의 판단과 보유 중의 변화.
첫째, 왜 사는가. 핵심 가설은 무엇인가. "이 산업은 성장 초기다", "이 기업은 구조적 경쟁우위가 있다", "시장이 과도하게 비관적이다." 가설은 하나일 수도 있고 여러 개가 겹칠 수도 있다. 여러 개라면 어느 것이 주된 가설이고 어느 것이 보조인지를 적어둔다. 나중에 주된 가설이 무너졌을 때, 보조 가설만으로 포지션을 유지할 것인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그리고 여기에 하나를 더 붙인다. "이 판단이 틀렸다면 어떤 증거로 알 수 있는가." 반증 조건을 매수 시점에 같이 적어두는 것이다. "2분기 연속 매출 역성장", "핵심 경영진 이탈", "경쟁사가 기술 격차를 좁히는 구체적 신호" 같은 것들. 이것이 있으면 보유 중에 흔들릴 때 감정이 아니라 기준으로 판단할 수 있다.
둘째, 뭘 보고 판단했는가. 어떤 정보가 이 판단을 만들었는가. 실적, 산업 리포트, 경쟁사 동향, 밸류에이션. 그리고 그 정보를 얼마나 강하게 믿었는가. "이 실적은 턴어라운드의 시작이다"와 "턴어라운드일 수도 있다"는 같은 정보에 대한 전혀 다른 확신도다.
셋째, 실행 계획. 비중은 얼마로 잡았는가. 분할 진입 계획이 있는가. 손절 기준은 무엇인가. 목표 비중은 어디까지인가. 어떤 조건이 되면 추가 매수를 하고, 어떤 조건이 되면 줄이는가.
넷째, 감정 상태와 불안 요소. "확신이 강하다", "약간 불안하다", "FOMO가 있다", "차분하다." 그리고 이 판단에서 가장 걱정되는 것을 구체적으로 적는다. "업종 전체가 빠지면 같이 빠질 것 같다", "가이던스를 너무 믿는 것 같다." 이 감정 기록이 왜 중요한지는 복기 섹션에서 다시 다룬다.
이 네 가지는 매수할 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매수하지 않기로 결정했을 때도 기록해야 한다.
"안 산 것"은 행동이 아니니까 기록 대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분석을 하고 나서 들어가지 않기로 한 것은 판단이다. 그것도 꽤 어려운 판단이다. 매력적으로 보이는 것을 지나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 판단을 기록하지 않으면 두 가지 문제가 생긴다.
첫째, 나중에 그 종목이 올랐을 때 후회만 남는다. "그때 살 걸"이라는 감정이 다음번 비슷한 상황에서 FOMO를 키운다. 하지만 기록이 있으면 "왜 안 샀는지"를 확인할 수 있고, 그 이유가 합리적이었다면 후회할 필요가 ...



시리즈 다 잘 읽고 있습니다. 좋은 글 감사드려요!

감사합니다 ㅎㅎ 저도 올려주시는 글 잘 보고 있습니다!

아..부끄럽지만 밸리에 들어와서 제가 이해할수있는 글중 가장 좋은글이었습니다.
요새 투자일지? 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던 참이었어요.
베이지안 투자법 글 때도 느꼈지만 글을 잘쓰시는것 같아요. 좋은글 감사합니다.

도움이 될 수 있어 좋네요ㅎㅎ 앞으로도 글 많이 읽어 주세요! 감사합니다.

이번글도 잘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늘 읽어주시고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시리즈 쭉 읽고 있는데 저한테는 정말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