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를 통과하는 일>





솔직히 눈에는 정말 많이 걸린 책이었다. 스타트업에 관심이 많았었기 때문에 각종 SNS에서 책 출간 직후부터 많은 후기가 올라왔었다. 그리고 블로그에도 후기가 많이 올라왔다. 투자자들도 찾아 읽고, 비슷한 취향으로 구독했던 분들도 역시나 이 책을 골라 읽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후기들을 꼼꼼하게 읽지 않았다. 올라 왔구나 정도였고, 책 읽어 봐야지하는 스쳐가는 생각만 들었다. 평소 같으면 되게 읽을 법한 책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이 잘 나가지 않았다. 이유는 잘 몰랐다.
그런데 연휴 막바지에 독서에 부스팅이 걸렸는지 활자가 미친듯이 잘 읽혔다. (잘 읽힐 글들만 챙겨봤고, 연휴 동안 안본만큼 capacity가 남아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물론, 잘 읽히는 책은 잘 썼기 때문이더라.
저자분은 퍼블리 서비스로 이름을 알게 된 지는 꽤 오래됐다. (당연히 아는 사이는 아니다)
하버드 케네디 스쿨이었나… 미국에서 대학원 졸업 전후로 손석희 사장에게 cold mail로 인터뷰를 따냈던 그 아티클을 정말 정말 인상깊게 읽었었다. 당시에 cold mail을 쓸 일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 이후로는 퍼블리 서비스를 한 2년 정도 구독했었는데, 솔직히 아티클을 많이 읽지 않았다. 내 기준에서 손이 안나가는 글이 너무 많았고, 그 시점부터 뉴미디어 때깔을 벗어나서 나는 오히려 고루한 글로 무게추가 옮겨가고 있었다. 퍼블리를 구독하기 2년 전 그 시절, 게걸스럽게 온라인에 있던 모든 글을 먹어치우던 그 때 만났더라면 아마 정말 많이 읽었을 것 같지만… 꼴에 머리가 좀 커지고 나서는 잘 읽지 않았다.
나름 좋은 서비스라고 생각했다. 간혹 단가가 너무 싸다는 생각과 함께 더 볼게 없다는 생각에 플랫폼에서 마음이 훌쩍 떠나버리고, 주변에서 퍼블리 본다는 이야기도 안들리던 시점에 회사가 팔렸다는 소식을 접했다.
굉장히 신기한 케이스였다. 창업자는 곧바로 퇴사했고, 회사는 2개의 서비스를 분할매각했다. 사실상 한국 스타트업 씬에서 처음보는 케이스였다. 진짜 개고생했을 것 같다는 생각히 헤드라인을 보자마자 스쳐서 그 전말이 되게 궁금했지만, 넘겼다. 뭐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어야지.
그런데 이 책에 정말 적나라하게 적혀있다. 정말 재밌게 읽었다. 책 전체는 한 4-5시간 만에 다 읽었다. 밑줄도 엄청 그어댔다. 간만에 이런 맛의 책을 봐서 그런가 조금의 두근거림과 고양감도 있다.
책에는 저자의 어마어마한 콘텐츠 스펙트럼과 창업자로서 내렸던 의사결정의 전말이 상세하게 적혀있다. 여기에 더해서 사업과 개인의 삶에 대한 무수한 조언과 선현들의 가르침, 그리고 자신의 깨달음이 쉴세없이 몰아친다. 책 어딜 펼쳐도 가져갈 것이 존재한다. 정말 재밌는 책이다. 덤으로 내가 읽었던 많은 콘텐츠도 이 책에서 만날 수 있어서 종종 반가웠다.
이 책은 나의 뇌리에 가장 깊게 새겨진 10가지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장면은 ‘나의 기억’ 그리고 ‘지금의 생각’ 두 가지로 나뉜다.
이 책이 시작이 아니라 끝을 먼저 말하는 이유도 같다. 우리에게 언젠가 죽음이 찾아오는 것이 필연적이듯, 어떤 일이든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다. ‘어떻게 시작할 것인가’는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어떻게 끝낼 것인가’라고 지금의 나는 생각한다. 인생의 끝인 죽음에 대해 생각할 때 진짜 자신과 마주 볼 수 있듯, 일의 끝에 대해 생각할 때 일의 방향도, 삶의 태도도 훨씬 나답게 만들어갈 수 있다. 나는 끝을 계획하고 창업한 것이 아니었기에 고통을 겪었지만, 읽는 분들께는 이 또한 반면교사가 되면 좋겠다.
그리고 특이한 점은 ‘나의 기억’인 과거와 ‘지금의 생각’인 현재로 책이 구성되어 있는데, ‘나의 기억’ 파트는 개조식으로 작성되어 있다. 자신의 옛 고객이었던 뉴미디어 소비자들을 배려한 것일지, 무수한 일기를 뒤적거리면서 책의 탈고 과정에서 의견을 구했던 많은 이들의 이야기도 함께 요약해서 담아내느라 이런 구성을 취하지 않았을까 하면서 읽었다. 나름 신선한 구성이었고, 개조식이 눈에 잘 들어오긴 한다. 말투도 편하고.
마지막으로,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이 남긴 연설을 소개하고 싶다. 1910년 파리 소르본 대학에서 한 연설 중 일부로, 공식 제목은 따로 있지만 ‘경기장 안의 사람’으로 더 알려져 있다.
중요한 것은 비평가가 아닙니다. 강한 자가 어디서 무너지는지, 혹은 행동하는 이가 무엇을 더 잘할 수 있었는지를 지적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모든 명예는 실제로 경기장에 안에서 뛰는 사람에게 돌아갑니다. 얼굴이 먼지와 땀, 피로 얼룩진 채 용감하게 나아가며, 실수를 저지르고, 반복해서 실패하는 사람의 것입니다. 실수와 실패는 불가피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명예의 주인공은 행동하기 위해 애쓴 사람, 위대한 열정과 위대한 헌신을 알고 있으며 가치 있는 대의를 위해 자신을 불사른 사람, 높은성취의 승리감을 이해하는 사람, 그리고 최악의 경우 설령 실패한다 하더라도 대담하게 도전하다 실패한 사람입니다. 성공도 패배도 모르는 차갑고 소심한 영혼들과는 결코 같은 위치에 있지 않은 사람입니다.
저자는 콘텐츠 창작자로서 자신의 (실패기라고 표현하지만) 고군분투를 정말 솔직하게 눌러썼다. 이 기록은 누구보다 자신을 위한 글이었겠지만, 공개에는 생각보다 큰 용기가 필요했기에 타인을 위한 글이기도 하다. 삶에서 누구보다 강렬했던 10년을 이렇게 한 권의 책으로 매듭지을 수 있는 영광은 책에서도 인용된 것처럼 저자가 ‘경기장 안의 사람’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소위 ‘유니콘 스타트업’을 만든 것도 아니고, 상장이나 매각을 통해 성공적인 ‘엑시트’를 달성한 것도 아니다. 매해 이익을 내고 법인세도 내면서 차곡차곡 성장하는 알짜배기 회사를 만들지도 못했다. 내 손으로 시작한 회사를 내 손으로 끝을 낸 것이 전부다. 그러므로 이 책은 성공담이 아니다. 그렇다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나는 콘텐츠가 사람의 인생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다. 나 자신이 그 증거다. 한글을 깨친 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접해온 모든 콘텐츠가 크든 작든 내게 영향을 미쳤다. 책과 만화, 드라마와 영화, 다큐멘터리와 애니메이션, 야구를 비롯한 스포츠 경기들이 나에게는 학교 그 자체였다. 평생 읽고 보고 들었던 콘텐츠들로 내가 만들어졌다.
그래서 글을 써보기로 했다. 퇴사 후 안식년을 보낼 계획이었으나 어떻게 ‘안식’을 해야 할지 도통 감을 잡을 수 없어 몇 달간 방황이 이어졌다. ‘만약 그때 그랬더라면…’ ‘혹시 이게 문제였을까...’ ‘도대체 왜 그랬을까…’와 같은 수많은 질문과 가정이 머릿 속을 도배했다. 하지만 이제는 미래로 나아가고 싶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과거부터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그냥 눈감고 묻어둘 수는 없었다. 복잡하게 얽히고 설킨 생각과 감정들을 털어내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글을 쓰는 것이었다. 내가 봐온 콘텐츠의 창작자들이 그러했듯이.
그럼에도 조심스러운 마음이 드는 것은 사실이었다. 왜 우리나라에는 인물이나 기업을 깊이 파고든 책이 많지 않을까. 왜 세상에 회자되는 자서전이나 평전, 기업사 책은 대부분 번역서일까. 알음알음 아는 사람들끼리만 공유되는 것이 아니라 콘텐츠라는 공개된 포맷으로 사람과 조직에 대한 이야기가 밖으로 나올 수 있다면, 같은 실수를 반복하거나 맨땅에 헤딩하는 일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지 않을까. 사회의 생산성이 높아진다는 것은 바로 이런게 아닐까.
오랫동안 이런 생각을 마음에 품고 회사를 만들었지만, 일로서 직접 해보고 나니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기록의 가치, 그것도 실수와 실패와 좌절이 담긴 기록의 가치를 다들 알고는 있다. 하지만 그것을 공개적인 기록으로 만드는 것은 다른 차원의 노력이 필요하다. 한국 사회의 맥락에서 고려해야 할 점도 많다. 그동안 콘텐츠 저자를 섭외하면서 종종 들었던 거절의 이유가, 책을 쓸까 말까 고민하는 현재의 나에게도 고스란히 적용되고 있었다.
그러던 차 <가난한 찰리의 연감>을 다시 펼쳐보다. 우연히 한 대목이 눈에 들어왔다. 찰리 멍거는 자신이 이사회 의장을 맡았던 어느 병원의 교수를 소개한다. 그는 오랜 세월의 노력 끝에 관절암 분야에서 방대한 지식을 얻었고, 이를 널리 전파해 관절암 치료에 일조하고자 했다. 그가 택한 방법은 교과서를 쓰는 것이었다. 지금 당장은 수백 권밖에 팔리지 않더라도 언젠가 전 세계의 암 치료 병원에 비치될 것이라고 믿었다.
마음을 정한 후 포스트잇을 꺼냈다. “읽는 사람에게 도움이 되자”라고 적고, 모니터 아래에 붙였다. 이 목표 하나만 보고 가보기로 했다. 암 환자의 생명을 구하는 고귀한 미션까지는 아니지만, 내가 보내온 시간에 대한 솔직한 기록이 이름 모를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럴 수만 있다면 충분히 의미가 있을 터였다.
저자의 이름 모를 누군가를 위한 마음이 책을 읽는 내내 느껴졌다. 누구보자 자신의, 자신에 의한, 자신을 위한 기록이었지만 이 이야기는 결코 특수하거나 예외적인 이야기가 아니었다. 인생에서 내 손으로 사서 고생해서, 시작하기 전 기대했던 것 이상의 고통을 뚫어낸 이들과 그 과정에 있는 모두에게 너무도 절절히 공감될 내용들로 가득차있다.
이 책은 어느 창업자의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다. 이성과 감정, 데이터와 직관, 돈과 사람, 이상과 현실이 뒤섞인 10년이 담겨있다. 창업자이자 대표로서 수없이 많은 결정을 내렸다. 좋은 판단도, 나쁜 판단도, 그저 그런 판단도 많았다. 하지만 이세돌 전 바둑기사가 한 인터뷰에서 말했듯, 좋은 판단을 내렸을 때의 기억은 잘떠오르지 않는 반면 잘못된 판단을 내렸을 때의 기억은 훨씬 오래간다.
그래서인지 지금 내 머릿속에 가장 강렬하게 남아 있는 10가지 장면을 꼽아보면, 대부분 잘못된 의사결정이다. 결정하자마자 ’이건 망했구나’ 하고 바로 알아챈 때도 있었지만, 시간이 한참 흐른 후에야 뼈아픈 실수였음을 깨닫고 머리를 땅에 쾅쾅 박고 싶은경우가 더 많았다. 일을 하다 보면 하루에도 수십 번의 실수와 실패를 경험하지만, 창업자의 잘못된 결정이 미치는 여파는 상상 이상으로 크고 고통스럽다
흥미로웠던 점은, 내 글을 읽은 조언자분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씀이었다. 내 이야기가 결코 특수하거나 예외적인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등장인물만 바꾸면 어떤 스타트업에서나, 어떤 기업에서나, 규모와 관계없이 어떤 조직에서나 관찰할 수 있는 지극히 보편적인 이야기라고 했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라는 위안이 되었다. 동시에 어떤 독자를 위해 써야 할지도 힌트를 얻었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10년 전의 나, 혹은 그때의 나와 비슷한 상황에 놓여 있는 사람들을 위해 썼다. 내 인생을 걸고 해보고 싶은 것이 있다. 그런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는 잘 모른다. 방법을 고민하다 창업을 선택한다. 그러나 아무리 사전에 많이 알아봤다 해도 링 위의 실전은 전혀 다른 세상이다. 피땀 눈물범벅이 되기 전에 조금이라도 일찍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었던 것들이 많다. 10년 전의 나에게 차분하지만 단호하게 건네주고 싶은 것들을 골라 적었다.
하지만 이 책은 창업자 또는 창업하려는 사람만을 위해 쓴 것은 아니다. 창업은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한 수많은 방법 중 하나일 뿐이다. 무엇이든 간에 스스로 세운 목표를 향해 한발씩 나아가는 사람이라면, 매일 희로애락을 경험할 것이다. 어떤 날은 밥을 먹지 않아도 배부를 듯 기쁘고, 어떤 날은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 소리 내어 울거나 화를 쏟고 싶어진다. 산이 높으면 골도 깊듯, ...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시작과 끝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이 책도 관심목록에 추가해야겠습니다. ^^b

유튜브로 인터뷰 봤었는데 사서 읽어 봐야겠네요!

"기꺼이 생사를 함께 할 수 있는 인연이 인생에서 한 둘은 있어야 한다..." 멋진 글로리아님도 이런 인연을 충분히 만들어 나가시기를 기원합니다.

멋진 책을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최근에 후회없이 최선을 다한 일들이 있었는데, 결과는 안좋았지만 매우 공감하면서 읽었어요. 그리고 LLC를 설립한 것까지. 창업자의 마음가짐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볼 계기가 된 것 같아요. 고통으로부터 배운다는 점도, 경기장 안의 상황은 구경꾼들이 지켜보는 것과는 무척이나 다르다는 점들까지. 스스로 지난 삶의 교훈들로부터 배웠기에 더 와닿았던것 같네요. 어떻해서든 책을 구해서 읽어봐야겠어요

저도 이 책이 유독 눈에 많이 걸려서 읽게 되었는데, 얇고 꾸준하게는 살고 있지만 제대로 밀어붙여본 적이 없어서인지 저자의 밀도 있는 삶이 부럽고 멋있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덕분에 한번 더 되새길 수 있었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꾸르잼~

글 초입에서 홀리듯이 읽다가... 안되겠어서 일단 바로 책 주문을 해버렸네요. 책을 읽고 남은 글 재미나게 읽어보겠습니다. 좋은 책 소개 정말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