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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쫀쿠와 대장주의 현상학
멋나들 연구소인문학과 투자

두쫀쿠와 대장주의 현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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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론백
2026.01.28조회수 297회

‘해설’에 대한 소비욕구

나는 처음 보는 이에게 곧잘 말을 거는 편이다. 택시 기사님에게 슬쩍 정치 이야기를 던지기도 하고, 식당 사장님에게 요즘 경기를 묻기도 한다. 어제는 머리를 자르다 미용사와 주식 이야기를 나눴다. 주식은 꽤 괜찮은 스몰토크 주제가 된다. 물론 나의 수익보다는 손실 이야기를 마중물로 넣어야 상대의 이야기도 술술 터져 나온다.


코로나 시기 야심 차게 입문했다가 '국장'에 배신당하고 '미장'으로 망명했다는 이야기, 그러다 결국 개별주식 레버리지 ETF에 정착했다는 이야기까지. 전형적인 한국 투자자의 연대기를 듣던 중 흥미로운 대목을 발견했다. 그가 한국 시장을 평하는 논리였다.


"한국 주식은 믿을 게 못 돼요. 원화 가치는 떨어졌는데 외국인이 싸니까 잠시 사는 것뿐이죠. 가치도 없고 언제든 무너질 수 있어요."


그의 관점이 옳고 그름을 따지려는 게 아니다. 놀라운 건 그가 읊조리는 ‘국장 회의론’이 얼마 전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본 글, 그리고 어제 다른 지인에게 들은 이야기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일치한다는 점이었다. 비단 경제뿐만이 아니다. 정치, 사회 사건, 심지어 영화 한 편에 대한 감상조차 우리는 누군가 정해놓은 ‘표준화된 관점’을 자신의 생각인 양 이야기하곤 한다.


왜 우리는 타인의 해석을 내 생각의 거처로 삼는 걸까? 나는 그 원인을 ‘정답을 갈구하는 문화적 관성’에서 찾는다. 예컨대 우리나라의 스포츠 중계는 서구권과 확연히 다르다. 서양의 중계가 상황 묘사와 기술적 데이터 전달에 집중하며 시청자에게 해석의 여백을 남겨둔다면, 한국의 중계는 지나치게 친절하다. “지금은 위기입니다”, “저 선수는 지금 간절합니다”라며 시청자가 느껴야 할 감정과 관점의 가이드라인을 실시간으로 주입한다. 우리는 스스로 느끼기보다, 전문가가 내려주는 ‘해설’을 소비하며 비로소 안도한다.


이런 특성은 비즈니스 현장에서도 ‘레퍼런스 강박’으로 나타난다.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 때 우리는 항상 외국의 선례부터 찾는다. 이미 검증된 ‘정답’이 있어야만 상급자와 투자자를 설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답이 없으면 한 발자국도 떼지 못하는 사회. 그래서 우리 사회는 모두가 동의하는 ‘상식’이 가장 강력한 권력을 갖는다.


불확실성이 본질인 시장조차 우리는 스포츠 해설 듣듯 확실한 해석을 원한다. 투자의 세계에서도 스스로 기업의 본질을 탐구하기보다, 유행하는 스타일을 ‘골라잡는’ 쪽을 택한다. 마치 미용실 메뉴판에서 댄디컷이나 가르마펌을 고르듯 가치 투자, 매크로 투자, 혹은 특정 테마주라는 스타일 속에 자신을 편입시킨다.


이번 글은 이런 현상의 시시비비를 가리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우리의 투자 행위 이면에 흐르는 심리적 층위를 현상학적으로 진단해보고자 한다. 우리가 무엇에 지배당하고 있는지 자각할 때, 비로소 시장의 소음에서 벗어나 유연하고 주체적인 관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한국 시장을 바라보는 사유의 첫 페이지를 넘겨본다.



대장주 현상

요즘 시장을 떠도는 회의론 중 가장 대중적인 서사는 ‘불균형’에 대한 불만이다. “삼성전자나 하이닉스 같은 반도체만 오르고 나머지는 제자리다”, “지수가 오르면 뭐 하나, 내 종목은 소외됐는데” 같은 탄식이다. 사람들은 지금의 시장이 비정상적이라며 혀를 차지만, 내가 경험한 한국 시장은 단 한 번도 ‘정상적’이었던 적이 없다. 엄밀히 말하면, 한국 시장에서 ‘쏠림’은 예외가 아니라 본질에 가깝기 때문이다.


한국 주식을 조금이라도 경험해 본 이들이라면 ‘차화정(자동차·화학·정유)’, ‘조방원(조선·방산·원전)’, ‘반바지(반도체·바이오·지주사)’ 같은 줄임말들을 기억할 것이다. 이 단어들은 단순한 산업 분류가 아니라 당대를 지배했던 '유행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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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7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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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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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학자이자 금융강사. 단순히 재무적 안정이나 부자되기를 넘어, 물질과 정신 모두 풍요로운 삶을 지향한다. 이를 '멋지게 나이들기'라는 철학으로 삼고, 이곳 <멋나들 연구소>에서 꾸준히 실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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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erie
2026.01.28

제 평소 생각이랑 너무 비슷하시네요.

아.. 동질화 안되는데 ㅋㅋ

(수정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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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2026.01.28

와우. 명문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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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리 슬립
2026.01.28

개인이 쉽게 실천해서 바꾸기 어려운 것들이라 긴 기간 동안 이러한 흐름이 지속되지 않을까 합니다 심리적 통찰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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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디
2026.01.28

좋은 글 감사합니다. 많은 부분에 공감하면서도, 조금 다른 각도에서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어 글을 남깁니다.

과연 한국만이 집단 소외에 불안해하고 유행에 쏠리는 사회일까요? 저는 조금 다르게 보고 있습니다.

집단에서 소외되지 않으려는 욕구는 어디에나 존재하는 것 같아요. 의견 개진이 자유롭다고 알려져 있는 미국의 크록스 열풍이나 스탠리 텀블러 광풍만 봐도 그렇죠. 제가 미국에서 만난 지인들(모두 대졸이며 이들의 페르소나가 미국이라는 사회의 대표성을 포함하지는 않지만)도 "FAANG은 무조건 오를 거야, 가장 안전한 선택이니까"라고 말하더군요. 제 생각엔 '대장주'와 'FAANG'은 표현만 다를 뿐 본질적으로 같은 현상인것 같아보입니다.

그렇다면 왜 유독 한국이 유행에 민감해 보이는 걸까요?

경험 속도의 차이인 것 같습니다. 한국은 높은 인구밀도, 빠른 공급망, 신속한 행정처리가 맞물려, 두쫀쿠 열풍이 일주일 만에 전국을 휩쓸고, 한 달 뒤면 골목마다 똑같은 간판이 걸수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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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디
2026.01.28

반면 미국에서 음식 유행이 상대적으로 천천히 퍼지는 건, 장기 임대 계약이나 긴 행정 절차, 넓은 점포 간 거리 같은 구조적 요인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같은 욕구가 있어도 물리적으로 빠르게 확산되기 어려운 환경이랄까요. 단적인 예로 한국은 새로운 점포를 열기 위해서 위생점검을 신청하면 이틀에서 삼일이면 받을 수 있지만, 미국의 주의 경우 6개월 이상 걸린다는 것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반대로 바로 생산하여 공급할 수 있는 신발, 물병 등은 유행이 돌고 있다는 경험을 더 빨리 쉽게 할 수 있는 거죠.

정리하자면, 한국 사람들이 특별히 더 유행에 민감한 게 아니라, 유행을 더 자주, 더 눈에 띄게 경험할 수 있는 환경에 놓여 있는 것 같습니다. 본질은 비슷하지만, 한국에서는 그것이 훨씬 빠르고 압축적으로 드러나는 거죠.


이 부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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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론백
작성자
2026.01.29

생각해보지 못했던 부분 이네요~

사실 한국 사람의 문화, 특성 이런 것이 실재하냐는 관점의 차이고 넓은 관점에서 보면 사람은 다 똑같은 사람이지요.

사람 차이보다 제도나 주어진 환경 차이도 분명 영향이 클거 같네요.

말씀해주신 부분은 상당히 타당한 관점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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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춘이
2026.02.02

"대장주에 올라타는 행위는 주식을 사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가장 뜨거운 ‘사회적 합의’에 동참하는 행위일 뿐이다."

명문입니다!

자원이 없는 나라에서 인적자본 하나만으로 이렇게 발전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또 그만큼 빠르게 환경에 적응하고 아닌건 빠르게 버리는 집단적인 경험이 내재화 된것 아닐까요? 애초에 우리같이 없는나라는 취향의 다양함이라는게 결국 마이너한 고립을 불러온다는게 생존 dna에 각이 되었다고 할까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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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에게 투자의 이유를 묻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투자철학

내면화의 힘과 탈중앙화의 한계 지난 글에서 나는 피터 버거의 종교사회학적 관점을 빌려 비트코인을 분석했다. 현대 사회의 붕괴에 대한 불안이 만들어낸 일종의 '종교적 현상'이자, 내면화된 최면 상태라고 말이다. 다소 도발적인 이 주장에 누군가는 불편함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잠시 숨을 고르고 이 '내면화'라는 개념에 대해 오해를 풀고 넘어가려 한다. 사실 나는 그 내면화를 폄하하려던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다. 투자의 세계에서, 아니 우리 삶의 대부분에서 진리는 언제나 허무할 정도로 심플하다. "쌀 때 사서 비쌀 때 팔라." "장기 투자하라." "자산을 배분하라." 이런 진리는 누구나 알지만, 아무나 실천하지 못한다. 이 단순한 명제들을 지키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강력한 자기 확신, 즉 '내면화'의 과정이다. 내가 굳이 골치 아픈 인문학을 끌어와 투자 이야기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뻔한 정답을 뻔하지 않게 바라보는 것. 철학, 역사, 문학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투자의 본질을 다각도로 비춰보는 것. 이 지적 유희의 과정이야말로 단순한 진리를 우리 뼈에 새기는 가장 강력한 내면화의 도구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비트코이너들의 그 뜨거운 믿음은, 방향의 옳고 그름을 떠나 그 강렬함만큼은 인정할 만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그들의 지향점인 '완전한 탈중앙화'에 대해서는 의문을 던진다. 이는 단순히 기술의 문제가 아니다. 인류 지성사의 문제다. 인간의 정신사는 언제나 '중심을 세우려는 응집의 열망'과 '그 중심을 부수려는 해체의 열망'이 역동적으로 교차해 온 역사였기 때문이다. 그 흐름을 한번 짚어보자. 혼돈스러운 야만의 시대에서 인류는 생존을 위해 '신'과 '왕'이라는 강력한 질서를 세웠다. 시간이 흘러 그 절대 권력이 부패하자, 르네상스를 통해 중심으로부터 벗어나는 첫 번째 해체를 시도했다. 그 빈자리에는 다시 '이성'과 '과학'이라는 근대의 새로운 절대신이 들어서며 강력한 응집을 이뤘다. 그리고 20세기, 우리는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다시금 모든 중심을 부정하고 이성을 해체하려는 시도, 즉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를 통과했다. 그렇다면 모든 권위를 부수고 절대적 자유를 외쳤던 현대의 우리는 지금 행복한가? 오히려 우리는 눈에 보이는 모든 가치를 부정하는 냉소적인 지성인들에게 피로감을 느낀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중심 없음'을 견디지 못하는 존재다. 결국 우리는 다시 의지할 수 있는 확실한 가치를 찾게 된다. 과거의 망령을 다시 소환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고, 유튜브나 SNS 속 순수하고 진정성 있는 사람들의 모습에 열광하기도 한다. 해체된 폐허 위에서 새로운 의미를 재건하려는 움직임, '새로운 진정성'의 시대로 넘어가고 있는 것이다. 다시말해 역사는 정반합의 흐름 속에 있는 역동 그 자체다. 나는 투자 시장 또한 인류 지성사가 겪어온 이 궤적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고 느낀다. 탈중앙화에 대한 열망은 언제든 다시 타오를 수 있지만, 그것이 영원한 유토피아가 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안 때문에 만들어진 토템을 숭배하기보다, 이 거대한 흐름 속에서 변하지 않는 단순한 진리를 내면화해야 한다. 이 글의 결론은 아주 심플하다. 하지만 먼 여행을 다녀와서야 비로소 ‘집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듯, 긴 사유의 여정을 돌아서 다시 마주하는 뻔한 결론은 분명 이전과는 다르게 다가올 것이다. 이제부터 나는 거대한 사상사의 흐름을 빌려, 우리가 지금 어디쯤 서 있는지 이야기해보려 한다. 그리고 이 냉소와 오만의 사이에서, 어떻게 흔들리지 않는 나만의 투자 철학을 세울 수 있을지 논의해 보겠다. 응집과 해체의 드라마 정신 문화의 역사는 거대한 시계추와 같다. 한쪽 끝에는 확실한 정답을 갈구하는 '응집'의 욕망이, 반대쪽 끝에는 억압을 부수고 자유를 찾으려는 '해체’의 욕망이 자리 잡고 있다. 우리는 이 두 극단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며 문명을 건설하고, 또 무너뜨려 왔다. 이 거대한 진자 운동의 틀 속에서, 고대부터 이어져 온 사상사의 궤적을 따라가 보자. 1. 첫 번째 중앙화와 탈중앙화 태초의 야만과 혼돈 속에서, 인류는 생존을 위해 강력한 '중심'을 갈구했다. 플라톤은 '이데아'라는 변하지 않는 절대적 진리를 주창했고, 기독교는 이를 받아들여 유일신 사상을 완성했다. 그 결과 하늘에는 신, 땅에는 왕이라는 중심을 기반으로 견고한 질서의 세계가 열렸다. 의심은 곧 죄악이었고, 믿음이 곧 생존이었던 거대한 '내면화'의 시대. 중세까지 이어진 이 '응집'의 시대에 진리는 오직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이었다. 하지만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다. 절대 권력의 부패는 르네상스 시기에 이르러 첫 번째 균열을 일으켰다. 종교개혁은 "중개자 없이도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사상적 혁명을 가져왔고, 교황이라는 절대 중심으로부터 탈중앙화가 시작되었다. 신의 자리에는 인간이 놓였고, 문화적 자유가 꽃을 피웠다. 사람들은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성역 없이 권력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더이상 인간은 시스템의 부속품이 아니었다. 인간은 스스로 생각하는 독립된 존재, 즉 ‘근대적 개인’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중심 없음'을 오래 견디지 못했다. 독일의 철학자 니체는 "신은 죽었다"는 선언으로 이 사실을 가장 먼저 알렸다. 과거의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모든 것은 신의 뜻대로면 되었으니까. 하지만 절대적 가치가 사라지자, 자유와 함께 끔찍한 공허가 밀려들었다. 방향성을 잃은 신념은 정신적 타락으로 이어졌고, 니체는 분열과 혼란에 빠진 이 시대를 '데카당스'라 진단했다. 하지만 곧, 인간은 신을 몰아낸 빈자리를 채웠다. 그곳에 등극한 것은 바로 '이성'과 '과학'이라는 새로운 절대신이었다. 합리적 개인은 세상을 예측 가능하고 통제할 수 있는 영역으로 점령해 나갔다. 알 수 없었던 미지의 영역은 더 이상 신의 뜻으로 유예되지 않았다. 정교한 수리적 논리 아래 차곡차곡 질서가 잡히기 시작했다. 이제 사람들은 세상을 뉴턴의 물리학처럼 완벽하게 계산하고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다. 효율성과 생산성, 국가와 민족이라는 거대 서사 아래, 우리는 다시 강력하게 뭉쳤다. 인류 역사상 가장 화려하고 오만한, '재응집'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2. 탈중앙화의 열병 영원할 것만 같았던 모더니즘의 견고한 성벽은 다시금 처참한 대가를 치르며 무너져 내렸다. 이성의 승리라 믿었던 과학기술은 양차 대전과 홀로코스트라는 야만으로 귀결되었다. 합리적 개인이 발명해낸 초기 자본주의는 인간을 거대한 기계의 부품으로 전락시켰다. '집단의 최대 이익'이라는 논리는 겉보기엔 완벽해 보였으나, 실상은 개개인을 더 큰 고통으로 몰아넣는 폭력이었다. 기업과 국가의 이익을 우선한다는 명분은 피지배계층은 물론 시스템을 운용하는 지배계층의 영혼까지도 철저하게 착취하는 도구로 변질되었을 뿐이다. 이러한 모순에 대한 반작용으로 20세기 중엽, 모든 견고한 것을 파괴하는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의 광풍이 불어닥쳤다. 그들은 단호하게 선언했다. "절대적 진리는 없다." 비트겐슈타인, 데리다, 들뢰즈, 푸코와 같은 철학자들은 기존 질서 체계의 허점을 파고들어 권위를 해체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발견한 아킬레스건은 바로 인간 사고의 근간인 '언어의 취약성'이었다. 모더니즘이 숭배했던 절대신, '이성'조차 결국은 불완전한 언어 위에 지어진 사상누각임을 폭로한 것이다. 우리가 어떤 개념을 완벽하게 포착하려 할 때, 의미는 손에 쥔 모래처럼 계속해서 미끄러져 나간다. 언어가 대상을 완벽하게 재현할 수 없다면, 언어로 지어진 '객관적 진리'나 '절대적 이성' 또한 우발적이고 불안정한 작용의 산물일 뿐이다. 이러한 통찰을 무기로 지성인들은 권위적인 모든 것을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합리적 자본주의가 내세운 효율성의 폭력을 고발했고, 민족과 국민이라는 거대 서사가 개인을 억압하는 방식을 해체했다. 그들의 무기는 조롱과 비꼼, 그리고 아이러니(Irony)였다. 이성이라는 신의 이름으로 포장된 엄숙한 문장들은 전복되고 비틀어졌다. 덕분에 포스트모더니즘은 오랫동안 억압받던 다양성을 해방시키고, 중심이 아닌 주변부의 목소리를 복원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3. 중심에 대한 향수 해체의 축제가 끝난 후, 우리는 폐허 위에 남겨졌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무엇이든 가능하다(Anything goes)"는 구호는 역설적으로 "무엇을 해도 의미 없다"는 허무주의로 변질되었다. 진리가 사라진 자리는 냉소주의가 채웠다. 사람들은 이제 진심을 말하는 것을 촌스럽게 여기고, 상처받지 않기 위해 쿨한 척 팔짱을 끼고 뒤로 물러섰다. 특히 ...
인문학과 투자
2025. 1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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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의 투자철학

'걱정의 벽'에 대한 걱정

저렴해진 욕망 나는 ‘죄악’을 파는 기업에 투자하길 좋아한다. 이건 단순히 술, 담배, 도박 같은 주식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제대로 대중이 원하는 것을 파악한 기업을 의미한다. 기업의 본질은 누군가의 필요를 대신하고 돈을 버는 것이다. 그러나 단순한 ‘필요(Needs)’는 재미가 없다. 인간의 생물학적 위장은 한계가 명확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부자라도 하루에 다섯 끼를 먹을 수는 없다. 1,000만 원짜리 식사가 1만 원짜리 식사보다 1,000배 더 배부른 것도 아니다. 하지만 ‘욕망(Desires)’의 영역으로 넘어가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1,000만 원짜리 식사는 허영심을 채워주거나, 미식이라는 탐닉을 충족시킨다. 이것은 배고픔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다. 투자자의 관점에서 볼 때, 필요는 닫힌 구간이지만 욕망은 열린 구간이다. 무한대다.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은 이 지점을 정확히 꿰뚫었다. 그는 욕망을 ‘결핍’으로 정의했다. 인간은 대상을 원한다고 착각하지만, 사실은 그 대상이 채워줄 것이라 믿는 ‘환상’을 욕망한다. 하지만 그 환상은 대상을 손에 넣는 순간 증발한다. 충족되지 않은 결핍은 즉시 또 다른 대상으로 옮겨간다. 밑 빠진 독. 이것이 라캉이 말한 욕망의 구조다. 단테는 <신곡>에서 이 끝없는 갈증을 ‘지옥’이라 불렀다. 7가지 죄악-교만, 질투, 분노, 나태, 탐욕, 식탐, 정욕-은 모두 채워지지 않는 항아리와 같다. 자신을 파괴할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 현대 자본주의는 이 ‘지옥의 속성’을 기가 막히게 상품화했다. 기업들은 7대 죄악을 비즈니스 모델로 삼아 우리를 유혹한다. ‘나태’하고 싶은 마음은 ‘편리함’이라는 구독 서비스가 되고, 타인에 대한 ‘질투’는 SNS 속 명품 광고가 된다. ‘정욕’이 돈이 되는 건 두말할 필요도 없다. 기업은 우리의 결핍을 집요하게 파고들어, 지옥의 불구덩이 대신 결제 창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이 욕망의 끝은 어디일까? 상상력을 조금 더 밀어붙여 본다. 영화 <매트릭스> 속 인간 배터리가 떠오른다. 기계가 주입하는 전기 신호만으로 뇌는 완벽한 쾌락을 느낀다. 혹은 영화 <인셉션>의 꿈속 세상. 그곳은 물리적 한계가 없는 궁극의 도파민 천국이다. 누군가는 가상보다 현실의 육체가 중요하다고, 지적인 성취가 중요하다고 반박할지 모른다. 하지만 뇌과학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느끼는 현실 또한 감각 기관이 보내온 신호를 뇌가 재구성한 시뮬레이션일 뿐이다. 우리는 절대로 ‘현실’을 마주할 수 없다. 그저 주어진 신호로 상상할 뿐이다. 그러니 정교하게 속일 수만 있다면, 가짜와 진짜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어쩌면 인류의 종착지는 매트릭스 속 배터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50억 년 뒤 태양이 폭발해 지구가 멸망한다는 예언처럼 너무 먼 이야기다. 투자자인 내가 주목하는 것은 그 종말의 풍경이 아니다. 그곳으로 향해가는 ‘과정’이다. 태양이 식기 전에, 우리가 먼저 마주할 현실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욕망 충족 비용의 하락’이다. 기업은 끊임없이 혁신한다. 경쟁자를 이기기 위해 더 싸고, 더 빠르고, 더 자극적으로 욕망을 공급한다. 그 결과, 과거에는 귀족이나 왕족만 누릴 수 있었던 쾌락들이 헐값이 되었다. 옛날에는 ‘미식(Gourmet)’이 상위 1%의 전유물이었으나, 지금은 설탕과 지방으로 범벅된 가공식품이 편의점에 넘쳐난다. 뇌가 느끼는 쾌락의 강도는 비슷하지만, 비용은 수백 분의 일로 줄었다. 이것이 현대인이 점점 내향적으로 변해가는 진짜 이유다. 굳이 밖으로 나가 비싼 돈을 쓰고 정서적 에너지를 쓸 필요가 없다. 배달 음식을 시켜 놓고 넷플릭스를 켜는 것. 단돈 몇 만 원이면 황제 부럽지 않은 도파민 샤워가 가능하다. 우리는 역사상 가장 저렴하게 욕망을 소비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바로 여기서 거대한 모순이 발생한다. 욕망을 채우는 비용이 0에 수렴해 간다면, 남는 돈은 어디로 가는가? 우리는 적은 돈으로 충분히 만족하고 있다. 그런데 소득은, 자본은 계속 쌓인다. 매트릭스의 배터리가 되기 전, 우리는 먼저 ‘돈이 갈 곳을 잃어버린 시대’를 통과해야 한다. 세상에 돈이 많다. 나 빼고. ‘돈이 갈 곳을 잃었다’는 말에 코웃음 칠 사람이 있을 것이다. 당장 스마트폰을 켜면 SNS 속 세상은 욕망의 용광로처럼 보인다. 1억 원짜리 스포츠카를 타고, 하룻밤에 수백만 원짜리 호텔에서 샴페인을 터뜨리는 사람들. 우리는 그들을 보며 생각한다. "내가 집에서 넷플릭스를 보는 건 돈이 부족하기 때문이지, 돈만 있다면 언제든 도파민의 파도 위에서 서핑을 탈 것이다." 개인적 관점에서 이 믿음은 유효하다. 그러나 거시적 현실은 조금 다르다. 나라는...
인문학과 투자
2025. 12.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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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의 벽'에 대한 걱정

부자라는 ‘명사’의 감옥

서점 매대를 지나다가 한국의 출판 시장은 기형적이다. 깊이 있는 원제는 사라지고, 그 자리를 '부자 되는 법'이라는 노골적인 욕망이 차지했다. 출판사는 판매량을 위한 선택이라 변명하겠지만, 이는 독자의 지성을 기만하는 행위다. 나는 서점을 점령한 이 '부자 담론'에 반기를 든다. 우리는 정말 부자가 되기를 원하는가? 역설적이게도 사람들은 부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들이 진정으로 욕망하는 것은 미래의 '부'가 아니라 현재의 '소비'와 '쾌락'이기 때문이다. 부자가 되는 길은 이미 널려 있다. 지능이나 환경을 탓하기엔 자수성가한 사례가 너무나 많다. 사람들이 부자가 되지 못하는 이유는 방법의 부재가 아니라, 부자가 되어가는 고단한 '과정'을 견딜 의지가 없기 때문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부자'를 도달해야 할 최종 목적지로 설정하는 사회적 통념에 있다. 절대적 빈곤이 해결된 현대 사회에서 가난은 '현상'이 아니라 '감정'이다. 100억을 가진 자는 1,000억을 가진 자 앞에서 가난을 느끼고, 국내에 별장이 있는 자는 해외에 별장이 있는 자 앞에서 박탈감을 느낀다. 내가 아는 한 지인은 남들이 부러워하는 부를 가졌음에도, 더 거대한 부자들과 자신을 비교하며 늘 허기에 시달린다.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려는 순간, 부에 대한 욕망은 영원히 채워질 수 없는 형벌이 된다. 왜 부자가 되어야 하는가? '더 행복해지기 위해서'라는 답변은 기만이다. ‘부자가 되면’, ‘의사가 되면’ 인생이 완성될 것이라는 믿음은 헛된 망상이다. '부자'는 삶의 결론이 될 수 없다. 목표를 달성한 그 순간에도 삶은 여전히 지루하게 이어진다. 태어날 때부터 부자였던 이들조차 불행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우리는 이제 '부자라는 명사'가 되기 위해 인생을 유예하는 것을 멈춰야 한다. 중요한 것은 도달한 이후의 삶, 그리고 부를 대하는 태도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명사적 존재의 함정 나는 "부자가 된다"는 말을 경계한다. 인간은 '부자'라는 명사로 고정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20세기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는 "실존이 본질을 앞선다"는 명제로 이 문제를 꿰뚫어 보았다. 의자나 키보드 같은 사물은 만들어지기 전부터 '앉기 위한 도구', '입력을 위한 도구'라는 목적, 즉 본질이 먼저 존재한다. 하지만 인간은 다르다. 우리는 세상에 먼저 던져진(피투) 후, 스스로 선택하며 자신을 만들어가는(기투) 존재다. 그런데도 우리는 스스로를 마치 용도가 정해진 사물처럼 착각한다. 사르트르는 <존재와 무>에서 카페 웨이터의 예를 든다. 주문을 받고 쟁반을 나르는 종업원은 마치 '웨이터'라는 본질을 타고난 기계처럼 움직인다. 하지만 그것은 연기일 뿐이다. 그는 퇴근하는 순간 누군가의 연인이 되고, 주말에는 춤을 추거나, 정치적 구호를 외치는 시위자가 될 수도 있다. 그는 '웨이터'라는 명사로 환원될 수 없는 투명하고 텅 빈 그릇이다. 어떤 수식어도 그를 영원히 가둘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실존이 본질을 앞선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다. 그러나 인간은 이 불확정성을 견디기 힘들어한다. 우리는 타인을, 그리고 나 자신을 규정되지 않은 실존으로 마주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불확실성은 불안을 낳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빨리 명사로 환원시키려 든다. "저 사람은 의사야", "이 사람은 대리야"라고 이름표를 ...
인문학과 투자
2025. 1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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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라는 ‘명사’의 감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