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칸 네이션들(분열하는 제국)>, 콜린 우다드, 글항아리, 2017
19세기에 파웨스트에서 살아남은 그룹은 거대한 외부 기업이나 그 기업들이 참여한 연방정부의 인프라 건설 프로젝트에 연관된 사람들뿐이었다. 미 정부는 강과 개울에 댐을 세우고, 수원을 분산시키기 위한 송수관을 건설했으며, 광범위한 관개 수로를 내고 유지·보수했다. 그러나 그 혜택으로 사막에서 농작물을 키울 수 있었던 농부는 소수에 불과했다. 광산 기업은 새로운 지역과 주로 사업을 확장해나가면서 그곳들을 자신들의 봉건 영지처럼 운영했다. 사업을 독점하고 요금을 마음대로 매긴 철도 회사들 때문에 파웨스트를 오가는 열차는 레프트코스트에서 동부 지역까지 오가는 열차보다 요금이 마일당 몇 배는 더 비쌌다. 20세기에도 시카고에서 몬태나의 헬레나까지 상품을 운송하는 비용이 같은 기차로 시카고에서 헬레나를 거쳐 시애틀까지 운송하는 것보다 더 비쌀 정도였다. 또 철도 회사들은 완성품에는 원자재보다 더 비싼 운송료를 매겼다. 이는 제조업체들이 파웨스트를 장악하지 못하도록 막고 파웨스트에 대한 레프트코스트, 양키덤, 미들랜드, 뉴데널란드의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한 철도 회사의 의도적인 꼼수였다.
이민자가 남부의 세 지역을 기피한 이유를 추측하기란 어렵지 않다. 그들은 귀족이 지배하는 압제적인 봉건국가를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미국으로 이주해왔다. 1866년 남북전쟁이 끝나기 전까지 딮사우스와 타이드워터는 귀족이 다스리는 억압적인 봉건제 사회와 똑같았다. 그들은 1877년 재건의 시대가 끝나고 연방군이 철수하자마자 원래 모습으로 돌아갔다. 산업이 발달하지 않고 농업 역시 대농장주의 지배를 받았던 딮사우스와 타이드워터는 이주민들에게 매력적인 장소가 아니었다. 그레이터 애팔래치아는 몹시 가난해서 도시가 형성되지 않았고 일자리가 없었다. 지역적인 관습에 집착하면서 '미국인'이 아닌 자에게 배타적인 태도를 보인 점도 외국인이 이곳을 꺼리게 만든 요소였다.
양키는 19세기에 '거대한 물결'이 미국을 덮치자 이주민을 '미국인'의 기준, 즉 뉴잉글랜드의 가치에 순응시키기 위해 두 배로 더 많은 노력을 쏟아부어야 했다.
그들의 성전은 이주민과 아이들을 교육시키는 데 집중됐다. 뉴잉글랜드와 양키 식민지에서 학교는 이주민을 동화시키기 위한 도구로 사용됐다. 20세기까지도 읽고 쓰고 계산할 수 있는지 여부는 농부, 임금노동자, 산업노동자로 채용되는 데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그보다 학교는 아이들에게 양키의 가치관을 주입시켜 공동체 의식을 강화함으로써 쉬족층의 형성을 막고 공화국을 지켜내기 위해 존재했다. '거대한 물결'은 양키의 위기의식을 더욱 강화했다. 버몬트 태생의 유명한 교육철학자 존 듀이는 1915년 "모두 한 교실에서 공부하도록 만드는 것이 민주주의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민주주의의 기본 가치인 기회의 평등을 실현시키려면 공동체를 위해 학습, 사회 적응, 신념, 실천, 일, 자신의 행동이 갖는 의미에 대한 인식을 처음부터 통일해 가르치는 교육이 필요하다." 양키는 사회와 문화의 연속성을 위해 공립학교에서 공통의 커리큘럼을 가지고 아이들을 함께 교육시켜야 한다고 오랫동안 주장해왔다. 뉴잉글랜드 정부는 19세기 중반부터 모든 도시에 무상 교육을 의무적으로 도입했다. 19세기 말에는 양키가 장악한 다른 많은 주도 의무 교육을 잇달아 도입했다. 반면 딮사우스에는 제대로 된 공립학교 시스템이 없었고, 계급과 카스트의 구분 없이 교육시키는 것을 꺼렸다.
딮사우스와 타이드워터는 그들의 제도와 인종 카스트가 위협을 받게 되자, 당시 유일하게 자신들의 수중에 남아 있던 시민 조직을 중심으로 저항운동을 펼쳐나갔다. 그 조직은 바로 교회였다. 남부 지역의 여러 교파 중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했던 복음주의 교회는 전쟁 전의 사회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아주 유용한 도구였다. 남부 침례교 등 복음주의 교회들은 양키덤의 교파와 달리, 종교학자들이 말하는 '내면적 개신교 Private Protestants' 성향을 띠고 있었다. 이는 북부 지역의 '공공적 개신교 Public Protestants'와 반대되는 개념이다. '내면적 개신교', 특히 남부 침례교, 남부 감리교, 남부 성공회는 이 세계가 애초부터 죄악으로 오염되어 있으며, 남북전쟁 후 이 같은 현상이 더 심해졌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예수의 재림을 준비하기 위해 복음을 전파해 이 땅을 변화시키려 하기보다는, 휴거가 일어나기 전 각 영혼이 영적으로 변화될 수 있도록 개인의 구원에 치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때문에 내면적 개신교는 사회를 변화시키는 데 아무 관심이 없었고 기존 질서와 복종만을 강조했다. 이들에게 노예제, 귀족계급, 일반 서민들의 비참한 가난은 타도해야 할 죄악이 아니라 오히려 양키 이단으로부터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지켜냐야 할 신성한 것이었다.
애팔래치아 지역의 스콧-아이리시 역사학자와 미국 상원의원인 짐 웨브는 "신선하고 새로운 의견은 위에서부터 묵살됐고, 때로는 폭력으로 입막음 됐다. ... 그 결과 흑인뿐 아니라 수많은 백인도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고 기록했다. 교육 수준은 추락했고, 연방에서 경제적으로 고립되는 현상은 더 심해졌다. 19세기 후반 다른 지역이 모두 성장하면서 팽창할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