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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연재]진짜 '국가'는 다르다. 현대 중동 2부
3등상[시리즈 연재]국제정치와 지정학

[시리즈연재]진짜 '국가'는 다르다. 현대 중동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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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ttoman
2026.06.11조회수 44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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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ttoman
구독자 873명구독중 26명
다양한 이야기를 쉽고 재미있게 쓰는게 목표입니다.


제대로 된 국가가 드문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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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 지도를 펼쳐 놓고 친구끼리만 얘기한다고 치고 솔직히 얘기해 보겠습니다. 이 안에 '진짜 국가'가 몇이나 되는지를 세어 보죠. 여기서 진짜 국가란 거창한 뜻이 아닙니다. 국민이 스스로를 하나의 운명 공동체로 여기고, 정권이 바뀌어도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알맹이를 품은 나라 ― 우리가 대한민국이나 일본을 떠올릴 때 자연스레 그리는 바로 그 그림입니다. 그 잣대를 들이대면, 수천 년 문명의 요람이라는 메소포타미아의 이 땅의 풍경은 뜻밖에 휑합니다.

1부에서 보았듯, 이 지역의 상당수는 자로 그은 국경선 안에 부족과 종파가 영문도 모른 채 뒤섞인 인공 구조물입니다. 시리아와 이라크가 그렇습니다. 또 어떤 나라들은 한 가문이 정복한 땅에 제 성(姓)을 새겨 넣은 거대한 부족 영지에 가깝습니다. 걸프의 산유 왕국들이 그렇습니다. 국경도, 국민도, 정통성도 어느 하나 '스스로 자라난' 것이 없는 땅. 그 휑한 풍경 속에서, 근대적 의미의 단단한 국가라 부를 만한 예외는 놀랍도록 드뭅니다. 손에 꼽아 보면 셋 정도입니다. 이란, 이스라엘, 그리고 오스만의 후손인 터키.

그리고 여기서 첫 번째 의문이 고개를 듭니다. 이 셋 가운데 누구도, 석유로 흥청대는 걸프의 부자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이란은 수십 년 제재로 가난에 절었고, 이스라엘은 석유 한 방울 나지 않으며(최근에 가스는 남), 터키 역시 변변한 자원이 없습니다. 가장 부유한 자들에게는 국가의 알맹이가 없고, 알맹이를 가진 자들은 가난합니다. 이 뒤집힌 그림이 단순한 우연이 아님을, 2026년 봄의 한 장면이 잔인할 만큼 선명하게 보여주었습니다.

올해 2월 말, 미국과 이스라엘의 기습 공습으로 이란은 최고지도자마저 잃습니다. 상식대로라면 그것으로 끝났어야 할 싸움이었습니다. 제재로 수십 년을 시달린 가난한 나라가, 세계 최강 미국과 중동 최강 이스라엘을 동시에 상대하는 형국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이란은 무너지기는커녕 호르무즈 해협을 틀어막아 세계 에너지 시장을 통째로 인질로 잡았고, 끝내 미국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냈습니다. 같은 시각, 두바이의 초고층 빌딩과 아부다비의 국부펀드와 리야드의 새 금융특구를 거느린, 1인당 소득이 이란의 수십 배에 이르는 걸프의 부자들은 무엇을 했을까요. 그들은 통일된 입장 하나 내놓지 못한 채, 제 영공과 유전이 위협받는 동안 사실상 구경꾼으로 서 있었습니다. UAE는 오히려 OPEC을 떠나버렸습니다. 돈으로 따지면 압도적인 부자가, 힘으로 따지면 가난한 이웃에게 끌려다니는 풍경입니다.


그렇습니다. 중동에서 진짜 힘은 석유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국가 역량(state capacity)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가장 역설적인 대목은, 그 역량이 오히려 쉬운 돈(Easy money)이 없을 때 단련된다는 것입니다. 1부의 이야기가 "민족주의로 망한 제국과 그 뒷 이야기"였다면, 2부는 "석유가 국가를 죽인, 혹은 그 부재가 국가를 살린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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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스만 제국의 무덤에 피는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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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년을 이어 온 제국이 1부의 마지막에서 멸망했습니다. 그 거대한 무덤 위에, 한 세대 만에 인류가 일찍이 본 적 없는 화려한 꽃들이 피어올랐습니다. 사막 위에 솟은 마천루의 도시들, 걸프의 석유 왕국들입니다. 그러나 이 꽃들에게는 한 가지 비밀이 있습니다. 눈부시게 화려하되, 뿌리가 얕다는 것입니다. 이 장은 그 꽃들이 어떻게 피어났는지, 그리고 왜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했는지를 따라가는 이야기입니다.

본격적인 이야기에 앞서, 국체(國體)라는 단어를 미리 정리하고 가겠습니다. 본래 묵직한 학술 용어입니다만, 이 글에서는 단순하게 쓰겠습니다. 돈으로는 살 수 없고 오직 시간과 시련으로만 빚어지는 것, 그 나라를 바로 그 나라이게 만드는 정체성과 응집력의 알맹이 ― 그것을 국체라 부르겠습니다. 1부에서 제국의 운명을 가른 열쇠가 '민족'이었다면, 2부에서 국가의 운명을 가르는 열쇠는 바로 이 국체입니다. 누구에게는 있고 누구에게는 없는 이 알맹이가, 앞으로 펼쳐질 모든 대비의 기준선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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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걸프의 꽃들은 어떻게 피어났을까요. 가장 큰 꽃부터 보겠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입니다. 그 뿌리는 18세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아라비아 내륙의 사우드 가문이, 와하브파라 불리는 지극히 엄격한 이슬람 개혁 운동과 손을 잡습니다. 한쪽은 칼을, 다른 한쪽은 코란을 든 이슬람 동맹이었습니다. 이 칼과 경전의 결합은 수백 년에 걸쳐 부침을 겪다가, 20세기 초 이븐 사우드라는 걸출한 인물에 이르러 결실을 맺습니다. 그는 아라비아 내륙을 무력으로 통일했고, 1925년에는 영국이 후원하던 하심 가문으로부터 메카와 메디나가 있는 헤자즈 지방까지 빼앗았습니다. 공교롭게도 이 헤자즈야말로 오스만 제국의 옛 영토였으니, '오스만의 무덤 위에 핀 꽃'이라는 비유는 사우디에 이르러 글자 그대로 들어맞습니다. 그리고 1932년, 그는 자신이 정복한 이 광대한 땅에 하나의 이름을 붙입니다. '사우디아라비아', 풀어 쓰면 '사우드 가문의 아라비아'입니다.

이 작명에 모든 것이 담겨 있습니다. 국민이 모여 국가를 세운 것이 아닙니다. 한 가문이 정복으로 영토를 차지한 뒤, 거기에 자기 성을 새겨 넣은 것입니다. 나라 이름 자체가 소유주의 문패였던 셈입니다. 걸프 연안에 점점이 박힌 더 작은 꽃들도 사정은 비슷했습니다. 쿠웨이트와 바레인과 카타르, 그리고 훗날 아랍에미리트, 즉 연합 아랍 토후국들로 묶이게 될 '휴전 해안(Trucial States)'의 군소 부족(토후국) 군주들은, 19세기에 영국과 보호조약을 맺음으로써 살아남았습니다. 영국이 이 작은 토후들을 거둔 것은 물론 호의가 아니었습니다. 인도로 가는 길목인 이 바다에서 해적을 단속하고, 다루기 쉬운 약소 군주를 통해 연안을 값싸게 '관리'하는 편이 이로웠기 때문입니다. 1부에서 우리는 유럽 열강이 무함마드 알리의 진격을 가로막으며 오스만이라는 환자를 환자인 채로 침대에 눕혀 두려 했던 장면을 보았습니다. 걸프에서는 바로 그 논리가 '부족을 부족인 채 보호국으로 살려 두는' 방식으로 작동했습니다.

여기서 이 장의 결론이 드러납니다. 걸프의 꽃들은 처음부터 '국민국가'가 아니라 '부족정 국가'로 피어났습니다. 통치의 정통성은 헌법이나 국민의 동의가 아니라 가문의 혈통과 부족 간 연합에서 나왔고, 국경은 부족의 자연스러운 경계가 아니라 석유 이권과 영국의 편의에 따라 그어졌습니다. 국민이 군주에게 "당신은 왜 우리를 다스리는가"라고 물어 본 적이 없으니, 군주도 그 물음에 답을 준비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바로 이 갓 피어난 꽃의 발밑에서, 20세기 들어 검은 황금이 납니다. 석유입니다. 그런데 이 석유는 꽃에게 뿌리를 내려 주기는커녕, 정반대의 일을 했습니다. 뿌리가 없어도 시들지 않게 해 주는 기묘한 양분이 된 것입니다.

2. 지대(地代)의 저주 ― 돈으로 무기는 사도 국가는 못 산다

어째서 걸프의 부족정 국가들은 그 막대한 부에도 불구하고 끝내 진짜 국가로 자라지 못했는가. 그 메커니즘을 이해하면 중동 권력 지도의 절반이 풀립니다.

이 현상에는 이름이 있습니다. 지대추구국가(rentier state) 이론입니다. 여기서 '지대'란 땅을 빌려주고 받는 임대료를 떠올리시면 됩니다. 일하지 않고, 무언가를 생산하지 않고, 그저 무언가를 '소유했다'는 이유만으로 굴러 들어오는 소득입니다. 석유야말로 전형적인 지대입니다. 땅속에 묻혀 있던 것을 퍼 올려 팔기만 하면 돈이 들어오니까요. 흥미로운 사실 하나를 곁들이자면, 이 이론을 1970년 처음 체계적으로 제시한 사람은 호세인 마흐다비라는 경제학자였는데, 그가 분석 모델로 삼은 나라가 다름 아닌 '혁명 전의 이란'이었습니다. 이란을 설명하려고 태어난 이론을, 훗날 바로 그 이란이 가장 멋지게 배반하게 된다는 사실은 참 재밌습니다.

지대추구국가의 핵심은 사회계약이 통째로 뒤집힌다는 데 있습니다. 근대 국가가 어떻게 탄생했는지를 떠올려 보십시오. 왕은 전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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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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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SCOPE
2026.06.11

시리즈 정주행중임니다 잘읽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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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고
2026.06.11

국체를 중심으로 한 국가들에 이끌려다니는 산유국들이 아이러니하면서도 부족정 국가라는 역사를 들여다보니 한편으로 이해도 되네요.

(수정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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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silonDelta
2026.06.11

정말 재밌네요,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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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LEY_cbg9898
2026.06.11

즐겁게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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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P_3_star
2026.06.11

매번 잘 읽고 있습니다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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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창이
2026.06.11

우리 나라도 부족한 자원으로 인해 교육과 인재에 투자릉 햇고, 첨단 산업을 발전 시키며 국체를 이룬 국가 중 하나 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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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MA11
2026.06.11

2부도 정말 인상깊게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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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yru
2026.06.11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돈으로 무언가를 지킬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하려면 돈 말고도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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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oneer
2026.06.12

국가와 비슷하지만 또 다른 의미인 국체가 무엇인지 생각해보면 기회가 되었습니다. 갑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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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리
2026.06.12

너무 재밌습니다!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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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연재]우리 우크라이나가 달라졌어요

잊혀진 전쟁 마지막으로 우크라이나 뉴스를 진지하게 읽으신 게 언제인지 한번 떠올려보시기 바랍니다. 한 달 전이라고 답하신다면 그래도 양호한 편입니다. 두 달, 석 달 전이라고 답하시는 분이 더 많으실 겁니다. 그도 그럴 것이, 2026년 2월 28일 미국과 이스라엘이 이란을 공습하고 하메네이가 사망한 이후의 두 달 동안 세계의 헤드라인은 일관되게 한 곳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 호르무즈, 중동의 정유, 가스 시설, 한때 배럴당 $126를 찍었던 브렌트 유가, 그리고 트럼프나 헤그세스 같은 미국 정치인들. 어쩌다 떠오르는 우크라이나 관련 뉴스가 있다 해도 대개는 트럼프-푸틴 통화의 단편적 내용이 전부였습니다. 같은 두 달 동안 안토니우 코스타 EU 의장은 "이 전쟁의 유일한 승자는 러시아다"라고 단언했고, 트럼프 대통령은 "러시아가 우위에 있으니 우크라이나는 받아들여야 한다"고 정치 매체에 인터뷰했습니다. 헤드라인이 다른 곳을 보는 사이 푸틴이 조용히 이득을 챙기고 있다는, 직관적으로는 그럴듯한 통념이 굳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데이터를 펼쳐놓고 보면 정확히 그 반대 그림이 나타납니다. 잊혀지는 동안 러시아의 진짜 상황은 더 깊은 곤경으로 빠져들었고, 1년 전만 해도 "내일이라도 무너질 것 같다"던 우크라이나는 우리가 보지 못한 사이에 상당한 자생력을 갖춰가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그 사이 무엇이 어떻게 변해갔는지를 생각해보겠습니다. 현재 우크라이나 전쟁은 영토 싸움이 아니라 인내심 싸움으로 변했으며, 그 인내심의 비대칭이 푸틴이 처음 가정했던 것과 정확히 반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푸틴이 한편으로는 헤드라인의 부재를 환영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트럼프의 전화번호를 다급하게 누르고 있는 모순적 행보의 정체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1. "우리 우크라이나가 달라졌어요" — 자생력의 등장과 인내심의 역전 2022년부터 2024년까지 우크라이나는 늘 "곧 무너질 것 같은" 나라였습니다. 미국 의회가 원조 패키지 표결을 한 차례 미루면 동부 전선의 포탄 비축량이 떨어졌고, 유럽이 결의안 채택을 한 주만 늦춰도 키이우의 외환보유고가 흔들렸습니다. 군사적 실력 이전에 외부 지원의 변동성에 운명이 묶여 있는 나라 — 평론가들이 우크라이나에 대해 가졌던 기본 인식이 그러했습니다. 트럼프가 재선되었을 때 적지 않은 한국 외교 관찰자들이 "이제 끝났다"고 단언한 것도 이런 의존성에 대한 평가의 연장선이었습니다. 자생력 없는 피후견국이 후견인의 변심을 견뎌내기는 어렵다는 — 국제정치 교과서에 충실한 — 진단이었습니다. 애물단지라고 하는 것이 정확했습니다. 그런데 2026년 봄, 데이터는 그 통념을 정면으로 뒤집습니다. 첫 번째 충격적인 사실은 영토가 거꾸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ISW(전쟁연구소)의 일일 평가를 종합하는 Russia Matters의 집계에 따르면, 2026년 3월 한 달 동안 러시아군은 우크라이나 영토를 12평방마일 순손실했고, 4월 한 달 동안에는 다시 26평방마일을 순손실했습니다. 자포리자 남부의 올렉산드리프카·훌랴이폴레 방면에서만 우크라이나가 400㎢ 이상을 회복했고, 2026년 2월은 2024년 이후 최초로 우크라이나가 잃은 영토보다 되찾은 영토가 더 많았던 달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런데 영토 자체보다 더 결정적인 수치는 그 영토를 "사는 데 든 비용"입니다. 매체에 공개한 분석에 따르면, 2026년 1분기 러시아군은 1평방킬로미터를 점령하는 데 평균 316명의 사상자를 기록했습니다. 2025년 같은 분기 기록이 평방킬로미터당 120명이었으니, 1년 만에 영토당 인명 단가가 약 2.6배로 폭증한 것입니다. 동일한 1평방킬로미터를 점령하기 위해 러시아군이 지난해보다 두 배 반의 사람을 갈아 넣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잠시 멈추고 그림을 다시 그려보시기 바랍니다. 푸틴이 트럼프와의 3월 10일 통화에서 "러시아군은 성공적으로 진격하고 있다"고 자신만만하게 발언한 것이 알려져 있습니다. 같은 발언을 한 다음날 그는 "키이우는 도네츠크주의 15~17%만 통제하고 있다"는, 실제 데이터(약 19.5%)와는 미묘하게 다른 수치를 공개석상에서 반복했습니다. 그러나 객관적 데이터는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진격이 멈춘 정도가 아니라 순손실이 두 달 연속 나오고 있고, 진격하는 과정조차 1년 전의 2.6배에 달하는 인명 비용을 치르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한 가지 첨언하자면, 푸틴이 외부에 진격을 자랑할수록 내부에서 협상의 다급함이 커진다는 신호로 읽는 것이 정확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정말 잘 풀리고 있는 사람이 굳이 그렇게 자주 자랑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푸틴이 이 전쟁을 시작할 때 가장 자신 있어 했던 것은 "전체주의가 민주주의보다 인내심이 길다"는 가정이었습니다. 시민 사회의 불만, 야당의 압박, 정권 교체 가능성에서 자유로운 러시아가, 매 분기 의회와 다투며 예산을 짜고 매 가을마다 선거를 치러야 하는 미국·EU·우크라이나보다 오래 버틸 수 있다 — 이것이 모스크바의 기본 베팅이었습니다. 2022년 9월 부분 동원 발표 직후 푸틴이 "우리가 진지하게 시작도 안 했다"고 발언했던 것도 같은 자신감의 표현이었습니다. 거기다 젤렌스키가 전시 지도자로 대선을 미루며 계속 연임을 지속하자, 러시아식 정치체제의 완벽한 승리처럼 비쳐졌습니다. 그런데 4년이 지나고 보니, 정작 인내심의 한계에 먼저 다가가고 있는 쪽은 러시아입니다. 러시아 국부펀드(National Wealth Fund, NWF)는 절반 이하로 줄었고, 모병은 떨어지고 있으며, 영토당 인명 비용은 2년 만에 두 배 반으로 뛰었습니다. 반면 우크라이나는 헐떡이며 외부 지원에 매달리던 나라에서, 자체 드론 산업과 무인지상차량 군대를 만들어 인적 자원의 한계를 기술로 우회하기 시작한 나라로 변모했습니다. 외부 지원은 여전히 중요하지만, 외부 지원이 한 주 늦어진다고 해서 무너지는 시스템이 아니게 된 것입니다. 이 자생력의 등장이야말로 코스타 의장의 진단이 빗나간 핵심 이유입니다. 2024년이었다면 헤드라인이 호르무즈로 옮겨가는 순간 우크라이나가 흔들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2026년의 우크라이나는 헤드라인이 없어도 매주 러시아군 8천여 명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습니다. 잊혀지는 것조차 견뎌낼 수 있는 나라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잊혀지는 동안에도 시스템이 매일 정해진 페이스로 작동한다는 사실 자체가, 푸틴 입장에서는 시간이 흐를수록 자기 입지가 나빠지는 그림이 됩니다. 이렇게 변해버린 사정이 지금부터 살펴볼 모든 변수의 출발점입니다. 드론 생태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푸틴의 재정과 인적 자원이 어디까지 무너졌는지, 그 빈자리를 어떻게 북한군으로 메우려 하고 있는지, 그리고 정작 변해버린 셈법을 워싱턴이 어떻게 카드로 쥐고 다루기 시작했는지 — 이 모든 변수가 결국 한 가지 사실로 수렴합니다. 푸틴은 자기 인내심이 떨어지기 전에 협상을 끝내야 합니다. 그리고 이란 전쟁은, 그 다급함을 잠시 가려주는 진통제일 뿐입니다. 2. 드론의 대반전 우크라이나의 자생력이 어디서 왔는지를 이해하려면 단일 무기 체계를 찾아서는 안 됩니다. 결정적 변수는 생태계입니다. 2026년 3월 한 달간 우크라이나가 집계한 러시아군 사상자는 35,351명으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습니다(2월 대비 29% 증가). 이 가운데 페도로프 우크라이나 국방장관이 "각 타격마다 영상 증거를 보유한 명백히 확인된 손실"이라며 못 박은 비율은 무려 96%가 드론에 의한 것입니다. 포병과 소화기에 의한 사상자를 다 합쳐도 4%에 불과합니다. 이 숫자가 의미하는 바는 분명합니다. 현대 지상전의 살상 매개체가 105mm·155mm 포탄이나 소총이 아니라 500달러짜리 프로펠러 넷 달린 허접하게 생긴 드론으로 옮겨갔다는 것입니다. 우크라이나 무인체계군이 2026년 천명한 목표는 더 무겁습니다. 월 5만~6만 명의 러시아군 사상이 공식 KPI입니다. 이 수치는 직관적으로는, 매주 한국군 1개 사단(약 1만 2천~1만 5천 명)에 해당하는 병력을 갈아 없애는 페이스가 됩니다. 한국군 전체가 약 50만 명이라는 점을 떠올려보시면 이 페이스의 의미가 더 명확해집니다. 이 숫자를 만들어내는 산업 구조를 살펴보면 더 놀랍습니다. 전쟁 전 우크라이나의 드론 제조사는 7~10개에 불과했습니다. 2026년 현재는 약 500개 이상의 회사가 활동하고 있으며, 폴란드 동방연구센터(OSW)와 KSE 연구소의 종합 추계에 따르면 연간 생산량은 2024년 220만 대 → 2025년 450만 대 → 2026년 700만 대 목표로 빠르게 확장되어 왔습니다. 블룸버그가 2025년 11월 보도한 표현을 빌리면, 우크라이나 한 나라의 드론 생산량이 NATO 회원국 전체 합산보다 많을 가능성이 높은 상태입니다. 우크라이나 정부 예산만으로는 이 생산량을 다 사들일 수도 없을 만큼 공급이 폭발했습니다(2025년 7월 보충 예산까지 동원해 약 230억 달러 규모의 국내 드론 조달 예산이 편성되었지만, 그조차도 국내 제조사들이 제시한 물량의 절반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이 생태계의 작동 방식은 의도적으로 분산형입니다. 정부 주도의 단일 대형 제조사 대신 수백 개의 중소 제조사가 경쟁하며, 일선 부대가 디지털 조달 플랫폼을 통해 직접 발주합니다. 발주자가 키이우의 국방부 조달관이 아니라 포크로우스크의 중대장이라는 점이 결정적입니다. 참호 안에서 3D 프린터로 부품을 즉석 제작하고, 현장 부대원의 피드백이 며칠 만에 소프트웨어 업데이트로 반영되며, 어떤 모델이 잘 작동하면 입소문을 타고 다른 부대가 같은 제조사에 직접 주문을 넣는 — 사실상 참호 단위의 시장 경제입니다. 비유하자면 윈도우(중앙집중·폐쇄)가 아니라 리눅스(분산·오픈소스)에 가까운 군사 산업 구조이며, 이 구조의 핵심 미덕은 적응 속도입니다. 러시아의 새로운 전자전 주파수가 등장하면 우크라이나 드론의 펌웨어가 일주일 안에 업데이트되어 전선에 배포됩니다. 이 생태계가 만들어낸 가장 인상적인 사례는 2025년 말 우크라이나 제3군단이 공개한 일화입니다. 동부 전선의 한 진지를, 기관총을 장착한 무인 지상차량(UGV) 단 한 대가 45일간 사수했습니다. 48시간마다 보급과 정비만 받으면서, 그 진지에 사람은 단 한 명도 배치되지 않았습니다. 군 관계자의 코멘트는 군더더기 없이 단순했습니다. "Robots don't bleed." 같은 흐름 속에서 BBC는 2025년 11월 포크로우스크 일대에서 전선 보급의 약 90%를 무인 지상차량이 담당한다고 보도했습니다. 보병 한 명의 가치가 폭등한 시대에, 보급 임무를 사람이 아닌 기계에 외주를 준 것입니다. 또 하나의 진화는 "드론 라인(Drone Line)"이라는 새로운 군사 조직 개념입니다. 마자르의 새들 연대(Magyar's Birds)를 비롯한 5개 정예 드론 부대를 통합한 조직으로, 전선 후방 10~15km 깊이의 구간에 "킬존(Kill Zone)"을 형성합니다. 이 킬존 안으로 들어오는 모든 보병·차량·포병은 80% 이상의 확률로 타격을 받습니다. 러시아군이 공격을 위해 집결하려면 일단 자기 후방에서 출발해 이 10~15km의 사신의 영역을 통과해야 하는데, 통과하기 전에 이미 80%가 사라집니다. 1평방킬로미터당 316명이라는 영토 비용의 수학적 토대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러시아도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광섬유 드론(전자전으로 무력화되지 않는 유선 통신 방식)을 대량 도입했고, 우크라이나 후방 보급선과 차량을 표적으로 삼는 종심 타격을 강화했습니다. 그 결과 Oryx의 공개 자료 기준으로 2025년부터는 우크라이나의 장비 손실이 러시아의 장비 손실을 추월하기 시작했습니다. 드론 전쟁은 이제 양방향으로 격화되고 있고, 우크라이나의 우위가 영원하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것은 두 가지 비대칭이 여전히 우크라이나 편에 있다는 점입니다. 첫째, 인명 교환비에서는 우크라이나가 압도적 우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러시아의 종심 타격이 우크라이나 보급 차량을 부수고 있긴 하지만, 우크라이나 드론은 그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러시아 보병의 시신을 만들고 있습니다. 둘째, 혁신 속도가 다릅니다. 우크라이나의 500개 제조사가 매일 경쟁하며 만들어내는 진화의 속도를, 러시아의 중앙집중적 방산 체계가 따라잡기 어렵습니다. 푸틴이 광섬유 드론으로 한 라운드를 따라잡았다면, 우크라이나는 그 사이 자율 표적 식별 AI와 드론 모선(母船) 운용으로 다음 라운드의 격차를 다시 벌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의미하는 바는 다음 섹션에서 살펴볼 러시아의 재정과 인적 자원의 한계와 합쳐졌을 때 비로소 완전히 보입니다. 매월 5만 명씩 전선에서 이탈하는 군대를 유지하려면 엄청난 재정과 인력 충원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3. 푸틴의 두 번째 전선 — 러시아 내정은 무적이 아니다 전장의 인내심 비대칭이 한 축이라면, 다른 한 축은 모스크바의 재무부 건물 안에서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쪽 시계는 더 가파르게 무너지고 있습니다. 러시아 국부펀드(National Wealth Fund, NWF)의 궤적부터 보겠습니다. 2022년 2월 침공 시점에 NWF의 유동자산은 1,135억 달러에 달했습니다. 푸틴이 "전쟁 비용을 충분히 댈 수 있다"고 자신했던 근거가 바로 이 곳간이었습니다. 그런데 2025년 ...

[시리즈연재]해협의 정권

이번엔 분량이 조금 깁니다. 제가 현재 이란을 보는 시각을 정리해보고 중동 관련 내용을 일단락 지으려고 합니다. 1170년 8월, 보현원 여름날 오후, 송악산 남쪽 보현원(普賢院)입니다. 왕은 놀러 나왔고, 신하들은 왕을 둘러쌌으며, 기생들은 술잔을 돌렸습니다. 그리고 그 한복판에서 30대의 젊은 문신 한 명이 나이 60을 넘긴 대장군의 뺨을 때렸습니다. 대장군의 이름은 이소응(李紹膺)이었습니다. 문신의 이름은 한뢰(韓賴)였습니다. 이소응은 무관의 최고위직인 대장군이었고, 한뢰는 의종이 총애하던 측근이었습니다. 사서는 그 이전의 장면들도 기록해 두었습니다. 문신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이 무인 정중부의 수염을 촛불로 태운 일, 문신들이 무관들의 수염을 가위로 자르며 놀았던 일, 무신들이 궁문 밖에서 비를 맞으며 서 있는 동안 안에서는 왕과 문신이 시를 주고받던 무수한 오후들. 대장군의 뺨이 맞은 그날 저녁, 보현원의 문이 닫힌 뒤 그 자리의 문신 수십 명이 차례로 살해당했습니다. 이후 며칠간 개경에서도 같은 일이 반복되어 100명에서 300명 사이의 문신이 죽었다고 기록은 전합니다. 쿠데타. 고려 무신정변. 사실 관심 없던 역사지만 지금은 발굴해볼 가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입니다. 이 사건은 한 왕조의 운명을 100년이나 바꿔놓은 사건이었습니다. 쿠데타가 있었고, 정권이 강화도로 피신했고, 삼별초가 제주도에서 최후를 맞았습니다. 한국 사람이 무신정권에 대해 아는 것은 대체로 이 세 문장입니다. 그 사이의 100년은 뭉텅 비어 있습니다. 그 100년 안에 뭐가 있었냐고 물으면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이의방, 정중부, 경대승, 이의민, 최충헌, 최우, 최항, 최의, 김준, 임연, 임유무. 이 이름들의 연속이 고려를 100년간 끌고 갔습니다. 그리고 그 100년이 지금, 다른 지역에서 거의 같은 레퍼토리로 다시 쓰이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하기 전에, 우선 고려로 돌아갑시다. 1170년 8월의 그 보현원으로. 그리고 그때만 해도 개경 귀족들의 한적한 별장이 몇 채 들어선 한가한 섬, 그 이름이 훗날 "도망친 정권의 다른 이름"이 될 줄 누구도 몰랐던 섬, 강화도로. 1. 무시당한 공무원들의 반란 무신정변의 주역들을 혁명가로 기억하는 한국인은 많지 않습니다. 그들은 사실 혁명가가 아니었습니다. 무시당한 공무원들이었습니다. 이게 이 이야기의 첫 단추입니다. 의종은 영리한 왕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 인종이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을 수습하느라 피땀을 흘리는 모습을 지켜보며 자란 탓인지, 의종은 즉위 후 "지친 왕조를 달래야 한다"는 명분 아래 놀이와 연회에 매진했습니다. 경치 좋은 곳마다 이궁(離宮)을 짓고, 문신들을 데리고 시를 짓고 술을 마셨습니다. 그 과정에서 무관들은 어떻게 되었느냐. 경호원이었습니다. 기다리는 사람이었습니다. 왕과 문신이 안에서 시를 지으며 흥에 겨운 동안, 무관들은 궁문 밖에서 비를 맞고 있었습니다. 모욕의 일화는 여러 개 남아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김돈중이 정중부의 수염을 촛불로 태운 사건에서 정중부는 그 자리에서 분을 삼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문신 이복기가 연회장에서 술에 취해 무관들을 조롱한 기록도 있습니다. "자네들은 창 들고 서 있는 데만 쓸모 있지, 어디 시 한 수 읊을 줄 아나." 그리고 1170년 8월의 대장군 이소응 사건. 한뢰가 이소응의 뺨을 때린 것은 단순한 만취 실수가 아니라, 무관을 기생에게 주정 부리듯 다룰 수 있다는 일상화된 계급 감각의 표현이었습니다. 뺨을 때리고도 문제가 될 거라고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는 점이 오히려 충격적입니다. 한 가지 기억해 둘 것이 있습니다. 국방을 맡은 사람들을 모욕한 체제는 오래가지 못합니다. 이건 도덕의 문제가 아닙니다. 구조의 문제입니다. 국가가 무력을 독점하려면 무력을 행사하는 이들이 체제에 충성할 이유가 있어야 합니다. 명예가 보장되거나, 보상이 충분하거나, 이념이 강력하거나, 최소한 인간 대접을 받아야 합니다. 고려 중기 문신들은 이 네 가지를 동시에 박탈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얻은 것이 보현원의 그날 저녁이었습니다. 정변의 방아쇠는 정중부·이의방·이고(李高) 세 사람이 당겼습니다. 이들은 체제를 뒤엎으려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체제 안에서 자기 자리를 되찾으려 한 것뿐이었습니다. 왕을 바꾸려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의종은 즉각 폐위되고 명종으로 교체되지만, 이건 "새 왕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지금 왕이 반격할까 무서워서"였습니다). 토지 제도를 바꾸려 한 것도 아니었고, 신분제를 흔들려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문신이 무신을 깔보지 않는 정상적인 근무 환경을 원했을 뿐입니다. 문제는, 무시당한 공무원들이 총을 들고 본사로 쳐들어왔을 때 그들이 가져온 것은 요구서뿐이었다는 점입니다. 요구서 이상의 것을 들고 올 만한 비전도, 그럴 만한 준비도 없었습니다. 이것이 이후 26년간 무신정권이 극도로 불안정해지는 근본 이유가 됩니다. 혁명가는 체제를 만들 수 있지만, 무시당한 공무원은 그저 번갈아가며 윗자리를 차지하는 것 외에는 할 줄 아는 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2. 무신정권, 회전문 인사의 시작 1170년부터 1196년까지 26년. 이 짧지 않은 기간 동안 고려의 실권자가 네 번 바뀌었고, 네 명 중 세 명이 부하 혹은 동료의 칼에 죽었습니다. 이 회전문의 속도가 얼마나 빨랐는지 감이 잘 잡히지 않으실 것이기에, 계보를 머릿속에 그려보시라 권합니다. 이의방(1170~1174, 4년, 정중부 측에 의해 살해), 정중부(1174~1179, 5년, 경대승의 기습으로 살해), 경대승(1179~1183, 4년, 병사), 이의민(1184~1196, 13년, 최충헌 형제에게 살해). 통치가 짧고, 죽음이 모두 칼에서 오며, 아무도 자기 손자에게 자리를 물려주지 못하는 풍경입니다. 각각의 통치 방식이 조금씩 달랐습니다. 이 차이가 의미심장합니다. 이의방은 정변 초기의 에너지로 움직였습니다. 문신 체제의 회복을 말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왕을 모시고 나라를 운영한다"는 형식은 유지했습니다. 그는 정변의 공을 독점하려 욕심을 부리다가 경쟁자 이고를 제거했고, 자기 딸을 태자비로 만들며 외척화를 시도했습니다. 이것이 정중부의 반발을 샀습니다. 정변의 첫 번째 사생아가 두 번째 사생아에게 살해당한 셈입니다. 정중부는 이의방보다 노련했습니다. 그는 "원로 대우"라는 권위에 기대어 권력을 행사했습니다. 이건 나름 고등한 기술입니다. 정중부 자신이 가장 나이 많은 무신 중 하나였고 무신정변의 실질적 최고 선임이었기에, 아랫사람들이 예를 표하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였습니다. 그러나 정중부의 약점도 여기서 나왔습니다. 그의 권력은 세대 교체에 취약했습니다. 그의 아들 정균이 횡포를 부리기 시작하자 젊은 무신들이 "이 집안은 우리가 왜 예를 표해야 하는 집안인가" 되묻기 시작했습니다. 26살의 경대승이 몇 명의 장수들과 함께 밤중에 궁궐로 난입해 정균을 죽이고 이어 정중부까지 처형한 것이 1179년 9월입니다. 경대승은 흥미로운 인물입니다. 그는 권력을 잡은 뒤 도방(都房)이라는 사병 조직을 만들었습니다. 수백 명의 무사를 집에 두고 자기 경호를 맡겼고, 잠도 그들 한가운데서 잤다고 합니다. 왜 이런 조직이 필요했을까요. 경대승은 문신 쪽에 다소 우호적이었고 — 정확히 말하면 무신정변 자체를 "국가의 불행"으로 보는 입장이었고 — 그 때문에 다른 무신들로부터 "우리 편이 아닌데 우리 위에 올라갔다"는 적개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 적개심에 포위된 채 4년을 살았고, 서른 살 되던 해 병으로 죽었습니다. 사인은 공식적으로는 병이지만, 만성 스트레스에 무너진 전형적 패턴이 아닌가 싶습니다. 무관을 지배하지만 무관들의 신뢰는 받지 못하는, 권력의 가장 외로운 자리에서 젊은 장수가 체력을 다 태워 버린 것입니다. 경대승이 죽자 변방에 물러나 있던 이의민이 소환됩니다. 이의민은 경주 소금장수의 아들이었습니다. 신분 서사만 떼어놓고 보면 "흙수저 영웅담"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의민은 거의 순수한 폭력의 화신이었고, 돈에 대한 집착이 유별났으며, 자기 아들들에게 권력을 분산해 가문을 세우려 했습니다. 그의 13년 집권은 이 네 명 중 가장 이념이 빠진 기간입니다. 문신 체제 회복의 명분도, 원로 대우의 권위도, 경대승 같은 정치적 복잡함도 없었습니다. 그냥 폭력과 재산이었습니다. 이의민의 아들들이 동네 처녀를 겁탈하고 다니는 기록들이 잔잔하게 쌓여 갔고, 개경 사람들은 "언제 누가 이 집안을 끝낼 것인가"를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드러나는 것이 있습니다. 무력으로 선 정권은 시간이 지날수록 이념이 빠지고 조폭화됩니다. 이의방에게는 어쨌거나 정변의 열기가 있었고, 정중부에게는 원로라는 포지션이 있었고, 경대승에게는 이념적 고민이라도 있었습니다. 이의민에게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저 계속 갖고 있으려는 욕망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조폭화가 극단에 이르렀을 때, 더 냉혹하고 더 조직적인 누군가가 나타나 판을 정리합니다. 그게 최충헌이었습니다. 한 가지 꼭 짚어 두고 싶은 디테일이 있습니다. 이 26년간 왕은 계속 자리에 있었습니다. 이의방이 의종을 폐위하고 명종을 세운 뒤, 명종은 1170년부터 1197년까지 27년간 재위합니다. 무신정권은 왕을 없애지 않았습니다. 왕은 형식적 정통성의 원천으로 남겨 두었습니다. 이 점이 중요합니다. 왜 중요한지는 뒤에서 다시 다루겠습니다. 3. 최씨 왕조의 발명 — 두 개의 왕조가 공존하는 나라 1196년, 최충헌이 동생 최충수와 함께 이의민을 기습해 죽입니다. 이의민의 집 앞에서 말을 세우고 활 한 발로 마무리한 이 장면은 당시 개경 사람들에게 상당한 충격이었다고 합니다. 13년간 공고했던 권력이 한나절 만에 무너진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진짜 충격은 그 다음에 찾아왔습니다. 최충헌은 이의민을 대체하는 새 실권자가 된 것이 아니라, 아예 새로운 체제를 발명했습니다. 이 체제는 이후 최씨 가문 4대, 62년간(1196~1258) 지속됩니다. 한국사에서 왕실 외의 한 가문이 이처럼 오래 최고 권력을 세습한 사례는 없습니다(북한을 제외한다면..)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느냐. 세 가지 발명품 때문이었습니다. 첫째, 도방(都房)의 확장. 경대승이 만들었던 사병 조직을 최충헌은 수천 명 규모로 키웠습니다. 도방은 국가 군대가 아닙니다. 최씨 개인에게 충성하는 사설 경호·공격 부대입니다. 국가에 세금을 내는 것이 아니라 최씨에게 충성심을 내는 조직이고, 국가 재정에서 돈을 받는 것이 아니라 최씨 개인 재산에서 봉급을 받는 조직이었습니다. 현대어로 번역하자면, 공식 국가 군대와 별도로 존재하는 한 가문 소속의 사설 보안 회사이자 특수부대였습니다. 둘째, 교정도감(敎定都監)의 창설. 이 부분은 한국사 교과서가 덜 다루는 대목이라 조금 자세히 풀어 보겠습니다. 당시 고려에는 이미 중서문하성·상서성·추밀원 같은 중앙 국가 기구가 있었습니다. 최충헌은 이것들을 없애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대로 두었습니다. 다만 그 위에 자기 사무실을 하나 얹었습니다. 그게 교정도감입니다. 표면적으로는 반역 사건을 조사하는 임시 기구로 시작했지만, 곧 모든 국가 중대사의 실질적 결정 기관이 되었습니다. 왕이 내리는 교서도, 재상이 올리는 상소도, 최종적으로는 교정도감을 거쳐야 했습니다. 국가 기구는 의례를 담당하고, 교정도감은 권력을 담당하는 이중 구조였습니다. 이것이 병행 정부(parallel government)의 고려 버전입니다. 셋째, 문신의 관리화. 최충헌은 문신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등용했습니다. 능력 있는 문신은 여전히 과거를 보고, 중서문하성에서 일을 하고, 외교 문서를 썼습니다. 다만 그들은 정책의 방향을 결정하지 않았습니다. 방향은 교정도감에서 내려왔고, 그것을 문서로 빚어 실행하는 것이 문신의 역할이었습니다. 이건 하청 계약과 비슷합니다. 문신들은 먹고살 수는 있었습니다. 심지어 꽤 풍족하게 살 수도 있었습니다. 다만 실권은 없었습니다. 이 구조의 천재성은 반대파를 만들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죽이면 유족이 복수를 꿈꾸지만, 관리가 되면 월급을 받고 아이를 키웁니다. 이 세 가지 발명 — 사병, 병행 정부, 반대파의 관리직화 — 은 이후 800년간 수많은 권위주의 체제가 거의 그대로 반복해서 쓰게 되는 구조입니다. 한 체제의 기본 골격이 한반도 서북쪽 귀퉁이의 한 가문에 의해 12세기 말에 완성된 것입니다. 국가 기구는 남겨두고, 그 위에 당(黨)이나 위원회나 사령부를 얹고, 반대파를 죽이지 않고 녹봉을 주어 관리한다. 이것은 오늘날 전 세계의 수많은 하이브리드 권위주의 체제가 여전히 쓰고 있는 운영 매뉴얼입니다. 뒤에 가서 "이 구조가 꼭 고려의 특이한 이야기가 아니다"라는 느낌을 받으실 겁니다. 4. 청천벽력 최충헌은 1219년에 죽고, 그의 아들 최우가 뒤를 잇습니다. 최우는 아버지보다 더 세련된 통치자였습니다. 문인들을 자기 사랑방에 불러들여 시를 짓게 했고, 이규보 같은 대시인을 후원했습니다. 이 시기의 고려는 표면적으로는 꽤 안정되어 있었습니다. 최씨 가문의 지배는 공고했고, 개경의 귀족들은 일상을 살았으며, 변방은 잠잠했습니다. 그리고 1231년 8월, 하늘이 무너졌습니다. 이 표현은 과장이 아닙니다. 그해 8월, 드디어 몽골의 장군 살리타이(撒禮塔)가 압록강을 건너 고려로 들어옵니다. 이것이 몽골의 첫 번째 고려 침입이었습니다. 그런데 "몽골의 고려 침입"이라는 말로는 당시 사람들이 느낀 공포를 전달하기 어렵습니다. 당시 몽골은 이미 서하를 멸망시키고, 금나라를 반으로 갈라버렸으며, 중앙아시아의 호라즘 제국을 지도에서 지운 세계 최강의 군대였습니다. 그들은 바그다드를 점령할 준비를 하고 있었고, 헝가리 평원까지 진격중이었습니다. 13세기 중반 몽골군이 어떤 존재였는지 현대인에게 번역하자면, 가히 현대의 미군에 준하는 최강의 군대-당시 알려진 세계의 절반을 이미 무너뜨린 군대였습니다. 그 군대가 고려 북방에 나타난 것입니다. 고려군은 당연히 몇 달 버티지 못했습니다. 1231년 가을에는 이미 개경 북쪽 근처까지 몽골군이 내려왔습니다. 고려 조정은 일단 화의를 맺고 몽골군을 돌려보냈습니다. 다루가치(達魯花赤) — 몽골의 감독관 — 몇 명이 고려 전국에 배치되었습니다. 이때 최우가 생각에 잠깁니다. 그의 판단은 이러했습니다. 몽골과의 회전은 가망이 없다. 그러나 몽골은 수군이 없다. 이 판단이 한 왕조의 향방을 결정합니다. 1232년 음력 6월, 최우는 강화도 천도를 선언합니다. 결정과 실행 사이의 시차는 거의 없었습니다. 한 달 남짓 만에 왕·신하·궁녀·장인·승려·도서관까지 모두 개경에서 40리 떨어진 강화도로 옮겨집니다. 이동은 장마철 한복판에서 이루어졌고, 고려사는 수많은 사람이 비에 막혀 길에서 죽었다고 담담하게 기록합니다. 강을 건너다 물에 쓸려간 사람, 진창에 빠진 채 일어나지 못한 사람, 도중에 병이 도진 사람. 정권은 옮겨 갔지만, 그 정권을 옮기는 과정 자체가 이미 백성에게는 재난이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38년간, 이 "정권은 옮겨 가고 백성은 죽는다"는 패턴이 반복됩니다. 천도는 이 38년의 축약판이었습니다. 강화도에 대해 한 가지만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개경에서 강화까지의 직선 거리는 40리입니다. 말로 반나절이면 닿습니다. 지금도 맑은 날 강화 평화전망대에서 북동쪽을 바라보면 과거의 개경, 개성공단이 보입니다. 그런데도 몽골은 강화도를 끝내 공격하지 못했습니다. 이유는 거리가 아니었습니다. 강화와 김포 사이를 흐르는 강화해협, 일명 염하(鹽河) 때문이었습니다. 가장 좁은 곳의 폭이 200~300m에 불과한 이 물길은, 딱 한 가지 결정적 특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밀물과 썰물의 차이가 커서 유속이 매우 빠르고(밀물 때 초당 ...

[시리즈연재]중동의 스파르타, 이스라엘 이야기

1. 작은 나라, 큰 주먹 요즘 이스라엘의 국제적 이미지는 솔직히 바닥입니다. 가자지구에서 벌어지는 참상이 매일 뉴스에 올라오고, 유엔 총회에서는 규탄 결의안이 쏟아지며, 잘 알려져있지 않지만 미국의 대학 캠퍼스에서는 친팔레스타인 시위가 끊이질 않습니다. 인구 1,000만도 안 되는 나라가 어떻게 이토록 세계의 분노를 한 몸에 받을 수 있는 것인지, 그 자체가 하나의 수수께끼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더 근본적인 수수께끼가 숨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면적은 충청남도 수준이고, 인구는 주변 아랍 국가들의 몇십 분의 1에 불과합니다. 이란 9,000만, 이집트 1.1억, 터키 8,500만 — 이스라엘을 둘러싼 이슬람권 인구를 합치면 3억을 가뿐히 넘깁니다. 그런데 이 작은 나라가 건국 이후 78년간 주변의 훨씬 덩치 큰 국가들을 사실상 일방적으로 두들기고 다녔습니다. 단순히 이겼다는 수준이 아닙니다. 상대 영토를 점령하고, 핵시설을 폭격하고, 4,000킬로미터 떨어진 아프리카 내륙에까지 특수부대를 보내 인질을 구출하는 수준입니다. 많은 분들이 이 현상을 한 단어로 설명합니다. "미국." 미국이 뒤를 봐주니까 강한 거 아니냐는 겁니다. 물론 미국의 역할은 큽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수십 년간 미국의 핵심 동맹으로서 천문학적 규모의 무기를 사들였지만, 예멘의 후티 반군 하나를 수년간 제압하지 못해 오히려 홍해 주도권을 반군에게 빼앗겨버렸습니다. 남베트남은 미국이 50만 대군을 직접 파병하고도 무너졌습니다. 돈과 무기만으로 강한 군대가 만들어진다면, 세계에서 가장 강한 군대는 석유 왕국들이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강한 이유는 다른 데 있습니다. 이 나라는 건국 이래 체계적으로 — 때로는 시행착오를 겪으며, 때로는 치명적 실패로부터 교훈을 얻으며 — '강소국이 되기 위한 시스템'을 구축해왔습니다. 그리고 그 시스템의 청사진은, 놀랍게도 2,400년 전 고대 그리스의 한 도시국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하기 전에, 먼저 이스라엘이 처한 상황이 얼마나 절망적이었는지부터 살펴보겠습니다. 2. 지도 위의 불가능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의 성립 자체가 어쩌면 지정학에 대한 모욕일 수도 있습니다. 지도를 펼쳐보겠습니다. 동쪽으로 요르단, 북쪽으로 레바논과 시리아, 남서쪽으로 이집트. 이스라엘의 가장 좁은 지점은 폭 15킬로미터 — 서울 강남에서 강북까지의 거리입니다. 전략적 종심이라는 개념이 성립하지 않는 나라입니다. 한국이 북한과의 대치에서 전략적으로 끊임없이 지적당하는 부분은, 수도이자 경제 중심지 서울이 너무 국경에 가까워 종심이 얕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한민국이 북쪽이라는 단일 방향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다면, 이스라엘은 삼면이 적입니다. 유일하게 열려 있는 방향은 서쪽의 지중해뿐인데, 거기는 바다입니다. 도망칠 곳이 없는 나라입니다. 1948년 5월, 인구 약 60만의 유대인들이 건국을 선포하자, 다섯 아랍 국가가 동시에 침공했습니다. 배후 인구 수천만. 서울의 한 자치구가 대한민국 전체를 상대로 독립을 선언한 것에 비견할 만한 비대칭이었습니다. 적대의 성격도 범상치 않았습니다. 팔레스타인에 이스라엘이 뿌리내리자, 1964년에는 PLO(팔레스타인해방기구)가 결성되었습니다. PLO는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의 민족자결권을 내건 정치·군사 조직으로 이 조직의 헌장이 명시한 목표는 영토 협상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파괴'였습니다. 아랍 국가 대부분이 지도 위에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올리는 것조차 거부했습니다. 상황이 나아진 지금조차도 이스라엘과 수교한 아랍국가는 거의 없습니다. 여기에 종교적 차원이 겹칩니다. 예루살렘은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 세 종교의 성지가 중첩된 세계 유일의 도시입니다. 유대인에게 예루살렘은 솔로몬 성전이 있던 곳이고, 기독교인에게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곳이며, 무슬림에게는 무함마드가 승천한 곳입니다. 보통의 국경 분쟁은 몇 킬로미터의 양보로 풀 수 있지만, '신이 약속한 땅'을 둘러싼 분쟁에서 타협이란 신학적 배반에 가깝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뿐 아니라 아랍 세계에도 마찬가지여서, 양측 모두에게 이 분쟁은 처음부터 제로섬이었습니다. 정상적인 지정학적 논리라면, 이 나라는 생존에 매달리거나 외교적 타협에 목숨을 걸었어야 합니다. 실제로 1948년 건국 이후 수십 년간, 이스라엘을 공식 인정하는 아랍 국가는 단 하나도 없었습니다. 유엔에서 이스라엘은 만년 소수파였고, 아시아·아프리카 비동맹 국가들 대부분이 아랍 편에 섰습니다. 외교적으로 완전한 고립. 그런데 이스라엘은 정반대의 길을 택했습니다. 3. 호전광(?) 이스라엘의 현대사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밥 먹듯이 전쟁을 했습니다. 건국 78년간 주요 전쟁과 군사작전의 목록은 숨이 막힙니다. 1948년 독립전쟁, 1956년 수에즈 전쟁, 1967년 6일 전쟁, 1968~70년 소모전쟁, 1973년 욤키푸르 전쟁, 1976년 엔테베 작전, 1978년 레바논 침공, 1982년 레바논 재침공 , 1981년 이라크 핵시설 폭격, 2006년 제2차 레바논 전쟁, 2007년 시리아 핵시설 폭격, 2008·2012·2014·2021년 가자 작전, 그리고 2023년~현재 가자 전쟁 2026년 이란과 전쟁... 대규모 전쟁만 8회, 크고 작은 작전까지 합치면 연평균 1건 이상입니다. 과장을 좀 보태면 이스라엘의 국외 출병 빈도는 1,500년 전 고구려의 해외 원정과 비슷한 수준으로, 현대 국가로서는 유례가 없을 정도로 호전적인, 그야말로 전쟁이 일상인 나라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대부분의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이겼다는 사실입니다. 그것도 일방적으로. 시작부터 그랬습니다. 1948년 독립전쟁 당시 이스라엘은 정규군이라 부를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영국 위임통치 시절 비밀리에 조직된 민병대 하가나가 군대의 모태였고, 무기는 세계 각지에서 밀수해온 잡다한 소총과 중고 전투기 몇 대가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이 오합지졸이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 이라크, 레바논 다섯 나라의 정규군을 상대로 이겼고, UN이 배정한 영토보다 50% 더 넓은 땅을 확보한 채 전쟁을 끝냈습니다. 이때 이스라엘이 깨달은 것은, 싸울 수밖에 없다면 누구보다 잘 싸워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1967년 6일 전쟁은 그 교훈이 시스템으로 성숙한 결과물입니다. 이집트의 나세르 대통령이 시나이 반도에 10만 대군을 집결시키고 티란 해협을 봉쇄하자, 이스라엘은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6월 5일 새벽, 이스라엘 공군 전투기들이 초저공으로 지중해 상공을 비행해 이집트 공군기지 위에 나타났습니다. 이집트 조종사들이 아침 식사를 하고 있던 시각이었습니다. 3시간 만에 이집트 공군기의 대부분이 활주로 위에서 파괴되었고, 뒤이어 시리아와 요르단 공군도 같은 운명을 맞았습니다. 제공권을 장악한 이스라엘 지상군은 시나이 반도, 가자지구, 서안지구, 동예루살렘, 골란고원을 6일 만에 모두 장악했습니다. 이스라엘 사상자 약 700명 대 아랍 측 약 2만 명. 한 번의 전쟁으로 국토를 세 배 이상 넓힌 것입니다. 1973년 욤키푸르 전쟁은 더 극적입니다. 유대교 최대 명절인 욤키푸르 당일, 이집트와 시리아가 동시에 기습했습니다. 이날은 이스라엘 전역이 멈추는 날이었습니다. 라디오 방송도, TV도 꺼지고, 거리에 차도 다니지 않는 날. 이집트군은 수에즈 운하를 도하해 이스라엘이 난공불락이라 자부하던 바레브 라인을 돌파했고, 골란고원에서는 시리아 전차 1,400대가 이스라엘 전차 177대를 향해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초기 48시간은 이스라엘 건국 이래 가장 위험한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예비군이 동원되면서 전세가 역전되었고, 이스라엘은 오히려 수에즈 운하를 역도하해 이집트군 제3군을 포위하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기습을 당하고도 역전승. 다만 이 전쟁은 이스라엘에게도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사상자가 2,600명을 넘었고, '무적 이스라엘'이라는 신화에 금이 갔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 충격이 이후 이스라엘 군사 독트린의 대대적 개혁을 이끌었습니다. 다시는 기습당하지 않겠다는 집념이 정보 역량의 비약적 강화로 이어졌고, 예비군 동원 체계의 속도가 수일에서 수시간으로 단축되었습니다. 실패에서 배우는 능력 — 이것이 어쩌면 이스라엘의 가장 무서운 역량일 수 있습니다. 1976년 엔테베 작전은 이스라엘이 얼마나 공세적인 나라인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팔레스타인 무장단체가 에어프랑스 여객기를 납치해 아프리카 우간다의 엔테베 공항에 착륙시켰을 때, 대부분의 나라였다면 협상 테이블에 앉았을 것입니다. 테러범과의 협상 말이죠. 하지만 이스라엘은 달랐습니다. 4,000킬로미터 — 서울에서 인도네시아까지의 거리 — 를 C-130 수송기 4대로 야간 비행해, 적국 한복판의 공항에서 인질 102명을 구출하고 돌아왔습니다. 작전 시간 53분. 이스라엘 측 전사자는 지휘관 요나탄 네타냐후 중령 한 명이었습니다. 네타냐후. 맞습니다. 그의 동생이 지금의 총리가 되는 그 유명한 베냐민 네타냐후입니다. 1981년에는 프랑스가 이라크에 독단적으로 기술을 전수해 원자로를 건설하려 하자, 건설 중이던 오시라크 핵 원자로를 F-16 편대가 폭격해 파괴해버렸습니다. 2007년에는 시리아가 북한의 기술 지원으로 건설하던 알키바르 핵시설을 역시 공습으로 날려버렸는데, 이 사실을 10년 넘게 비밀에 부쳤습니다. 적의 전략적 역량이 완성되기 전에 먼저 ...

[시리즈연재]한국인이 꼭 알아야 할 대만 이야기 (중국아님)

한국이 대만을 읽는 방식, 그리고 진짜 대만 한국에서 대만 정치를 읽는 프레임은 놀라울 정도로 단순합니다. 민진당은 반중·독립, 국민당은 친중·통일, 그 사이에 민중당이라는 제3세력이 있다 — 이 정도가 보통의 이해이고, 뉴스에서 접하는 대만 관련 보도도 대부분 이 틀 안에서 움직입니다. 미·중 경쟁이라는 거시적 프레임 안에서 대만은 "미국 편이냐 중국 편이냐"로 환원되고, 대만 내부의 선거도 "반중 세력이 이겼다" 혹은 "친중 세력이 약진했다"는 식으로 보도됩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실제로 대만 젊은 층일수록 대만이 중국과는 별개의 국가라는 인식이 강하고, 양안 관계가 대만 정치에서 가장 큰 축인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프레임만으로는 지금 대만에서 벌어지고 있는 극적인 정치적 분열을 도저히 설명할 수 없습니다. GDP 성장률 8.68%라는 전례 없는 경제 성과를 이끌어낸 현 집권 민진당이, 왜 2026년 지방선거에서 참패가 예정일까요? 반중 정당인 민진당과 역시 반중 성향인 민중당이, 왜 같은 편이 아니라 적일까요? 친중 성향의 국민당과 반중 성향의 민중당이, 왜 후보 단일화까지 합의하며 손을 잡았을까요?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은 양안 프레임 안에 없습니다. "친중이냐 반중이냐"라는 축은 대만 정치의 표면(surface)이지 심층(depth)이 아닙니다. 본질은 다른 곳에 있습니다. TSMC라는 "호국신산(護國神山)"이 만들어낸 전례 없는 경제적 양극화, 그리고 그 양극화가 낳은 사회적·정치적 분열이 진짜 이야기입니다. 대만의 정치 시계를 돌리는 것은 중국이 아니라, TSMC의 이익이 2,300만 대만인 중 극소수에게만 집중되는 구조입니다. 이 구조를 이해하지 않으면 대만 정치의 현재도, 미래도 제대로 읽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가 한국에게도 철저하게 남의 일이 아닌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글의 끝에서 다루겠습니다. 무역흑자가 GDP의 30%인 나라 대만의 2025년 경제 성적표부터 펼쳐봅니다. GDP 성장률 8.68%, 연간 무역흑자 1,501억 달러. 이 흑자가 어느 정도 규모인지 감을 잡기 위해 비교하자면, 대만의 연간 GDP가 대략 8,000억 달러이니 나라 전체가 1년 동안 벌어들인 부가가치의 약 5분의 1을 순수하게 남긴 셈입니다. 한국의 2025년 무역흑자 780억 달러와 비교하면 거의 두 배에 가깝고, GDP 대비 비율로 따지면 한국(약 4.5%)의 네 배가 넘습니다. 물론 같은 동포(?)인 중국의 1조 달러 무역흑자에 비하면 작아보일 수 있으나 이는 사실 말도 안되는 수치입니다. 월간으로 보면 더 기괴한 숫자가 나타납니다. 2025년 10월 한 달 무역흑자가 226억 달러를 기록했는데, 이것을 연율로 환산하면 GDP의 31%에 달합니다. 한 나라가 만들어내는 부가가치의 거의 3분의 1이 순수출로 빠져나간다는 것인데, 이것은 정상적인 경제 구조에서는 좀처럼 나오기 어려운 숫자입니다. 석유를 수출하는 걸프 국가들이나 극도로 작은 도시국가를 제외하면, 제조업 기반 경제에서 이 정도의 무역흑자 비율은 거의 전례가 없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기형적입니다. 이 기적의 중심에는 당연히 TSMC가 있습니다. 대만 주식시장의 유일한 주가지수인 가권지수에서 이 한 종목이 차지하는 비중이 30~40%입니다. 한국으로 치면 삼성전자, SK하이닉스, 현대차, POSCO, LG를 전부 합쳐서 한 회사로 만든 것과 비슷한 무게감이라고 상상하시면 됩니다. 세계 파운드리 시장 점유율 60%, 전 세계 첨단 공정 반도체의 90% 이상을 생산합니다. 대만의 반도체와 서버 수출은 지난 5년간 300% 폭등했고, 2025년에는 주요 수출품인 반도체가 전년 대비 89.5% 급증, 대미 수출은 78% 늘어 1,982억 달러에 달했습니다. PPP(구매력평가) 기준 1인당 소득은 호주, 독일, 일본을 넘어섰고, 이코노미스트지는 대만을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 중 하나"로 묘사합니다. 숫자만 보면 대만은 지구상에서 가장 성공적인 경제입니다. TSMC는 대만에서 "호국신산(護國神山)"이라 불립니다. 나라를 지키는 신성한 산이라는 뜻입니다. TSMC가 있기에 미국이 대만을 전략적 자산으로 여기고 지켜주며, TSMC가 있기에 중국이 대만을 함부로 침공하지 못한다는 논리입니다. 이 별명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민진당 정부의 핵심 정치 서사이기도 합니다. "TSMC를 키운 대만의 기술 생태계가 곧 안보 자산이며, 이를 지키기 위해 반중 노선을 유지해야 한다" — 이것이 민진당의 대중국 강경 노선을 뒷받침하는 경제적 논거입니다. 그런데 이 화려한 숫자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완전히 다른 나라가 나타납니다. 3%의 기적, 97%의 현실: 반도체가 구조적으로 사람을 고용하지 않는 이유 여기서부터가 핵심입니다. TSMC가 만들어낸 기적이 왜 대만 국민 대다수의 삶으로 전환되지 않는가, 그 구조적 원인을 짚어봅니다. 먼저 반도체라는 산업의 본질적 특성을 이해해야 합니다. 반도체는 자동차나 서비스업과 근본적으로 다른 산업입니다. 자동차 한 대를 만들려면 수만 개의 부품이 필요하고, 그 부품을 만드는 수백 개의 협력사가 있으며, 공장 노동자부터 물류, 딜러, 정비소까지 방대한 고용 체인이 작동합니다. 현대차가 자동차 한 대를 더 팔 때마다 그 돈은 수많은 경제 주체를 거쳐 사회 곳곳에 퍼져나갑니다. 서비스업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식당, 호텔, 병원, 교육 — 서비스업은 본질적으로 사람의 노동이 투입되는 산업이기 때문에 매출이 느는 만큼 고용이 따라옵니다. 반도체는 다릅니다. 극소수의 고급 엔지니어가 수십억 달러짜리 ASML 노광장비와 최첨단 클린룸을 운영하는, 극도로 자본집약적인 산업입니다. TSMC가 팹 하나를 짓는 데 투입하는 금액은 200억 달러 이상인 반면, 그 팹에서 일하는 사람은 수천 명에 불과합니다. 같은 200억 달러를 자동차 공장에 투자했다면 수만 명의 직접 고용과 수십만 명의 간접 고용이 생겼을 것입니다. 반도체는 그 구조가 아닙니다. 매출 대비 고용 창출 효과가 전 산업 중 최하위 수준에 속합니다. 숫자로 확인해봅니다. TSMC의 전 세계 직원 수는 2024년 말 기준 83,825명이고, 이 중 약 87%인 약 73,000명이 대만에서 근무합니다. 대만의 전체 취업자 수는 약 1,163만 명입니다. 계산하면 TSMC는 대만 전체 노동력의 0.6%를 고용하고 있습니다. 시가총액의 30~40%를 차지하면서 일자리는 0.6%만 만드는 구조입니다. 반도체 산업 전체로 확대해도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습니다. 대만 반도체 제조업 전체 종사자는 2024년 기준 약 14만3,000명으로 추정됩니다. 설계, 패키징, 테스트까지 포함한 반도체 산업 전체로는 약 32만 명 수준입니다. 대만 전체 취업자 1,163만 명의 2.7%에 불과합니다. 이 2.7%의 인력이 대만 GDP의 약 20%를 만들어내고, 수출의 절대적 비중을 차지하며, 주식시장 시총의 30~40%를 차지합니다. 이것이 무역흑자가 GDP의 30%에 달하는 "말도 안 되는" 성과를 냈음에도 정작 국민 대다수가 저임금에 시달리는 구조의 본질입니다. 흑자를 만들어내는 산업이 애초에 사람을 거의 고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역흑자가 GDP의 5%였다면 "수출이 좀 잘 되네" 수준이겠지만, 30%에 달하는데도 내수가 안 살아나는 것은 그 흑자를 만든 산업의 고용 구조가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같은 GDP 기여를 자동차 산업이 했다면 수십만 명의 추가 고용이 생겼을 것이고, 그 수십만 명의 월급이 동네 식당과 편의점과 학원으로 흘러갔을 것입니다. 서비스업이 했다면 수백만 명이 그 성장에 직접 참여했을 것입니다. 반도체가 만든 GDP 8% 성장은 2.7%의 종사자와 주주에게 집중되고, 나머지 97.3%의 대만인은 그 숫자와 무관한 경제 현실을 살고 있습니다. 나머지 97%의 삶: 초임 149만 원, 그리고 세계 최저 출산율이라는 응징 그렇다면 97%의 대만인은 실제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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