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연재]진짜 '국가'는 다르다. 현대 중동 2부





중동 지도를 펼쳐 놓고 친구끼리만 얘기한다고 치고 솔직히 얘기해 보겠습니다. 이 안에 '진짜 국가'가 몇이나 되는지를 세어 보죠. 여기서 진짜 국가란 거창한 뜻이 아닙니다. 국민이 스스로를 하나의 운명 공동체로 여기고, 정권이 바뀌어도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알맹이를 품은 나라 ― 우리가 대한민국이나 일본을 떠올릴 때 자연스레 그리는 바로 그 그림입니다. 그 잣대를 들이대면, 수천 년 문명의 요람이라는 메소포타미아의 이 땅의 풍경은 뜻밖에 휑합니다.
1부에서 보았듯, 이 지역의 상당수는 자로 그은 국경선 안에 부족과 종파가 영문도 모른 채 뒤섞인 인공 구조물입니다. 시리아와 이라크가 그렇습니다. 또 어떤 나라들은 한 가문이 정복한 땅에 제 성(姓)을 새겨 넣은 거대한 부족 영지에 가깝습니다. 걸프의 산유 왕국들이 그렇습니다. 국경도, 국민도, 정통성도 어느 하나 '스스로 자라난' 것이 없는 땅. 그 휑한 풍경 속에서, 근대적 의미의 단단한 국가라 부를 만한 예외는 놀랍도록 드뭅니다. 손에 꼽아 보면 셋 정도입니다. 이란, 이스라엘, 그리고 오스만의 후손인 터키.
그리고 여기서 첫 번째 의문이 고개를 듭니다. 이 셋 가운데 누구도, 석유로 흥청대는 걸프의 부자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이란은 수십 년 제재로 가난에 절었고, 이스라엘은 석유 한 방울 나지 않으며(최근에 가스는 남), 터키 역시 변변한 자원이 없습니다. 가장 부유한 자들에게는 국가의 알맹이가 없고, 알맹이를 가진 자들은 가난합니다. 이 뒤집힌 그림이 단순한 우연이 아님을, 2026년 봄의 한 장면이 잔인할 만큼 선명하게 보여주었습니다.
올해 2월 말, 미국과 이스라엘의 기습 공습으로 이란은 최고지도자마저 잃습니다. 상식대로라면 그것으로 끝났어야 할 싸움이었습니다. 제재로 수십 년을 시달린 가난한 나라가, 세계 최강 미국과 중동 최강 이스라엘을 동시에 상대하는 형국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이란은 무너지기는커녕 호르무즈 해협을 틀어막아 세계 에너지 시장을 통째로 인질로 잡았고, 끝내 미국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냈습니다. 같은 시각, 두바이의 초고층 빌딩과 아부다비의 국부펀드와 리야드의 새 금융특구를 거느린, 1인당 소득이 이란의 수십 배에 이르는 걸프의 부자들은 무엇을 했을까요. 그들은 통일된 입장 하나 내놓지 못한 채, 제 영공과 유전이 위협받는 동안 사실상 구경꾼으로 서 있었습니다. UAE는 오히려 OPEC을 떠나버렸습니다. 돈으로 따지면 압도적인 부자가, 힘으로 따지면 가난한 이웃에게 끌려다니는 풍경입니다.
그렇습니다. 중동에서 진짜 힘은 석유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국가 역량(state capacity)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가장 역설적인 대목은, 그 역량이 오히려 쉬운 돈(Easy money)이 없을 때 단련된다는 것입니다. 1부의 이야기가 "민족주의로 망한 제국과 그 뒷 이야기"였다면, 2부는 "석유가 국가를 죽인, 혹은 그 부재가 국가를 살린 이야기"입니다.


600년을 이어 온 제국이 1부의 마지막에서 멸망했습니다. 그 거대한 무덤 위에, 한 세대 만에 인류가 일찍이 본 적 없는 화려한 꽃들이 피어올랐습니다. 사막 위에 솟은 마천루의 도시들, 걸프의 석유 왕국들입니다. 그러나 이 꽃들에게는 한 가지 비밀이 있습니다. 눈부시게 화려하되, 뿌리가 얕다는 것입니다. 이 장은 그 꽃들이 어떻게 피어났는지, 그리고 왜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했는지를 따라가는 이야기입니다.
본격적인 이야기에 앞서, 국체(國體)라는 단어를 미리 정리하고 가겠습니다. 본래 묵직한 학술 용어입니다만, 이 글에서는 단순하게 쓰겠습니다. 돈으로는 살 수 없고 오직 시간과 시련으로만 빚어지는 것, 그 나라를 바로 그 나라이게 만드는 정체성과 응집력의 알맹이 ― 그것을 국체라 부르겠습니다. 1부에서 제국의 운명을 가른 열쇠가 '민족'이었다면, 2부에서 국가의 운명을 가르는 열쇠는 바로 이 국체입니다. 누구에게는 있고 누구에게는 없는 이 알맹이가, 앞으로 펼쳐질 모든 대비의 기준선이 됩니다.

그렇다면 걸프의 꽃들은 어떻게 피어났을까요. 가장 큰 꽃부터 보겠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입니다. 그 뿌리는 18세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아라비아 내륙의 사우드 가문이, 와하브파라 불리는 지극히 엄격한 이슬람 개혁 운동과 손을 잡습니다. 한쪽은 칼을, 다른 한쪽은 코란을 든 이슬람 동맹이었습니다. 이 칼과 경전의 결합은 수백 년에 걸쳐 부침을 겪다가, 20세기 초 이븐 사우드라는 걸출한 인물에 이르러 결실을 맺습니다. 그는 아라비아 내륙을 무력으로 통일했고, 1925년에는 영국이 후원하던 하심 가문으로부터 메카와 메디나가 있는 헤자즈 지방까지 빼앗았습니다. 공교롭게도 이 헤자즈야말로 오스만 제국의 옛 영토였으니, '오스만의 무덤 위에 핀 꽃'이라는 비유는 사우디에 이르러 글자 그대로 들어맞습니다. 그리고 1932년, 그는 자신이 정복한 이 광대한 땅에 하나의 이름을 붙입니다. '사우디아라비아', 풀어 쓰면 '사우드 가문의 아라비아'입니다.
이 작명에 모든 것이 담겨 있습니다. 국민이 모여 국가를 세운 것이 아닙니다. 한 가문이 정복으로 영토를 차지한 뒤, 거기에 자기 성을 새겨 넣은 것입니다. 나라 이름 자체가 소유주의 문패였던 셈입니다. 걸프 연안에 점점이 박힌 더 작은 꽃들도 사정은 비슷했습니다. 쿠웨이트와 바레인과 카타르, 그리고 훗날 아랍에미리트, 즉 연합 아랍 토후국들로 묶이게 될 '휴전 해안(Trucial States)'의 군소 부족(토후국) 군주들은, 19세기에 영국과 보호조약을 맺음으로써 살아남았습니다. 영국이 이 작은 토후들을 거둔 것은 물론 호의가 아니었습니다. 인도로 가는 길목인 이 바다에서 해적을 단속하고, 다루기 쉬운 약소 군주를 통해 연안을 값싸게 '관리'하는 편이 이로웠기 때문입니다. 1부에서 우리는 유럽 열강이 무함마드 알리의 진격을 가로막으며 오스만이라는 환자를 환자인 채로 침대에 눕혀 두려 했던 장면을 보았습니다. 걸프에서는 바로 그 논리가 '부족을 부족인 채 보호국으로 살려 두는' 방식으로 작동했습니다.
여기서 이 장의 결론이 드러납니다. 걸프의 꽃들은 처음부터 '국민국가'가 아니라 '부족정 국가'로 피어났습니다. 통치의 정통성은 헌법이나 국민의 동의가 아니라 가문의 혈통과 부족 간 연합에서 나왔고, 국경은 부족의 자연스러운 경계가 아니라 석유 이권과 영국의 편의에 따라 그어졌습니다. 국민이 군주에게 "당신은 왜 우리를 다스리는가"라고 물어 본 적이 없으니, 군주도 그 물음에 답을 준비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바로 이 갓 피어난 꽃의 발밑에서, 20세기 들어 검은 황금이 납니다. 석유입니다. 그런데 이 석유는 꽃에게 뿌리를 내려 주기는커녕, 정반대의 일을 했습니다. 뿌리가 없어도 시들지 않게 해 주는 기묘한 양분이 된 것입니다.
어째서 걸프의 부족정 국가들은 그 막대한 부에도 불구하고 끝내 진짜 국가로 자라지 못했는가. 그 메커니즘을 이해하면 중동 권력 지도의 절반이 풀립니다.
이 현상에는 이름이 있습니다. 지대추구국가(rentier state) 이론입니다. 여기서 '지대'란 땅을 빌려주고 받는 임대료를 떠올리시면 됩니다. 일하지 않고, 무언가를 생산하지 않고, 그저 무언가를 '소유했다'는 이유만으로 굴러 들어오는 소득입니다. 석유야말로 전형적인 지대입니다. 땅속에 묻혀 있던 것을 퍼 올려 팔기만 하면 돈이 들어오니까요. 흥미로운 사실 하나를 곁들이자면, 이 이론을 1970년 처음 체계적으로 제시한 사람은 호세인 마흐다비라는 경제학자였는데, 그가 분석 모델로 삼은 나라가 다름 아닌 '혁명 전의 이란'이었습니다. 이란을 설명하려고 태어난 이론을, 훗날 바로 그 이란이 가장 멋지게 배반하게 된다는 사실은 참 재밌습니다.
지대추구국가의 핵심은 사회계약이 통째로 뒤집힌다는 데 있습니다. 근대 국가가 어떻게 탄생했는지를 떠올려 보십시오. 왕은 전쟁을...

시리즈 정주행중임니다 잘읽겠습니다

국체를 중심으로 한 국가들에 이끌려다니는 산유국들이 아이러니하면서도 부족정 국가라는 역사를 들여다보니 한편으로 이해도 되네요.

정말 재밌네요, 잘 읽었습니다!

즐겁게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매번 잘 읽고 있습니다 :) 감사합니다.

우리 나라도 부족한 자원으로 인해 교육과 인재에 투자릉 햇고, 첨단 산업을 발전 시키며 국체를 이룬 국가 중 하나 인 것 같습니다.

2부도 정말 인상깊게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돈으로 무언가를 지킬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하려면 돈 말고도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국가와 비슷하지만 또 다른 의미인 국체가 무엇인지 생각해보면 기회가 되었습니다. 갑사합니다.

너무 재밌습니다!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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