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엔 분량이 조금 깁니다. 제가 현재 이란을 보는 시각을 정리해보고 중동 관련 내용을 일단락 지으려고 합니다.
1170년 8월, 보현원
여름날 오후, 송악산 남쪽 보현원(普賢院)입니다. 왕은 놀러 나왔고, 신하들은 왕을 둘러쌌으며, 기생들은 술잔을 돌렸습니다. 그리고 그 한복판에서 30대의 젊은 문신 한 명이 나이 60을 넘긴 대장군의 뺨을 때렸습니다.
대장군의 이름은 이소응(李紹膺)이었습니다. 문신의 이름은 한뢰(韓賴)였습니다. 이소응은 무관의 최고위직인 대장군이었고, 한뢰는 의종이 총애하던 측근이었습니다. 사서는 그 이전의 장면들도 기록해 두었습니다. 문신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이 무인 정중부의 수염을 촛불로 태운 일, 문신들이 무관들의 수염을 가위로 자르며 놀았던 일, 무신들이 궁문 밖에서 비를 맞으며 서 있는 동안 안에서는 왕과 문신이 시를 주고받던 무수한 오후들. 대장군의 뺨이 맞은 그날 저녁, 보현원의 문이 닫힌 뒤 그 자리의 문신 수십 명이 차례로 살해당했습니다. 이후 며칠간 개경에서도 같은 일이 반복되어 100명에서 300명 사이의 문신이 죽었다고 기록은 전합니다. 쿠데타. 고려 무신정변. 사실 관심 없던 역사지만 지금은 발굴해볼 가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입니다. 이 사건은 한 왕조의 운명을 100년이나 바꿔놓은 사건이었습니다. 쿠데타가 있었고, 정권이 강화도로 피신했고, 삼별초가 제주도에서 최후를 맞았습니다. 한국 사람이 무신정권에 대해 아는 것은 대체로 이 세 문장입니다. 그 사이의 100년은 뭉텅 비어 있습니다. 그 100년 안에 뭐가 있었냐고 물으면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이의방, 정중부, 경대승, 이의민, 최충헌, 최우, 최항, 최의, 김준, 임연, 임유무. 이 이름들의 연속이 고려를 100년간 끌고 갔습니다. 그리고 그 100년이 지금, 다른 지역에서 거의 같은 레퍼토리로 다시 쓰이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하기 전에, 우선 고려로 돌아갑시다. 1170년 8월의 그 보현원으로. 그리고 그때만 해도 개경 귀족들의 한적한 별장이 몇 채 들어선 한가한 섬, 그 이름이 훗날 "도망친 정권의 다른 이름"이 될 줄 누구도 몰랐던 섬, 강화도로.

1. 무시당한 공무원들의 반란
무신정변의 주역들을 혁명가로 기억하는 한국인은 많지 않습니다. 그들은 사실 혁명가가 아니었습니다. 무시당한 공무원들이었습니다. 이게 이 이야기의 첫 단추입니다.
의종은 영리한 왕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 인종이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을 수습하느라 피땀을 흘리는 모습을 지켜보며 자란 탓인지, 의종은 즉위 후 "지친 왕조를 달래야 한다"는 명분 아래 놀이와 연회에 매진했습니다. 경치 좋은 곳마다 이궁(離宮)을 짓고, 문신들을 데리고 시를 짓고 술을 마셨습니다. 그 과정에서 무관들은 어떻게 되었느냐. 경호원이었습니다. 기다리는 사람이었습니다. 왕과 문신이 안에서 시를 지으며 흥에 겨운 동안, 무관들은 궁문 밖에서 비를 맞고 있었습니다.
모욕의 일화는 여러 개 남아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김돈중이 정중부의 수염을 촛불로 태운 사건에서 정중부는 그 자리에서 분을 삼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문신 이복기가 연회장에서 술에 취해 무관들을 조롱한 기록도 있습니다. "자네들은 창 들고 서 있는 데만 쓸모 있지, 어디 시 한 수 읊을 줄 아나." 그리고 1170년 8월의 대장군 이소응 사건. 한뢰가 이소응의 뺨을 때린 것은 단순한 만취 실수가 아니라, 무관을 기생에게 주정 부리듯 다룰 수 있다는 일상화된 계급 감각의 표현이었습니다. 뺨을 때리고도 문제가 될 거라고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는 점이 오히려 충격적입니다.
한 가지 기억해 둘 것이 있습니다. 국방을 맡은 사람들을 모욕한 체제는 오래가지 못합니다. 이건 도덕의 문제가 아닙니다. 구조의 문제입니다. 국가가 무력을 독점하려면 무력을 행사하는 이들이 체제에 충성할 이유가 있어야 합니다. 명예가 보장되거나, 보상이 충분하거나, 이념이 강력하거나, 최소한 인간 대접을 받아야 합니다. 고려 중기 문신들은 이 네 가지를 동시에 박탈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얻은 것이 보현원의 그날 저녁이었습니다.
정변의 방아쇠는 정중부·이의방·이고(李高) 세 사람이 당겼습니다. 이들은 체제를 뒤엎으려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체제 안에서 자기 자리를 되찾으려 한 것뿐이었습니다. 왕을 바꾸려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의종은 즉각 폐위되고 명종으로 교체되지만, 이건 "새 왕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지금 왕이 반격할까 무서워서"였습니다). 토지 제도를 바꾸려 한 것도 아니었고, 신분제를 흔들려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문신이 무신을 깔보지 않는 정상적인 근무 환경을 원했을 뿐입니다.
문제는, 무시당한 공무원들이 총을 들고 본사로 쳐들어왔을 때 그들이 가져온 것은 요구서뿐이었다는 점입니다. 요구서 이상의 것을 들고 올 만한 비전도, 그럴 만한 준비도 없었습니다. 이것이 이후 26년간 무신정권이 극도로 불안정해지는 근본 이유가 됩니다. 혁명가는 체제를 만들 수 있지만, 무시당한 공무원은 그저 번갈아가며 윗자리를 차지하는 것 외에는 할 줄 아는 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2. 무신정권, 회전문 인사의 시작

1170년부터 1196년까지 26년. 이 짧지 않은 기간 동안 고려의 실권자가 네 번 바뀌었고, 네 명 중 세 명이 부하 혹은 동료의 칼에 죽었습니다. 이 회전문의 속도가 얼마나 빨랐는지 감이 잘 잡히지 않으실 것이기에, 계보를 머릿속에 그려보시라 권합니다. 이의방(1170~1174, 4년, 정중부 측에 의해 살해), 정중부(1174~1179, 5년, 경대승의 기습으로 살해), 경대승(1179~1183, 4년, 병사), 이의민(1184~1196, 13년, 최충헌 형제에게 살해). 통치가 짧고, 죽음이 모두 칼에서 오며, 아무도 자기 손자에게 자리를 물려주지 못하는 풍경입니다.
각각의 통치 방식이 조금씩 달랐습니다. 이 차이가 의미심장합니다.
이의방은 정변 초기의 에너지로 움직였습니다. 문신 체제의 회복을 말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왕을 모시고 나라를 운영한다"는 형식은 유지했습니다. 그는 정변의 공을 독점하려 욕심을 부리다가 경쟁자 이고를 제거했고, 자기 딸을 태자비로 만들며 외척화를 시도했습니다. 이것이 정중부의 반발을 샀습니다. 정변의 첫 번째 사생아가 두 번째 사생아에게 살해당한 셈입니다.
정중부는 이의방보다 노련했습니다. 그는 "원로 대우"라는 권위에 기대어 권력을 행사했습니다. 이건 나름 고등한 기술입니다. 정중부 자신이 가장 나이 많은 무신 중 하나였고 무신정변의 실질적 최고 선임이었기에, 아랫사람들이 예를 표하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였습니다. 그러나 정중부의 약점도 여기서 나왔습니다. 그의 권력은 세대 교체에 취약했습니다. 그의 아들 정균이 횡포를 부리기 시작하자 젊은 무신들이 "이 집안은 우리가 왜 예를 표해야 하는 집안인가" 되묻기 시작했습니다. 26살의 경대승이 몇 명의 장수들과 함께 밤중에 궁궐로 난입해 정균을 죽이고 이어 정중부까지 처형한 것이 1179년 9월입니다.
경대승은 흥미로운 인물입니다. 그는 권력을 잡은 뒤 도방(都房)이라는 사병 조직을 만들었습니다. 수백 명의 무사를 집에 두고 자기 경호를 맡겼고, 잠도 그들 한가운데서 잤다고 합니다. 왜 이런 조직이 필요했을까요. 경대승은 문신 쪽에 다소 우호적이었고 — 정확히 말하면 무신정변 자체를 "국가의 불행"으로 보는 입장이었고 — 그 때문에 다른 무신들로부터 "우리 편이 아닌데 우리 위에 올라갔다"는 적개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 적개심에 포위된 채 4년을 살았고, 서른 살 되던 해 병으로 죽었습니다. 사인은 공식적으로는 병이지만, 만성 스트레스에 무너진 전형적 패턴이 아닌가 싶습니다. 무관을 지배하지만 무관들의 신뢰는 받지 못하는, 권력의 가장 외로운 자리에서 젊은 장수가 체력을 다 태워 버린 것입니다.
경대승이 죽자 변방에 물러나 있던 이의민이 소환됩니다. 이의민은 경주 소금장수의 아들이었습니다. 신분 서사만 떼어놓고 보면 "흙수저 영웅담"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의민은 거의 순수한 폭력의 화신이었고, 돈에 대한 집착이 유별났으며, 자기 아들들에게 권력을 분산해 가문을 세우려 했습니다. 그의 13년 집권은 이 네 명 중 가장 이념이 빠진 기간입니다. 문신 체제 회복의 명분도, 원로 대우의 권위도, 경대승 같은 정치적 복잡함도 없었습니다. 그냥 폭력과 재산이었습니다. 이의민의 아들들이 동네 처녀를 겁탈하고 다니는 기록들이 잔잔하게 쌓여 갔고, 개경 사람들은 "언제 누가 이 집안을 끝낼 것인가"를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드러나는 것이 있습니다. 무력으로 선 정권은 시간이 지날수록 이념이 빠지고 조폭화됩니다. 이의방에게는 어쨌거나 정변의 열기가 있었고, 정중부에게는 원로라는 포지션이 있었고, 경대승에게는 이념적 고민이라도 있었습니다. 이의민에게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저 계속 갖고 있으려는 욕망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조폭화가 극단에 이르렀을 때, 더 냉혹하고 더 조직적인 누군가가 나타나 판을 정리합니다. 그게 최충헌이었습니다.
한 가지 꼭 짚어 두고 싶은 디테일이 있습니다. 이 26년간 왕은 계속 자리에 있었습니다. 이의방이 의종을 폐위하고 명종을 세운 뒤, 명종은 1170년부터 1197년까지 27년간 재위합니다. 무신정권은 왕을 없애지 않았습니다. 왕은 형식적 정통성의 원천으로 남겨 두었습니다. 이 점이 중요합니다. 왜 중요한지는 뒤에서 다시 다루겠습니다.
3. 최씨 왕조의 발명 — 두 개의 왕조가 공존하는 나라
1196년, 최충헌이 동생 최충수와 함께 이의민을 기습해 죽입니다. 이의민의 집 앞에서 말을 세우고 활 한 발로 마무리한 이 장면은 당시 개경 사람들에게 상당한 충격이었다고 합니다. 13년간 공고했던 권력이 한나절 만에 무너진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진짜 충격은 그 다음에 찾아왔습니다. 최충헌은 이의민을 대체하는 새 실권자가 된 것이 아니라, 아예 새로운 체제를 발명했습니다. 이 체제는 이후 최씨 가문 4대, 62년간(1196~1258) 지속됩니다. 한국사에서 왕실 외의 한 가문이 이처럼 오래 최고 권력을 세습한 사례는 없습니다(북한을 제외한다면..)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느냐. 세 가지 발명품 때문이었습니다.
첫째, 도방(都房)의 확장. 경대승이 만들었던 사병 조직을 최충헌은 수천 명 규모로 키웠습니다. 도방은 국가 군대가 아닙니다. 최씨 개인에게 충성하는 사설 경호·공격 부대입니다. 국가에 세금을 내는 것이 아니라 최씨에게 충성심을 내는 조직이고, 국가 재정에서 돈을 받는 것이 아니라 최씨 개인 재산에서 봉급을 받는 조직이었습니다. 현대어로 번역하자면, 공식 국가 군대와 별도로 존재하는 한 가문 소속의 사설 보안 회사이자 특수부대였습니다.
둘째, 교정도감(敎定都監)의 창설. 이 부분은 한국사 교과서가 덜 다루는 대목이라 조금 자세히 풀어 보겠습니다. 당시 고려에는 이미 중서문하성·상서성·추밀원 같은 중앙 국가 기구가 있었습니다. 최충헌은 이것들을 없애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대로 두었습니다. 다만 그 위에 자기 사무실을 하나 얹었습니다. 그게 교정도감입니다. 표면적으로는 반역 사건을 조사하는 임시 기구로 시작했지만, 곧 모든 국가 중대사의 실질적 결정 기관이 되었습니다. 왕이 내리는 교서도, 재상이 올리는 상소도, 최종적으로는 교정도감을 거쳐야 했습니다. 국가 기구는 의례를 담당하고, 교정도감은 권력을 담당하는 이중 구조였습니다. 이것이 병행 정부(parallel government)의 고려 버전입니다.
셋째, 문신의 관리화. 최충헌은 문신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등용했습니다. 능력 있는 문신은 여전히 과거를 보고, 중서문하성에서 일을 하고, 외교 문서를 썼습니다. 다만 그들은 정책의 방향을 결정하지 않았습니다. 방향은 교정도감에서 내려왔고, 그것을 문서로 빚어 실행하는 것이 문신의 역할이었습니다. 이건 하청 계약과 비슷합니다. 문신들은 먹고살 수는 있었습니다. 심지어 꽤 풍족하게 살 수도 있었습니다. 다만 실권은 없었습니다. 이 구조의 천재성은 반대파를 만들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죽이면 유족이 복수를 꿈꾸지만, 관리가 되면 월급을 받고 아이를 키웁니다.
이 세 가지 발명 — 사병, 병행 정부, 반대파의 관리직화 — 은 이후 800년간 수많은 권위주의 체제가 거의 그대로 반복해서 쓰게 되는 구조입니다. 한 체제의 기본 골격이 한반도 서북쪽 귀퉁이의 한 가문에 의해 12세기 말에 완성된 것입니다. 국가 기구는 남겨두고, 그 위에 당(黨)이나 위원회나 사령부를 얹고, 반대파를 죽이지 않고 녹봉을 주어 관리한다. 이것은 오늘날 전 세계의 수많은 하이브리드 권위주의 체제가 여전히 쓰고 있는 운영 매뉴얼입니다. 뒤에 가서 "이 구조가 꼭 고려의 특이한 이야기가 아니다"라는 느낌을 받으실 겁니다.
4. 청천벽력
최충헌은 1219년에 죽고, 그의 아들 최우가 뒤를 잇습니다. 최우는 아버지보다 더 세련된 통치자였습니다. 문인들을 자기 사랑방에 불러들여 시를 짓게 했고, 이규보 같은 대시인을 후원했습니다. 이 시기의 고려는 표면적으로는 꽤 안정되어 있었습니다. 최씨 가문의 지배는 공고했고, 개경의 귀족들은 일상을 살았으며, 변방은 잠잠했습니다.
그리고 1231년 8월, 하늘이 무너졌습니다.

이 표현은 과장이 아닙니다. 그해 8월, 드디어 몽골의 장군 살리타이(撒禮塔)가 압록강을 건너 고려로 들어옵니다. 이것이 몽골의 첫 번째 고려 침입이었습니다. 그런데 "몽골의 고려 침입"이라는 말로는 당시 사람들이 느낀 공포를 전달하기 어렵습니다. 당시 몽골은 이미 서하를 멸망시키고, 금나라를 반으로 갈라버렸으며, 중앙아시아의 호라즘 제국을 지도에서 지운 세계 최강의 군대였습니다. 그들은 바그다드를 점령할 준비를 하고 있었고, 헝가리 평원까지 진격중이었습니다. 13세기 중반 몽골군이 어떤 존재였는지 현대인에게 번역하자면, 가히 현대의 미군에 준하는 최강의 군대-당시 알려진 세계의 절반을 이미 무너뜨린 군대였습니다. 그 군대가 고려 북방에 나타난 것입니다.
고려군은 당연히 몇 달 버티지 못했습니다. 1231년 가을에는 이미 개경 북쪽 근처까지 몽골군이 내려왔습니다. 고려 조정은 일단 화의를 맺고 몽골군을 돌려보냈습니다. 다루가치(達魯花赤) — 몽골의 감독관 — 몇 명이 고려 전국에 배치되었습니다.
이때 최우가 생각에 잠깁니다. 그의 판단은 이러했습니다. 몽골과의 회전은 가망이 없다. 그러나 몽골은 수군이 없다. 이 판단이 한 왕조의 향방을 결정합니다.
1232년 음력 6월, 최우는 강화도 천도를 선언합니다. 결정과 실행 사이의 시차는 거의 없었습니다. 한 달 남짓 만에 왕·신하·궁녀·장인·승려·도서관까지 모두 개경에서 40리 떨어진 강화도로 옮겨집니다. 이동은 장마철 한복판에서 이루어졌고, 고려사는 수많은 사람이 비에 막혀 길에서 죽었다고 담담하게 기록합니다. 강을 건너다 물에 쓸려간 사람, 진창에 빠진 채 일어나지 못한 사람, 도중에 병이 도진 사람. 정권은 옮겨 갔지만, 그 정권을 옮기는 과정 자체가 이미 백성에게는 재난이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38년간, 이 "정권은 옮겨 가고 백성은 죽는다"는 패턴이 반복됩니다. 천도는 이 38년의 축약판이었습니다.
강화도에 대해 한 가지만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개경에서 강화까지의 직선 거리는 40리입니다. 말로 반나절이면 닿습니다. 지금도 맑은 날 강화 평화전망대에서 북동쪽을 바라보면 과거의 개경, 개성공단이 보입니다. 그런데도 몽골은 강화도를 끝내 공격하지 못했습니다. 이유는 거리가 아니었습니다. 강화와 김포 사이를 흐르는 강화해협, 일명 염하(鹽河) 때문이었습니다. 가장 좁은 곳의 폭이 200~300m에 불과한 이 물길은, 딱 한 가지 결정적 특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밀물과 썰물의 차이가 커서 유속이 매우 빠르고(밀물 때 초당 3.5m), 수심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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