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을 멈춘 사람들 (上)
착한 사람들이 왜 정치 앞에서는 악마가 되는가?
프롤로그: 계엄의 밤, 그리고 여전히 우리는 싸운다
안녕하세요. 덕왕입니다.
전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한 지 1년이 지났습니다.
지나고 생각해 보면 참으로 급박했던 시절이었습니다. 국회의원들은 경찰과 군의 저지선을 뚫고 국회로 달려갔고, 6시간 만에 만장일치로 계엄 해제안을 통과시켰습니다. 전 세계는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저력에 찬사를 보냈습니다.
하지만 그날부터 SNS는 전쟁터였습니다.
"이게 나라냐", "반국가 세력을 척결하기 위한 정당한 통치행위였다”, “시민이 민주주의를 지켰다", "반역자를 처단하라", “빨갱이 놈들” 등 같은 사건을 보면서도 우리는 완전히 다른 세계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진정되었을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더 극렬해졌습니다.
SNS과 커뮤니티 게시판을 열면 증오의 언어가 넘쳐납니다. 커뮤니티는 정치 이야기만 나오면 전쟁터가 되고, 직장에서는 정치 성향만으로 사람을 재단하며, 대학가에서는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친구를 끊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이들 대부분이 평소에는 착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웃에게 친절하고, 자녀를 사랑하고, 직장에서 성실하게 일하는 평범한 시민들입니다. 그런데 정치 이야기만 나오면 눈빛이 변합니다. 마치 스위치가 켜지듯, 다른 사람이 됩니다.
언론과 유튜브, SNS는 이 광기에 기름을 붓습니다. 클릭을 위해, 조회수를 위해, 그들은 점점 더 자극적인 제목을 뽑아냅니다. "충격", "경악", "이것은 반역이다", "나라가 망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맹목적으로 소비합니다. 팩트를 확인하지도 않고, 맥락을 살피지도 않고, 그저 우리 진영의 서사에 맞으면 무조건 공유하고 분노합니다.
저는 이 광경을 보면서 질문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왜 이럴까?
착한 사람들이 왜 정치 앞에서 악마가 될까? 합리적이어야 할 지식인들이 왜 진영논리에 갇힐까? 사랑하는 가족이 왜 정치 때문에 등을 돌릴까?
평소 이 문제를 궁금해하던 중, 회사 게시판의 한 독자님께서 똑같은 궁금증을 가지고 계시고 이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자는 댓글을 달아 주셨고, 마침 좋은 시기라 생각하여 몇 주간 자료를 조사하고 정리하여 이렇게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왜 그렇게 행동하고 반대편의 사람을 눈엣가시처럼 여길까요? 이것은 단순히 "사람들이 나빠서"가 아닙니다. 이것은 구조적이고 과학적이며 체계적인 현상입니다. 우리의 뇌가, 우리의 진화가, 우리의 사회 시스템이 작동하는 방식의 문제입니다.
과학의 렌즈로, 심리학의 도구로, 사회학의 통찰로, 그리고 역사의 교훈으로, 정치적 극성화가 무엇이고, 왜 발생하며, 무엇보다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특히 20세기 가장 위대한 정치철학자 중 한 명인 한나 아렌트의 저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나온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중심축으로 삼겠습니다. 그녀는 나치의 홀로코스트를 주도한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을 관찰하며 충격적인 발견을 했습니다: 악은 악마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멈춘 평범한 사람들에게서 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알기로, 이것은 정치적 극성화를 이해하는 가장 강력한 열쇠입니다.
이 글은 네 파트로 구성됩니다.
PART 1에서는 에른스트 블로흐의 “비동시성의 동시성”과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 개념을 살펴보고, 이것이 현대 정치 극성화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살펴봅니다.
PART 2에서는 왜 착한 사람들이 생각을 멈추는지, 뇌과학, 진화생물학, 심리학, 경제학의 관점에서 살펴봅니다.
PART 3에서는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에 대해 여러 사례들과 함께 과학적으로 검증된 구체적 방법들과 이를 개인차원에서 실천할 수 있는 구체적인 프로토콜까지 살펴보겠습니다.
PART 4에서는 투자자의 관점에서 생각을 살펴봅니다. 정치적 편향이 어떻게 투자자의 포트폴리오를 망칠 수 있는지, 그리고 진정한 투자자는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하는지 이야기하겠습니다.
긴 여정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 여정을 함께 걸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금, 선택의 기로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계속 증오의 소용돌이에 갇혀 살 것인가, 아니면 생각을 되찾고 대화를 복원할 것인가. 답은 우리 각자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참고로 오늘의 이야기는 정치적 판단을 담고 있지 않습니다. 이 글을 토대로 많은 분들이 함께 생각을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며 어느 한쪽이 옳다는 것을 전제로 하지 않습니다. 또한 여기에 나오는 사례와 실천적 방법들에 대해서도 반드시 옳다고 단정 짓지 않으며 판단은 각자의 몫임을 미리 밝힙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PART 1: 생각을 멈춘 순간, 악마가 깨어난다
0. "생각하는 것을 멈춘다"는 것은 무엇인가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잠시 "생각을 멈춘다"는 개념 자체를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사실 "생각을 멈춘 사람들"이라는 표현은 우리 시대의 가장 심각한 문제를 지적하는 핵심 개념입니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이 주제는 학술서에서부터 대중문화까지 다양한 형태로 등장해 왔습니다.
니콜라스 카의 베스트셀러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은 인터넷과 디지털 기술이 인류의 사고 능력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에 대해 경고합니다. 그는 "인류의 사고 능력은 기술 혁명의 희생양이 되었다"고 주장하며 큰 논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클릭 한 번으로 무한한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시대, 우리는 정말 더 많이 생각하고 있을까요? 아니면 역설적으로 생각하기를 멈추고 있는 것일까요?
더 거슬러 올라가면, 20세기의 위대한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의 <생각을 잃어버린 사회>를 만나게 됩니다. 러셀은 "인간은 이성적인 동물"이라는 통념에 정면으로 도전합니다. 그는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멈추는 현상을 날카롭게 분석했습니다. 러셀이 활동하던 20세기 초중반, 파시즘과 전체주의가 유럽을 휩쓸던 그 시기에도 "생각을 멈춘 사람들"의 문제는 핵심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진지한 주제는 의외의 장소에서도 등장합니다. 바로 일본의 유명 만화 <죠죠의 기묘한 모험>입니다.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었다"는 이 작품에서 유래한 인터넷 유행어로, 등장인물 카즈가 생각하기를 멈추고 영원히 우주 공간을 떠돌게 되는 장면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죠죠의 기묘한 모험에 나오는 카즈
재미있게도, 이 만화적 표현은 우리가 다룰 주제의 본질을 정확히 꿰뚫습니다. 카즈는 절대적인 힘을 얻었지만, 바로 그 순간 생각을 멈추고 영원한 정지 상태에 빠집니다. 이것은 강력한 메타포입니다. 우리가 절대적 진리를 가졌다고 확신하는 순간, 우리는 생각을 멈춥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우리는 성장을 멈추고 고립됩니다.
정치적 극성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100% 옳다", "그들은 100% 틀렸다"는 확신의 순간, 우리는 카즈처럼 생각하는 것을 그만둡니다. 그리고 영원히 우주 공간을 떠도는 카즈처럼, 우리도 대화가 불가능한 고립된 공간에 갇히게 됩니다.
러셀이 지적했고, 니콜라스 카가 경고했으며, 심지어 대중문화까지 표현한 이 "생각 정지" 현상. 이것이 바로 우리가 오늘 탐구할 핵심입니다. 그리고 한나 아렌트는 이 현상의 가장 극단적인 결과를 아이히만의 재판정에서 목격했습니다.
1. 아이히만의 얼굴: 악은 왜 평범한가
가장 큰 악은 평범한 사람들이 저지른다. 그들은 동기도 없고, 신념도 없고, 악마성도 없다. 단지 생각하기를 거부했을 뿐이다."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
1961년 예루살렘. 수백만 유대인을 죽음의 수용소로 보낸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이 열렸습니다. 전 세계는 어떤 괴물이 등장할지 궁금해했습니다.
좌: 2차 대전 당시의 아돌프 아이히만
우: 아르헨티나에서 모사드에 의해 이스라엘로 납치되어 전범재판을 받고 있는 모습
그런데 법정에 나타난 아이히만은 괴물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평범했습니다. 중년의 대머리 남자. 안경을 쓰고, 진부한 말만 반복하고, 자신의 경력 승진에만 관심이 있던 관료. 재판을 담당한 정신과 의사는 그를 "완전히 정상적인 사람, 오히려 검사를 받은 나보다 더 정상"이라고 평가했습니다.
마치 여러분의 직장 동료나 아파트 이웃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이 광경을 지켜본 한나 아렌트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나치 독일을 피해 망명한 유대계 철학자였던 그녀는 이 재판을 직접 보기 위해 예루살렘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발견한 것은 악의 새로운 얼굴이었습니다.
아렌트는 이것을 "악의 평범성(The Banality of Evil)"이라 명명했습니다. 아이히만은 악마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단지 생각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을 관찰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그가 말할 수 없는 것과 생각할 수 없는 것 사이에 밀접한 연관이 있음이 명백해졌습니다. 즉,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능력의 부재 말입니다. 깊이도 없고 악마성도 없습니다. 단지 타인이 경험하는 것을 상상하기를 거부하는 것뿐입니다. 그것이 바로 악의 평범성입니다."
아이히만은 유대인을 인간이 아닌 "숫자", "통계", "해결해야 할 문제"로 봤습니다. 자신은 단지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 주장했습니다. 칸트의 정언명령을 인용하며 자신을 "이상주의자"라 불렀지만, 칸트를 완전히 오해했습니다. 그는 "보편 법칙"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고, 단지 "명령에 복종"하는 것으로 왜곡했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죄책감이 없었습니다. 그가 느낀 것은 오직 "임무를 완수하지 못한 아쉬움"뿐이었습니다.
여기서 질문이 생깁니다. 아이히만과 우리는 무슨 상관일까요?
안타깝게도, 많은 상관이 있습니다.
2. 당신의 이웃이 아이히만이 되는 순간
정치 이야기만 나오면 평소와 다른 사람이 되는 당신의 지인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 사람도 아이히만처럼 "생각을 멈춘" 것입니다.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기를 거부합니다. 반대 진영 사람들의 고통이나 두려움, 합리적 이유를 상상하지 않습니다. 대신 진부한 슬로건만 반복합니다. "그들은 다 ○○이야", "이건 상식이야", "명백한 사실이잖아".
아렌트가 아이히만에게서 발견한 것과 똑같은 특징입니다: 무사고(thoughtlessness). 생각의 부재. 숙고의 거부.
물론 규모의 차이는 있습니다. 아이히만은 대량학살을 조직했고, 우리는 SNS에 혐오 댓글을 다는 정도입니다. 하지만 메커니즘은 놀랍도록 유사합니다.
스탠리 밀그램의 유명한 전기충격 실험(1961)을 기억하십니까? 평범한 사람들의 65%가 권위자의 명령에 따라 타인에게 치명적 수준의 전기충격을 가했습니다. 밀그램은 이 실험이 바로 "악의 평범성"을 입증한다고 말했습니다.
2017년 폴란드 SWPS 대학의 Dariusz Doliński 연구팀이 밀그램 실험을 재현한 결과(실험은 2015년 실시), 여전히 90%의 참가자가 최고 레벨 전기충격을 가하는 데 동의했습니다. 2020년대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명령", "규칙", "집단의 압력" 앞에서 생각을 멈춥니다.
정치적 극성화는 바로 이 지점에서 무섭습니다. 우리는 정치적 신념을 "진리"나 "상식"으로 포장하고, 반대 의견을 "명백한 오류"나 "악"으로 규정하며, 집단의 압력을 통해 개인의 사고를 억압합니다.
이 모든 과정에서, 평범한 사람들이 생각을 멈춥니다.
그리고 주변에서 그런 이웃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평범한 이웃은 당신 자신일 수도 있습니다.
3. 생각의 죽음이 가져오는 것들
아렌트는 <정신의 삶(The Life of the Mind)>에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생각하는 행위 자체가 악을 예방할 수 있을까?"
그녀의 답은 조심스러운 긍정이었습니다. 생각하는 행위, 특히 자기 자신과의 대화(내적 대화)는 우리가 타인과의 관계에서 일관성을 유지하도록 만듭니다.
나 자신과 평화롭게 살고 싶다면, 내가 타인에게 행하는 것과 내가 스스로에게 말하는 것 사이에 모순이 없어야 합니다. 이것은 강력한 도덕적 제약입니다.
하지만 정치적 극성화는 정확히 이 "생각하는 행위"를 차단합니다. 어떻게?
첫째, 사고의 외주화입니다. 우리는 복잡한 문제를 스스로 사유하는 대신, 우리 진영의 "전문가"나 "리더"의 의견을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아이히만이 나치 이데올로기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것처럼, 우리도 정치적 진영의 서사를 무비판적으로 내면화합니다.
둘째, 언어의 진부화입니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진부한 말만 반복"했다고 지적했습니다. 정치적 극성화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좌파 빨갱이", "수구 꼴통", "이게 나라냐", "적폐 청산" - 이런 진부한 표현들은 사고를 대체합니다.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정답이 정해져 있으니까요.
셋째, 타자의 비인간화입니다. 아이히만은 유대인을 인간이 아닌 "통계", "숫자", "처리해야 할 문제"로 봤습니다. 오늘날 정치적 극성화에서도 반대 진영은 "적", "빌런", "악"으로 프레이밍 됩니다. 일단 누군가를 인간 이하로 규정하면, 그에 대한 공격은 도덕적 문제가 아니게 됩니다.
4. 데이터가 말하는 극성화의 실체
수치로 봅시다. 미국 퓨 리서치 센터의 2022년 조사에 따르면, 민주당원과 공화당원의 호감도 차이가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습니다. 1994년에는 평균 17포인트였던 차이가 2022년에는 63포인트로 확대되었습니다.
더 무서운 건 "부정적 당파성(negative partisanship)"의 증가입니다. 즉, 자기 정당을 지지해서가 아니라 상대 정당을 혐오해서 투표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는 것입니다. 2016년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와 힐러리에 투표한 사람들의 각각 70% 이상이 상대 후보에 대한 혐오가 주된 동기였다고 답했습니다.
우리나라라고 다를까요?
2022년 한국의 사회동향 보고서(통계청/국가통계연구원)에 따르면, 한국의 정치 양극화는 정서적 양극화(affective polarization)가 주된 특징입니다. 민주당과 국민의힘 지지자의 감정온도 차이는 평균 39점으로, 이는 2016년 미국 대선의 정서적 양극화(40.9점)와 거의 동일한 수준입니다.
2023년 28개국 32,000명을 대상으로 한 글로벌 조사에서 한국은 브라질, 멕시코, 프랑스, 영국, 일본, 네덜란드, 독일, 이탈리아와 함께 정치·경제 양극화 위험국으로 분류되었습니다.
고려대 KU-POPS의 2023년 조사는 더 섬뜩합니다. "정치적 성향이 다르면 결혼 상대로 고려하지 않겠다"는 응답이 20대에서 43.7%에 달했습니다. 즉, 젊은 세대의 절반 가까이가 정치적 이유로 사랑하는 사람을 포기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경제적 양극화가 이를 더욱 악화시킵니다. 2025년 1월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소득 상위 10%와 하위 10% 가구 간 소득 격차가 처음으로 연 2억 원을 초과했고, 자산 격차는 15억 원 이상으로 벌어졌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의견 차이가 아닙니다. 이것은 아렌트가 말한 "생각의 죽음"이 사회 전체로 확산되는 현상입니다. 우리는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기를 거부하고, 오직 우리 진영의 서사만을 진리로 받아들이며, 반대 진영을 인간 이하로 취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요? 왜 착한 사람들이 정치 앞에서 악마가 될까요?
5. 에른스트 블로흐의 통찰: 같은 공간, 다른 시간
답을 찾기 전에, 또 다른 20세기 철학자의 통찰을 빌려봅시다. 독일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Ernst Bloch)입니다. 아렌트가 "악의 평범성"으로 무사고의 메커니즘을 밝혔다면, 에른스트는 "비동시성의 동시성(Gleichzeitigkeit des Ungleichzeitigen)"이라는 개념으로 극성화의 구조를 설명합니다.
같은 시간, 다른 세계
에른스트의 핵심 통찰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2025년이라는 똑같은 물리적 시간을 살고 있지만, 사람들의 의식과 가치관은 각기 다른 역사적 시간대에 머물러 있다는 것입니다. 같은 달력을 보지만, 서로 다른 시대를 살고 있는 것입니다.
계엄의 밤을 예로 들어봅시다. 같은 사건을 목격했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왜일까요? 에른스트의 렌즈로 보면 명확해집니다.
그룹 A - 현재의 시간에 사는 사람들
이들에게 2025년은 정말로 2025년입니다. 민주주의 절차와 현대적 법치 시스템이 당연한 21세기를 살고 있습니다. 헌법은 최고의 규범이고, 국회는 국민의 대표이며, 군은 정치에 개입해서는 안 되는 존재입니다. 이들에게 계엄은 "있을 수 없는 과거의 야만"입니다. 마치 중세의 마녀사냥이나 공개 교수형을 21세기에 다시 하자는 것만큼이나 황당한 것입니다.
그룹 B - 과거의 시간에 사는 사람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의 의식은 여전히 1960-70년대, 혹은 1980년대에 머물러 있습니다. 이들이 살고 있는 "마음속 시대"에서는 국가의 안보나 위기 상황에서 강력한 공권력이나 군사적 개입이 가능했습니다. 5.16 군사정변도, 긴급조치도, 광주의 계엄도 그 시대에는 "국가를 지키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으로 정당화되었습니다. 이들에게 계엄은 "가능한 해결책의 하나"입니다. 극단적 위기에는 극단적 수단이 필요하다는 논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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