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제에 대한 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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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GT3RS
2025.09.10조회수 25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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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몇년간 내가 맡은 일은 회의를 진행하는 일이다. (사진은 내 업무와 전혀 상관없는 FOMC 미팅사진임)


어떠한 상황에서도 매끄럽고 끊기지 않는 회의 진행이 최우선 목표이다 보니, 나는 회의 며칠전부터 항상 가능한 모든 경우의 수를 최대한 그려본다. 그리고 각 경우의 수에 대한 대응 시나리오를 최대한 많이, 그리고 상세히 준비해둔 채로 회의장에 들어간다.

  • 가장 무난하게 모든 안건이 원안대로 가결된다는 가정하에 회의 진행 기본 시나리오를 쓰고,

  • 상정될 안건들의 문제여부를 사전에 검토해서,

    • 일부 조문을 바꿔서 수정가결될 가능성이 있는지

    • 좀 더 논의와 의견 합치가 필요해서 보류했다가 재상정할 필요가 있는지

    • 혹은 최악의 경우 안건이 부결될 가능성이 있는지

      • 부결이 된다면 그것은 만장일치에 의해서일지, 아니면 표결에 의해서일지

        • 표결을 한다면 표결방법은 기명일지, 무기명일지

이런식으로 각 경우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미리 시나리오를 준비해 놓는다.


벌써 회의진행 3년차가 되어가서, 이젠 엔간한 상황은 전부 미리 준비한 시나리오 내에서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약 95% 정도는 그러한 것 같다. 그러나, 반대로 말하면 만약 그 95%내에 들어오지 않는 특이상황은 정말 말 그대로 2시그마 밖의 알 수 없는 돌발 상황일 확률이 그만큼 높다. 애초에 예상 가능하면 시나리오 내에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카메라가 돌아가고 모든 발언들이 마이크를 통해 기록으로 남는 회의의 특성상 회의장 내에서 발생하는 일들이 사전 준비된 시나리오 내에 없을 경우, 회의진행에 상당한 애로상황이 꽃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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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갑자기 회의중에 위원이 증인들의 발언이 의심스러워 예정에 없던 현장확인을 요청한다거나,

  • 위원들끼리 견해가 엇갈려 감정적으로 싸우기 시작한다거나,

  • 이해관계 때문에 두 집단이 한치도 양보하지 않는 대치전을 벌이다 회의장을 나가버려서 안건을 심의하기 위한 최소 정족수를 만족하지 못해 회의가 파행된다든가,

  • 어디까지가 협의로 정할 문제인지, 어디까지가 위원장의 고유 권한인지 불분명하다든가,

  • 견해차이가 발생했는데 선례가 전혀 없다거나,


이러한 예상치 못한 시나리오 밖의 상황이 닥칠 경우, 일단 정회를 선포하고 나서 위원장과 위원들이 향후 절차에 대해 나와 내 상급자의 의견을 묻는다. 위원들의 회의 진행 절차와 규정에 대한 이해도는 그리 높지 않고, 그런 절차에 대한 위원의 질문에 답하는 것은 전부 회의를 진행하는 직원(나)과 내 상급자의 몫이다. 그리고 필연적으로 위원들이 회의절차에 대해 묻는 상황이 발생했다는 것은, 지금 상황에 불만이 있어서 "지금 이렇게 진행하는 것이 규정상 맞는 것이냐?"라고 공격적으로 따지는 경우일 확률이 높다.


물론, 정회(adjournment)라는 존야의 모래시계가 있기는 하다. 정회가 선포되면 마이크가 전부 꺼지기 때문에 발언들이 기록에 남지 않게 되고 위원들끼리 소위 말해 '툭 까놓고' 토론을 벌일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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