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V를 켜면 어디서나 서바이벌 프로그램과 오디션 프로그램을 볼 수 있다.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매 라운드마다 제거되는 인간들, 무대를 떠나는 인간들, 사라지는 인간들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눈물겨운 표정으로 탈락한 자들과 작별하면서도 자신이 아직 게임에 잔류하고 있다는 사실에 원초적 안도감을 감추지 못하는 무수한 얼굴들이 있다. 삶의 기본적 세팅 자체가 서바이벌 게임이 된 듯하다.
신자유주의적 생존주의자는 단순한 '승리자'나 '성공자'와 동일시될 수 없다. 이미 삶에서 뭔가를 이룬 저들과 달리, '생존주의자'는 아직도 안정적인 상태에 도달하지 못했으며, 바로 이런 이유로 엄격한 자기 테크닉을 통해 더 강력한 존재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항상적 불안, 항상적 노력의 주체다. 사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저들 신자유주의적 생존주의자는 자신이 결코 성취할 수 없는 것을 향한 강박에 사로잡혀 있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생존주의자가 꿈꾸는 생존자-모델은 현실화하기 어려운 이상적 아이콘이며 그가 소유하고 있다는 여겨지는 능력 또한 쉽게 획득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서동진은 신자유주의에 내재하는 이 무한 능력의 모순을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산업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하는 주체는 자신이 선택한 일의 세계에 들어가기 위해 사회적으로 규정된 자격과 기준을 갖추면 끝이었다. 그러나 탈근대 자본주의의 노동자는 자신의 능력으로부터 졸업할 수 없다. 그는 평생 교육을 통해 혹은 끊임없는 자기 혁신을 통해 자신을 능력화해야 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탈근대 자본주의에서 능력있는 주체에 도달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인생을 지배하는 것은 어쩌면 아이러니일지도 모릅니다. 내가 슬퍼 오열하면서 나는 종종 그렇게 우는 나 자신을 보기 위해 거울을 들여다보곤 했다니 말입니다. 자기 자신 위를 날아 활공할 줄 아는 이런 성격은 아마도 모든 덕성의 원천일 것입니다.
플로베르의 저 고백에서 자아는 둘로 쪼개져 있다. 한 자아는 슬퍼 오열하며 울고 있다. 그런데, 다른 자아가 (그 슬픔의 바깥에서) 슬퍼하는 자기 자신을 바라본다. 양자를 매개하는 것은 거울이다. 거울에 반영된 자신을 거울 밖의 관찰적 자아가 바라본다. 관찰되는 자아는 감정에 사로잡혀 울고 있지만, 관찰하는 자아는 아무런 감정도 갖고 있지 않다. 그는 마치 고공에서 지상을 굽어 ...

너무 피상적인 반응일 수 있겠지만, 최근 국민 삶의 질 보고서에서 여전히 높은 노인 노동참여 비율과 빈곤율, 그 결과로서의 노인 자살율을 보고 여전히 우리가 생존의 레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다시금 들었습니다. 공동체가 이들의 죽음을 방기하는 것은 미달성된 생존으로 인해서기도 하고, 동시에 이처럼 선명한 유기가 존재하는 한 생존은 결코 달성될 수 없는 상호참조적인 문제로 보입니다.

생존 강박에서 벗어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생존이 하나의 사회적 규범이 되어, 이를 숙명처럼 받아들이는 경향까지 생겼죠. 하지만 생존이 계속 유기의 형태로만 남는다면, 결국 사회 구성원의 대부분은 생존을 가장한 모멸과 소멸만을 반복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이제는 지난 세대의 꿈, 아버지의 꿈에서 깨어나 새로운 가치관을 만들어야 할 때라고 생각됩니다. 저 또한 그 세대의 일원으로서 더 깊이 고민하고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PS. 좋은 댓글 감사합니다. 특히 마지막 문장은 글의 완성은 댓글이라는 말을 떠올리게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