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에 성숙이라는 말은 참 낯선 단어가 되었지만, 돌이켜보면 나는 영화와 함께 성장했다. 삶은 그것을 반추하게 하는 여러 차원의 시선들을 요청한다. 그 시선들의 힘으로 인생을 관조하면서, 우리는 비로소 스스로를 이해하고, 꾸짖고, 용서할 수 있다. 영화는 그런 시선을 우리에게 준다.
좋은 영화를 보았을 때 나는 들뢰즈가 말하는 '세계에 대한 믿음'이 조금 더해진 기쁨을 느낀다. 세계에 대한 믿음이 생기려면, 자기가 삭감되어야 한다. 자기가 덜어내지고, 자기의 중심성이 흐트러지고, 자기가 사라져야 한다. 그 사라진 빈자리만큼 세상이 나타난다. 그 세계의 주인은 내가 아닌 타인들이다. 들뢰즈라면 미래의 민중이라 말할 것이다.
영화 비평가나 애호가(시네필)보다는 '영화를 겪는 자'라는 표현이 더 가슴에 와닿는다. 시네-페이션트. 내가 느낀 마음의 흔들림과 정신의 변형을 누군가와 나누고 싶어서 이 글을 썼다. 같이 흔들리자고, 같이 무너지자고, 같이 도망치자고, 혼자 받은 감동 속에서, 이 거대한 세상에서, 세계에 대한 믿음을 잃은 '나'라는 것은, 주체라는 것은, 하염없이 덧없고 외로운 것이 아닌가?
이 책은 그 외로움의 바깥으로, 주체의 외부로 나가는 선을 그려보려는 한 조그만 시도다. 내가 그린 선들이 당신의 마음에 가닿기를 희망한다.
영화는 존재한 적 없는 것에 대한 기억이다.
<본생경>은 부처의 전생 설화를 모아놓은 텍스트다. 경전에 의하면, 석가모니 부처에게도 환생과 윤회의 긴 과거가 있었다. 전생에 그는 수행자였고 상인이었고 왕이었다. 하지만 인간이 아닌 비인간이었던 적이 더 많다. 원숭이로 태어난 적도 있고, 나무였던 적도 있으며, 말이나 앵무새, 공작새, 메추라기, 거위, 코끼리로 살다 죽은 적도 있다.
이 중 특히 유명한 것은 '토끼의 공양'이라는 제목으로 잘 알려진 설화다. 진리를 사랑하며 보시하는 삶을 살던 동물 무리에 어느 날 한 승려가 찾아온다. 먹을 것을 청한다. 수달은 물고기를 바치고, 들개는 고기와 우유를 바친다. 원숭이도 망고 열매를 바쳤다. 그런데, 아무것도 줄 것이 없던 토끼는 자기 살을 태워 고기를 바치기로 결심한다. 토끼의 갸륵한 마음을 읽은 걸식승은 본래 모습인 제석천으로 변해, 달에 토끼 형상을 새겨 그의 덕을 기린다.
이 토끼가 바로 석가의 전생이다.
부처는 중생 바깥으로부터 그들을 구제하러 '오는' 메시아가 아니라, 뭇 생명이 나고 죽는 윤회 속에서, 그 끝없는 회귀와 권태와 무의미를 안에서부터 찢고 '나가는' 존재다. 부처는 포스트 휴먼이다. 인간을 초월한다는 의미에서 그런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리가 애초부터 동물성과 식물성에 침식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본생경>을 쓴 자들은 상상하지 못했겠지만, 아마도 21세기의 상황에 맞추어 경전을 다시 극화해야 한다면 우리는 아마 그 목록에 아메마-부처, 유글레나-부처, 바이러스-부처, 박테리아-부처의 이야기를 추가해야 할지 모른다.
불교적 상상계는 초월성의 가상을 쉽게 허용하지 않는다. 특권적 존재도 입장도 방향도 권리도 없다. 성령도 구언도 없고, 성스러운 것과 속된 것의 경계도 없다. 극단들은 교환되고 뒤섞이며 회전한다.
한 차례의 유일한 십자가, 한 차례의 유일한 부활은 없다. 대신 끝없이 반복되는 십자가들(가령 토끼의 희생)과 종식되지 않는 무수한 부활(환생)의 흐름만이 있다.
세계는 인간-너머의 생명성으로, 생명=고통이라는 역설적 희열로 폭발하고 있다. 윤회에 묶인 자들에게 죽음은 끝이 아니다. 우리는 언제나 존재할 수밖에 없다. 언제나, 어디선가, 무언가로 다시 태어나 살아갈 수밖에 없다. 있음의 바깥으로 나가는 길은 '거의' 막혀 있다. 이것이 불교적 상상력의 극한에서 우리가 만나게 되는 어떤 아득하고 막연한 두려움, 폐소공포의 정체다. 우리는 과연 이 삶에서 벗어나기를 욕망하는가? 아니면 여기 영영 머무르는 것을 욕망하는가? 우리가 두려워하고 증오한다고 믿고 있는 이 고해를 사실 우리는 다른 어떤 것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아닌가?
2500년 불교 전통이 아시아의 다양한 지역들을 통과하면서 마름질해낸 이 물음들은 아시아 시네마의 저류에 일종의 형이상하적 DNA처럼 흐르고 있다. 가령 오스 야스지로, 사티아지트 레이, 차이밍량, 허우 샤오센, 지아장커, 그리고 홍상수의 시네마를 나는 이런 관점에서 읽는다.
아시아 시네마의 가장 매력적인 한자락에서 우리는 해탈에 대한 거부, 아니 해탈 쪽으로의 지향을 숨기지 못하지만 동시에 그 지향을 배반하고 부정하는 속세의 압력에 깨져버린 채 배회하는 영혼들의 세계를 본다.
오즈가 즐겨 다루는 음식의 맛, 빨래의 나부낌, 정물에 고여 있는 일상의 시간은 사실 얼마나 격렬한가? 사티아지트 레이가 그리는 아푸의 성장 이야기는, 그의 휴머니즘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