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당신을 미워한다 하여도 그것은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신이 나에게 바람 부는 강변을 보여주면은 나는 거기에서 얼마든지 쓰러지는 갈대의 자세를 보여주겠습니다.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은, 빛 속에서 잃어버린 것을, 어둠 속에서 찾으려 하는가 아니면 어둠 속에서 잃어버린 것을, 빛 속에서 찾으려 하는가? 어떤 경우건, 무언가를 발견하기 위해 그 대상이 이미 상실되었어야 함을 아는 한에서, 영화적 인간은 플라톤주의자다. 하지만, 이 회복이 이데아가 아닌 이미지의 운동 속에서 이루어진다고 믿는 한, 그는 플라톤주의를 배반한다.
영화에서 이미지의 우주를 바라보는 것은 육안이나 정신의 눈이 아닌, 카메라의 기계적 눈이다. 영화가 주는 매혹은 카메라가 절단해내는 진실의 극한적 성격에서 온다. 그것은 폭력이나 외설 같은 시각의 과잉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카메라와 접속된 눈이 새롭게 지각하게 되는 인간-너머의 끔찍한 진실을 가리킨다.
도쿄 교외의 하숙집 2층. 엄마와 딸이 언쟁을 벌이고 있다. 착잡한 가족 문제 때문이다. 딸은 엄마의 인생을 싸잡아 비난하고 제풀에 속이 상해 운다. 엄마도 자신의 인생이 허무하고 서러워 흐느끼고 있다. 딸은 차라리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고 생각에 잠긴다. 바로 그때, 모녀의 마음만큼이나 어두운 밤하늘 저 멀리 환각처럼 번개가 친다. 두 줄기 섬광이 하늘을 가르고 빛의 가지가 뻗어가다 이내 사라진다. 순간, 번개를 바라본 딸의 얼굴에 언어로 명시하기 어려운 미묘한 변화가 서린다. 딸은 몸을 돌려 엄마에게 다가간다. 자신이 상처를 준 엄마의 마음을 달래주고 모녀는 마음을 푼다.
나루세가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이 여기 잘 드러나 있다. 고조되던 갈등에 새로운 방향을 준 것은 예기치 않은 번개와 섬광이었다. 가족 관계가 악화되고, 문제들은 해답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뒤엉키고, 감정은 꼬이고, 가장 가까운 존재에 대한 애정이 원망에 휘감겨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그 막막한 순간, 깜깜한 하늘에 번개가 친다. 하늘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인해 주인공들의 마음에 무언가가 발생했다. 그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모른다. 그 짧은 시간에 딸이 무엇을 생각했는지, 어쩌면 자신도 알지 못할 것이다.
언어에 잡히지 않을 만큼 미세한 변화, 그러나 어떤 결정적 방향 전환을 가져오는 각성. 우리는 그것을 오직 딸의 변화된 태도를 통해 짐작할 뿐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말한다. "예술작품은 몇 초, 십분의 일 초, 백분의 일 초를 표시해야만 한다." 예술은 우리 시선이 정지시켜놓은 순간들, 정물화나 스냅 사진처럼 물화시키고 석화시켜놓은 그 순간들이 얼마나 광폭하게 진동하는 에너지의 파동이자 덩어리인지, 얼마나 심대한 변화의 씨앗들이 그 미소한 순간들에 뿌려져 있는지를 보여준다.
실제로 삶의 중요한 사건들은 지각할 수 없는 찰나에 일어난다. 세계가 변화하기 위해서는 번개 치는 찰나면 족하다.
백 분의 일 초 동안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은, 영원의 시간이 주어진다 해도 결코 할 수 없는 일이다.
번개는 하늘을 무너뜨리지 않았고 땅의 문제를 해결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구원도 구제도 아니다. 다만 어떤 쪼개짐이, 어떤 균열선이 순간적으로 나타났다 사라졌을 뿐이다. 그것은 정지와 휴지를 강제하는, 번쩍거리는, 어찌 보면 그저 무의미한 사건이다.
하늘은 이내 봉합되고 다시 어둠으로 뒤덮인다. 그런데 밤하늘이 그렇게 한 번 찢어졌다가 다시 붙을 때, 이 두번째의 밤은 처음의 밤과 달라져 있다. 그것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