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완: 그럼 아름이는 믿는 게 뭐야?
아름: 저는 제 자신이 주인이 아니라는 거, 주인공이 아니라는 것을 믿어요. 절대로 아니라는 거. 그리고 두번째로는 언제든 죽어도 된다는 걸 믿어요. 정말로 괜찮다는 걸 믿어요. 셋째로는 모든 게 괜찮다는 걸 믿어요. 모든 게 다 사실을 아름다운 것일 거라는 걸, 영원히, 이 세상을 믿어요.
카메라는 누군가의 기억 속으로 이동해 간다. 1930년대 러시아 숲속의 집. 기억 속에 살아서 늙은 적 없는 엄마가 머리를 감고 있다. 기억 속에 살아서 늙은 적도 죽은 적도 없는 강아지가 잠들어 있다. 영원히 방울방울 떨어져야 하는 기억 속 식탁에 흘린 기억 속 우유를 기억 속의 고양이가 핥고 있다. 고양이의 정수리에 하얀 설탕 가루를 몰래 뿌리는 개구쟁이. 허름한 벽으로 흘러내리는 물줄기. 천장에서 쏟아져 내리는 회백색 자재들. 불타는 헛간. 내리는 빗방울. 평범한 가구들.
기억 속에서 아직 헤어지지 않은 엄마와 아빠는 풀숲에 누워 미래를 묻는다. "아들을 낳을까, 딸을 낳을까?" 엄마는 대답 없이, 너무 아름다워 차라리 마음이 아파지는 풍경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린다. 사랑의 순간들은, 우리가 살아간 모든 시간은 상실되지 않는 것, 결코 소멸하지 않는 것. 언젠가 부활하는 것. 이미지라는 뼈와 살을 입고.
우리는 귀신이 된다. 영화 속 세계는 현실보다 더 실제적이다. 우리는 귀신이 된다. 귀신이 되는 기쁨. 우리가 귀신으로 출몰하는 바로 그 세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는 기쁨. 이것은 영화가 줄 수 있는 체험 중에서도 희귀한 것에 속한다.
귀신-관객은 타르콥스키가 창조한 세계에 질투를 느낀다. <거울>을 보고 감동한 소련의 한 여성 노동자가 타르콥스키에게 보냈다는 다음의 편지가 하고자 한 말이 바로 그것이 아닐까?
나는 당신의 영화를 일주일 동안 네 번 봤습니다. 나를 괴롭히는 것, 내게 부족한 것, 내가 동경하는 것, 나를 화나게 하는 것, 구역질 나게 하는 것, 나를 숨 막히게 하는 것, 내게 밝고 따뜻한 것, 나를 살아 있게 하고 나를 파멸하게 하는 것. 이 모든 것을 당신의 영화에서 거울 속을 들여다보듯이 봤습니다. 내게는 처음으로 영화가 현실이 됐습니다. 내가 당신의 영화를 보러 가는 이유, 잠시 그 속에 들어가 살려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홀로코스트와 1, 2차 대전을 겪으면서 세계는 하나의 나쁜 영화가 되어버렸다. 20세기의 이 잔혹성, 부조리, 무의미를 대면한 이후에도 어떻게 이 세계를 믿을 수 있는 것일까? 영화는 그렇게 묻는다. 목적도 이유도 없이 악과 고통에 침윤되어 있고, 결코 정화될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이 사악한 세계에서 "우리는 어떤 점에서 아직도 경건한가?" 이것이 영화가 던지는 철학적 질문이다.
현대적 사실, 그것은 우리가 더 이상 이 세계를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사랑이나 죽음처럼 우리에게 일어나는 사건들조차 믿지 않는다. 인간과 세계의 관계는 파괴되었다. 이제 믿음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것은 바로 이 관계다. 영화는 세계가 아니라 이 세계에 대한 믿음을 찍어야 한다. 이 믿음이 우리의 유일한 관계이다. 사람들은 종종 영화적 환상의 본성에 대해 자문하고는 했다. 우리에게 다시 세계에 대한 믿음을 주는 것, 이것이 바로 현대 영화의 힘이다. 기독교인이건 무신론자이건, 우리의 보편적인 정신분열증 속에서, 우리는 이 세계를 믿어야 할 이유들이 필요하다.
세상에는 정의를 믿는 자, 역사를 믿는 자, 권력이나 폭력, 사랑, 과학 또는 지식을 믿는 자가 있다. 인간을 믿는 자, 기적을 믿는 자, 자신의 상처나 운명을 믿는 자도 있다. 하지만 '세계'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어디서 우리는 그것을 배우는가? 들뢰즈에 의하면, (좋은) 영화를 통해서 배울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 영화는 20세기에 나타난 새로운 예배의 형식이다. 그것은 인식 장치나 오락 장치이기 이전에 믿음의 장치였다. 교회나 성당이 아닌 극장에서 수행되는 예배.
영사기에 감긴 세룰로이드 스트립에서 방사된 몇 줄기 희미한 빛에 떠도는 먼지와 냄새, 스크린에 나타나고 사라지는 환영이 지배하는 단 몇 시간. (삶의) 빛에서 상실한 것을 (극장의) 어둠 속에서 회복하는 단 몇 시간의 예배.
20세기의 아이들은 스테인드글라스를 뚫고 오는 빛 또는 십자가상 너머에 서려 있는 비가시적 초월성이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