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흩어진 돈, 뒤섞인 삶

나는 어렸을 적부터 게임을 좋아했다. 게임 잡지를 읽으면서 다양한 전략을 연구하거나 세계관 속에 빠져보기도 했고 프로게이머의 꿈을 꾸기도 했다. 다양한 게임을 했지만 그중 최고는 단연 스타크래프트였다. 동네에선 알아주는 실력자였지만, 이상하게도 큰 대회에만 나가면 중요한 순간에 실수하며 번번이 고배를 마셨다. 당시에는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시간이 흘러 오랜만에 사촌 동생과 다시 그 게임을 즐길 기회가 생겼다. 나는 초반부터 날카로운 전략으로 유리하게 이끌어갔다. 하지만 중반을 넘어가자 이상하게 힘이 빠졌다. 아무리 병력을 생산해도 동생의 물량을 당해낼 수 없었다. 예전엔 자존심에 나의 문제점을 못 물었봤었다. 즐겜러가된 지금은 편하게 물어볼 수 있었다.
“내 문제가 뭐라고 생각해?”
“형은 건물을 이상하게 짓잖아. 그러니 병력이 제대로 안 나오지.”
게임 속 건물을 제 위치에 짓는 것. '심시티(SimCity)'라 불리는 이 작업은 나에겐 사소한 문제였다. 핵심은 '전략'과 '컨트롤'이지, 건물을 보기 좋게 짓는 게 뭐 그리 중요하냐고 반문했다. 하지만 게임을 다시 돌려보니 명확했다. 아무렇게나 지은 건물들 탓에 병력이 입구에 갇히거나, 전장 합류가 하염없이 늦어지고 있었다. 물론 그것만이 패인은 아니었겠지만, 나는 그때 '사소한 정리'가 '결정적 효율'을 만든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허술함'은 내 오랜 문제였다. 수학 문제를 풀 때도 줄을 맞춰 풀지 않고 여기저기 계산을 휘갈기다 실수가 잦았다. 자취방 냉장고에는 아무렇게나 처박아 둔 음식물이 썩어 나갔다. 나는 늘 '본질'이 중요하다고 외쳤다. 게임의 전략이, 수학의 개념이, 요리의 레시피가 중요하지, 깔끔한 정리 따위는 사소한 것으로 치부해 버렸다.
이런 태도는 아내를 만나고서야 고쳐졌다. 정돈의 달인인 아내와 살며 처음에는 많이 부딪혔다. 수납공간이 넉넉한데 왜 자꾸 수납장을 사는지, 내 물건을 왜 자꾸 버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함께 살며 깨달았다. 깔끔한 정리는 곧 효율이었다. 팬트리에서 물건을 찾느라 헤맬 필요가 없었고, 옷장 앞에서 고민하는 시간이 줄었다. 작은 냉장고는 늘 여유가 있었고 버리는 식재료도 사라졌다. 자연스레 옷 사는 횟수와 식비가 줄었고, 불필요한 집안일에 쓰던 에너지를 아낄 수 있었다.
체계의 중요성은 돈 관리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수납함이 집의 효율을 높이듯, 돈을 담을 '그릇'이 명확해야 돈의 효율이 높아진다. 나는 정리의 달인과 함께 산 덕분에 돈 관리의 중요한 원칙을 알게 되었다. '틀'이 중요하다는 사실 말이다.
우리는 이전 챕터에서 인플레이션과 장수 리스크라는 위협 앞에서 지출을 관리하고 '생존 자금'을 확보하는 법을 배웠다. 심적회계를 이용해 생존을 위한 '방어' 시스템을 만든 것이다. 하지만 생존을 넘어 풍요로운 노후를 만들려면, 이제 '자산을 모으고 불려나가는'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한 투자 방법이나 투자 상품에 대해서만 생각한다. 하지만 그건 과거의 나와 같은 실수를 저지르는 것과도 같다. 전략 만큼 체계도 중요하다. 이제 자산을 불리는 단계에서 심적 회계를 적용하는 법을 알아보겠다.
자산이란 감각을 위한 그릇

대부분의 사람이 자산 불리기에 실패하는 이유는 돈이 없어서가 아니다. 돈이 '뒤죽박죽 섞여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통장에서 생활비도 쓰고, 저축도 하고, 비상금도 빼서 쓴다. 이는 모든 식재료를 냉장고 '야채 칸' 하나에 쑤셔 넣는 것과 같다. 우유가 김치 냄새에 절고, 고기가 녹아 물이 흐른다. 결국 각각의 식재료가 어디에 쓰일지에 대한 감각이 흐려진다. 이처럼 돈이 섞여 있으면, 돈이 '자산'이라는 목적을 위한 재료가 아니라, 그저 당장 쓸 수 있는 '소비 자원'으로만 보이게 된다.
예를 들어 보자. 갑자기 복권에 당첨되어 5,000만 원이 생겼다. 어떤 마음이 들까? 대부분 사람들은 '무엇에 소비할지'부터 고민한다. 차를 살까? 명품을 살까? 여행을 갈까? 즐거운 고민에 빠진다. 돈은 마치 당장의 쾌락을 채워줄 '총알'로만 보인다.
하지만 돈은 소비를 위한 '총알'일 뿐만 아니라, 무언가를 '생산'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통장에 찍힌 5,000만 원이 아니라, 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무인 아이스크림 가게를 떠올려보자. 업체에서 아이스크림은 자동으로 채워주고, 사람들은 알아서 값을 지불한다. 그리고 매달 내 통장엔 자동으로 돈이 들어온다. 당장 이 가게를 팔아 5,000만 원으로 내가 좋아하는 자동차나 명품 가방을 살 수는 없겠지만, 매달 들어오는 돈이 쌓여 언젠가 그 이상의 가치를 만들어 줄 것이다.
이것이 교환재(Medium of exchange)와 자산(Asset)의 근본적인 차이다. 다른 물건과 바꾸기 위한 '교환'의 수단이냐, 아니면 그 자체로 다른 부가가치를 만들어내는 '생산'의 수단이냐의 차이다. 이는 자본주의를 다루는 수많은 책에서 강조하는 내용, 부가 아닌 '자산을 쌓아야 한다'는 단순한 진리다.
그러나 이것이 어려운 이유는 돈을 '자산'으로 바라보는 관점 자체를 갖기 어렵기 때문이다. 우리는 눈으로 보거나 직접 경험하지 않은 것은 믿기 어려워한다. 통장에 찍힌 '50,000,000'이라는 숫자는 다른 물건으로 바꾸며 쾌락을 안겨준 경험은 많아도, 그 자체가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자산'으로 활약한 경험은 별로 없기 때문이다.
전혀 성격이 다르지만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는 점이 사람들을 더 혼란스럽게 한다. 특히 금융 자산은 이런 감각을 유지하기 더 어렵게 만든다. 부동산, 자판기, 선박처럼 실물 형태가 확실한 것들은 '자산'이라는 감각을 갖기 쉽다. 하지만 금융 자산, 예를 들어 주식 5,000만 원어치는 당장 자동차로 바꿀 수 있는 '교환재' 5,000만 원과 똑같은 '숫자'로 보인다. 그 둘의 성격 차이를 직관적으로 느끼기 어려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5,000만 원의 현금과 아이스크림 가게의 '모양'이 다르듯, 최소한 내 돈을 다른 '형태'로 보관해야 한다. 아예 다른 계좌에 돈을 나눠 담음으로써, 돈 속에 뒤섞인 '교환재'와 '자산'의 성격을 의식적으로 분리하는 감각을 키워야 한다. 마치 똑같은 돼지고기라도 그 형태와 보관 장소를 달리해 다른 요리 재료로 구분하는 것과 같다. (만두 속에 넣기 위해 다져놓은 돼지고기를 당장 배고프다고 구워 먹다가는 아내에게 등짝을 맞을 것이다. 잘게 다져져 냉동고 속에 들어간 순간, 그 돼지고기는 '구이용'이라는 딱지가 떨어진다.)
이 글에서는 세 가지 형태의 그릇, 즉 세 개의 핵심 계좌를 제안한다. 이는 '재무설계의 아버지'라 불리는 해롤드 이븐스키(Harold Evensky)가 제안한 '3개의 바구니 전략(Three-Basket Strategy)'을 노후준비에 맞게 응용한 것이다. 그는 주로 은퇴 후 마음이 편안한 자산 인출을 위해 이 전략을 강조했지만, 자산을 모으는 생애 전체에 걸쳐 이 세 가지 그릇을 구별하는 것 역시 매우 유용한 전략이된다.
돈의 속성을 세 가지로 나눠 담을 '수납함'이 생기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거기에 맞춰 돈을 정리하고 자산을 채워나가게 된다. 더이상 주식계좌에 찍혀 있는 돈을 현금이랑 같이 취급하고, 주식 종목을 슬롯머신처럼 여기지 않게 된다. 내 주식들은 잘 정리된 ‘자산’이 된다. 이제 이 세 가지 그릇의 정체와, 이런 전략의 장점을 더욱 구체적으로 알아보겠다.
왜 3개의 바구니인가? 시간 지평에 따른 자원 배분

개인의 재무관리는 펀드가 자산을 불리거나 기업이 재무 의사결정을 하는 것과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펀드나 기업은 '자산 가치의 극대화'라는 비교적 단순한 목표를 갖는다. 물론 재무 구조의 효율성을 위해 긴축을 할 때도 있지만, 결국에는 더 큰 부를 향한 단 하나의 목표가 존재한다.
그러나 개인의 재무관리는 단순히 부의 증대만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물론 평생 부의 증식을 목표로 삼고 자손에게 부를 이전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한정된 삶' 안에서 '최대의 행복'을 누리는 것을 가장 큰 목표로 삼는다.
여기서 가장 큰 어려움은 개인이 마주한 '소득과 지출의 불균형'이다. 돈을 버는 시간은 한정되어 있는데(소득), 돈을 써야 할 시간(지출)은 평생에 걸쳐 있기 때문이다. 즉, 개인 재무는 기업이나 펀드와 달리 '언젠가 현명하게 소비될 것'을 전제로 하며, '시간에 따른 자원 배분'이 핵심적인 과제가 된다.
만약 우리가 죽을 때까지 부를 증대시키는 것만을 목표로 한다면, 계좌를 나눌 필요도 없다.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지출만 남기고 모든 자원을 투자 자산으로 바꿔 '불리기'만 하면 된다. 펀드가 최소한의 운용 보수만 받고 모든 돈을 투자에 투입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개인은 그렇게 할 수 없다. 언젠가 이 돈을 가장 적절한 시기에 가장 큰 효용을 누리는 방식으로 '소비'하도록 설계해야 한다. 그러므로 당장의 '소비'를 위한 돈과 '자산 축적'을 위한 돈은 반드시 구별될 필요가 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자산을 축적하기 위한 계정을 하나로만 유지할 경우, '과연 이 돈을 언제 인출해야 하는가?'라는 문제가 생긴다. 우리의 삶이 ‘얼마를 벌고, 언제 은퇴해서, 정확히 언제까지 산다'는 식으로 단순하다면 이런 고민은 필요 없을 것이다. 60세까지 돈을 모으고, 60세부터 30년간 나눠 쓴다면 하나의 저축 계좌로도 충분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은퇴 시기도, 예상 수명도 정확히 알 수 없다. 사고, 질병, 실직 등 어떤 돌발 변수가 생길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내 모든 자산을 '아주 먼 미래(장기)' 계획에만 배분할 수는 없다. 지금 당장 소비할 필요는 없지만, 가까운 미래에 나의 지출을 감당해 줄 '예비군(중기)'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정리하자면, 개인의 돈은 각기 다른 목적과 '사용될 시간'을 갖는다. 그래서 나는 돈을 관리할 때 '시간 지평'에 따라 크게 세 가지로 나눌 것을 제안한다.
단기 자금 : 당장 쓸 생활비, 비상금이다. 언제든 꺼내 쓸 수 있는 유동성이 가장 중요하다.
중기 자금 : 3~5년 뒤의 목적 자금(결혼, 이사, 학자금 등)이다. 당장 필요는 없지만 조만간 필요할 수 있으니 안정성을 추구한다.
장기 자금 : 10년 이상 뒤에 필요할 노후 자금이다. 지금의 나는 이 돈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러니 성장성이 최우선이다.
3개의 그릇이 주는 명확한 이점
이 단순하면서도 직관적인 구분은 음식을 보관하는 것과 비슷하다.

냉장고 (단기): 당장 먹어야 할 식재료를 넣어 둔다. 언제든 요리에 활용하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