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하며
나는 금융 강사이자 문학연구자다. 이 두 가지를 동시에 말하면 대부분 고개를 갸웃한다. 어울리지 않는 조합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이 어울리지 않음이 오히려 두 영역을 함께 보는 데 꽤 쓸모가 있다고 생각한다. 얼마 전 해외문학 편집자로 유명한 한 인플루언서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금융이나 경제 관련 책을 절대 읽지 않는다고 했다. 읽다가 그런 내용이 나오면 책을 덮으면서 이렇게 말한다고 했다.
빨리 다른 책 읽어야지, 하마터면 경제상식 생길 뻔했다!
이 문장이 오래 머릿속에 남았다. 웃겼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뜨끔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나는 그 재미없다는 영역의 강사이니까.
재미는 무시할 수 없는 힘이다. 사람을 움직이는 동기 중에 재미만큼 강력한 것이 많지 않다. 공포도 의무도 사람을 움직이지만, 그것들은 오래가지 않는다. 재미는 다르다. 재미있으면 계속 하게 된다. 투자 공부를 처음 시작할 때의 열정이 왜 식는가. 어렵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재미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뜨끔하면서 동시에 생각했다. 그 편집자의 세계는 재미있는가? 문학은 재미있고, 금융은 재미없는가?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나는 인문학자들을 오래 지켜봤다. 흥미로운 현상이 있다. 대부분 재미가 없다. 특히 철학자 중에 유머가 있는 사람이 있는가 싶다. 희극을 연구하는 사람조차 웃기지 않다. 유머를 분석하고 논문을 쓰지만, 정작 그 자리에서 농담을 하는 사람은 없다. 유머를 논리의 언어로 해부하는 순간, 유머는 이미 유머이기를 멈추기 때문이다. 그들은 훌륭한 연구자가 되었지만, 결코 작가는 되지 못했다.
금융도, 인문학도, 같은 함정에 빠져 있다. 진지함이 전문성의 증거라고 믿는 것이다. 금융인은 숫자와 분석 뒤에 숨고, 인문학자는 이론과 개념 뒤에 숨는다. 양쪽 다 유머가 사라진 자리에 권위를 세운다. 그런데 정작 시장은 진지한 분석을 비웃듯 움직이고, 문학은 논문이 아니라 작품으로 사람을 움직인다. 진지함만으로는 닿지 못하는 곳이 양쪽 모두에 있다.
물론 재미가 곧 유머는 아니다. 재미의 형태는 다양하다. 그러나 재미와 유머 사이에는 분명한 교집합이 있다. 그리고 나는 그 교집합이 투자에서 생각보다 훨씬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공부를 즐겁게 만드는 수준이 아니라, 시장이라는 세계를 제대로 이해하는 방식으로서 작동한다.
우리는 투자 연구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금융 공학도가 아니란 전제하에) 실천가가 되어야 한다. 그 차이는 지식의 양이 아니라 태도에 있다. 논리가 닿지 않는 세계를 어떻게 대하느냐에 있다. 시장은 자주 설명되지 않고, 예측을 비웃으며, 인과관계 없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그 세계에서 진지함만으로 버티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힘들다. 유머는 그 힘을 준다.
카오스를 함께 사는 방식
시장이 불확실하다는 말은 이제 누구나 한다. 분산투자를 하고, 리스크를 관리하고, 장기적으로 보라고 한다. 맞는 말이다. 여태까지 내 글에서 계속 반복하는 말이다. 그런데 이 말들이 실제로 도움이 되는가. 폭락장 한가운데서 "불확실성은 원래 있는 것"이라는 말이 손 떨리는 걸 막아주는가. 지식으로 아는 것과 몸으로 사는 것은 다르다.
1637년 네덜란드에서 있었던 일이다. 한 선원이 항구 창고에서 점심을 먹다가 옆에 있던 것을 양파인 줄 알고 함께 먹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은 튤립 구근이었다. 당시에는 그것이 집 한 채 값이었다. 선원은 감옥에 갔다. 그는 그냥 배가 고팠을 뿐이었다.
이 이야기가 웃긴 이유는 하나다. 버블 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진지했다. 구근 하나에 집 한 채 값을 매기는 것이 완벽하게 합리적인 세계였다. 그런데 그 세계 밖에서 보면 그냥 양파다. 시장의 카오스는 언제나 이런 식이다. 안에서는 논리가 있고, 밖에서 보면 희극이다.
그런데 여기서 멈춰보자. 왜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웃음이 나오는가. 철학자들은 오래전부터 웃음의 기원을 탐구했다. 가장 강력한 답 중 하나는 불일치다. 우리는 기대한 것과 실제가 어긋날 때 웃는다. 양파여야 할 것이 집 한 채 값이 되는 순간, 논리가 갑자기 방향을 트는 순간, 예상이 완전히 빗나가는 순간, 그때 웃음이 나온다.
그런데 이것이 정확히 시장이 작동하는 방식이다. 좋은 실적에 주가가 내리고, 나쁜 소식에 주가가 오른다. 모두가 오를 것이라 믿을 때 꺾이고, 모두가 망했다고 할 때 반등한다. 시장은 끊임없이 불일치를 만들어낸다. 코미디와 시장은 같은 구조로 작동한다.
이것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역발상 투자와 같이 군중과 반대로 가는 투자 철학의 본질은 불일치를 읽는 능력이다. 남들이 기대하는 것과 실제 사이의 간극을 보는 것이다. 그것이 수익의 원천이다. 코미디언이 웃음을 만드는 방식을 생각해보자. 관객의 기대를 읽고, 그 기대가 향하는 방향을 파악한 뒤, 정확히 다른 곳을 찌른다. 역발상 투자자가 하는 일도 같다. 시장의 기대를 읽고, 그 기대가 만들어낸 가격의 쏠림을 파악한 뒤, 반대쪽에 선다. 유머 감각이 있는 사람은 이 간극에 익숙하다. 웃음이 나오는 지점을 본능적으로 감지하는 사람이, 시장이 만들어내는 불일치도 더 잘 본다. 코미디를 이해하는 사람이 시장을 이해한다. 과장처럼 들리지만, 뿌리가 같다.
문제는 우리가 항상 안에 있다는 것이다. 밖에서 보면 희극인 것을, 안에서는 볼 수가 없다. 그래서 투자자들은 설명하려 한다. 주가가 오른 이유, 내린 이유, 반등할 이유. 증권사 리포트는 언제나 화려하다. 거시경제 흐름, 금리 경로, 지정학적 리스크, 섹터별 전망이 쏟아진다. 읽고 나면 뭔가 알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란-미국 전쟁이 터졌을 때도 지정학 전문가들은 분주하게 설명했다. 트럼프가 이 전쟁을 선택한 이유, 미국이 얻는 전략적 이득, 중동 역학의 변화 등. 논리적이고 정교했다. 그런데 한 논평가가 이렇게 말했다. "단 한 번도 농담이라도 비논리적인 얘기를 해본 적이 없으신 분들 (답습니다.), 전쟁에 어떤 논리가 있습니까?" 이 한 문장이 그 모든 분석을 조용히 무너뜨렸다.
분석이 틀리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분석은 틀릴 수 있다. 문제는 틀려도 같은 방식으로 다시 설명한다는 것이다. 다음 리포트에서 새로운 논리를 세우고, 그 논리가 또 틀리면 다시 새로운 논리를 세운다. 한 번도 웃지 않는다. 한 번도 "우리가 틀렸다"를 가볍게 인정하지 않는다. 농담을 못 하는 사람들은 틀려도 멋지게 틀린다. 멋지게 틀리는 것이 습관이 되면, 틀렸다는 사실 자체가 보이지 않게 된다.
주의할 점은, 그렇다고 근거있는 투자와 분석이 무의미하다는 말이 아니다.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고 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말을 설명 불가능한 것은 무시해도 된다는 뜻으로 읽었다. 그러나 그의 요지는 달랐다. 말할 수 없는 것이 오히려 가장 중요할 수 있다. 다만 언어와 논리가 그것을 온전히 담지 못할 뿐이다. 침묵은 포기가 아니라 한계의 인정이다. 시장 분석도 마찬가지다. 분석은 중요하다. 다만 분석이 닿지 않는 곳이 있다는 걸 아는 것과 그 한계 앞에서 침묵 대신 피식 웃을 수 있는 것이 유머가 분석 옆에 있어야 하는 이유다.
마크 트웨인은 이렇게 말했다.
10월은 주식 투기를 하기에 특히 위험한 달이다. 나머지 위험한 달은 7월, 1월, 9월, 4월, 11월, 5월, 3월, 6월, 12월, 8월, 그리고 2월이다.
이것은 분석이 아니다. 그냥 웃음이다. 그런데 이 한 문장이 어떤 정교한 리포트보다 시장의 본질을 정확하게 짚는다. 시장은 언제나 위험하고, 특별한 예외 같은 건 없다는 것. 유머는 설명을 포기한 자리에서 나온다. 그리고 그 포기가 역설적으로 시장을 더 정직하게 본다. 정교한 분석을 하되, 그것이 틀릴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