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떤 감정에 대하여

2026년 4월, 삼성전자 노사 협상이 한동안 뉴스의 한 자리를 차지했다. 노조는 영업이익에 비례해 성과급을 분배해달라고 요구했고, 사측은 불황에 대비한 유보가 필요하다는 입장으로 맞섰다. 어디서 본 듯한 그림이다. 분배의 폭을 둘러싼 노사의 입장 차이는 어느 시대 어느 회사에든 있었다.
내가 이 사건을 며칠 동안 곱씹게 된 건 노사의 입장 차이 자체보다 사건을 둘러싼 한 가지 반응 때문이었다. 인터넷 댓글창에서, 가까운 모임의 대화에, 같은 종류의 문장이 반복되었다.
어떻게 주주보다 노동자가 더 많이 받는다는 거냐.
이 문장이 나올 때마다 묘한 감각이 들었다. 그 의문은 일견 자연스러워 보였다. 회사의 주인은 주주이고, 직원은 회사에서 일하는 사람이고, 그러니 주인이 더 가져가는 게 당연하다는 산수가 머릿속에 빠르게 떠오른다. 한국의 많은 개인투자자들이 이런 산수의 어딘가에 익숙하다. 나도 그렇다. 분노라기보다는 익숙한 감각의 발로에 가까웠다.
그런데 이 익숙함이 거꾸로 마음에 걸렸다. 너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반응일수록 한 번쯤 멈춰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어떤 사고방식을 너무 깊이 내면화하면, 그 사고방식의 한계는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내면화된 감각은 보이지 않는 채로 우리의 판단을 매일 조용히 지배한다. 투자자에게 이건 단순히 세계관의 문제가 아니다. 손익계산서에 직접 영향을 주는 문제다.
이 글은 그 익숙함을 한 번 비스듬히 보려 시도해본다. "어떻게 주주보다 노동자가 더 받느냐"는 생각은 어디서 오는가. 그 감각이 전제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 전제가 우리에게 무엇을 보게 하고, 무엇을 보지 못하게 하는가.
미리 해두고 싶은 말이 하나 있다. 나는 어느 쪽이 옳고 그른지 따지려고 글을 쓴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각자의 판단 영역이다. 또한, 투자라는 행위가 어떻게 따져도 개인적 이익 추구에 가깝고, 그 자체에 잘못이 있지 않다는 것에도 동의한다. 다만 하나의 가설이 있다. 한 가지 프레임으로만 시장을 보는 일은, 그 시각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우리가 그것의 한계를 보지 못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한계는 도덕의 문제이기 전에 실용의 문제다.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이 결국 우리의 수익률을 깎고 있을 수 있다는 뜻이다.
이 가설을 따라가면서, 몇 가지 우회로를 거치게 될 것이다. 회계가 잡지 못하는 가치들, 영국 철학자의 한 문장, 투자업계의 한 좌우명, 그리고 가장 사적인 동기가 갖는 의외의 공적 얼굴까지 살펴본다. 우회가 좀 길어 보일 수 있지만, 도착하는 자리가 처음의 감각을 다르게 보게 해줄 것이라 기대한다.
2. 제로섬 사고의 함정
"어떻게 주주보다 노동자가 더 받느냐"는 문장의 밑바닥에 깔린 사고를 한 번 천천히 풀어보자. 거기에는 의외로 단순한 산수 하나가 있다. 누군가가 더 가져가면 내가 덜 가져간다는 산수다. 회사가 만들어낸 이익은 정해진 크기의 파이로 가정되고, 이 파이를 주주와 직원이 나눠 가져야 하니, 한쪽이 많이 가져가면 다른 쪽 몫이 줄어든다는 그림이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그려진다.
이 산수가 잘못되었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단기적으로 보면 이 산수는 분명히 맞다. 올해의 영업이익에서 직원에게 더 분배하면 주주에게 갈 몫이 줄어든다는 것은 회계적 사실이다. 핵심은 이 산수가 잘못이라는 게 아니라, 너무 자연스러워서 우리가 그 한계를 보지 못한다는 점이다. 모든 산수가 다 똑같은 산수는 아니다. 어떤 산수는 좁은 시간의 창 안에서만 정확하다.
그런데 거시적인 시간 축에서 살펴보면, 우리가 자본주의의 가장 강력한 동력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대부분 정해진 크기의 파이를 다투는 게임이 아니었다. 좋은 회사는 직원에게 더 좋은 보상을 주면서도 주주에게 더 좋은 수익을 돌려준다. 좋은 산업은 한 회사가 다른 회사를 죽이는 영역이 아니라 경쟁사들이 함께 시장을 키우는 영역에서 만들어진다. 좋은 기술 혁신은 누군가의 일자리를 빼앗는 동시에 더 많은 종류의 새 일자리를 만들어낸다.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부의 총량은 인류 역사에서 한 번도 정해진 크기였던 적이 없다.
이 두 풍경, 정해진 파이를 다투는 풍경과 파이 자체가 커지는 풍경은 어느 한쪽이 진실이고 다른 한쪽이 거짓인 관계가 아니다. 둘 다 진실이다. 다만 보이는 시간 지평이 다를 뿐이다. 짧은 시간을 놓고 보면 분명히 정해진 파이를 두고 다투는 그림이 맞고, 긴 시간을 놓고 보면 파이 자체가 커지는 그림이 맞다. 그러므로 내일까지의 수익을 생각하는 사람과 10년 뒤를 생각하는 사람은 같은 회사의 같은 결정을 보고도 완전히 다른 그림을 본다.
여기서 한 가지 자연스러운 질문이 따라온다. 그렇다면 우리는 보통 어느 쪽 그림을 보고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우리가 처한 환경에 따라 꽤 달라진다. 어떤 환경은 자연스럽게 우리에게 긴 시간 지평을 떠올리게 하고, 어떤 환경은 반대로 짧은 시간 지평으로 우리를 끌어당긴다. 그리고 투자라는 활동은 후자에 가까운 환경처럼 보인다.
매수자가 있으면 매도자가 있고, 어떤 종목이 오르면 누군가는 그 차익을 가져가고 다른 누군가는 그만큼 못 벌게 된다. 매일 매시간의 가격 변동이 손익으로 환산되어 눈앞에 표시된다. 차트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세상은 점점 더 정해진 크기의 파이를 두고 다투는 풍경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런 풍경에 오래 노출될수록 우리의 시야는 자연스럽게 짧은 시간 단위에 맞춰진다. 우리가 의식적으로 짧게 보려고 해서가 아니라, 환경 자체가 우리의 시간 감각을 그렇게 빚어낸다.
그러므로 정해진 파이의 사고를 의심한다는 것은 도덕의 문제가 아니다. 잃어버리고 있는 시간축을 회복하는 일이고, 그 결과 자기가 보지 못하던 가치 창출의 경로를 보게 되는 일이다. 정해진 파이의 사고가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만 가지고는 가치의 절반밖에 보지 못한다는 뜻이다.

이 시야에서 다시 처음의 이야기로 돌아가보면, 사건이 조금 다르게 읽힌다. "어떻게 주주보다 노동자가 더 받느냐"는 반응은 잘못된 지적이 아니라, 짧은 시간축으로 압축된 사고가 자연스럽게 만들어낸 풍경에 가깝다. 그 시간축을 한 칸만 더 길게 잡으면 같은 사건이 다른 모양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직원에게 더 분배하는 결정이 단기적으로는 주주의 몫을 줄이지만, 장기적으로는 그 회사가 가진 무형의 가치, 숙련, 신뢰, 인재 풀, 조직의 학습 능력을 지키는 일이 될 수도 있다.
이 가능성을 가장 정직하게 측정하고 관리해보려 했던 동시대의 어휘가 하나 있다. 지금은 너무 닳아서 듣기만 해도 피로감이 드는 단어가 되었지만, 그 어휘가 처음 던진 질문은 여전히 살아 있다. 그 어휘로 잠시 우회해보자.
3. 숫자가 잡지 못한 것들
ESG라는 단어는 최근 몇 년 사이 가장 심하게 닳은 어휘 중 하나가 되었다. 펀드 마케팅의 라벨로 쓰이고, 기업 홍보 페이지의 장식이 되고, 어떤 자리에서는 이 단어를 입에 올리는 것만으로 약간의 멋쩍음이 따라붙기도 한다. 이런 변질에 대한 피로감은 정당하다. 본래의 문제의식이 무엇이었든, 그 단어가 실제로 사용되는 풍경이 너무 많이 변했다.
다만 한 가지를 분리해서 보고 싶다. 단어가 닳았다는 것과 그 단어가 처음 답하려고 했던 질문이 사라졌다는 것은 다른 일이다. 라벨이 너덜너덜해졌다고 해서 라벨이 가리키던 문제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ESG가 처음 던진 질문은 여전히 살아 있고, 어떤 의미에서는 점점 더 절박해지고 있다. 그 질문을 한 번 다시 꺼내보고 싶다.
질문은 의외로 회계의 영역에서 출발한다. 우리가 지금 사용하는 회계 시스템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그 기본 골격이 잡혔다. 그 시대의 기업이 무엇을 가지고 가치를 만들어냈는지를 떠올려보면 이 시스템이 왜 지금의 모양을 갖게 되었는지가 보인다. 공장이 있었고, 기계가 있었고, 재고가 있었다. 자산은 만져지고 셀 수 있는 것들이었고, 이익은 그 자산이 만들어낸 매출에서 비용을 빼면 나오는 것이었다. 회계는 이 환경에 맞게 설계되었다.
그런데 21세기 기업의 풍경은 많이 다르다. 한 추정에 따르면 현재 미국 S&P 500 기업 시가총액의 80% 이상이 무형자산에서 온다(Ocean Tomo, etc.). 인적자본, 브랜드, 연구개발의 축적, 조직 문화, 데이터, 고객과의 신뢰, 플랫폼 안에 형성된 네트워크 같은 것들이다. 만져지지 않고 셀 수 없는 자산들이 기업가치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된 시대다. 그런데 회계 시스템은 여전히 19세기 말에 설계된 골격으로 작동하고 있다. 무형자산은 자산화되지 않고, 그것을 만들고 지키는 데 들어가는 지출은 대부분 '비용'으로만 기록된다.
이 어긋남이 만들어내는 가장 분명한 사례가 인적자본이다. 한 회사가 직원들에게 평균보다 좋은 보상을 주고, 좋은 교육 기회를 제공하고, 안정적으로 고용한다고 해보자. 손익계산서에서 이 모든 것은 '인건비'라는 한 줄의 비용으로 잡힌다. 자산 항목 어디에도 잡히지 않는다. 그러니까 단기적으로 이익을 늘리고 싶은 경영자에게 가장 손쉬운 길은 인건비를 줄이는 것이 된다. 비용이 줄어들면 그 자리에서 이익이 늘어나는 것으로 잡힌다. 그것이 ‘무엇을 잠식하면서 늘어난 이익’인지는 회계가 말해주지 않는다.
정말로 잠식되는 것은 무엇일까. 숙련된 직원이 회사를 떠나고, 남은 직원의 사기가 떨어지고, 우수한 인재가 더 이상 그 회사를 선택하지 않게 되고, 조직 안에 쌓여 있던 학습이 흩어진다. 이 모든 것이 사실은 자산의 손상이다. 그러나 회계 장부에는 단지 '인건비 절감'이라는 좋은 뉴스만 찍힌다. 회계는 단기 이익이 늘었다고 알려주는데, 실제로는 장기 자산이 깎이고 있는 셈이다.
ESG가 처음 답하려 했던 문제가 이 자리에 있다. 단기 회계로는 잡히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가치를, 어떻게 측정하고 관리할 것인가. 환경(E)도 거버넌스(G)도 같은 구조의 문제다. 단기 이익을 위해 환경 외부효과를 사회에 떠넘기거나, 자의적인 의사결정 구조를 방치하거나 한 결과가 결국 기업 자체로 돌아온다. 그러나 그 돌아옴은 회계 장부 어디에도 미리 잡히지 않는다. 사고가 터지고 나서야, 평판이 무너지고 나서야 비로소 비용으로 인식된다. ESG라는 어휘는 이 어긋남을 미리 측정하고 관리해보려는 시도였다. 그 시도가 충분히 정교했는가는 따로 논의할 일이지만, 시도 자체가 답하려 했던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한국에서 ESG의 세 글자 중 가장 저평가된 것이 S(Social), 그중에서도 인적자본 영역이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E는 규제로 어느 정도 강제되는 영역이 되었고, G는 코리아 디스카운트 담론에 힘입어 점차 시장의 관심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S는 여전히 "인건비 절감 = 경영 효율"이라는 오래된 관념 안에 갇혀 있다. 직원에게 잘 대해주는 회사를 보면 좋은 회사라기보다는 비용 통제가 안 되는 회사라는 의심이 먼저 드는 풍토가 있다. 이 풍토가 기업의 의사결정에 미치는 압력은 결코 작지 않다.
이 자리에서 한 가지 연구를 짧게 소개하고 싶다. 런던비즈니스스쿨의 알렉스 에드먼스(Alex Edmans)가 2011년에 발표한 논문이다. 그는 미국에서 매년 발표되는 '일하기 좋은 100대 기업' 명단에 들어간 기업들로 포트폴리오를 만들어 26년간의 수익률을 추적했다. 결과는 분명했다. 이 포트폴리오는 같은 기간 시장 평균을 의미 있게 상회했다.
이 연구가 흥미로운 이유는 결과 자체보다 그가 출발한 질문에 있다. 에드먼스가 처음 가졌던 가설은 오히려 회의적이었다. 효율적 시장 가설이 맞다면, 직원 만족도가 높다는 정보는 이미 주가에 반영되어 있어야 한다. 모두가 알고 있는 정보로는 초과수익을 낼 수 없는 것이 시장의 기본 원리다. 그러므로 이 포트폴리오의 수익률은 시장 평균과 다르지 않아야 한다는 게 그의 처음 생각이었다.
그런데 결과는 달랐다. 의미 있는 초과수익이 나왔다. 그가 이 결과를 어떻게 해석했는가가 그의 후속 작업의 출발점이 되었다. 그의 결론은 이렇다. 시장이 무형자산을, 특히 인적자본을 체계적으로 과소평가한다는 것이다. 회계가 잡지 못하니 가치가 보이지 않고, 보이지 않으니 가격에 반영되지 않고, 그래서 그 자산의 진짜 가치를 알아본 사람만이 초과수익을 가져갈 수 있게 된다.
에드먼스는 이 통찰을 바탕으로 <Grow the Pie>라는 책을 썼다. 제목이 핵심을 담고 있다. 기업가치는 정해진 크기의 파이가 아니라 키울 수 있는 파이다. 직원에게 잘하는 것이 주주의 몫을 깎는 것이 아니라, 파이 자체를 키워서 결과적으로 주주의 몫도 더 커지게 만드는 일이 될 수 있다. 그가 이 책에서 거듭 강조하는 것은 이것이 도덕적 권유가 아니라 실증 연구에서 도출된 관찰이라는 점이다. 좋은 회사가 좋은 주식이 되는 메커니즘이 실제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관찰을 한국으로 옮겨놓고 보면 풍경이 한층 구체적으로 보인다. 지난 몇 년간 한국에서 가장 자주 거론된 산업적 우려 중 하나는 우수한 공학 인재가 의대로 빠져나간다는 흐름이었다. 이 흐름을 막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신호는 결국 무엇인가. 정부의 정책도, 산업계의 호소도 작용하겠지만, 가장 직접적으로 작동하는 신호는 보상 구조다. 공학을 선택한 사람이 그 선택의 대가로 무엇을 받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정직한 지표 말이다.
이 시야에서 보면 한 회사의 성과급 결정은 그 회사의 분배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산업 전체의 인재 풀에 보내는 신호가 된다. 삼성전자가 어떻게 분배하느냐는 지금 이공계 진학을 고민하는 고등학생의 선택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그 고등학생이 10년 뒤 어디서 일하게 되는지가 한국 산업의 다음 10년을 일정 부분 결정한다. 이 긴 인과 사슬이 단기 회계 장부 어디에도 잡히지 않는다.
다시 삼성전자 사건으로 돌아가보자. "어떻게 주주보다 노동자가 더 받느냐"는 반응의 자연스러움은, 회계가 보여주는 영역만 보고 회계가 잡지 못하는 영역을 빠뜨린 시야의 산물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 시야가 잘못되었다는 게 아니다. 다만 그 시야만으로는 가치의 절반밖에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짚어두고 싶다. 보지 못한 절반이 자기 수익률에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를 모른 채로 자신의 시야를 신뢰하는 것은, 투자자에게 가장 위험한 자기 신뢰일 수 있다.
그런데 여기까지 오니 한 가지 더 큰 질문이 따라온다. 이 모든 것이 ESG라는 한 영역의 문제일 뿐일까, 아니면 우리가 세상을 보는 방식 전체에 걸쳐 있는 더 큰 패턴의 한 사례일까.
4. 망치 한 자루의 한계
지금까지 우리는 한 회사의 분배 갈등에서 출발해, 그 분노가 짧은 시간축으로 압축된 사고가 만들어낸 풍경이라는 점, 그리고 이 짧은 시간축의 사고가 회계라는 구체적 장치 안에서 어떻게 단기 이익을 위해 장기 자산을 잠식하는지를 살폈다. 그런데 한 가지 솔직한 의문이 든다. 이 모든 것이 ESG라는 한 영역의 문제, 회계 시스템이라는 기술적 결함의 사례일 뿐일까.
그렇다면 회계 기준이 개정되고 무형자산 측정 기법이 발전하면 우리는 본래의 합리적 산수로 돌아갈 수 있다. 하지만 의심이 드는 지점이 있다. 짧은 시간축으로 모든 것을 환산하고, 정해진 파이의 산수만 자연스럽게 떠올리고, 자기 결정의 비용을 과소평가하는 이 패턴이 정말로 회계 제도 안에서만 작동하는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세상을 보는 방식 전체에 깔려 있는 더 깊은 무엇인가의 표면 효과인가.
이 질문을 본격적으로 다루기 위해 잠시 19세기 영국으로 우회하고 싶다. 존 스튜어트 밀이 1859년에 출간한 <자유론>(On Liberty)은 흔히 표현의 자유에 관한 고전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책을 직접 펼쳐보면 약간 의외의 인상을 받게 된다. 밀이 옹호하려 했던 것은 단순히 사람들이 자기 의견을 말할 수 있는 권리가 아니었다. 그가 더 깊이 우려했던 것은 사회가 다수의 의견에 의해 점차 한 가지 색깔로 물들어가는 풍경이었다.
그는 이것을 '다수의 횡포(tyranny of the majority)'라고 불렀다. 법이 사람을 가두지 않더라도, 사회 전체가 한 가지 의견만 정상으로 여기고 다른 의견을 비정상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형성되면, 사실상의 사상 통제가 일어난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었다. 그리고 이 통제의 가장 큰 피해자는 의외로 다수파 자신이라는 것이 그의 핵심 주장이었다.
왜 다수파 자신이 피해자인가. 이 질문에 대한 그의 답이 <자유론> 제2장의 가장 인상적인 대목이다. 밀은 이렇게 썼다. 자기 의견의 근거만 알고 반대 의견의 가장 강한 형태를 모르는 사람은, 자기 의견을 진정으로 안다고 할 수 없다(He who knows only his own side of the case, knows little of that). 자기 의견이 왜 옳은지를 안다고 믿지만, 사실은 그 의견에 가해질 수 있는 가장 날카로운 반론을 한 번도 견뎌보지 못한 채로 안다고 믿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그가 가진 것은 의견이 아니라 의견의 외피이고, 외피는 한 번 진지하게 두드려보면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드러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