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거철이다. 길거리마다 후보들의 공약이 적힌 현수막이 걸려있다. 건물 위며, 가로수 사이며, 선거 차량이며, 강렬한 색과 볼드한 문장들이 쏟아진다. 그중에는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것을 넘어, 속을 울렁거리게 만드는 것도 적지 않다.
예컨대, 버스가 밤낮으로 한 번 겨우 왕복하는 동네에 공항을 짓겠다는 약속, 혹은 무언가를 거저 나눠주겠다는 약속이 그렇다. 나는 그런 현수막 앞에서 속으로 ‘지긋지긋한 포퓰리즘’이라는 말을 떠올리곤 했다. 표를 얻으려는 헛된 약속이다. 그리고 그런 약속에 마음이 기우는 사람들을 떠올렸다. 얄팍한 수에 쉽게 넘어가는 이들이라고 여겼다. 그러면서 정작 나는 거기에 속지 않는다는 은근한 자부심을 품었다. 그렇게 누군가의 공약을 포퓰리즘이라 부르는 말 안에는, 대중을 한 수 아래로 보는 시선과 나는 그들과 다르다는 작은 우쭐함이 분명히 섞여 있었다.
또 다른 현수막 앞에서도 마음이 편치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어떤 말들은 특정한 집단을 향한 미움을 부추긴다. 성별로, 세대로, 계층으로, 국적으로. (인종을 가르는 말은 아직 우리 사회에서 그만큼 크지는 않다.) 사람을 갈라 세우고 한쪽을 향한 분노를 부추겨 표를 끌어모은다. 사실 편을 갈라 한쪽을 미워하게 만드는 일은 가장 오래된 정치 전략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회의 틈을 더 벌려놓는 일이며, 다수에 속한 사람들조차 끝내 자기 자유를 잃고 마는 결말이 된다. 역사가 거듭 보여주었던 바이다. 그런데도 혐오의 말에 표가 모이는 것을 볼 때면 나는 일종의 염증을 느꼈다. 그리고 그 숨막히는 감각 끝에는, 저렇게 쉽게 휩쓸리는 사람들을 향한 옅은 경멸이 있었다.
이 마음이 어디서 오는지 나는 어렴풋이 안다. 무언가를 오래 들여다보고 공부한 사람일수록 이런 피로에서 자유롭기 어렵다.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세상을 한 겹 더 깊이 들여다본다고 느낄수록, 그 깊이를 모르는 사람들과 나 사이에는 거리가 생긴다. 나에게는 보이는데, 어째서 사람들은 그걸 보지 못할까? 도대체 왜 사람들은 이미 증명된 문제 조차 반복할까?
그런데 사실, 그 거리감이 싫지만은 않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나 홀로 꿰뚫어 본다는 감각, 깨어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지적 우월감은 분명한 쾌감을 준다. 고백하자면 나 역시 그 쾌감을 동력 삼아 오랫동안 지적 유희에 빠져 살았고, 그런 태도로 제법 뜨거운 시절을 보냈다.
그리고 그 끝에서, 부끄럽지만 더 위험한 생각에 닿은 적이 있다. 한쪽에서는 헛된 약속에 넘어가고 다른 쪽에서는 미움을 부추기는 말에 끌리는 사람들을 번갈아 바라보다 보면, 이렇게 쉽게 흔들리는 이들의 손에 세상의 방향을 맡겨도 되는 것일까 하는 의심이 든다. 대중에 기댄 민주주의라는 제도 자체에 회의감을 느낀 것이다.
그런데 이런 감각은 책상 앞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철학이나 정치를 두고 대중이 틀렸다고 여기는 일에는 별다른 대가가 따르지 않는다. 틀려도 잃을 것이 없으니 마음껏 떠들 수 있다. 단지 괴짜 소리정도만 견디면 된다. 그러나 똑같은 감각을 돈 위에 얹어야 하는 자리에서는 다르다. 바로 시장 앞이다. 그곳에서는 내가 대중보다 우월하다는 믿음이 곧바로 계좌의 숫자로 정산된다. 나는 시장 앞에서도 내 고집을 버리지 못하는 편이다. 시장이 틀렸다고 우기는 것이다. 아직 사람들이 못 알아봐서 그렇지, 요즘 시장이 좀 이상하지, 하고 중얼거린다. 어쩌면 마음 깊은 곳에 대중은 어리석다는 생각을 여태 품고 있는지도 모른다.
시장은 옳은가 그른가. 이 물음은 투자의 세계에서도 오래된 논쟁거리다. 흥미롭게도 어설픈 이들이 아니라 역사에 이름을 남긴 거장들끼리 정반대 자리에 서 있다. 한쪽은 시장이 옳으니 이기려 들지 말라고 한다. 인덱스 펀드를 처음 만든 존 보글은 종목을 고르려 애쓰지 말고 시장 전체를 사서 가만히 들고 있으라고 했고, 시장을 이긴 가장 유명한 투자자인 워런 버핏조차 평범한 지수 펀드가 잘난 헤지펀드들을 이긴다는 데 돈을 걸어 손쉽게 그 내기를 이겼다. 다른 한쪽은 정반대다. 벤저민 그레이엄은 단기의 시장을 인기투표 기계라 부르며 가격이 가치에서 벗어나는 그 틈이 곧 기회라고 보았고, 조지 소로스는 모두가 한 방향으로 쏠렸을 때 홀로 반대편에 서서 큰돈을 벌었다.
고백하자면 나는 두 번째 편에 서고 싶어 한다. 시장이 틀렸고 그것을 먼저 알아본 내가 옳다는 쪽이다. 대중을 내려다보던 그 시선이 시장 앞에서도 똑같이 작동한다. 대중이 보지 못하는 것을 읽어낸 철학자들의 논의를 따라가며 지적 유희를 즐겼던 것처럼, 시장을 뛰어넘는 거장들의 투자 철학을 쫓으며 위안을 삼으려고 했다.
그런데 거장들에게 기대어 내 편을 확인하려 들면, 오히려 묘한 것이 드러난다. 같은 거장이라도 한쪽에서는 시장을 이길 수 없다 하고, 다른 쪽에서는 군중의 반대편에 서라고 한다. 거장들은 깔끔하게 두 편으로 갈라선 듯 보이지만, 막상 한 사람 안에서도 그 선이 흐려진다. 그렇다면 나는 대체 어느 편에 서야 하는가.
나는 문득 이 물음 자체가 처음부터 어딘가 잘못 놓인 것은 아닐까 의심하게 되었다. 옳고 그름을 가리기 전에, 조금 다른 질문 하나를 먼저 꺼내봐야지 않나 싶다. 대중이 틀렸고 자신이 옳다고 굳게 믿었던 사람들의 삶은 어땠을까? 과연 그 믿음 속에서 ‘마음’이 편안했을까. 수익률 보다 중요한 것 말이다.
앞서 던진 그 질문에 답하려면, 평소 잘 하지 않던 일을 한 번 해보아야 한다. 한 사람의 생각이 아니라 그 사람의 삶을 들여다보는 일이다.
학자나 철학자를 다룰 때 우리는 흔히 그 사람의 삶과 생각을 따로 떼어놓는다.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와 무관하게, 무엇을 썼고 무엇을 주장했는지만 들여다본다. 사람의 생각이 그의 삶과 동떨어져 홀로 설 때도 있으니, 그런 분리가 늘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생각과 삶이 깊이 얽혀 있을 때도 분명히 있다.
하이데거를 떠올려본다. 그의 철학이 아무리 깊다 해도, 그가 한때 나치당에 몸담고 그 체제에 협력했다는 사실을 지운 채 그를 읽어도 되는지 나는 잘 판단이 서지 않는다. 철학을 직업으로 삼은 학자라면 사상과 삶을 갈라 분석할 수 있고, 그것은 그것대로 정당한 작업이다. 다만 나처럼 철학을 학문의 도구가 아니라 내 삶의 도구로 빌려 쓰려는 사람에게는, 그 생각을 품고 산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가 자꾸 마음에 걸린다.
그래서 삶의 도구를 고를 때 나는 은근히 이런 것을 따지게 된다. 그 생각을 끝까지 밀고 간 사람이 불행했다면, 그 생각이 과연 보통 사람의 삶에 좋은 도구일 수 있을까.
투자에서도 다르지 않다. 큰돈을 번 사람이 곧 따라 할 만한 사람은 아니다. 제시 리버모어는 한 시대를 풍미한 전설적인 투자자였다. 그는 상상하기 어려운 큰돈을 벌었지만 그만큼 여러 번 파산했고, 끝내 스스로 권총을 들어 생을 마감했다. 그의 매매법이 아무리 화려해도, 그 방식을 그대로 따라 하는 일이 보통 사람에게 도움이 될지는 의문이다. 어떤 생각을 품고 산 사람에게서 내가 조용히 살피게 되는 것은, 결국 그 생각이 그의 삶을 어디로 데려갔는가 하는 점이다.
그래서 이 장에서 나는 철학자의 생각이 아니라, 먼저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려 한다. 그들의 사상이 보잘것없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다만 대중은 어리석고 자신은 깨어 있다는 그 감각을 누구보다 멀리까지 밀고 간 두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그 믿음이 그들을 편안하게 했는지를 묻고 싶을 뿐이다.
먼저 플라톤이다. 그의 출발점에는 한 사람의 죽음이 있다. 스승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시민들의 투표로 사형을 선고받고 독배를 마셨다. 플라톤은 자신이 속한 도시가, 자신이 아는 가장 지혜로운 사람을 다수결로 죽이는 장면을 지켜본 셈이다. 그 충격이 그의 평생을 따라다닌다.
그는 이렇게 물었던 것 같다. 가장 훌륭한 사람을 다수가 죽일 수 있다면, 그 다수에게 나라를 맡기는 일이 과연 옳은가. 『국가』에서 그가 내놓은 답은 단호하다. 나라는 선과 진리가 무엇인지 아는 소수, 곧 철학자가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다. 다수의 뜻이 곧 옳음은 아니라고, 그는 믿었다.
그가 남긴 한 이야기는 그 믿음이 어떤 것이었는지 더 또렷이 보여준다. 사람들은 어두운 동굴에 갇혀 벽에 비친 그림자만을 진짜라 여기며 살아간다. 그중 한 사람이 풀려나 동굴 밖으로 나가고, 처음으로 햇빛 아래 진짜 세계를 본다. 그는 동굴로 돌아와 사람들에게 그 사실을 알리려 하지만, 사람들은 그를 비웃는다. 심지어 그가 사람들의 사슬을 풀어주려 든다면, 사람들은 도리어 그를 붙잡아 죽이려 들 것이다. 플라톤은 그렇게 적었다. 진실을 들고 돌아온 자를 무리가 죽인다는 이 이야기는, 독배를 든 자기 스승의 최후를 그대로 닮았다.
그렇다면 그 믿음은 그를 편안하게 했을까. 플라톤은 자기 생각을 머릿속에만 두지 않았다. 그는 시칠리아의 시라쿠사로 건너가, 그곳의 젊은 참주를 철학자가 다스리는 군주로 길러내려 했다.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 바다를 건넜다. 그러나 그 시도는 번번이 어그러졌다. 그는 궁정의 음모에 휘말렸고, 신변이 위태로운 지경에 몰리기도 했다. 가장 지혜로운 자가 다스려야 한다는 그 확신을 현실에 옮기려던 노력은, 끝내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그를 지치게 했다. 그는 어쩌면 옳았는지도 모른다. 다수가 가장 훌륭한 사람을 죽였다는 그의 분노에는 근거가 있었다. 그러나 옳다는 것이 그를 편안하게 하지는 않았다. 스승의 죽음에서 생긴 상처는 끝까지 아물지 않았다.

그로부터 이천 년이 지나, 또 한 사람이 같은 눈으로 군중을 바라보았다. 더 날카로운 눈이었다. 프리드리히 니체다. 나는 이전 글에서 니체에게 투자의 이유를 물은 적이 있다. 그 글에서 나는 니체의 개념을 빌렸다. 남의 시선에 반응하며 사는 노예의 태도와 스스로 가치를 세우는 주인의 태도를 가르고, 시장 앞에서도 남이 매기는 점수판이 아니라 자기 기준 위에 서는 투자자가 되자고 적었다. 지금도 그 말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홀로 서는 고독은 사람의 판단을 날카롭게 만든다. 모두가 한쪽으로 갈 때 혼자 멈춰 서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군중을 따라가지 않으려는 투자자에게 니체만큼 든든한 우군도 드물다. 그런데 그때 나는 니체의 생각만 빌렸을 뿐, 정작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는 들여다보지 않았다.
니체가 군중을 어떻게 보았는지는 분명하다. 그는 다수가 공유하는 도덕을 무리의 도덕이라 부르며 낮춰 보았고, 안락에 만족한 채 더 높은 것을 바라지 않는 인간, 이른바 “마지막 인간”을 가장 경계했다. 그가 그린 차라투스트라는 십 년의 산속 고독을 끝내고 사람들에게 자기 깨달음을 전하러 산을 내려온다. 그러나 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비웃는다.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말이 무리를 위한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그는 다시 홀로 물러난다.
그렇다면 그 생각을 품고 산 니체 자신의 삶은 어땠을까. 그는 평생 지독하게 외로웠다. 그의 책은 살아생전 거의 팔리지 않았고, 그를 알아보는 사람도 드물었다. 그는 병을 안고 이 도시 저 도시의 셋방을 떠돌았으며, 가까웠던 사람들과의 관계도 하나둘 끊어졌다. 그리고 1889년 토리노에서, 그는 정신이 무너져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마지막 십여 년을 그는 정신을 놓은 채 보냈다.
군중과 거리를 두는 일은 분명 그의 시야를 날카롭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 거리감이 그를 누구보다 외롭게 만들었다. 무리에게서 멀어질수록 판단은 또렷해졌지만, 그 또렷함은 누군가가 다가오기 어려운 경계를 만들었다. 군중이 틀렸다는 감각은 사람을 영민하게 만드는 동시에, 그 마음에 천천히 독이 된다. 내가 들여다보지 않은 것이 바로 이 삶이었다.
플라톤과 니체, 고대와 근대의 두 사람은 같은 상처를 안고 있다. 둘 다 군중에게서 무언가 진짜를 보았다. 그들이 옳았는지 그른지를 나는 여기서 가리고 싶지 않다. 다만 조용한 한 가지가 마음에 남는다. 그들은 편안했는가. 두 사람의 삶을 들여다볼수록, 그 답은 아니었던 것 같다.
나를 불편하게 하는 것은 그다음이다. 나는 그 두 사람에게서 나를...





저도...그 땐 왜 그랬는지 누가 옳고 그른지 다투며 화내기 바빴다면, 지금 뒤돌아보면 다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사이좋게 지내기에도 짧은 인생, 싸우며 지내면 아깝더라구요.

진심으로, 투자를 넘어 삶을 대하는 자세를 되돌아보게 만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상담사의 관점에서 '이해'와 '안정'의 시선을 가지고 세상을 대하도록 노력해보겠습니다.
제게는 어떤 철학책 못지 않은 값진 글이었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너무 훌륭한 글입니다. 시장을 내담자로 보고 공감적 이해와 흔들림 곁에서 흔들리지 않기.. 스피노자나 다른 철학자 처럼 우매한 군중에 분노하기 보단 시장에 휩쓸려다니는 1인이지만... 정말 배움 가득한 글 감사합니다. 일전에 교육관련 봉사에서 상담사 선생님께서 아이들 상담해주시걸 곁에서 볼 기회가 있었는데, 상담사 분들이 정말 존경스러워졌었습니다. 말씀하신 교육과 훈련들을 통해서 그 극한 업무를 다루고 계신거였군요.

야-호⭐

시장 야-호⭐

깨닫지 못한 군중들에게 속터진다는 내용의 문장에서 내 얘긴데? 하면서 긴글을 끝까지 다 읽었네요.
공감에 가장 도움이 되는건 독서를 포함한 직간접적인 경험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번 장에 이런저런 이유로 소위 주도주는 안?못?탔지만 버블에 대한 여러 책과 군중심리에 대한 책을 읽고 지난 코로나 상승장을 겪고 나니 원래 주식시장은 이런 곳이려니 싶어서 그닥 포모 같은건 오지 않더군요.
앞으로도 좋은 글 부탁드립니다.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생각을 하지 않을까 싶어요. 마론백님이 풀어내신 글에 빠져들게 됩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상담 한번 해.주.시.겠.습.니.까?
깊이 있는 글 감사드립니다.

너무 멋진 글 감사합니다. 항상 글 읽으면서 많이 배웁니다.

올해 본 글중에 가장 와닿았던 글이었습니다.
감탄하며 읽었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좋은 글! 너무 잘 봤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