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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이라는 내담자
멋나들 연구소인문학과 투자

시장이라는 내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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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론백
2026.06.01조회수 27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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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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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학자이자 금융강사. 단순히 재무적 안정이나 부자되기를 넘어, 물질과 정신 모두 풍요로운 삶을 지향한다. 이를 '멋지게 나이들기'라는 철학으로 삼고, 이곳 <멋나들 연구소>에서 꾸준히 실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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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선거철이다. 길거리마다 후보들의 공약이 적힌 현수막이 걸려있다. 건물 위며, 가로수 사이며, 선거 차량이며, 강렬한 색과 볼드한 문장들이 쏟아진다. 그중에는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것을 넘어, 속을 울렁거리게 만드는 것도 적지 않다.


예컨대, 버스가 밤낮으로 한 번 겨우 왕복하는 동네에 공항을 짓겠다는 약속, 혹은 무언가를 거저 나눠주겠다는 약속이 그렇다. 나는 그런 현수막 앞에서 속으로 ‘지긋지긋한 포퓰리즘’이라는 말을 떠올리곤 했다. 표를 얻으려는 헛된 약속이다. 그리고 그런 약속에 마음이 기우는 사람들을 떠올렸다. 얄팍한 수에 쉽게 넘어가는 이들이라고 여겼다. 그러면서 정작 나는 거기에 속지 않는다는 은근한 자부심을 품었다. 그렇게 누군가의 공약을 포퓰리즘이라 부르는 말 안에는, 대중을 한 수 아래로 보는 시선과 나는 그들과 다르다는 작은 우쭐함이 분명히 섞여 있었다.


또 다른 현수막 앞에서도 마음이 편치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어떤 말들은 특정한 집단을 향한 미움을 부추긴다. 성별로, 세대로, 계층으로, 국적으로. (인종을 가르는 말은 아직 우리 사회에서 그만큼 크지는 않다.) 사람을 갈라 세우고 한쪽을 향한 분노를 부추겨 표를 끌어모은다. 사실 편을 갈라 한쪽을 미워하게 만드는 일은 가장 오래된 정치 전략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회의 틈을 더 벌려놓는 일이며, 다수에 속한 사람들조차 끝내 자기 자유를 잃고 마는 결말이 된다. 역사가 거듭 보여주었던 바이다. 그런데도 혐오의 말에 표가 모이는 것을 볼 때면 나는 일종의 염증을 느꼈다. 그리고 그 숨막히는 감각 끝에는, 저렇게 쉽게 휩쓸리는 사람들을 향한 옅은 경멸이 있었다.


이 마음이 어디서 오는지 나는 어렴풋이 안다. 무언가를 오래 들여다보고 공부한 사람일수록 이런 피로에서 자유롭기 어렵다.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세상을 한 겹 더 깊이 들여다본다고 느낄수록, 그 깊이를 모르는 사람들과 나 사이에는 거리가 생긴다. 나에게는 보이는데, 어째서 사람들은 그걸 보지 못할까? 도대체 왜 사람들은 이미 증명된 문제 조차 반복할까?


그런데 사실, 그 거리감이 싫지만은 않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나 홀로 꿰뚫어 본다는 감각, 깨어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지적 우월감은 분명한 쾌감을 준다. 고백하자면 나 역시 그 쾌감을 동력 삼아 오랫동안 지적 유희에 빠져 살았고, 그런 태도로 제법 뜨거운 시절을 보냈다.


그리고 그 끝에서, 부끄럽지만 더 위험한 생각에 닿은 적이 있다. 한쪽에서는 헛된 약속에 넘어가고 다른 쪽에서는 미움을 부추기는 말에 끌리는 사람들을 번갈아 바라보다 보면, 이렇게 쉽게 흔들리는 이들의 손에 세상의 방향을 맡겨도 되는 것일까 하는 의심이 든다. 대중에 기댄 민주주의라는 제도 자체에 회의감을 느낀 것이다.


그런데 이런 감각은 책상 앞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철학이나 정치를 두고 대중이 틀렸다고 여기는 일에는 별다른 대가가 따르지 않는다. 틀려도 잃을 것이 없으니 마음껏 떠들 수 있다. 단지 괴짜 소리정도만 견디면 된다. 그러나 똑같은 감각을 돈 위에 얹어야 하는 자리에서는 다르다. 바로 시장 앞이다. 그곳에서는 내가 대중보다 우월하다는 믿음이 곧바로 계좌의 숫자로 정산된다. 나는 시장 앞에서도 내 고집을 버리지 못하는 편이다. 시장이 틀렸다고 우기는 것이다. 아직 사람들이 못 알아봐서 그렇지, 요즘 시장이 좀 이상하지, 하고 중얼거린다. 어쩌면 마음 깊은 곳에 대중은 어리석다는 생각을 여태 품고 있는지도 모른다.


시장은 옳은가 그른가. 이 물음은 투자의 세계에서도 오래된 논쟁거리다. 흥미롭게도 어설픈 이들이 아니라 역사에 이름을 남긴 거장들끼리 정반대 자리에 서 있다. 한쪽은 시장이 옳으니 이기려 들지 말라고 한다. 인덱스 펀드를 처음 만든 존 보글은 종목을 고르려 애쓰지 말고 시장 전체를 사서 가만히 들고 있으라고 했고, 시장을 이긴 가장 유명한 투자자인 워런 버핏조차 평범한 지수 펀드가 잘난 헤지펀드들을 이긴다는 데 돈을 걸어 손쉽게 그 내기를 이겼다. 다른 한쪽은 정반대다. 벤저민 그레이엄은 단기의 시장을 인기투표 기계라 부르며 가격이 가치에서 벗어나는 그 틈이 곧 기회라고 보았고, 조지 소로스는 모두가 한 방향으로 쏠렸을 때 홀로 반대편에 서서 큰돈을 벌었다.


고백하자면 나는 두 번째 편에 서고 싶어 한다. 시장이 틀렸고 그것을 먼저 알아본 내가 옳다는 쪽이다. 대중을 내려다보던 그 시선이 시장 앞에서도 똑같이 작동한다. 대중이 보지 못하는 것을 읽어낸 철학자들의 논의를 따라가며 지적 유희를 즐겼던 것처럼, 시장을 뛰어넘는 거장들의 투자 철학을 쫓으며 위안을 삼으려고 했다.


그런데 거장들에게 기대어 내 편을 확인하려 들면, 오히려 묘한 것이 드러난다. 같은 거장이라도 한쪽에서는 시장을 이길 수 없다 하고, 다른 쪽에서는 군중의 반대편에 서라고 한다. 거장들은 깔끔하게 두 편으로 갈라선 듯 보이지만, 막상 한 사람 안에서도 그 선이 흐려진다. 그렇다면 나는 대체 어느 편에 서야 하는가.


나는 문득 이 물음 자체가 처음부터 어딘가 잘못 놓인 것은 아닐까 의심하게 되었다. 옳고 그름을 가리기 전에, 조금 다른 질문 하나를 먼저 꺼내봐야지 않나 싶다. 대중이 틀렸고 자신이 옳다고 굳게 믿었던 사람들의 삶은 어땠을까? 과연 그 믿음 속에서 ‘마음’이 편안했을까. 수익률 보다 중요한 것 말이다.





2

앞서 던진 그 질문에 답하려면, 평소 잘 하지 않던 일을 한 번 해보아야 한다. 한 사람의 생각이 아니라 그 사람의 삶을 들여다보는 일이다.

학자나 철학자를 다룰 때 우리는 흔히 그 사람의 삶과 생각을 따로 떼어놓는다.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와 무관하게, 무엇을 썼고 무엇을 주장했는지만 들여다본다. 사람의 생각이 그의 삶과 동떨어져 홀로 설 때도 있으니, 그런 분리가 늘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생각과 삶이 깊이 얽혀 있을 때도 분명히 있다.


하이데거를 떠올려본다. 그의 철학이 아무리 깊다 해도, 그가 한때 나치당에 몸담고 그 체제에 협력했다는 사실을 지운 채 그를 읽어도 되는지 나는 잘 판단이 서지 않는다. 철학을 직업으로 삼은 학자라면 사상과 삶을 갈라 분석할 수 있고, 그것은 그것대로 정당한 작업이다. 다만 나처럼 철학을 학문의 도구가 아니라 내 삶의 도구로 빌려 쓰려는 사람에게는, 그 생각을 품고 산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가 자꾸 마음에 걸린다.


그래서 삶의 도구를 고를 때 나는 은근히 이런 것을 따지게 된다. 그 생각을 끝까지 밀고 간 사람이 불행했다면, 그 생각이 과연 보통 사람의 삶에 좋은 도구일 수 있을까.

투자에서도 다르지 않다. 큰돈을 번 사람이 곧 따라 할 만한 사람은 아니다. 제시 리버모어는 한 시대를 풍미한 전설적인 투자자였다. 그는 상상하기 어려운 큰돈을 벌었지만 그만큼 여러 번 파산했고, 끝내 스스로 권총을 들어 생을 마감했다. 그의 매매법이 아무리 화려해도, 그 방식을 그대로 따라 하는 일이 보통 사람에게 도움이 될지는 의문이다. 어떤 생각을 품고 산 사람에게서 내가 조용히 살피게 되는 것은, 결국 그 생각이 그의 삶을 어디로 데려갔는가 하는 점이다.


그래서 이 장에서 나는 철학자의 생각이 아니라, 먼저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려 한다. 그들의 사상이 보잘것없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다만 대중은 어리석고 자신은 깨어 있다는 그 감각을 누구보다 멀리까지 밀고 간 두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그 믿음이 그들을 편안하게 했는지를 묻고 싶을 뿐이다.


먼저 플라톤이다. 그의 출발점에는 한 사람의 죽음이 있다. 스승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시민들의 투표로 사형을 선고받고 독배를 마셨다. 플라톤은 자신이 속한 도시가, 자신이 아는 가장 지혜로운 사람을 다수결로 죽이는 장면을 지켜본 셈이다. 그 충격이 그의 평생을 따라다닌다.


그는 이렇게 물었던 것 같다. 가장 훌륭한 사람을 다수가 죽일 수 있다면, 그 다수에게 나라를 맡기는 일이 과연 옳은가. 『국가』에서 그가 내놓은 답은 단호하다. 나라는 선과 진리가 무엇인지 아는 소수, 곧 철학자가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다. 다수의 뜻이 곧 옳음은 아니라고, 그는 믿었다.


그가 남긴 한 이야기는 그 믿음이 어떤 것이었는지 더 또렷이 보여준다. 사람들은 어두운 동굴에 갇혀 벽에 비친 그림자만을 진짜라 여기며 살아간다. 그중 한 사람이 풀려나 동굴 밖으로 나가고, 처음으로 햇빛 아래 진짜 세계를 본다. 그는 동굴로 돌아와 사람들에게 그 사실을 알리려 하지만, 사람들은 그를 비웃는다. 심지어 그가 사람들의 사슬을 풀어주려 든다면, 사람들은 도리어 그를 붙잡아 죽이려 들 것이다. 플라톤은 그렇게 적었다. 진실을 들고 돌아온 자를 무리가 죽인다는 이 이야기는, 독배를 든 자기 스승의 최후를 그대로 닮았다.


그렇다면 그 믿음은 그를 편안하게 했을까. 플라톤은 자기 생각을 머릿속에만 두지 않았다. 그는 시칠리아의 시라쿠사로 건너가, 그곳의 젊은 참주를 철학자가 다스리는 군주로 길러내려 했다.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 바다를 건넜다. 그러나 그 시도는 번번이 어그러졌다. 그는 궁정의 음모에 휘말렸고, 신변이 위태로운 지경에 몰리기도 했다. 가장 지혜로운 자가 다스려야 한다는 그 확신을 현실에 옮기려던 노력은, 끝내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그를 지치게 했다. 그는 어쩌면 옳았는지도 모른다. 다수가 가장 훌륭한 사람을 죽였다는 그의 분노에는 근거가 있었다. 그러나 옳다는 것이 그를 편안하게 하지는 않았다. 스승의 죽음에서 생긴 상처는 끝까지 아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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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이천 년이 지나, 또 한 사람이 같은 눈으로 군중을 바라보았다. 더 날카로운 눈이었다. 프리드리히 니체다. 나는 이전 글에서 니체에게 투자의 이유를 물은 적이 있다. 그 글에서 나는 니체의 개념을 빌렸다. 남의 시선에 반응하며 사는 노예의 태도와 스스로 가치를 세우는 주인의 태도를 가르고, 시장 앞에서도 남이 매기는 점수판이 아니라 자기 기준 위에 서는 투자자가 되자고 적었다. 지금도 그 말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홀로 서는 고독은 사람의 판단을 날카롭게 만든다. 모두가 한쪽으로 갈 때 혼자 멈춰 서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군중을 따라가지 않으려는 투자자에게 니체만큼 든든한 우군도 드물다. 그런데 그때 나는 니체의 생각만 빌렸을 뿐, 정작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는 들여다보지 않았다.


니체가 군중을 어떻게 보았는지는 분명하다. 그는 다수가 공유하는 도덕을 무리의 도덕이라 부르며 낮춰 보았고, 안락에 만족한 채 더 높은 것을 바라지 않는 인간, 이른바 “마지막 인간”을 가장 경계했다. 그가 그린 차라투스트라는 십 년의 산속 고독을 끝내고 사람들에게 자기 깨달음을 전하러 산을 내려온다. 그러나 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비웃는다.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말이 무리를 위한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그는 다시 홀로 물러난다.


그렇다면 그 생각을 품고 산 니체 자신의 삶은 어땠을까. 그는 평생 지독하게 외로웠다. 그의 책은 살아생전 거의 팔리지 않았고, 그를 알아보는 사람도 드물었다. 그는 병을 안고 이 도시 저 도시의 셋방을 떠돌았으며, 가까웠던 사람들과의 관계도 하나둘 끊어졌다. 그리고 1889년 토리노에서, 그는 정신이 무너져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마지막 십여 년을 그는 정신을 놓은 채 보냈다.


군중과 거리를 두는 일은 분명 그의 시야를 날카롭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 거리감이 그를 누구보다 외롭게 만들었다. 무리에게서 멀어질수록 판단은 또렷해졌지만, 그 또렷함은 누군가가 다가오기 어려운 경계를 만들었다. 군중이 틀렸다는 감각은 사람을 영민하게 만드는 동시에, 그 마음에 천천히 독이 된다. 내가 들여다보지 않은 것이 바로 이 삶이었다.


플라톤과 니체, 고대와 근대의 두 사람은 같은 상처를 안고 있다. 둘 다 군중에게서 무언가 진짜를 보았다. 그들이 옳았는지 그른지를 나는 여기서 가리고 싶지 않다. 다만 조용한 한 가지가 마음에 남는다. 그들은 편안했는가. 두 사람의 삶을 들여다볼수록, 그 답은 아니었던 것 같다.


나를 불편하게 하는 것은 그다음이다. 나는 그 두 사람에게서 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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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G가 처음 던진 질문은 여전히 살아 있고, 어떤 의미에서는 점점 더 절박해지고 있다. 그 질문을 한 번 다시 꺼내보고 싶다. 질문은 의외로 회계의 영역에서 출발한다. 우리가 지금 사용하는 회계 시스템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그 기본 골격이 잡혔다. 그 시대의 기업이 무엇을 가지고 가치를 만들어냈는지를 떠올려보면 이 시스템이 왜 지금의 모양을 갖게 되었는지가 보인다. 공장이 있었고, 기계가 있었고, 재고가 있었다. 자산은 만져지고 셀 수 있는 것들이었고, 이익은 그 자산이 만들어낸 매출에서 비용을 빼면 나오는 것이었다. 회계는 이 환경에 맞게 설계되었다. 그런데 21세기 기업의 풍경은 많이 다르다. 한 추정에 따르면 현재 미국 S&P 500 기업 시가총액의 80% 이상이 무형자산에서 온다(Ocean Tomo, etc.). 인적자본, 브랜드, 연구개발의 축적, 조직 문화, 데이터, 고객과의 신뢰, 플랫폼 안에 형성된 네트워크 같은 것들이다. 만져지지 않고 셀 수 없는 자산들이 기업가치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된 시대다. 그런데 회계 시스템은 여전히 19세기 말에 설계된 골격으로 작동하고 있다. 무형자산은 자산화되지 않고, 그것을 만들고 지키는 데 들어가는 지출은 대부분 '비용'으로만 기록된다. 이 어긋남이 만들어내는 가장 분명한 사례가 인적자본이다. 한 회사가 직원들에게 평균보다 좋은 보상을 주고, 좋은 교육 기회를 제공하고, 안정적으로 고용한다고 해보자. 손익계산서에서 이 모든 것은 '인건비'라는 한 줄의 비용으로 잡힌다. 자산 항목 어디에도 잡히지 않는다. 그러니까 단기적으로 이익을 늘리고 싶은 경영자에게 가장 손쉬운 길은 인건비를 줄이는 것이 된다. 비용이 줄어들면 그 자리에서 이익이 늘어나는 것으로 잡힌다. 그것이 ‘무엇을 잠식하면서 늘어난 이익’인지는 회계가 말해주지 않는다. 정말로 잠식되는 것은 무엇일까. 숙련된 직원이 회사를 떠나고, 남은 직원의 사기가 떨어지고, 우수한 인재가 더 이상 그 회사를 선택하지 않게 되고, 조직 안에 쌓여 있던 학습이 흩어진다. 이 모든 것이 사실은 자산의 손상이다. 그러나 회계 장부에는 단지 '인건비 절감'이라는 좋은 뉴스만 찍힌다. 회계는 단기 이익이 늘었다고 알려주는데, 실제로는 장기 자산이 깎이고 있는 셈이다. ESG가 처음 답하려 했던 문제가 이 자리에 있다. 단기 회계로는 잡히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가치를, 어떻게 측정하고 관리할 것인가. 환경(E)도 거버넌스(G)도 같은 구조의 문제다. 단기 이익을 위해 환경 외부효과를 사회에 떠넘기거나, 자의적인 의사결정 구조를 방치하거나 한 결과가 결국 기업 자체로 돌아온다. 그러나 그 돌아옴은 회계 장부 어디에도 미리 잡히지 않는다. 사고가 터지고 나서야, 평판이 무너지고 나서야 비로소 비용으로 인식된다. ESG라는 어휘는 이 어긋남을 미리 측정하고 관리해보려는 시도였다. 그 시도가 충분히 정교했는가는 따로 논의할 일이지만, 시도 자체가 답하려 했던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한국에서 ESG의 세 글자 중 가장 저평가된 것이 S(Social), 그중에서도 인적자본 영역이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E는 규제로 어느 정도 강제되는 영역이 되었고, G는 코리아 디스카운트 담론에 힘입어 점차 시장의 관심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S는 여전히 "인건비 절감 = 경영 효율"이라는 오래된 관념 안에 갇혀 있다. 직원에게 잘 대해주는 회사를 보면 좋은 회사라기보다는 비용 통제가 안 되는 회사라는 의심이 먼저 드는 풍토가 있다. 이 풍토가 기업의 의사결정에 미치는 압력은 결코 작지 않다. 이 자리에서 한 가지 연구를 짧게 소개하고 싶다. 런던비즈니스스쿨의 알렉스 에드먼스(Alex Edmans)가 2011년에 발표한 논문이다. 그는 미국에서 매년 발표되는 '일하기 좋은 100대 기업' 명단에 들어간 기업들로 포트폴리오를 만들어 26년간의 수익률을 추적했다. 결과는 분명했다. 이 포트폴리오는 같은 기간 시장 평균을 의미 있게 상회했다. 이 연구가 흥미로운 이유는 결과 자체보다 그가 출발한 질문에 있다. 에드먼스가 처음 가졌던 가설은 오히려 회의적이었다. 효율적 시장 가설이 맞다면, 직원 만족도가 높다는 정보는 이미 주가에 반영되어 있어야 한다. 모두가 알고 있는 정보로는 초과수익을 낼 수 없는 것이 시장의 기본 원리다. 그러므로 이 포트폴리오의 수익률은 시장 평균과 다르지 않아야 한다는 게 그의 처음 생각이었다. 그런데 결과는 달랐다. 의미 있는 초과수익이 나왔다. 그가 이 결과를 어떻게 해석했는가가 그의 후속 작업의 출발점이 되었다. 그의 결론은 이렇다. 시장이 무형자산을, 특히 인적자본을 체계적으로 과소평가한다는 것이다. 회계가 잡지 못하니 가치가 보이지 않고, 보이지 않으니 가격에 반영되지 않고, 그래서 그 자산의 진짜 가치를 알아본 사람만이 초과수익을 가져갈 수 있게 된다. 에드먼스는 이 통찰을 바탕으로 <Grow the Pie>라는 책을 썼다. 제목이 핵심을 담고 있다. 기업가치는 정해진 크기의 파이가 아니라 키울 수 있는 파이다. 직원에게 잘하는 것이 주주의 몫을 깎는 것이 아니라, 파이 자체를 키워서 결과적으로 주주의 몫도 더 커지게 만드는 일이 될 수 있다. 그가 이 책에서 거듭 강조하는 것은 이것이 도덕적 권유가 아니라 실증 연구에서 도출된 관찰이라는 점이다. 좋은 회사가 좋은 주식이 되는 메커니즘이 실제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관찰을 한국으로 옮겨놓고 보면 풍경이 한층 구체적으로 보인다. 지난 몇 년간 한국에서 가장 자주 거론된 산업적 우려 중 하나는 우수한 공학 인재가 의대로 빠져나간다는 흐름이었다. 이 흐름을 막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신호는 결국 무엇인가. 정부의 정책도, 산업계의 호소도 작용하겠지만, 가장 직접적으로 작동하는 신호는 보상 구조다. 공학을 선택한 사람이 그 선택의 대가로 무엇을 받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정직한 지표 말이다. 이 시야에서 보면 한 회사의 성과급 결정은 그 회사의 분배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산업 전체의 인재 풀에 보내는 신호가 된다. 삼성전자가 어떻게 분배하느냐는 지금 이공계 진학을 고민하는 고등학생의 선택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그 고등학생이 10년 뒤 어디서 일하게 되는지가 한국 산업의 다음 10년을 일정 부분 결정한다. 이 긴 인과 사슬이 단기 회계 장부 어디에도 잡히지 않는다. 다시 삼성전자 사건으로 돌아가보자. "어떻게 주주보다 노동자가 더 받느냐"는 반응의 자연스러움은, 회계가 보여주는 영역만 보고 회계가 잡지 못하는 영역을 빠뜨린 시야의 산물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 시야가 잘못되었다는 게 아니다. 다만 그 시야만으로는 가치의 절반밖에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짚어두고 싶다. 보지 못한 절반이 자기 수익률에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를 모른 채로 자신의 시야를 신뢰하는 것은, 투자자에게 가장 위험한 자기 신뢰일 수 있다. 그런데 여기까지 오니 한 가지 더 큰 질문이 따라온다. 이 모든 것이 ESG라는 한 영역의 문제일 뿐일까, 아니면 우리가 세상을 보는 방식 전체에 걸쳐 있는 더 큰 패턴의 한 사례일까. 4. 망치 한 자루의 한계 지금까지 우리는 한 회사의 분배 갈등에서 출발해, 그 분노가 짧은 시간축으로 압축된 사고가 만들어낸 풍경이라는 점, 그리고 이 짧은 시간축의 사고가 회계라는 구체적 장치 안에서 어떻게 단기 이익을 위해 장기 자산을 잠식하는지를 살폈다. 그런데 한 가지 솔직한 의문이 든다. 이 모든 것이 ESG라는 한 영역의 문제, 회계 시스템이라는 기술적 결함의 사례일 뿐일까. 그렇다면 회계 기준이 개정되고 무형자산 측정 기법이 발전하면 우리는 본래의 합리적 산수로 돌아갈 수 있다. 하지만 의심이 드는 지점이 있다. 짧은 시간축으로 모든 것을 환산하고, 정해진 파이의 산수만 자연스럽게 떠올리고, 자기 결정의 비용을 과소평가하는 이 패턴이 정말로 회계 제도 안에서만 작동하는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세상을 보는 방식 전체에 깔려 있는 더 깊은 무엇인가의 표면 효과인가. 이 질문을 본격적으로 다루기 위해 잠시 19세기 영국으로 우회하고 싶다. 존 스튜어트 밀이 1859년에 출간한 <자유론>(On Liberty)은 흔히 표현의 자유에 관한 고전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책을 직접 펼쳐보면 약간 의외의 인상을 받게 된다. 밀이 옹호하려 했던 것은 단순히 사람들이 자기 의견을 말할 수 있는 권리가 아니었다. 그가 더 깊이 우려했던 것은 사회가 다수의 의견에 의해 점차 한 가지 색깔로 물들어가는 풍경이었다. 그는 이것을 '다수의 횡포(tyranny of the majority)'라고 불렀다. 법이 사람을 가두지 않더라도, 사회 전체가 한 가지 의견만 정상으로 여기고 다른 의견을 비정상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형성되면, 사실상의 사상 통제가 일어난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었다. 그리고 이 통제의 가장 큰 피해자는 의외로 다수파 자신이라는 것이 그의 핵심 주장이었다. 왜 다수파 자신이 피해자인가. 이 질문에 대한 그의 답이 <자유론> 제2장의 가장 인상적인 대목이다. 밀은 이렇게 썼다. 자기 의견의 근거만 알고 반대 의견의 가장 강한 형태를 모르는 사람은, 자기 의견을 진정으로 안다고 할 수 없다(He who knows only his own side of the case, knows little of that). 자기 의견이 왜 옳은지를 안다고 믿지만, 사실은 그 의견에 가해질 수 있는 가장 날카로운 반론을 한 번도 견뎌보지 못한 채로 안다고 믿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그가 가진 것은 의견이 아니라 의견의 ...
인문학과 투자
2026. 05.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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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자자의 인지적 위생

시장은 농담을 한다

시작하며 나는 금융 강사이자 문학연구자다. 이 두 가지를 동시에 말하면 대부분 고개를 갸웃한다. 어울리지 않는 조합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이 어울리지 않음이 오히려 두 영역을 함께 보는 데 꽤 쓸모가 있다고 생각한다. 얼마 전 해외문학 편집자로 유명한 한 인플루언서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금융이나 경제 관련 책을 절대 읽지 않는다고 했다. 읽다가 그런 내용이 나오면 책을 덮으면서 이렇게 말한다고 했다. 빨리 다른 책 읽어야지, 하마터면 경제상식 생길 뻔했다! 이 문장이 오래 머릿속에 남았다. 웃겼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뜨끔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나는 그 재미없다는 영역의 강사이니까. 재미는 무시할 수 없는 힘이다. 사람을 움직이는 동기 중에 재미만큼 강력한 것이 많지 않다. 공포도 의무도 사람을 움직이지만, 그것들은 오래가지 않는다. 재미는 다르다. 재미있으면 계속 하게 된다. 투자 공부를 처음 시작할 때의 열정이 왜 식는가. 어렵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재미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뜨끔하면서 동시에 생각했다. 그 편집자의 세계는 재미있는가? 문학은 재미있고, 금융은 재미없는가?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나는 인문학자들을 오래 지켜봤다. 흥미로운 현상이 있다. 대부분 재미가 없다. 특히 철학자 중에 유머가 있는 사람이 있는가 싶다. 희극을 연구하는 사람조차 웃기지 않다. 유머를 분석하고 논문을 쓰지만, 정작 그 자리에서 농담을 하는 사람은 없다. 유머를 논리의 언어로 해부하는 순간, 유머는 이미 유머이기를 멈추기 때문이다. 그들은 훌륭한 연구자가 되었지만, 결코 작가는 되지 못했다. 금융도, 인문학도, 같은 함정에 빠져 있다. 진지함이 전문성의 증거라고 믿는 것이다. 금융인은 숫자와 분석 뒤에 숨고, 인문학자는 이론과 개념 뒤에 숨는다. 양쪽 다 유머가 사라진 자리에 권위를 세운다. 그런데 정작 시장은 진지한 분석을 비웃듯 움직이고, 문학은 논문이 아니라 작품으로 사람을 움직인다. 진지함만으로는 닿지 못하는 곳이 양쪽 모두에 있다. 물론 재미가 곧 유머는 아니다. 재미의 형태는 다양하다. 그러나 재미와 유머 사이에는 분명한 교집합이 있다. 그리고 나는 그 교집합이 투자에서 생각보다 훨씬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공부를 즐겁게 만드는 수준이 아니라, 시장이라는 세계를 제대로 이해하는 방식으로서 작동한다. 우리는 투자 연구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금융 공학도가 아니란 전제하에) 실천가가 되어야 한다. 그 차이는 지식의 양이 아니라 태도에 있다. 논리가 닿지 않는 세계를 어떻게 대하느냐에 있다. 시장은 자주 설명되지 않고, 예측을 비웃으며, 인과관계 없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그 세계에서 진지함만으로 버티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힘들다. 유머는 그 힘을 준다. 카오스를 함께 사는 방식 시장이 불확실하다는 말은 이제 누구나 한다. 분산투자를 하고, 리스크를 관리하고, 장기적으로 보라고 한다. 맞는 말이다. 여태까지 내 글에서 계속 반복하는 말이다. 그런데 이 말들이 실제로 도움이 되는가. 폭락장 한가운데서 "불확실성은 원래 있는 것"이라는 말이 손 떨리는 걸 막아주는가. 지식으로 아는 것과 몸으로 사는 것은 다르다. 1637년 네덜란드에서 있었던 일이다. 한 선원이 항구 창고에서 점심을 먹다가 옆에 있던 것을 양파인 줄 알고 함께 먹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은 튤립 구근이었다. 당시에는 그것이 집 한 채 값이었다. 선원은 감옥에 갔다. 그는 그냥 배가 고팠을 뿐이었다. 이 이야기가 웃긴 이유는 하나다. 버블 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진지했다. 구근 하나에 집 한 채 값을 매기는 것이 완벽하게 합리적인 세계였다. 그런데 그 세계 밖에서 보면 그냥 양파다. 시장의 카오스는 언제나 이런 식이다. 안에서는 논리가 있고, 밖에서 보면 희극이다. 그런데 여기서 멈춰보자. 왜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웃음이 나오는가. 철학자들은 오래전부터 웃음의 기원을 탐구했다. 가장 강력한 답 중 하나는 불일치다. 우리는 기대한 것과 실제가 어긋날 때 웃는다. 양파여야 할 것이 집 한 채 값이 되는 순간, 논리가 갑자기 방향을 트는 순간, 예상이 완전히 빗나가는 순간, 그때 웃음이 나온다. 그런데 이것이 정확히 시장이 작동하는 방식이다. 좋은 실적에 주가가 내리고, 나쁜 소식에 주가가 오른다. 모두가 오를 것이라 믿을 때 꺾이고, 모두가 망했다고 할 때 반등한다. 시장은 끊임없이 불일치를 만들어낸다. 코미디와 시장은 같은 구조로 작동한다. 이것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역발상 투자와 같이 군중과 반대로 가는 투자 철학의 본질은 불일치를 읽는 능력이다. 남들이 기대하는 것과 실제 사이의 간극을 보는 것이다. 그것이 수익의 원천이다. 코미디언이 웃음을 만드는 방식을 생각해보자. 관객의 기대를 읽고, 그 기대가 향하는 방향을 파악한 뒤, 정확히 다른 곳을 찌른다. 역발상 투자자가 하는 일도 같다. 시장의 기대를 읽고, 그 기대가 만들어낸 가격의 쏠림을 파악한 뒤, 반대쪽에 선다. 유머 감각이 있는 사람은 이 간극에 익숙하다. 웃음이 나오는 지점을 본능적으로 감지하는 사람이, 시장이 만들어내는 불일치도 더 잘 본다. 코미디를 이해하는 사람이 시장을 이해한다. 과장처럼 들리지만, 뿌리가 같다. 문제는 우리가 항상 안에 있다는 것이다. 밖에서 보면 희극인 것을, 안에서는 볼 수가 없다. 그래서 투자자들은 설명하려 한다. 주가가 오른 이유, 내린 이유, 반등할 이유. 증권사 리포트는 언제나 화려하다. 거시경제 흐름, 금리 경로, 지정학적 리스크, 섹터별 전망이 쏟아진다. 읽고 나면 뭔가 알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란-미국 전쟁이 터졌을 때도 지정학 전문가들은 분주하게 설명했다. 트럼프가 이 전쟁을 선택한 이유, 미국이 얻는 전략적 이득, 중동 역학의 변화 등. 논리적이고 정교했다. 그런데 한 논평가가 이렇게 말했다. "단 한 번도 농담이라도 비논리적인 얘기를 해본 적이 없으신 분들 (답습니다.), 전쟁에 어떤 논리가 있습니까?" 이 한 문장이 그 모든 분석을 조용히 무너뜨렸다. 분석이 틀리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분석은 틀릴 수 있다. 문제는 틀려도 같은 방식으로 다시 설명한다는 것이다. 다음 리포트에서 새로운 논리를 세우고, 그 논리가 또 틀리면 다시 새로운 논리를 세운다. 한 번도 웃지 않는다. 한 번도 "우리가 틀렸다"를 가볍게 인정하지 않는다. 농담을 못 하는 사람들은 틀려도 멋지게 틀린다. 멋지게 틀리는 것이 습관이 되면, 틀렸다는 사실 자체가 보이지 않게 된다. 주의할 점은, 그렇다고 근거있는 투자와 분석이 무의미하다는 말이 아니다.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고 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말을 설명 불가능한 것은 무시해도 된다는 뜻으로 읽었다. 그러나 그의 요지는 달랐다. 말할 수 없는 것이 오히려 가장 중요할 수 있다. 다만 언어와 논리가 그것을 온전히 담지 못할 뿐이다. 침묵은 포기가 아니라 한계의 인정이다. 시장 분석도 마찬가지다. 분석은 중요하다. 다만 분석이 닿지 않는 곳이 있다는 걸 아는 것과 그 한계 앞에서 침묵 대신 피식 웃을 수 있는 것이 유머가 분석 옆에 있어야 하는 이유다. 마크 트웨인은 이렇게 말했다. 10월은 주식 투기를 하기에 특히 위험한 달이다. 나머지 위험한 달은 7월, 1월, 9월, 4월, 11월, 5월, 3월, 6월, 12월, 8월, 그리고 2월이다. 이것은 분석이 아니다. 그냥 웃음이다. 그런데 이 한 문장이 어떤 정교한 리포트보다 시장의 본질을 정확하게 짚는다. 시장은 언제나 위험하고, 특별한 예외 같은 건 없다는 것. 유머는 설명을 포기한 자리에서 나온다. 그리고 그 포기가 역설적으로 시장을 더 정직하게 본다. 정교한...

관점을 만드는 투자자

한 때의 대장주, 인문학 기술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 가슴을 뛰게 하는 것은 인문학과 결합한 기술이다. 애플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는 아이패드를 들어 올리며 이 문장을 남겼다. 언론은 즉각적으로 잡스의 인문학적 이력에 주목했다. 그는 리드 대학 철학과를 중퇴했고, 이후에도 다양한 수업을 청강하며 교양을 쌓았다. 특히 서체 수업을 통해 아름다운 글꼴의 가치를 배웠고, 인도 여행과 선불교 같은 동양 철학에도 깊이 빠져들었다. 애플의 핵심 구호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기'(Think Different)는 이러한 인문학적 배경과 맞닿아 있었다. 사람들은 스티브 잡스와 애플의 성공을 통해 기술적 우위보다 인간에 대한 이해와 인문학적 감수성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처럼 보였다. 그 믿음은 빠르게 확산됐다. 대학에는 인문학과 공학을 결합한 융합 전공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기업에서도 인문학적 소양을 지닌 창의적 인재를 채용하자는 논의가 시작됐다. 삼성그룹은 인문학 전공자를 대상으로 소프트웨어 개발 프로그램을 운영하기도 했다. 임원을 대상으로한 인문학 특강이 유행했고, CEO들은 인문학 독서 모임을 만들었다. 투자계도 예외가 아니었다. 워렌 버핏이 하루 다섯 시간씩 책을 읽는다는 이야기가 회자됐고, 그와 찰리 멍거의 어록은 유행처럼 소비됐다. 인문학의 길을 걷던 사람으로서 참으로 희망찬 시기였다. 나에게도 길이 있겠구나. 그로부터 십여 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결과를 알고 있다. 인문학 열풍은 온데간데 없고, 문과 전반에 대한 조롱과 패배감만 남았다. 이는 마치 어떤 운동이 유행하는 것과 비슷했다. 테니스가 그랬고, 골프가 그랬고, 러닝이 그랬다. 정작 그 운동을 즐기던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변화가 없는데, 갑작스럽게 관심이 쏠렸다가 사라지면서 안 좋은 인식만 남는다. 돈이 많이 드는 운동, 무릎에 위험한 운동. 그와 같은 낙인이 인문학에도 찍혔다. 학부 수준이거나 혹은 워크숍을 몇 번 들은 소위 "융합형 인재"가 인문학 컨설턴트로 활동했다. 그들은 니체의 인용구 몇 개를 프레젠테이션에 배치하고 기존의 문법을 반복했다. 결과는 명확했다. 아무런 성과가 나오지 않았다. 인문학은 돈벌이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는 결론만 남았다. 문학도로서 나는 이 풍경을 씁쓸하게 지켜봤다. 관련 글 : 두쫀쿠와 대장주의 현상학 사실 이 현상은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이전 글에서 우리는 대장주 쏠림 현상을 이야기했다. 두쫀쿠에서 탕후루로, 차화정에서 조방원으로, 다시 반바지로. 모두가 같은 정답에 몰려들고, 그 정답이 바뀌면 일제히 발을 돌리는 한국 시장의 특성. 인문학 열풍은 정확히 같은 구조였다. 본질을 탐구하기보다 유행하는 정답만 따라했고, 스스로 생각하기보다 누군가 내려주는 '해설'을 소비했다. 앞서 진단한 세 가지 사회적 기제도 그대로 작동했다. 동질성 압력은 "인문학 안 하면 뒤처진다"는 조급함을 만들었고, 파놉티콘의 시선은 "다들 하는데 나만 안 하면 어쩌나"라는 불안을 심었다. 고맥락 문화 속에서 우리는 인문학의 실체보다 "지금 분위기는 인문학이다"라는 암묵적 합의에 더 민감했다. 대장주든 인문학이든, 왜 매번 본질을 놓치고 껍데기만 쫓는 걸까? 어째서 누군가 중요하다고 정해준 관점을 소비만 하고, 나만의 관점을 만들어 내지 못할까? 인문학 열풍이 실패한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는 인문학을 '지식'으로만 소비했기 때문이다. "니체가 뭐라 했다"를 아는 것은 10분이면 된다. 하지만 "니체처럼 생각하는 법"을 배우는 것은 평생의 훈련이다. 영문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셰익스피어의 작품 목록을 외우거나 햄릿의 줄거리를 암기하는 게 아니다. 그것은 작가 창조한 세상과 대화하며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는 과정이다. 다시 말해, 인문학 공부는 고정된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텍스트와 대면하는 능력 자체를 기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문학의 결과만을 수집해서는 어떠한 능력도 얻지 못한다. 나는 세상을 주체적으로 읽는 능력, 즉 인문학적 감수성이 '투자'라는 영역에서 실질적인 힘을 발휘한다고 주장하기 위해 이 글을 썼다. 진정한 의미의 인문학 공부는 지식을 쌓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관점을 만드는 능력을 기르는 과정이다. 그리고 그 능력이야말로 독립적인 투자관을 형성하는 데 필수적인 토대가 된다. 시장이 정해준 해설을 소비하는 대신, 스스로 해설을 써 내려가는 투자자. 이제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하나씩 살펴보겠다. 현상 너머 구조를 읽는 능력 대장주를 쫓는 투자자에게는 공통된 맹점이 있다. 그들은 이미 일어난 현상을 보고 움직인다. 가장 많이 오른 종목, 가장 많이 회자되는 테마, 가장 뜨거운 섹터. 그러나 그것이 보일 때쯤이면 이미 늦었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알고 있다. 앞서 나가기 위해서는 현상 너머 구조를 살펴봐야 한다. 현상은 구조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대장주가 오르는 것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사건이 아니라, 자본의 흐름, 산업의 사이클, 집단 심리의 동기화가 만들어낸 필연적 결과다. 현상만 보는 투자자는 항상 후행할 수밖에 없다. 결과가 눈에 보일 때 진입하고, 결과가 사라질 때 공포에 빠진다. 반면 구조를 먼저 읽는 투자자는 다르다. 결과가 나타나기 전에 그것이 만들어질 조건을 본다. 필요한 것은 현상에 반응하는 속도가 아니라, 현상이 왜 일어나는지를 묻는 습관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인문학적 훈련이 힘을 발휘한다. 인문학의 핵심은 질문이다. 인문학은 언제나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를 묻는다. 문학은 인물의 행동 너머에 있는 욕망과 구조를 읽고, 역사학은 사건 너머에 있는 사회적 힘을 추적하며, 철학은 현상 너머에 있는 전제와 논리를 해부한다. 이것은 현상을 소비하지 않고 현상을 만들어낸 메커니즘을 묻는 훈련이다. 오랜 시간 이런 질문을 반복한 사람은, 어떤 현상 앞에서도 본능적으로 "이것은 왜 지금 일어나는가?"를 먼저 묻게 된다.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는 이 사고방식의 좋은 예다. 그의 출발점은 단순한 질문이었다. "왜 어떤 문명은 발전하고, 어떤 문명은 그렇지 못했는가?" 당시의 지배적인 답은 민족의 우열이었다. 더 영리한 민족이 더 발전했다는 논리다. 다이아몬드는 이 표면적 설명을 거부했다. 그는 개별 민족의 특성이 아니라, 지리와 기후와 작물이라는 구조적 조건으로 파고들었다....

두쫀쿠와 대장주의 현상학

‘해설’에 대한 소비욕구 나는 처음 보는 이에게 곧잘 말을 거는 편이다. 택시 기사님에게 슬쩍 정치 이야기를 던지기도 하고, 식당 사장님에게 요즘 경기를 묻기도 한다. 어제는 머리를 자르다 미용사와 주식 이야기를 나눴다. 주식은 꽤 괜찮은 스몰토크 주제가 된다. 물론 나의 수익보다는 손실 이야기를 마중물로 넣어야 상대의 이야기도 술술 터져 나온다. 코로나 시기 야심 차게 입문했다가 '국장'에 배신당하고 '미장'으로 망명했다는 이야기, 그러다 결국 개별주식 레버리지 ETF에 정착했다는 이야기까지. 전형적인 한국 투자자의 연대기를 듣던 중 흥미로운 대목을 발견했다. 그가 한국 시장을 평하는 논리였다. "한국 주식은 믿을 게 못 돼요. 원화 가치는 떨어졌는데 외국인이 싸니까 잠시 사는 것뿐이죠. 가치도 없고 언제든 무너질 수 있어요." 그의 관점이 옳고 그름을 따지려는 게 아니다. 놀라운 건 그가 읊조리는 ‘국장 회의론’이 얼마 전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본 글, 그리고 어제 다른 지인에게 들은 이야기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일치한다는 점이었다. 비단 경제뿐만이 아니다. 정치, 사회 사건, 심지어 영화 한 편에 대한 감상조차 우리는 누군가 정해놓은 ‘표준화된 관점’을 자신의 생각인 양 이야기하곤 한다. 왜 우리는 타인의 해석을 내 생각의 거처로 삼는 걸까? 나는 그 원인을 ‘정답을 갈구하는 문화적 관성’에서 찾는다. 예컨대 우리나라의 스포츠 중계는 서구권과 확연히 다르다. 서양의 중계가 상황 묘사와 기술적 데이터 전달에 집중하며 시청자에게 해석의 여백을 남겨둔다면, 한국의 중계는 지나치게 친절하다. “지금은 위기입니다”, “저 선수는 지금 간절합니다”라며 시청자가 느껴야 할 감정과 관점의 가이드라인을 실시간으로 주입한다. 우리는 스스로 느끼기보다, 전문가가 내려주는 ‘해설’을 소비하며 비로소 안도한다. 이런 특성은 비즈니스 현장에서도 ‘레퍼런스 강박’으로 나타난다.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 때 우리는 항상 외국의 선례부터 찾는다. 이미 검증된 ‘정답’이 있어야만 상급자와 투자자를 설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답이 없으면 한 발자국도 떼지 못하는 사회. 그래서 우리 사회는 모두가 동의하는 ‘상식’이 가장 강력한 권력을 갖는다. 불확실성이 본질인 시장조차 우리는 스포츠 해설 듣듯 확실한 해석을 원한다. 투자의 세계에서도 스스로 기업의 본질을 탐구하기보다, 유행하는 스타일을 ‘골라잡는’ 쪽을 택한다. 마치 미용실 메뉴판에서 댄디컷이나 가르마펌을 고르듯 가치 투자, 매크로 투자, 혹은 특정 테마주라는 스타일 속에 자신을 편입시킨다. 이번 글은 이런 현상의 시시비비를 가리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우리의 투자 행위 이면에 흐르는 심리적 층위를 현상학적으로 진단해보고자 한다. 우리가 무엇에 지배당하고 있는지 자각할 때, 비로소 시장의 소음에서 벗어나 유연하고 주체적인 관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한국 시장을 바라보는 사유의 첫 페이지를 넘겨본다. 대장주 현상 요즘 시장을 떠도는 회의론 중 가장 대중적인 서사는 ‘불균형’에 대한 불만이다. “삼성전자나 하이닉스 같은 반도체만 오르고 나머지는 제자리다”, “지수가 오르면 뭐 하나, 내 종목은 소외됐는데” 같은 탄식이다. 사람들은 지금의 시장이 비정상적이라며 혀를 차지만, 내가 경험한 한국 시장은 단 한 번도 ‘정상적’이었던 적이 없다. 엄밀히 말하면, 한국 시장에서 ‘쏠림’은 예외가 아니라 본질에 가깝기 때문이다. 한국 주식을 조금이라도 경험해 본 이들이라면 ‘차화정(자동차·화학·정유)’, ‘조방원(조선·방산·원전)’, ‘반바지(반도체·바이오·지주사)’ 같은 줄임말들을 기억할 것이다. 이 단어들은 단순한 산업 분류가 아니라 당대를...
인문학과 투자
2026. 01. 28
48

니체에게 투자의 이유를 묻다

부에 대한 도덕적 가면 당신이 투자를 시작하려는 이유는 무엇인가? 감상적인 미사여구를 걷어내보자. 우리는 결국 돈을 벌기 위해 이 시장에 들어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의 획득을 욕망하는 것은 생존을 위한 본능이자 가장 원초적인 동력이다. 그러므로 “왜 돈을 벌려 하는가?”라는 질문은 그 자체로 무의미한 질문일지 모른다. 오히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돈에 관심이 없다”고 공공연히 말하는 이들의 내면이다. 흥미롭게도 부에 대한 무관심을 가장하는 이들일수록, 역설적으로 다른 가치에 병적으로 집착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들은 “돈보다 중요한 가치가 있다”는 명제로 자신의 정신적 우월감을 과시하곤 한다. 물론 물질만능주의가 팽배한 시대에 정신적 가치를 역설하는 태도는 경청할 만하다. 하지만 이것이 하나의 ‘도그마’가 될 때 문제는 시작된다. ‘돈보다 소중한 것이 있다’는 사실이 곧 ‘돈은 중요하지 않다’는 결론으로 비약될 수는 없다. 그러나 도덕화된 반물질주의는 은연중에 부를 추구하는 행위 자체를 속물적이거나 불순한 것으로 낙인찍는다. 개인의 가치관이 도덕의 탈을 쓰는 순간, 그것은 자신과 다른 삶의 방식을 비난하는 가장 편리한 무기가 된다. 이것이 바로 취향이 도덕으로 변질되는 과정이다. 반대편 극단에 있는 ‘경제적 자유’ 숭배자들 역시 이러한 오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들은 ‘돈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라고 항변하며, 하기 싫은 노동에서 해방된 상태를 ‘자유’라고 정의한다. 그리고 이 자유를 구매하기 위해 현재의 삶을 자본 축적의 수단으로 전락시킨다. 문제는 이 경제적 자유라는 목표가 반론 불가능한 절대 진리로 격상될 때 발생한다. 이 단계에 이르면 자유를 향한 갈망은 자칫 강박적인 도덕률로 굳어질 수 있다. 미래의 안식을 위해 현재의 욕망을 철저히 통제하는 삶을 떠올려보자. 이들에게 인내는 단순한 절약이 아니라 미래를 구원하기 위한 숭고한 투쟁이다. 문제는 이 비장한 기준이 타인에게 적용될 때다. 만약 경제 공동체인 배우자가 이러한 절제에 온전히 동참하지 못한다면, 그의 평범한 소비는 곧장 ‘미래를 훼방 놓는 무책임한 행동’으로 간주되기 쉽다. 인내하는 자는 자신의 금욕을 ‘선’으로, 상대의 소비를 ‘악’이나 ‘미성숙함’으로 바라보며 심리적 벽을 쌓게 된다. 결국 돈을 경시하는 태도나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태도나, 본질적인 위험성은 맞닿아 있다. 부에 대한 개인의 가치관이 도덕적 신념으로 비약되는 순간, 그것은 나와 다른 타인을 정죄하는 날카로운 무기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유예된 현재와 기묘한 공허 강박적인 구호로 변질된 부의 도덕은 타인을 정죄하는 무기를 넘어, 개인의 내면을 억압하는 정교한 기제로 작동하기 시작한다. 이는 '돈보다 소중한 가치'를 신봉하는 이들과 '경제적 자유'를 열망하는 이들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징후다. 전자가 문득 찾아오는 물질적 욕망 앞에서 남모를 죄책감에 시달린다면, 후자는 일상의 소소한 쾌락에 탐닉하는 자신을 발견할 때마다 자기 배신에 가까운 고통을 느낀다. 특히 경제적 자유를 추구하는 이들 중 일부는 스스로를 자발적인 '금욕주의자'의 틀 안에 가둔다. 그들은 현재의 인내만이 미래의 확실한 보상을 약속한다는 믿음으로 무장하고 욕망을 통제한다. 더 나은 삶을 위해 시작한 투자가 역설적으로 지금 이 순간의 생명력을 억압하는 족쇄가 되는 것이다. 이처럼 금욕주의의 외피를 두른 채 뒤틀려버린 경제적 자유의 담론은, 우리 삶의 기반을 흔드는 몇 가지 치명적인 맹점을 안고 있다. 먼저, 현재의 삶이 ‘임시적 거처’로 치환된다는 점이다. 그들은 미래의 자유를 위해 지금의 노동과 관계를 유예시킨다. 자유로운 시간을 사기 위해 정작 지금 이 순간을 가치 없는 무의미한 시간으로 소모하는 형용모순에 빠지는 것이다. 결국 경제적 자유에 도달하기 전까지의 삶은 오직 '참는 것'만이 유일한 존재 이유가 된다. 다음으로, 고통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정당화한다는 문제다. 현재 삶에서 마주하는 고통을 실질적인 문제로 다루지 않고, 미래를 위한 필연적 과정으로 치환해 버린다. 이는 한국 사회에서 입시와 취업을 위해 청춘의 시간을 억압해 온 트라우마의 연장선이기도 하다. 고통이 미래의 행복을 위한 필수 전제가 되는 순간, 복잡한 구조적 문제는 사라지고 개인의 인내심이라는 지표만 남게 된다. 마지막으로, 이 인내의 미덕은 질문을 금지한다는 문제가 있다. 다른 선택지는 없는지, 이 고통이 정말 필요한 것인지 묻는 행위는 나약함이나 조급함으로 치부된다. 현재의 고단함에서 도망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미래의 경제적 자유라는 구원 서사뿐이다. 그 과정에서 '현재의 나'는 점점 흐릿해진다. 기쁨에 둔감해지고 욕망을 스스로 검열하며, 삶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조차 차단한다. 오직 미래의 행복이라는 불확실한 약속을 위해 현재의 생명력을 갉아먹는 투쟁을 지속할 뿐이다. 과연 이것이 우리가 그토록 갈구하던 '자유'의 본 모습일까? 미래는 언제나 이야기 속에만 존재한다. 은퇴 이후의 평온, 자산 성취 뒤에 오는 자유, 혹은 죽음 이후의 천국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을 무조건 참아냈다는 사실이 반드시 미래의 보상으로 치환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우리에게 남는 것은 살지 못한 현재와 확인할 수 없는 미래 사이의 거대한 공백뿐이다. 이는 경험적으로도 증명된다. 나는 성공적으로 은퇴한 이들을 만나보았다. 자산을 소진하지 않으면서도 평생 필요한 만큼 소비하며 살 준비가 된 이들이다. 60대에 이 정도의 성취를 이루는 것도 대단한 일이지만, 40~50대에 조기 은퇴한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들은 직장인들이 꿈꾸는 삶을 산다. 지옥철에 몸을 맡기지 않아도 되고, 싫어하는 상사의 눈치를 보거나 진상 고객을 상대할 필요도 없다. 마음껏 운동하고 여행하며 시간을 보낸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들 중 상당수가 공통적인 공허함을 호소한다. 막상 원하던 목적지에 도달했는데,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더라는 고백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지 고민하기보다 ‘경제적 자유’라는 당위를 쫓았기 때문이다. 천국에 가기만 하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 믿었을 뿐, 그곳에서 무엇을 하며 존재할 것인지에 대한 사유가 부재했다. 경제적 자유만을 추구했다면, 현재의 괴로움을 벗어나는 것만이 유일한 '선'이 된다. 고통으로부터의 탈출이 목표의 전부였기에, 탈출 이후에 찾아오는 강렬한 허무를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탈출로서의 투자 너머 그렇다면 우리는 왜 투자를 하고 돈을 벌어야 하는가? 나는 결코 금욕적 인내의 가치를 부정하는 게 아니다. 또한, 무절제한 쾌락을 옹호하려는 것도 아니다. 다만 하나의 관점이 너무 확고한 정답지로 수렴되는 방식에 문제를 제기하고자 한다. 일을 하기 싫어서 투자를 한다는 논리 외에, 우리가 나아가야 할 또 다른 경로에 대한 이야기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사례는 많다. 막대한 부를 이룬 이후에도 일 자체를 지독하게 즐기는 이들 말이다. 이들은 대중이 그토록 혐오하는 '일' 그 자체에 몰입하며 기쁨을 얻는다. 세계 최고의 부를 이룬 일론 머스크는 왜 여전히 공장 바닥에서 잠을 자며 주 100시간 넘게 일하고 있을까? 투자의 성인이라 불리는 워런 버핏은 왜 100세에 가까운 나이에도 현역에서 재무제표를 탐독하고 있을까? 이를 이해할 수 없는 이들은 단순히 '괴짜'라는 수식어로 그들을 치부한다. 누군가는 ‘돈이 많으면 일을 하지 않는 것이 행복’이라는 관점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물론 막대한 부를 바탕으로 평생 유희를 즐기는 삶도 하나의 선택지다. 하지만 그것만이 유일한 정답이나 '선'은 아니다. 우리에게는 분명히 다른 선택지가 있다. 경제적 자유라는 구호 뒤에 숨은 금욕주의적 투자가 아닌, 다른 방식의 투자 말이다. 그 길을 탐구해 보기 위해서 이 글은 '괴짜'들의 단순한 사례 분석을 넘어, 이들이 보여주는 태도의 ‘본질’에 주목해보고자 한다. 이는 단지 ‘원칙주의’나 ‘확고한 자기 신념’ 같은 말로 모두 설명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철학이라는 렌즈를 통해 괴짜들의 본질적 가치 세계를 살펴보려고 한다.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가치체계를 형성하는 방식에 대한 훌륭한 통찰을 제시한 바 있다. 그는 인간의 심리적 기원을 추적하며, 삶을 대하는 태도를 크게 '주인의 도덕'과 '노예의 도덕'으로 구분했다. 니체의 생각은 명료하다. 외부의 환경이나 타인의 시선에 예속되어 반응할 것인가, 아니면 스스로 가치를 창출하며 삶의 입법자가 될 것인가. 이 철학적 틀을 투자에 대입해 보면, 우리는 단순히 돈을 버는 기술을 넘어 어떤 존재로서 시장 앞에 설 것인지에 대한 실존적 선택지를 마주하게 된다. 이제부터 우리는 니체와 함께 도덕화된 부의 구호를 넘어, 진정한 주인으로서 투자를 시작하는 길을 탐구해 볼 것이다. ‘주인과 노예’의 도덕 니체의 철학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가 제기한 '가치의 기원에 대한 물음'에 주목해야 한다. 그는 도덕을 시대와 관계없는 절대적 진리로 보지 않았다. 대신 특정 도덕이 어떤 심리적 배경과 힘의 관계에서 탄생했는지를 추적하는 '계보학(Genealogy)'을 통해 인간 정신의 본질을 파헤쳤다. 이 여정의 핵심은 바로 주인의 도덕과 노예의 도덕을 구분하는 일이다. 이는 단순히 사회적 계급을 의미하지 않는다. 노예와 주인의 차이는 삶을 대하는 근본적인 '태도'에 있다. 주인의 도덕은 철저하게 '자기 긍정'에서 출발한다. 니체가 말하는 '고귀한 인간'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거나 외부의 기준을 참조하지 않는다. 이들에게 '좋음(good)'이란 곧 자기 자신, 즉 힘이 넘치고 탁월하며 생명력이 충만한 상태를 의미한다. 주인은 먼저 자신을 향해 "좋다"라고 선언한다. 이 당당한 선언으로부터 파생된 결과로 자신과 다른 자들을 '나쁨(bad)'이라 규정할 뿐이다. 여기서 ‘나쁨’은 결코 증오나 복수의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탁월하지 못함에 대한 ‘무관심’에 가깝다. 주인의 도덕 체계에서 중심은 항상 자기 자신이며, 가치 판단의 에너지는 내부에서 외부로 발산된다. 그리고 스스로를 높게 평가하는 자는 자신과 다른 자들 사이의 거리를 즐기고, 그 차이를 통해 자신의 고귀함을 확인할 뿐이다. 이들의 행동 원리는 오직 '능동(Active)'에 있다. 주인은 무언가에 반대하기 위해 움직이지 않는다. 내면에 가득 찬 에너지를 밖으로 뿜어내기 위해 창조할 뿐이다. 마치 넘쳐흐르는 샘물처럼 자신의 힘을 실현하는 과정 자체에서 기쁨을 느낀다. 설령 그 과정에서 고통이나 시련이 닥치더라도, 주인은 그것을 자신의 위대함을 증명할 무대로 삼아 긍정한다. 이들이 바로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는 '아모르 파티(Amor Fati)'의 구현체다. 반면 노예의 도덕은 그 기원이 '부정'에 있다. 노예는 스스로 가치를 창조할 힘이 없다. 그들은 오직 외부의 자극, 즉 주인의 존재에 대한 반응(Reaction)으로서만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한다. 노예는 무엇이 좋은지 스스로 판단하기에 앞서, 자신을 억압하는 주인을 '악(evil)'으로 규정한다. "나를 억압하는 주인들은 악하다"라고 선언하는 것이 시작이다. 그 후에야 이 악한 존재와 반대되는 자신의 나약함을 '선(good)' 혹은 '겸손'이라는 이름으로 치장한다. 이로써 단지 좋고 나쁘고의 문제가 선과 악의 문제, 즉 도덕의 문제로 치환된다. 니체는 이러한 노예 도덕의 전형을 기독교의 금욕적 구원론에서 발견했다. 로마의 압제 아래 있던 이들은 제국적이고 귀족적인 가치를 악마화했다. 대신 검소하고 청빈한 삶을 선한 것으로 둔갑시킨다. 그리하여 종국에는 악한 자는 지옥에 가고 선한 자는 천국에 갈 것이라는 구원론적 논리 체계를 구축했다. 이 신념 체계를 지탱하는 강력한 동력은 바로 '르쌍티망’(Ressentiment)이다. 르쌍티망은 ‘원한’이라는 뜻이지만 우리가 아는 원한 감정과는 조금 차이가 있다. 왜냐하면, 실제로 누군가 원한을 살만한 일을 한 것과는 무관하게 드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르쌍티망은 자기 자신의 기준을 타인에게 강요하기 위한 동기일 뿐이다. 이 복잡한 심리 기제를 도로 위의 상황에 대입해 보자. 평소 방어운전을 철칙으로 여기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누군가 방향지시등도 켜지 않은 채 그의 앞으로 위험하게 끼어든다. 순간 그는 단순한 짜증을 넘어 묘한 도덕적 분노에 휩싸인다. "나라면 저렇게 하지 않았을 텐데, 최소한 미안하다는 신호라도 보냈어야지." 물론 안전과 배려는 존중받아 마땅한 가치다. 하지만 나의 '인내'가 타인을 정죄하는 절대적 '기준'으로 변질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매너가 아니라 ...
인문학과 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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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에게 투자의 이유를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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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고
2026.06.01

저도...그 땐 왜 그랬는지 누가 옳고 그른지 다투며 화내기 바빴다면, 지금 뒤돌아보면 다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사이좋게 지내기에도 짧은 인생, 싸우며 지내면 아깝더라구요.

(수정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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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ZI
2026.06.01

진심으로, 투자를 넘어 삶을 대하는 자세를 되돌아보게 만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상담사의 관점에서 '이해'와 '안정'의 시선을 가지고 세상을 대하도록 노력해보겠습니다.

제게는 어떤 철학책 못지 않은 값진 글이었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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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어대디
2026.06.01

너무 훌륭한 글입니다. 시장을 내담자로 보고 공감적 이해와 흔들림 곁에서 흔들리지 않기.. 스피노자나 다른 철학자 처럼 우매한 군중에 분노하기 보단 시장에 휩쓸려다니는 1인이지만... 정말 배움 가득한 글 감사합니다. 일전에 교육관련 봉사에서 상담사 선생님께서 아이들 상담해주시걸 곁에서 볼 기회가 있었는데, 상담사 분들이 정말 존경스러워졌었습니다. 말씀하신 교육과 훈련들을 통해서 그 극한 업무를 다루고 계신거였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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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ttlemove
2026.06.01

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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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론백
작성자
2026.06.01

시장 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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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narianx
2026.06.01

깨닫지 못한 군중들에게 속터진다는 내용의 문장에서 내 얘긴데? 하면서 긴글을 끝까지 다 읽었네요.

공감에 가장 도움이 되는건 독서를 포함한 직간접적인 경험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번 장에 이런저런 이유로 소위 주도주는 안?못?탔지만 버블에 대한 여러 책과 군중심리에 대한 책을 읽고 지난 코로나 상승장을 겪고 나니 원래 주식시장은 이런 곳이려니 싶어서 그닥 포모 같은건 오지 않더군요.

앞으로도 좋은 글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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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
2026.06.01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생각을 하지 않을까 싶어요. 마론백님이 풀어내신 글에 빠져들게 됩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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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춘이
2026.06.01

상담 한번 해.주.시.겠.습.니.까?


깊이 있는 글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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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식식객
2026.06.01

너무 멋진 글 감사합니다. 항상 글 읽으면서 많이 배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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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00k
2026.06.01

올해 본 글중에 가장 와닿았던 글이었습니다.

감탄하며 읽었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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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po12
2026.06.01

좋은 글! 너무 잘 봤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