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드레센, 호로위츠, 그리고 a16z⟫ part 1




VC의 규칙을 다시 쓰고, 테크 혁신을 주도하고, 이제는 정치권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현 시점 최고 VC. 마크 안드레센, 벤 호로위츠, 그리고 a16z에 대한 글입니다.
총 5개 파트라 분량은 길지만, 저는 꽤 재미있다고 생각합니다. ㅎ
마크 안드레센(Marc Andreessen)은 하루에 두세 시간을 오디오북 듣는 데 씁니다. 걸을 때도, 이동할 때도, 빈 틈이 생기면 어김없이 이어폰을 꽂습니다. 역사, 전기, 인공지능. 장르는 달라도 찾는 것은 하나입니다. 이 세상이 왜 지금 이 모양이고, 앞으로 어떻게 바뀔 것인가에 대한 단서. 인구 2,554명의 위스콘신 소도시 뉴리스본에는 서점이 없었습니다. 도서관은 작았고, TV 채널도 몇 개 되지 않았습니다. 정보에 굶주린 상태로 자란 소년은 그때도 지금도 읽고 또 읽습니다. 그 소년이 1992년, 모두에게 인터넷을 열어주게 됩니다.
2001년 3월, 샌프란시스코의 한 호텔 회의실. 벤 호로위츠(Ben Horowitz)가 슬라이드를 넘기는 동안 앞줄에 앉은 기관투자자들의 표정이 점점 굳어갔습니다. 그럴 만했습니다. 나스닥은 고점에서 60%가 증발했고, 닷컴의 잔해 위로 회사들이 매주 백기를 들고 있었습니다. 그의 회사 Loudcloud는 연 매출 2,500만 달러에 그보다 큰 적자를 안고 있었습니다. 그런 회사를 주식시장에 올리겠다고 그는 버티는 중이었습니다. 발표가 한창인데 한 투자자가 조용히 일어나 문을 닫고 나갔습니다. 다음 사람도, 그다음 사람도. 벤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훗날 그는 이 시기를 세 단어로 압축합니다. The IPO from Hell. 지옥에서 온 상장이었습니다.
그로부터 7년 뒤, 리먼브라더스가 무너지던 그 주에 Sequoia Capital은 창업자들을 불러 "RIP Good Times"를 띄웠습니다. 좋은 시절은 끝났으니 생존 모드로 들어가라는 경고였습니다. 벤처 자금은 얼어붙고 LP들은 약정을 거둬들이던, 펀드를 세우기에 최악의 시점이었습니다. 마크와 벤은 정반대로 읽었습니다. 그 전 몇 해 동안 Twitter와 Facebook에 함께 엔젤 투자를 해온 두 사람은, 당시 벤처 캐피털이 창업자에게 돈만 쥐여줄 뿐 회사를 키우는 데는 쓸모가 없다는 것을 봤고, 둘 다 그 쓸모없음의 피해자였습니다. 마크는 자신이 만든 회사를 시장에 빼앗겼고, 벤은 투자자에게 공개적으로 무능하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러니 답은 또렷했습니다. 창업자였을 때 곁에 있었으면 했던 바로 그런 벤처 캐피털을, 모두가 발을 빼는 지금 직접 세우는 것. 위기는 후퇴 신호가 아니라 진입 신호였습니다. 업계 전체가 숨을 죽이던 그때, 두 사람이 메신저를 주고받습니다.
벤: “우리가 벤처 캐피털 펀드를 만들어야 할 것 같아.”
마크: “나도 똑같이 생각하고 있었어.”

정보가 갇힌 인터넷을 모두에게 열겠다는 청년, 모두가 도망치는 장에서 상장을 강행하는 CEO, 자본이 썰물처럼 빠지는 위기의 한복판에서 펀드를 세우겠다는 두 사람. 이 글은 시장의 합의가 틀렸다고 확신할 수 있는 자리에서 가장 크게 건 두 사람의 이야기이고, 그 확신이 대체 어디서 나왔는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a16z의 운용자산은 2026년 1월 기준 900억 달러에 이릅니다. 창업 16년 만입니다. 그동안 두 사람이 짜낸 모델은 업계의 새 표준으로 굳어졌고, 그만큼 새로운 모순도 함께 쌓였습니다. 왜 하필 그들이었는지, 어떻게 가능했는지, 그 모델의 진짜 차별점이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따라가 봅니다.
마크 안드레센은 1971년 아이오와주 시더폴스에서 태어나 곧 위스콘신주 뉴리스본으로 옮겨갔습니다. 밀워키에서 북쪽으로 두 시간 반, 인구 2,554명의 매우 작은 마을입니다. 아버지 로웰은 종자회사 Pioneer Hi-Bred International의 지역 영업 매니저였고, 어머니 팻은 카탈로그 의류업체 Lands’ End의 고객서비스 직원이었습니다. 마크는 가족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습니다. 공개된 인터뷰를 통틀어 가족을 입에 올린 건 사실상 한 번뿐입니다.
“그들은 스칸디나비안 하드코어였습니다. 극도로 자기 부정적인 사람들, 인생에서 행복을 기대하지 않으며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감정을 억제하고 결과만을 중시하는 기질에, 서점조차 없는 작은 마을의 정보 결핍이 더해졌습니다. 마크의 평생을 이끈 집착은 여기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직접 이 둘을 연결해 설명합니다. “나는 정보에 굶주린 소년이었습니다. 나중에 내가 인터넷을 모두에게 개방한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을겁니다.” 기술 낙관주의*는 거창한 철학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정보가 부재한 환경에서 자란 어린 시절의 갈증에서 왔습니다. 이러한 독서 습관은 단순한 취향을 넘어 그의 강력한 투자 무기가 되었습니다. 마크의 직관은 번뜩이는 영감이 아니라, 수십 년간 축적된 역사와 전기 속에서 패턴을 추출해낸 결과물입니다. 과거의 기술 전환들이 어떤 조건에서 일어났는지를 통째로 파악하고 있기에, 새로운 기술이 그 임계점에 도달하는 순간을 누구보다 먼저 알아챕니다.
*기술 낙관주의(Techno-Optimism)는 기술 발전이 인류가 직면한 문제의 근본적 해결책이며 성장과 가속 자체가 도덕적 선(善)이라고 보는 입장으로, 2023년 마크 안드레센이 발표한 「기술 낙관주의 선언(The Techno-Optimist Manifesto)」이 그 대표적 정식화다
중학교 때 부모가 사준 Radio Shack의 TRS-80이 출발점이었습니다. 마크는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혼자 BASIC을 떼었고, 첫 프로그램으로 수학 숙제를 자동으로 푸는 도구를 짰습니다. 게임이 아니라 귀찮은 일의 제거. 이 실용주의가 이후 그의 모든 결정에 깔립니다. 1989년 일리노이대학교 어바나-샴페인(UIUC)에 들어갑니다. 전기공학을 첫 전공으로 고른 이유는 “평균 급여가 제일 높아서”, 컴퓨터공학으로 갈아탄 이유는 “덜 힘들어서”였습니다. 멋보다 실속을 먼저 따지는 사람다운 답입니다. National Merit Scholar 장학생이던 그는 재학 중 NCSA(국립 슈퍼컴퓨팅 응용센터)에서 시급 6.85달러짜리 아르바이트를 시작합니다. 공식 업무는 슈퍼컴퓨터용 3D 시각화 소프트웨어였지만, 머릿속에 든 건 따로 있었습니다. 정보를 세상 모두에게 여는 법.

마법천재 소년: 마크 안드레센 The Whiz Kid: Marc Andreessen (출처: WIRED)
같은 시기 미국 반대편에서, 전혀 다른 결핍을 겪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벤저민 에이브러햄 호로위츠는 1966년 1월 13일 ...

운영체제랑 브라우저는 거리가 멀어보였는데, 넷스케이프가 윈도우에 대한 위협이 된다고보고 IE 를 만들었다는 부분이 놀랍네요.
제가 사람과 사업에 대한 이야기를 좋아해서인지 너무 재밌게 읽었습니다.
아직 part 가 4개나 남아서 기분이 좋네요.
감사합니다 룰라팔루자님!

잼있습니다. 읽고보니 무지 기네요. 읽을때는 몰랐는데 스크롤 벡 하다가 알았습니다.ㅋ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넷스케이프 이전 얘기부터 시작하니까 몰랐던 신선한 부분이 더 많네요.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재밌고 유익합니다 ㅎㅎ

너무 재밌게 잘 봤습니다. 지금 시점에 생각거리가 많네요. 다음 글도 너무 기대 됩니다.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