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우리의 투자는 미끄러지는가? 대체 왜?





오늘 이야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처음듣는 이야기며 또 매우 재밌을 것이다.
뭐로 글을 시작할까. 한가지 질문으로 글을 시작할 수 있겠다.
인간이 만약에 이기적인 동물이라면 우리는 왜 타인의 죽음에도 슬퍼할까?
문득 어렸을때 던져둔 질문이 오늘에서야 대답의 일부분을 일본 소설가 히라노 게이치로의 책 <나란 무엇인가>에서 찾을 수 있었다.
진정한 나란 무엇인가? 나를 찾느냐고 번민하는 이들, 혹은 너무 많은 나 앞에서 자신을 위선자라고 가학하는 이들에게, 게이치로는 그냥 여러개의 나가 있음을 인정하라고 한다.
'나'란 나눌 수 없는 '개인'이 아니라 여러 개의 나, 즉 '분인' 이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부모님과 나의 관계에서의 '나', 친구와 나의 관계에서의 '나' , 직장 동료와 나의 관계에서의 '나' 라는 다양한 나가 존재한다는 말이다.
때문에 우리의 자아는 누군가와 커뮤니케이션을 하다보면 그 앞에서 작동하는 나의 패턴, 즉 타인과의 관계로 규정되는 '나' 라는 자아의 합이다.
그렇다면 이것을 조금 변주해본다면 우리는 누군가와의 관계에서 사랑하는 것은 그 사람뿐 아니라 그와의 관계를 사랑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와 같이 있을때의 '나' (사랑 받는 나)의 자아를 사랑하는 것이며 동시에 그런 자아를 만들어준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이다.
그럼 또 우리는 이런 논의를 해볼 수 있다. 내가 사랑하는 이들과의 이별이 어째서 몸의 한구석이 떨어져나가는 듯한 고통을 가져오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죽음으로서 타인과 연결된 관계성이 하나 사라진다는 것은 단순히 개인의 죽음이 아니라 나의 소멸이다. 다시는 그를 볼 수 없다는 말은 다시는 그때의 나로 돌아가지 못함과 같다.
때문에 누군가를 살해하는 이는 그와 연결된 수많은 관계성을 파괴하는 행위이며 연쇄살인이다.
아..그렇구나 이 책을 읽기 이전에 나는 그렇다는 것을 몰랐다.
그렇다는 것을 알고 난 이후에 나는 오래된 기억속에 이해되지 않던 여러 문장들이 생각나기 시작했다.
가령 다들 잘 아는 이순신 장군의 명언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고, 죽고자 하면 살 것이다" 같은 문장들 말이다.

(이순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