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Edward Hopper - morning sun)
작년에 재수 생활을 할 때 나는 동네 학원에서 1년을 보냈다. 나는 굉장히 낙천적인 성격임에도 불구하고, 재수 생활을 내 인생의 유일한 암흑기로 손꼽을 만큼 그 생활은 결코 쉽지 않았다. 연애, 식사, 숙면이 통제되는 금욕에 가까운 생활, 그리고 재수생으로서 성과를 내야 한다는 압박. 성과가 뒤따르지 못할 때 느끼는 그 모든 부채감과 죄의식은 오롯이 나를 향했고, 그것은 서서히 자신을 갉아먹었다.
흔히들 '죄'수생이라고 부르며 감옥 생활과 비교하곤 하는데, 개인적으로는 재수생이 심적으로 더 고통스러운 것 같다. 죄인은 정해진 처벌을 받으면 채무(죄)에서 해방된다. 하지만 재수생에게 좌절은 전부 나의 잘못이며, 실패의 화살을 돌릴 곳이 오직 자신뿐이지 않은가.
내가 나를 착취하고 내가 나를 감시하는 가장 작은 사회가 바로 재수 생활이다. 물론 사회에 나가도 이런 경쟁은 끊임없겠지만, 모든 노력이 가시적인 수치와 등수로 치환된다는 점에서 재수 생활은 더욱 잔인하다.
재수 생활 중 수능 문학을 공부하며 배운 게 있다면, 모든 시는 '관찰'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이다. 시인은 세계를 관찰하며 자신만의 구조적 틀을 세우고, 그 구조를 압축하는 단어들을 정성껏 써 내려간다.
윤동주 시인의 <바람이 불어> 라는 시를 하나 보자.
바람이 어디로부터 불어와
어디로 불려 가는 것일까,
바람이 부는데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다.
- 윤동주, 「바람이 불어」 중
여러분들이 이 시를 쓰는 사람이라면 이 시를 어디에서 영감을 받아서 썼을까 생각해보자. 아마 바람일 것이다. 어느 날 윤동주에게 문득 바람이 불었다. 아마 모두에게 바람이 불 것이다. 하지만 '관찰하는' 시인에게는 똑같이 불어오는 바람도 예민하게 느껴진다. 그렇게 문장이 써졌다. "바람이 부는데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다"고 말이다.
시인은 누구일까. 시인은 글을 쓰는 사람이다. 그런데 무엇으로부터? 바로 '관찰'로부터 글을 쓰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시인은 이렇게 정의할 수 있지 않을까? "시인은 관찰하는 사람이다"라고.
우리는 가끔 시를 보면 시인의 훌륭한 '표현'에 많이 집중하지만, 그보다 먼저 알아야 할 것은 화자가 무엇을 '관찰'했는지일 것이다. 시인은 이후에나 이 '관찰'을 정의할 단어를 찾아다니는 것뿐이다.
윤동주

그렇게 재수 학원에서 생활을 보내다가 문득 2026 수능특강에 윤동주의 <병원>이 실려 있는 것을 알았다. 윤동주라... 모두가 아는 시인이지만 동시에 모두가 모르는 시인이 아닐까 싶다.
나는 윤동주를 모른다. 알긴 아는데 정확히는 모른다. 그게 어려워서가 아니라 초등학교부터 재수 생활까지 내 공부에서 윤동주가 떨어져 나간 적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윤동주가 일제 강점기 시절에 활동했던 시인이며 자기성찰과 부끄러움을 알았던 시인이라는 것을 안다. 그리고? 그다음은?
윤동주는 1942년 부산을 떠나 1945년 2월 16일 광복을 반년 앞둔 상황에서 뇌일혈로 요절했다. 근데 이건 단순한 사실관계일 뿐 그사이에 윤동주가 어떤 마음이었는지 우리는 알 길이 없다. 그러니 우리가 그의 마음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의 시를 읽는 것뿐이다.
윤동주는 부산을 떠나기 1년 전, 그러니까 1941년에 연희전문학교(연세대)를 졸업하고 이를 기념해서 자필 시집을 제작했다고 한다. 그게 그 유명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이다. 나중에 신형철 평론가님의 책을 읽다 알게 된 것인데, 윤동주의 친구 정병욱의 말에 따르면 원래 윤동주 시집의 이름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아니라 <병원>이었다고 한다.
당시 윤동주는 세계가 거대한 병원이고 사람들은 모두 환자일 뿐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병원' 이라는 단어는 그가 포착한 세계의 '구조' 를 압축하는 말이었다. 신형철,<몰락의 에티카>중
윤동주가 이 시를 시집의 제목으로 삼고 싶어 했기에, 그의 마음을 이해하기 위한 첫 단추로 <병원>을 꺼내는 것은 무리가 아니겠다는 생각이 든다.

시를 읽어보면 윤동주가 노래하는 '나도 모를 아픔'이 일제 강점기 지식인이 짊어져야 했던 시대적 비애라는 점은 자명해 보인다. 하지만 아픔과 슬픔은 엄연히 다르다. 슬프다고 해서 반드시 아픈 것은 아니며, 통증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곧장 슬픔으로 이어지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이 두 감정이 갈라지는 결정적인 지점은 어디일까.
'슬픔'이 '아픔'으로 인식되기 시작한다. 이 차이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니다. 슬픔이 구조적 통찰 이전의 즉각적인 반응이라면 아픔은 어떤 구조적 통찰 이후의 반성적 반응이다. - 신형철, <몰락의 에티카>
시인은 단어의 예민한 사람임으로 '슬픔' 이 아니라 '아픔' 으로 쓴 이유가 있을 것이다. 2연에는 그 힌트가 있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에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슬픔을 아픔으로 바꾸어 말한 이유는 그가 스스로를 '환자'라고 정의했기 때문이 아닐까. 환자는 분명히 아픈 사람이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자신을 환자라고 지칭하면서 대립하는 인물은 누구인가, '의사'가 아닐까?
위에서 말했듯이 윤동주에게 이 세계가 거대한 병원이었다는 점을 고수한다면, 의사는 단순한 의사가 아니라 '병원'이라는 세계를 운영하고 관리하는 무언가를 비유한 표현으로 해석하는 것이 맞겠다.
그렇다면 이 시는 어떤 맥락을 가지고 있는가? 이 시는 1939년 말에서 1941년 말 사이에 쓰인 것으로 추정된다. 1939년 9월 1일 독일군의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고, 같은 해 '창씨개명령'이 공포되었다. 해가 지나 1940년 8월, 조선 내부적으로는 ...






![[시리즈 연재] 4. 카더가든과 부재자의 인질 (김혜순)](https://post-image.valley.town/li4gpywvoCHRm6Iuimte3.jpeg)
![[시리즈 연재] 3. 외모 정병과 불쌍한 사랑 기계 (김혜순)](https://post-image.valley.town/Zz9NJ5RYSPtOl3qnIsvPL.jpeg)
![[시리즈 연재] 2. 몰락의 사랑과 그로테스크한 연애시 (김혜순)](https://post-image.valley.town/1TETjtOAzq4h_Sv2YeiVP.jpeg)
![[시리즈 연재] 1. 투자 커뮤니티에서 시 평론을 하는 마음](https://post-image.valley.town/xce4DVJT-mg40rVfGUhWs.jpe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