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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 연재]신고립주의, 앞으로의 세계는 (下)
3등상[시리즈 연재]국제정치와 지정학

[시리즈 연재]신고립주의, 앞으로의 세계는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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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ttoman
2026.02.07조회수 48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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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tto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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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이야기를 쉽고 재미있게 쓰는게 목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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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전력 집중

중편에서 우리는 왜 미국이 다시 담장 안으로 돌아가려 하는가를 살펴봤습니다. 전쟁 피로, 중산층 붕괴, 중국의 부상, 에너지 지형 변화, 국내 양극화라는 다섯 가지 구조적 요인이 하나로 수렴하며 고립주의 DNA를 깨웠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핵심 질문이 남습니다. 미국이 세우려는 새로운 담장은 정확히 어디까지 좁아지고, 어디만은 더 단단해질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미국은 세계 전체에서 발을 서서히 빼고 있지만, 과거와 같은 고립 일변도가 아니라 꼭 필요한 곳만을 남겨놓고 빼려는 선택적 고립에 가깝습니다. 담장이 전체적으로 낮아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구간은 허물고 어떤 구간은 오히려 더 높이 쌓는 방식입니다. 문제는 미국이 어디를 지키고 어디를 버릴지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세계 질서 전체가 재편된다는 점입니다.

하편에서는 구체적으로 들여다보겠습니다. 미국이 끝까지 움켜쥘 핵심은 어디이고, 반대로 손을 놓으려는 곳은 어디인가. 그 과정에서 동맹국들은 어떤 선택을 강요받게 되는가. 그리고 이 모든 변화가 한국을 포함한 다른 나라들에게는 어떤 의미인가. 이제 추상적인 역사 이야기를 넘어, 지도 위의 구체적인 선택들을 따라가보겠습니다.

1. 선택적 고립

1.1. 오해는 금물, 미국은 사라지지 않는다

숨어있는 세계사] '세계 경찰' 역할 해온 미국… 원래는 고립주의가 원칙이었죠 - 프리미엄조선

많은 사람들이 미국의 고립주의를 19세기식 은둔으로 오해합니다. 대문을 걸어 잠그고 세상 돌아가는 일에 일체 관여하지 않겠다는 식의 이미지 말입니다. 하지만 지금 미국이 선택하는 길은 그런 종류의 고립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미국은 여전히 강력하게 개입하되, 개입의 영역과 수단을 근본적으로 재조합하고 있습니다.

전통적인 고립주의는 밖을 보지 않겠다는 태도입니다. 1930년대 미국이 유럽의 전쟁을 방관하면서 중립법을 제정한 것처럼 말입니다. 반면 지금의 미국이 하는 것은 선택적 집중입니다. 모든 곳을 관리하지 않되, 핵심 전선에 자원을 몰아넣는 방식입니다. 담장 전체를 높이는 대신, 중요한 구간만 철옹성으로 만들고 나머지는 낮게 두거나 아예 허무는 겁니다.

이를 '축소된 제국'이라고 부를 수도 있습니다. 제국의 외곽 변경에서는 철수하지만, 핵심 영토와 전략적 요충지는 더욱 단단히 장악하는 방식입니다. 로마 제국이 말기에 국경선을 축소하고 핵심 지역만 방어하던 것과 비슷한 패턴입니다. 다만 미국은 아직 쇠퇴하는 제국이 아니라, 전략을 재조정하는 강대국에 가깝습니다. 힘이 없어서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효율을 위해 재배치하는 겁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힘의 총량이 아니라 관리 의지와 비용 감수 범위입니다. 미국의 군사력은 여전히 압도적입니다. GDP도 여전히 세계 1위이고, 달러는 여전히 기축통화이고, 기술 우위도 대부분 분야에서 유지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 힘을 어디에 쓸 것인가입니다. 아프가니스탄의 산악 지대에서 탈레반과 소모전을 벌일 것인가, 아니면 대만 해협에서 중국 해군과 맞설 준비를 할 것인가. 자원은 유한하니 선택을 해야 합니다.

1.2. 그렇다면 미국은 어디를 끝까지 움켜쥐는가

선택적 집중이라는 말이 추상적으로 들릴 수 있으니 구체적으로 정리하겠습니다. 미국이 끝까지 움켜쥐려는 것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 바다의 길입니다. 해상교통로, 특히 인도태평양의 주요 항로와 병목 지점들입니다. 둘째, 기술의 목입니다. 반도체, AI, 양자컴퓨팅 같은 핵심 기술의 병목 지점들입니다. 셋째, 앞마당입니다. 서반구, 즉 북미와 남미 대륙입니다.

이 세 가지는 미국이 절대 양보할 수 없는 핵심 인프라입니다. 해상교통로를 잃으면 무역이 막히고, 기술의 목을 잃으면 미래 경쟁력이 사라지고, 앞마당을 잃으면 본토 안보가 위협받습니다. 나머지는 협상 가능하지만, 이것들은 협상 불가입니다. 트럼프가 그린란드를 사겠다고 하고, 반도체 수출을 통제하고, 남중국해에 항공모함을 파견하는 것은 모두 이 세 가지 핵심을 지키기 위한 움직임입니다.

반대로 미국이 비우려는 곳도 명확합니다. 유럽의 일상적 안보 관리, 중동의 직접 개입, 중앙아시아나 아프리카 같은 주변부 지역들입니다. 이곳들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우선순위가 밀린다는 겁니다. 유럽은 스스로 방어할 능력이 있으니 맡기고, 중동은 최소한의 관리만 하고, 주변부는 아예 신경 쓰지 않겠다는 전략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이런 질문이 나옵니다. "미국이 비우면 중국이 채우는 거 아닌가?" 맞습니다. 빈 공간은 생깁니다. 하지만 그 공간을 채우는 비용과 위험도 함께 옮겨갑니다. 누가 그 영수증을 감당할지의 문제입니다. 미국이 중동에서 20년간 전쟁하며 수조 달러를 쓴 것처럼, 중국도 그 공간을 채우려면 막대한 비용을 감수해야 합니다. 미국의 계산은 이렇습니다. 중국이 아프리카나 중동에서 자원을 낭비하는 동안, 우리는 인도태평양에 집중하겠다는 겁니다.

2. 미국이 '끝까지 움켜쥘' 핵심 1: 서반구, 먼로주의 2.0

2.1. 아메리카 대륙은 '나와바리'다

Monroe Doctrine: American Exceptionalism upending the Global Order

1823년 먼로 독트린 이후 미국 외교의 불변 원칙이 하나 있습니다. 서반구는 미국의 세력권이라는 겁니다. 유럽 열강이 남미에 식민지를 만들거나 군사 기지를 세우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선언이었습니다. 200년이 지난 지금도 이 원칙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오히려 더 강화되고 있습니다.

세계를 모두 관리하지 못한다면, 최소한 우리 집 앞마당부터 단단히 정리한다는 논리입니다. 트럼프가 그린란드를 사겠다고 하고, 파나마 운하 통제권을 거론하고, 베네수엘라를 공격하는 것은 모두 이 맥락입니다. 유럽이나 중동에서는 손을 빼더라도, 서반구만큼은 절대 중국이나 러시아가 발붙이지 못하게 하겠다는 의지입니다.

2.2. 서반구 통제의 구체적 요소들

What to expect as Biden sends 1,500 troops to US-Mexico border

먼저 이민과 국경 문제입니다. 미국 정치에서 국경은 이제 외교가 아니라 국내정치의 심장부가 됐습니다. 멕시코 국경을 넘어오는 불법 이민자들, 중미에서 올라오는 난민 행렬, 이것들은 유권자들에게 가장 가시적이고 감정적인 이슈입니다. 트럼프가 국경 장벽을 건설하고, 이민자 추방을 강화하고, 멕시코와 중미 국가들에 압박을 가하는 것은 단순한 인종주의가 아닙니다. 서반구 통제라는 전략적 목표와 국내 정치적 필요가 결합된 결과입니다.

마약과 범죄 네트워크도 중요합니다. 멕시코 카르텔, 콜롬비아의 마약 조직들은 이제 국가 간 갈등이 아니라 네트워크 간 전쟁의 주체가 됐습니다. 펜타닐 같은 합성 마약이 미국으로 밀수되면서 연간 수만 명이 목숨을 잃습니다. 이것은 안보 위협입니다. 미국이 멕시코와 중미 국가들에 군사 협력을 강요하고, 때로는 직접 개입을 고려하는 이유입니다.

파나마 운하는 또 다른 핵심입니다. 컨테이너가 지나가는 좁은 길목이 외교의 레버리지가 됩니다. 중국 기업들이 파나마 운하 주변의 항만을 운영하기 시작하자 미국은 긴장했습니다. 지금까지 당연하게 여겼던 통제권이 흔들리는 순간입니다. 트럼프가 파나마 운하 통제권을 거론한 것은 단순한 협상 카드가 아니라, 서반구에서 중국의 영향력 확대를 막겠다는 신호입니다.

남미의 자원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리튬, 구리, 희토류 같은 전략 광물들이 칠레, 볼리비아, 아르헨티나에 집중돼 있습니다. 전기차 배터리에 필수적인 리튬은 대부분 남미에서 나옵니다. 중국이 남미 국가들에 막대한 투자를 하며 자원 개발권을 확보하려는 것도, 미국이 이를 견제하려는 것도 모두 이 때문입니다. 가치보다 공급 안정이 중요한 시대입니다.

그린란드는 서반구의 가장 외곽이지만 전략적으로는 핵심입니다. 북극 항로가 열리면서 그린란드는 대서양과 북극을 감시하는 요충지가 됩니다. 여기에 중국이나 러시아가 발붙이는 것을 미국이 절대 용납할 수 없습니다. 트럼프의 그린란드 매입 발언은 황당해 보였지만, 전략적으로는 일리가 있습니다. 덴마크 같은 국가에게 그린란드의 통제권을 절대 남겨둘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실제 그린란드를 매입하지 않더라도 군사적 통제는 유지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2.3. 역설적 강화: 고립할수록 앞마당은 조인다

재미있는 역설이 있습니다. 유럽과 중동에 대한 관심이 줄수록, 서반구에 대한 통제 욕구는 오히려 노골화된다는 점입니다. 전 세계를 관리할 때는 서반구가 당연한 세력권이었기에 굳이 강조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전력을 집중해야 하는 지금, 서반구는 절대 양보할 수 없는 최후의 보루가 됩니다.

베네수엘라 문제가 대표적입니다. 마두로 정권이 독재를 하건 인권을 유린하건, 과거 미국은 직접 개입을 주저했습니다. 중동에 전력이 묶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제 중동에서 손을 빼면서 여유가 생기자, 베네수엘라를 즉시 참수했습니다. 석유 자원도 있고, 지리적으로도 미국의 앞마당인데, 중국과 러시아가 영향력을 키우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다는 계산입니다.

먼로 독트린 2.0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1823년 버전이 유럽 열강을 서반구에서 배제하는 것이었다면, 2020년대 버전은 중국을 서반구에서 배제하는 것입니다. 형식은 같지만 대상이 바뀌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더 공격적입니다. 왜냐하면 미국이 다른 곳에서 물러나는 만큼, 여기만큼은 절대 양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3. 미국이 '끝까지 움켜쥘' 핵심 2: 인도태평양, 단일 전선의 강화

Reinventing the Indo-Pacific

3.1. 왜 인도태평양인가: 적은 하나뿐이다

중편에서 말한 '모든 전선을 동시에 유지할 수 없음'이 실제 정책으로 내려오면, 아시아 태평양이 우선순위 1번이 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중국이 여기 있기 때문입니다. 중국은 군사력만 강한 것이 아니라 경제, 기술, 외교 모든 방면에서 미국에 도전하는 종합 도전자입니다. 냉전 시절 소련은 군사적으로만 위협이었지만, 중국은 다릅니다.

중국의 GDP는 이미 미국의 70%를 넘어섰고, 제조업 생산량은 미국을 훨씬 능가합니다. 5G 인프라, 전기차, 태양광 패널, 배터리 같은 분야에서는 세계 시장을 장악했습니다. 일대일로를 통해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에 경제적 영향력을 확장하고 있습니다. 군사적으로도 해군력을 급속히 증강하며 서태평양에서 미국의 우위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미국의 전략은 명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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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다시 담장 안으로 상편에서 우리는 미국의 대외정책이 진자처럼 고립과 개입 사이를 오가는 역사를 살펴봤습니다. 조지 워싱턴의 고별사부터 냉전 시대의 세계 경찰 역할까지, 미국은 언제나 '담장 안의 안전'과 '마당 밖의 책임' 사이에서 갈등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진자가 다시 고립 쪽으로 크게 흔들리고 있습니다. 트럼프의 재집권은 그저 우연일까요, 아니면 필연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묻습니다. "고립주의는 트럼프 개인의 성향 아닌가요?" 아닙니다. 트럼프는 원인이라기보다 증상에 가깝습니다. 오바마 행정부 시절부터 이미 미국은 장기 개입의 비용을 줄이고, 동맹국에 비용 분담을 압박하고, 중국 견제를 초당적 과제로 만들어왔습니다. 정권이 바뀌어도 방향은 같았습니다. 트럼프는 그저 이 흐름을 거칠고 노골적으로 표현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고립주의라면서 왜 관세는 더 올리고 수출통제는 더 세지나요?" 좋은 질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고립주의는 19세기식 은둔이 아닙니다. 선택적 집중입니다. 총과 기지를 줄이는 대신, 관세와 보조금과 수출통제라는 경제적 수단으로 전장을 바꾸는 겁니다. 군사력으로 직접 개입하지 않되, 경제적 압박으로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방식입니다. "중국이 위협이면 더 개입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바로 그 반대입니다. 위협이 커질수록 전력을 분산할 수 없습니다. 모든 곳에 얇게 퍼지기보다, 핵심 전선에 두껍게 집중해야 합니다. 유럽과 중동과 중앙아시아에서 부담을 덜어야, 인도태평양과 기술 전쟁에서 버틸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미국이 직면한 냉혹한 현실입니다. 중편에서는 이 질문에 답하려 합니다. 왜 지금 다시 고립주의인가? 무엇이 미국으로 하여금 세계 경찰의 배지를 벗게 만들었는가? 전쟁의 피로, 중산층의 붕괴, 중국의 부상, 에너지 지형의 변화, 그리고 국내 정치의 양극화가 어떻게 하나의 거대한 흐름을 만들어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 개입의 비용이 쌓인 방식: 전쟁 피로와 '승리의 부재' 1.1. 9/11 이후의 전쟁: 목적은 선명했으나 종착역이 흐려진 전쟁들 2001년 9월 11일, 뉴욕의 쌍둥이 빌딩이 무너졌을 때 미국인들의 분노는 명확했습니다. 알카에다를 응징하고 테러리스트들을 소탕하겠다는 목표는 누구도 이견이 없었습니다. 아프가니스탄 침공은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고, 2003년 이라크 전쟁 역시 초반에는 여론의 지지를 얻었습니다. 복수극의 시작은 깔끔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습니다. 탈레반 정권은 무너뜨렸는데, 알카에다 지도부는 파키스탄 국경 지대로 도망갔습니다. 사담 후세인은 체포했는데, 이라크는 종파 갈등으로 내전에 빠졌습니다. 전쟁의 목적이 '응징'에서 '국가 재건'으로, 다시 '질서 유지'로 변질됐습니다. 애초에 약속한 전쟁이 아니었습니다. 전쟁이 길어질수록 뉴스의 중심도 바뀌었습니다. 승전보 대신 철수 일정이, 적의 소탕 대신 미군 전사자 숫자가, 작전의 성공 대신 전쟁 비용이 헤드라인을 차지하기 시작했습니다. 브라운대학교 '전쟁 비용 프로젝트'에 따르면,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전쟁에 투입된 미국의 직접 비용은 2조 달러가 넘습니다. 간접 비용까지 포함하면 8조 달러를 훌쩍 넘는다는 추산도 있습니다. 미군 전사자는 7천 명이 넘고, 부상자는 5만 명이 넘습니다. 문제는 이 막대한 희생에도 불구하고 '승리'가 보이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베트남전쟁이 그랬던 것처럼, 전쟁이 끝나지 않는 순간 깔끔했던 복수극은 치정극이 됩니다. 국민들은 묻기 시작합니다. "도대체 우리가 왜 저기 있는 거죠? 언제 돌아오나요? 이기긴 이기는 건가요?" 1.2. '영구 주둔'의 피로: 군사적 개입이 일상 행정이 되는 순간 냉전 시절 미국의 군사 전략은 명확했습니다. 소련의 팽창을 막는 것. 유럽에 NATO를 만들고, 한국에 주한미군을 주둔시키고, 일본에 기지를 두는 것은 모두 소련이라는 적을 억제하기 위한 포석이었습니다. 적이 명확했고, 전략도 명확했습니다. 그런데 냉전이 끝나고 소련이 사라진 뒤에는 어땠을까요? 적이 없어졌는데도 미군은 전 세계에 그대로 주둔했습니다. 새로운 임무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발칸 반도의 인종 학살을 막고, 소말리아의 내전을 중재하고, 리비아의 독재자를 제거하고, 시리아 내전에 개입하는 식이었습니다. 이제 미군의 역할은 적을 억제하는 것이 아니라 분쟁을 관리하는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문제는 분쟁 관리는 끝이 없다는 점입니다. 장군이 전장을 지휘하는 것이 아니라, 현지 부족장들과 외교를 하고, 경찰 훈련을 시키고, 인프라를 재건하고, 학교를 짓는 일까지 떠맡게 됐습니다. 군인이 행정관이 되고, 전쟁이 일상이 됐습니다. 미국은 전 세계 약 750개의 군사 기지를 운영하고 있고, 80개국 이상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유지하는 데 드는 비용은 연간 수천억 달러에 달합니다. '영구 주둔'은 피로를 낳습니다. 2021년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군이 철수할 때 탈레반이 순식간에 수도를 점령하는 장면을 전 세계가 목격했습니다. 20년 동안 무엇을 했는가라는 질문이 쏟아졌습니다. 수조 달러를 쓰고, 수천 명이 목숨을 잃었는데, 결국 원점으로 돌아간 겁니다. 미국인들은 지쳤습니다. 1.3. 국내 정치로 환산되는 전쟁 전쟁 비용은 추상적인 숫자로 끝나지 않습니다. 결국 유권자의 물가와 세금과 복지와 경쟁합니다. 아프가니스탄에 쓴 2조 달러면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요? 미국의 노후화된 인프라를 전면 재건할 수 있었고, 학자금 대출을 탕감할 수 있었고, 의료보험 제도를 개선할 수 있었습니다. 유권자들은 이런 계산을 합니다. 특히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이런 비교는 더욱 첨예해졌습니다. 중산층은 붕괴하고, 실업률은 치솟고, 집값은 폭락했는데, 정부는 중동에서 전쟁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아프가니스탄 도로는 고치면서 왜 우리 동네 다리는 방치하나요?" 이런 질문에 어떻게 답할 수 있을까요? 개입은 더 이상 군사 전략이 아니라 정치적 부채가 됐습니다. 해외 개입을 지지하는 정치인은 '엘리트'이고 '워싱턴 내부인'이며 '서민의 현실을 모르는 사람'으로 낙인찍혔습니다. 반대로 철수를 주장하는 정치인은 '애국자'이고 '납세자의 편'이며 '상식적인 사람'이 됐습니다. 전쟁 피로는 정치적 무기가 됐고, 고립주의는 선거 전략이 됐습니다. 2. 세계화의 배당이 표로 돌아오지 않다: 중산층의 균열 2.1. '국가의 GDP'와 '가정의 월급'이 갈라진 시기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미국 경제는 호황이었습니다. GDP는 성장했고, 주가는 올랐고, 실업률은 낮았습니다. 경제학자들은 세계화의 승리를 선언했습니다. 자유무역이 모두를 풍요롭게 만든다는 논리였습니다. 통계는 그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통계가 보여주지 못한 것이 있었습니다. 세계화의 혜택이 지역과 계층에 따라 완전히 다르게 분배됐다는 사실입니다. 월스트리트의 금융인들은 글로벌 자본 흐름을 타고 엄청난 부를 축적했습니다. 실리콘밸리의 기술 기업들은 전 세계 시장을 장악하며 성장했습니다. 상위 1%의 소득은 급증했습니다. 반면 중서부 러스트벨트의 제조업 노동자들은 어땠을까요? 공장들은 하나둘씩 문을 닫았습니다. 일자리는 중국이나 멕시코로 이전됐습니다. 한때 중산층의 자부심이었던 자동차 공장, 철강 공장, 섬유 공장이 폐허가 됐습니다. 오하이오, 미시간, 펜실베이니아, 위스콘신 같은 주들은 '러스트벨트'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녹슨 벨트. 오명입니다. 한때 미국 제조업의 심장이었던 곳이 이제는 쇠퇴와 몰락의 상징이 됐습니다. 프린스턴의 경제학자 앤 케이스와 앵거스 디턴의 연구는 충격적인 사실을 밝혔습니다. 1990년대 이후 고졸 학력 백인 노동자들의 기대 수명이 감소하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기대 수명 감소라니, 이는 선진국에서는 거의 유례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약물 중독, 알코올 중독, 자살이 급증했습니다. 연구자들은 이를 '절망사(deaths of despair)'라고 불렀습니다. 일자리를 잃고, 희망을 잃고, 결국 삶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늘어난 겁니다. 국가의 GDP는 올랐지만 가정의 월급은 정체됐습니다. 아니, 물가상승률을 감안하면 실질적으로 감소했습니다. 세계화는 파이를 키웠지만, 그 파이를 나눠 먹는 방식은 공정하지 않았습니다. 경제학자들이 말하던 '낙수 효과'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위에서 풍요가 넘쳐야 아래로 흘러내린다는 논리였는데, 실제로는 위에서 더 큰 그릇을 가져다놓고 다 담아버렸습니다. 2.2. 보호주의의 감정적 토대: 불공정의 체감 경제학 교과서는 자유무역이 장기적으로 모두에게 이익이라고 가르칩니다. 비교우위 이론에 따르면 각국이 잘하는 것에 특화하면 전체 효율이 올라간다는 논리입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문제는 '장기적으로'라는 단서와 '모두에게'라는 가정입니다. 미시간에서 30년 동안 자동차 부품 공장에서 일하다가 해고된 50대 노동자에게 "장기적으로는 이익입니다"라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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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 연재]왜 미국은 다시 고립되는가 (中)

[시리즈연재]미국 대외정책의 고질병, 고립주의의 세계 (上)

1. 진자처럼 움직이는 미국의 마음 세계인들에게 미국의 외교 정책은 종종 정신분열증처럼 보입니다. 때로는 민주주의를 수출하려는 이상주의적인 세계 경찰 역할을 하다가도, 때로는 갑자기 철수하고 가장 가까운 동맹국들에게 가혹한 배상금을 요구하기도 하지요. 이러한 변동은 정신분열증이 아니라, 미국이 가진 대외 전략의 아주 오래된 특징입니다. 사실 미국의 대외정책을 이해하려면 한 가지 비유를 떠올리면 됩니다. 거대한 섬에 사는 집주인이 기분에 따라 담장을 높였다가, 어느 날 갑자기 대문을 활짝 열고 동네 순찰을 돌기 시작하는 모습 말입니다. 그러다가 지치면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 또 시간이 지나면 다시 나가는 식입니다. 이 반복되는 패턴이야말로 미국 외교사의 핵심입니다. 미국이 이런 사치를 부릴 수 있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지정학적 로또에 당첨됐기 때문입니다. 좌우로는 태평양과 대서양이라는 거대한 '천연 해자'가 펼쳐져 있고, 위아래로는 캐나다와 멕시코라는 미국에게는 전혀 위협적이지 않은 초식동물같은 이웃이 있습니다. 유럽이나 아시아 국가들처럼 국경 너머에 강력한 적성국이 호시탐탐 침공 기회를 노리는 상황이 아닙니다. 이런 천혜의 조건 덕분에 미국은 '선택적 고립'이라는 사치를 역사적으로 누려왔습니다. 개입할 건 개입하되, 귀찮으면 언제든 빠질 수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핵심 질문은 이것입니다. 트럼프의 'America First'는 돌발적인 변종일까요, 아니면 미국이라는 나라에 처음부터 각인된 해묵은 본능의 회귀일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후자에 가깝습니다. 미국의 고립주의는 건국 초기부터 면면히 이어져 온 DNA이고, 지금 우리가 목격하는 현상은 그저 오래된 진자가 다시 한 번 반대편으로 흔들리고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2. 건국과 함께 쇄국, "외국과 얽히지 마라" 1796년, 조지 워싱턴은 대통령직에서 물러나면서 유명한 고별사를 남겼습니다. "유럽은 우리와 무관한 그들만의 이해관계가 있습니다. 우리의 운명을 유럽의 어느 부분과 엮어 평화와 번영을 위태롭게 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이 말은 단순한 조언이 아니었습니다. 신생 독립국 미국의 생존 전략 그 자체였습니다. 당시 미국은 형편없이 약한 나라였습니다. 독립전쟁을 겨우 이겨냈지만, 정규군은 보잘것없었고 경제력도 유럽 열강에 비하면 보잘것없었습니다. 유럽 대륙에서는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 전 유럽이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있었습니다. 영국과 프랑스는 각각 미국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 했지만, 워싱턴과 그의 후계자들은 단호했습니다. 유럽의 권력 게임에 휘말리는 순간, 미국의 민주주의 실험은 끝장난다고 판단한 겁니다. 18세기 당시에는 유럽의 많은 국가들이 군주가 직접 국가를 이끄는 군주정을 채택하고 있었습니다. 이 당시의 가장 유명한 인물은 누가 뭐라고 해도 프랑스의 황제인 나폴레옹으로, 그는 민족주의와 자유주의를 전파하는 동시에 공화국 프랑스를 끝장내고 본인이 군주의 자리에 오른 이단아이기도 했습니다. 군주가 없는 국가로 정체성을 잡은 미국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유럽의 정치 풍토가 미국에 닿는 것을 반드시 막아야만 했습니다. 국제정치학자 월터 러셀 미드는 이를 '제퍼슨주의'라고 불렀습니다. 토머스 제퍼슨으로 대표되는 이 전통은 미국의 민주주의 가치를 내부에서 보존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았습니다. 유럽의 군주제와 권력 정치는 일종의 오염원이었고, 이를 차단하기 위해서는 외교적 '결벽증'이 필요했습니다. 군사 동맹은 물론이고 불필요한 무역 의존도까지 최소화해야 한다는 논리였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 초기 고립주의가 단순히 군사적 불개입에 그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경제적으로도 보호무역주의와 맞물려 있었습니다. 신생 미국의 제조업은 영국의 산업혁명 제품들과 경쟁할 수 없었기에, 높은 관세 장벽으로 국내 산업을 보호해야 했습니다. 군사적 고립과 경제적 보호주의는 한 몸처럼 움직였습니다. 외부 세계와의 접촉을 최소화하면서 내부의 힘을 기르겠다는 전략이었던 겁니다. 3. 대륙 팽창기와 먼로주의 돈로주의, 도널드 트럼프와 먼로주의를 합성한 이 단어를 들어보셨나요? 1823년, 제임스 먼로 대통령은 의회 연례 교서에서 역사적인 선언을 했습니다. "아메리카 대륙은 더 이상 유럽 열강에 의해 식민지화될 대상이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요즘 유행하고 있는 먼로 독트린입니다. 아메리카니 남미도 포함합니다. 표면적으로는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의 독립을 지지하는 고귀한 선언처럼 들렸지만, 실상은 좀 더 복잡했습니다. 먼로 독트린의 핵심 논리는 이렇습니다. 유럽은 유럽대로 알아서 하고, 우리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알아서 하겠다는 겁니다. 유럽 열강이 서반구에 새로운 식민지를 만들거나 기존 독립국에 간섭하는 것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경고였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미국이 모두의 자치권을 존중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기에는 교묘한 이중성이 숨어 있었습니다. 유럽을 향해서는 고립의 담장을 높이 쌓으면서, 북미와 남미 대륙 안에서는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을 내세우며 영토를 무섭게 확장해 나갔던 겁니다. 1840년대에 미국은 텍사스를 합병하고, 멕시코와의 전쟁을 벌였습니다. 미국-멕시코 전쟁으로 알려진 이 전쟁은 우리에게는...

[시리즈 연재]미중 패권경쟁의 뿌리

'중화독립투쟁'과 '중국인들의 반란' 사이 1. 서양 제국 1.1. 프린켑스와 임페라토르: '시민 중의 제1인자' 로마 제국을 떠올리면 보통 황금 월계관을 쓴 황제가 제일 먼저 생각나실 겁니다. 하지만 재미있게도 로마 황제의 공식 칭호는 처음부터 '황제(Emperor)'가 아니었습니다.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스스로를 '프린켑스(Princeps)', 즉 '제1시민'이라고 불렀습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로마인들에게 황제란 하늘에서 떨어진 신성한 존재가 아니라, 그저 시민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능력으로 선출된 '최고 경영자'에 가까웠습니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황제의 권력이 절대화되긴 했지만, 그 권위의 근원은 여전히 '실질적인 통치 능력'에 있었습니다. 또 다른 칭호인 '임페라토르(Imperator)'는 원래 '장군'을 뜻하는 말이었고요. 승리한 장군에게 병사들이 환호하며 외치던 그 이름이, 나중에 황제를 부르는 공식 칭호가 된 겁니다. 이건 단순한 명칭 문제가 아닙니다. 서양 제국의 본질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단서거든요. 로마 황제는 하늘의 아들이 아니라 '일 잘하는 사람 1번'이었습니다. 그의 권위는 신성함이 아니라 효율성에서 나왔고, 백성들은 신하가 아니라 시민이었습니다. 이 점을 모르면 세계사의 반을 오해하게 됩니다. 이 차이가 앞으로 펼쳐질 동서양 제국의 근본적인 차이를 만들어냅니다. 1.2. 효율적 지배를 위한 하드웨어 설계 로마인들은 건축의 천재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가장 공을 들인 건축물이 뭐였을까요? 웅장한 신전? 거대한 콜로세움? 물론 이것들도 대단하지만, 로마인들이 진짜 심혈을 기울인 건 바로 '도로'였습니다. 로마 가도는 단순한 길이 아니었습니다. 제국의 모든 지점을 최단 거리로 연결하는 정밀한 네트워크였죠.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닙니다. 실제로 로마 군단은 이 도로를 통해 제국 어디든 빠르게 이동할 수 있었고, 지방의 곡물과 자원은 이 길을 따라 중앙으로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현대 물류 시스템의 고대 버전이었던 셈이죠. 그리고 또 하나, 리메스(Limes)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이건 제국의 국경선을 의미하는데, 단순한 선이 아니라 요새와 성벽, 감시탑으로 이루어진 철저한 방어 시스템이었습니다. 영국 북부에 가면 지금도 하드리아누스 방벽이 남아있는데, 이게 바로 로마 제국의 리메스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이겁니다. 로마인들은 명확한 '안'과 '밖'을 구분했다는 거예요. 리메스 안쪽은 로마의 법과 질서가 지배하는 '문명의 공간'이고, 밖은 아직 정복되지 않은 '야만의 공간'입니다. 그리고 제국의 목표는 이 경계를 조금씩 넓혀가는 것이었죠. 지도에 명확한 선을 긋고, 그 안을 완벽하게 통제하는 것. 이것이 서양 제국의 기본 설계도였습니다. 1.3. 중요한 것은 실제로 지배하는 것 로마인들은 왜 이렇게 도로를 닦고 국경을 요새화했을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돈 때문입니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효율적인 지배' 때문이죠. 로마 제국은 정복한 지역에 로마법을 적용했습니다. 특히 '만민법(ius gentium)'이라는 게 있었는데, 이건 로마 시민이 아닌 피정복민들에게도 적용되는 법이었습니다. 이 법 체계의 진짜 목적은 세금 징수 시스템을 표준화하고, 재산권을 명확히 하고, 상거래 규칙을 통일해서 제국 전역에서 자원이 마찰 없이 로마로 흘러들어오게 만든 겁니다. 이건 정말 천재적인 시스템이었습니다. 폭력만으로 약탈하는 게 아니라, 법과 행정 체계를 통해 '합리적으로' 착취하는 거니까요. 피정복민들은 억압받는다고 느끼기보다 오히려 '로마의 평화(Pax Romana)' 아래서 보호받고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실제로 도로가 안전해지고 교역이 활발해지니 경제도 성장하고요. 더불어 제국 전역에서 인재가 중앙으로 모이는 효과를 내 주변국이었던 프랑스나 독일, 스페인, 그리스 등의 지역이 모두 자신이 로마의 방계라는 인식을 심어놓았습니다. 1.4. 거대한 행정 단위로서의 제국 정리해볼까요? 서양 제국의 본질은 '효율적인 경영 시스템'이었습니다. 황제는 신이 아니라 CEO였고, 가도는 물류 네트워크였고, 법은 사내 내규였습니다. 제국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주식회사처럼 작동했던 거죠. 이런 시스템의 가장 큰 특징은 '실리 우선주의'입니다. 명분이나 도덕, 신성함 같은 건 부차적이에요. 중요한 건 "이 시스템이 얼마나 효율적으로 작동하는가"입니다. 정복한 땅에서 최대한의 자원을 뽑아내면서도 반란이 일어나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게 로마 황제들이 밤마다 고민하던 문제였습니다. 재미있는 건, 이 DNA가 오늘날까지 서구 문명에 고스란히 남아있다는 겁니다. 현대 자본주의, 국제법 체계, 글로벌 공급망... 전부 로마 제국의 직계 후손들이에요. 이것이 로마를 가장 위대한 제국으로 만든 점이죠. 세계를 명확한 규칙 아래 두고, 자원의 흐름을 최적화하고, 표준을 만들어 모두에게 강제하는 것. 이게 바로 서양식 패권의 본질입니다. 2. 동양 제국 2.1. 천자 사상: 하늘의 아들이라는 존재론적 초월성 자, 이제 지구 반대편으로 가보겠습니다. 로마 황제가 '제1시민'이었다면, 중국의 황제는 뭐였을까요? 바로 '천자(天子)', 하늘의 아들이었습니다. 이 차이를 제대로 이해하시려면 잠깐 상상을 해보셔야 합니다. 로마 시민들이 아우구스투스를 볼 때의 시선과, 중국 백성들이 진시황을 볼 때의 시선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로마인들에게 아우구스투스는 '우리 중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이었지만, 중국인들에게 황제는 태어날 때부터 다른 종류의 존재였거든요. 천명(天命) 사상이 핵심입니다. 황제는 하늘로부터 세상을 다스릴 권한을 받은 유일한 존재입니다. 일반 백성과는 핏줄 자체가 다른 거예요. 용의 자손이라는 표현이 괜히 나온 게 아닙니다. 실제로 자금성에 가보시면 황제만 걸을 수 있는 '어도(御道)'라는 게 있는데, 이건 단순한 청룡영화제 레드카펫이 아니라 신성한 존재만이 밟을 수 있는 성스러운 길이었습니다. 재미있는 건 이 권위가 양날의 검이었다는 겁니다. 황제는 하늘의 대리자이기 때문에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지만, 동시에 하늘의 뜻을 제대로 구현하지 못하면 천명을 잃을 수도 있었거든요. 홍수가 나거나 흉년이 들면 "황제가 덕을 잃어서 하늘이 노한 것"이라고 해석됐습니다. 로마에서는 황제가 무능하면 그냥 암살당했지만, 중국에서는 하늘이 왕조를 버렸다는 명분 아래 혁명이 일어났죠. 2.2. 만리장성과 리메스의 차이: 배제의 울타리와 개방된 천하 만리장성과 로마의 리메스, 둘 다 거대한 방벽이지만 그 의미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로마의 리메스는 명확한 주권의 선이었습니다. "여기까지가 우리 땅이고, 여기부터는 아니다." 지도에 빨간 선 딱 그어놓은 거죠. 리메스 안쪽은 로마법이 지배하고, 밖은 로마법이 미치지 않는 곳입니다. 깔끔하고 명료하죠? 그런데 만리장성은 좀 다릅니다. 겉보기엔 비슷해 보여도, 중국인들이 이 성벽을 생각하는 방식이 달랐거든요. 만리장성은 주권의 선이 아니라 '문명의 울타리'였습니다. 성벽 안쪽은 예의와 덕을 아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고, 밖은 아직 교화되지 않은 '오랑캐'들이 사는 곳이에요. 여기서 핵심은 이겁니다. 로마의 경계는 정치적·법적 개념이지만, 중국의 경계는 도덕적·문화적 개념이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만리장성 밖의 유목민들도 중국 문화를 받아들이고 예법을 따르면 언제든 '천하'의 일부가 될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수,당은 개창자가 이민족이고, 원,청나라는 아예 국가를 이민족이 세웠지만, 중국 문명을 계승했기 때문에 정통 왕조로 인정받습니다. 이게 바로 '천하' 개념입니다. 천하는 고정된 영토가 아니라 황제의 덕이 미치는 무한한 공간입니다. 원칙적으로 전 세계가 다 천하에 포함될 수 있습니다. 황제의 덕에 감화되기만 하면요. 로마가 "저 땅까지 정복했다"고 지도에 색칠했다면, 중국은 "저 나라도 우리 황제의 덕을 우러러본다"고 생각한 겁니다. 2.3. 조공-책봉 체제 이 천하 개념을 구체적으로 구현한 게 바로 조공-책봉 체제입니다. 기본 원리는 이렇습니다. 주변국 왕이 중국 황제에게 조공을 바치러 옵니다. 예를 들어 조선 왕이 사신단을 보내서 "황제 폐하께 우리나라의 특산물을 바칩니다" 하는 거죠. 그럼 중국 황제는 "오냐, 네가 과인의 덕을 흠모하는구나. 짐이 너를 조선의 왕으로 임명하노라" 하고 책봉합니다. 여기까지 들으면 조선이 완전히 속국처럼 보이지만 그런데 실제로는 좀 달랐습니다. 우선 중국은 조선 내정에 거의 간섭하지 않았습니다. (명-청 시기가 조금 다릅니다만) 일반적으로 왕이 법을 어떻게 만들든, 신하를 어떻게 임명하든, 전쟁을 하든 말든 중국은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걷은 세금을 보내라고 하지도 않습니다. 그냥 "너는 우리 황제를 우러러보는 착한 왕이다"라는 명분만 있으면 됩니다. 더 재미있는 건 경제적 측면입니다. 조공 무역을 보면 황당한 일이 벌어집니다. 조선이 조공품을 바치면, 중국은 그 몇 배 값어치의 비단과 서적을 답례품으로 주었습니다. 경제적으로 보면 완전히 손해를 보는 셈입니다. 이 때문에 중국은 사정이 어려우면 조공 횟수를 제한하는(...) 일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한국과 일본에서 행해지는 연구의 공통된 결론은 조공 무역에서 중국은 거의 항상 손해를 크게 봤다는 것입니다. 왜 이런 짓을 했을까요? 명분 때문입니다. 주변국들이 중화의 황제를 인정하고 찾아와주는 게 중요했던 것입니다. 그게 바로 황제가 하늘의 뜻을 제대로 구현하고 있다는 증거니까요. 실리를 좀 손해 봐도 "만방이 우리 황제의 덕을 흠모한다"는 명분을 얻는 게 더 중요했습니다. 로마였다면? 로마 황제가 게르만 부족에게 공물보다 더 많은 걸 답례로 준다고요? 원로원에서 탄핵안이 바로 올라왔을 겁니다. 국부 유출은 암살 대상이었기 때문입니다. 서양 제국은 실리를 챙기고 명분은 나중에 갖다 붙이는 식이었지만, 동양 제국은 명분을 지키기 위해 실리를 기꺼이 희생했습니다. 2.4. 도덕적 위계질서로서의 동양 제국 정리하자면, 동양 제국은 서양 제국과 완전히 다른 논리로 작동했습니다. 서양이 '효율적인 행정 시스템'이었다면, 동양은 '도덕적 위계 질서'였습니다. 황제는 CEO가 아니라 성인(聖人)이어야 했고, 제국의 범위는 지도의 선이 아니라 덕의 영향력으로 정해졌으며, 주변국과의 관계는 조약이 아니라 예의로 규정됐습니다. 심지어 경제적으로 손해를 보더라도 "우리가 세계의 중심"이라는 상징적 지위를 유지하는 게 더 중요했어요. 이게 나중에 큰 문제가 됩니다. 19세기에 서양 제국주의가 동아시아에 들이닥쳤을 때, 중국은 완전히 다른 게임의 룰을 가진 플레이어를 만납니다. 중국은 인정해주면 적당히 손해봐도 잘 쳐주겠다는 정도의 인식이었다면, 영국은 아예 대륙 전체를 발라먹을 생각을 하고 왔기 때문입니다. 3. 제국주의와 치욕의 세기 3.1. 나폴레옹의 대관식: 파괴된 전통과 약육강식의 시작 ...

[시리즈 연재]전생에 공포의 나치였던 내가 이번 생에는 관광객? 독일의 재무장 이야기

미국의 퇴장과 신먼로주의의 공포 2024년 11월, 도널드 트럼프가 다시 백악관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그의 'America First' 기치는 이번엔 단순한 슬로건이 아니었습니다. 70년간 유럽의 하늘을 덮어주던 미국이라는 거대한 우산이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접히기 시작한 겁니다. NATO 정상회의에서 트럼프는 방위비 분담금을 제대로 내지 않는 동맹국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러시아가 공격해도 우린 돕지 않을 것"이라고요. 농담처럼 들렸지만, 아무도 웃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진심이라는 걸 모두가 알았거든요. 유럽 각국 정상들의 표정을 상상해보십시오. 마치 70년간 부모님 집에 얹혀살던 중년이 갑자기 "내일부터 독립해"라는 통보를 받은 것과 같은 심정이었을 겁니다. 문제는 이 중년이 집 밖 세상이 얼마나 위험한지 까맣게 잊고 살았다는 점이죠. 미국의 안보 외주가 종료되는 순간, 유럽은 자신들이 벌거벗은 채로 서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머리 위로는 거대한 먹구름 하나가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바로 러시아라는 이름의. 실존적 위협, 소련러시아라는 오래된 적 2022년 2월 24일, 블라디미르 푸틴은 전 세계에 명확한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제국주의는 죽지 않았다"고요. 우크라이나 침공은 단순한 국지전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냉전 이후 유럽이 믿고 싶어했던 모든 환상을 산산조각 낸 사건이었죠. 잠깐, 우리는 러시아를 너무 가볍게 봤던 게 아닐까요? 소련 붕괴 후 30년이 지나며 많은 사람들이 착각했습니다. '저 곰은 이제 늙었고 이빨도 다 빠졌다'고요. 하지만 보시죠. 소련은 냉전 시절 550만 명의 상비군을 보유했습니다. 전차만 5만 대, 전투기 1만 대, 핵탄두 4만 발. 말 그대로 유럽 전체를 단독으로 상대할 수 있는 군사력이었죠. 그래서 NATO가 만들어졌던 겁니다. 소련 하나를 막기 위해 서방 16개국이 손을 잡아야 했으니까요. 소련이 무너지면서 그 군사적 유산은 어디로 갔을까요? 대부분을 러시아가 승계받았습니다. 1991년 12월, 옐친은 소련군의 70% 이상을 러시아군으로 흡수했습니다. 핵무기는 물론이고, 첨단 미사일 기술, 전략폭격기, 전략 잠수함... 소련 방산 단지의 85%가 러시아 영토에 있었거든요. 더 중요한 건 소련 시절의 군사 교리와 전략적 사고방식까지 고스란히 이어받았다는 점입니다. 서방의 전쟁 개념과 근본적으로 다른, 그 독특한 방식 말이죠. 그것이 러시아가 전쟁하는 방식입니다. 러시아는 전쟁을 '전선'이 아니라 '체계 전체'에서 수행합니다. 소련 군사 이론가였던 게라시모프 장군의 이름을 딴 '게라시모프 독트린'을 아십니까? 군사적 수단과 비군사적 수단의 비율을 1:4로 보는 전략입니다. 즉, 탱크 한 대 굴리는 동안 사이버 공격, 에너지 차단, 정보전, 외교 압박을 네 배로 가한다는 거죠. 실제로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을 보십시오. 겨울이 오기 전 천연가스 공급을 끊어 시민들을 얼어붙게 만들고, 사이버 공격으로 발전소를 마비시키며, SNS에 가짜뉴스를 퍼뜨려 사회를 분열시킵니다. 2023년 한 해 동안만 우크라이나는 2,194건의 대규모 사이버 공격을 받았습니다. 하루 평균 6건입니다. 어느 유럽 안보 전문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러시아는 전쟁을 교향곡처럼 지휘한다"고 합니다. 군사, 에너지, 정보, 사이버, 외교... 모든 악기가 하나의 목표를 향해 연주되는 거죠. 문제는 유럽이 이런 하이브리드전에 완전히 무방비라는 점입니다. 냉전이 끝난 1990년부터 유럽 국가들은 '평화의 배당금'이라는 달콤한 함정에 빠졌습니다. "이제 전쟁은 없을 거야. 국방비를 줄이고 복지에 쓰자!" 그 결과가 어땠을까요? 독일군은 한때 빗자루을 총 대신 들고 훈련했습니다. 농담이 아닙니다. 2014년 NATO 훈련에서 독일군이 실제 무기가 부족해서 나무로 만든 가짜 총을 장착했던 일화는 이제 전설이 되었죠. 영국 해군의 구축함들은 부품 부족으로 항구에 묶여 있고, 프랑스는 정예 부대는 있지만 대규모 지상전을 치를 예비군이 없습니다. 이탈리아와 스페인은... 뭐, 말할 필요도 없겠죠.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습니다. 고령화와 전의(戰意) 상실입니다. 러시아는 단기적 위협이 아닙니다. 앞으로 20년, 30년을 내다봐야 하는 구조적 위협입니다. 푸틴이 사라져도 러시아라는 시스템은 남습니다. 러시아 국방대학 교과서에는 아직도 "유럽 평원은 러시아의 전략적 완충 지대"라는 표현이 버젓이 남아있습니다. 제국의 영광을 되찾으려는 DNA는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유럽은 녹슬어버린 무기를 다시 갈고닦아야 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무기보다 더 큰 문제가 있었으니... 2. 복지 천국 유럽, '누가 전장으로 갈 것인가?' 20세기 초반의 유럽을 떠올려봅시다. 유럽은 수백년 지속된 열강으로, 대륙 밖의 모든 나라를 손쉽게 두들겨패고 다녔습니다. 대영제국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였습니다. 프랑스는 나폴레옹의 영광을 계승한 대륙의 패권국이었고, 독일 제국은 프로이센 군국주의의 정점에 있었죠. 이들의 군사력은 가히 세계를 호령했습니다. 숫자로 볼까요?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프랑스는 동원령 하루 만에 390만 명을 소집했습니다. 영국은 전쟁 기간 동안 자원입대자만 250만 명이었습니다. 독일은? 1,300만 명을 동원했죠. 독일답죠? 인구 대비 20%입니다. 이들의 산업 생산력도 무시무시했습니다. 영국은 전쟁 기간 동안 전차 2,636대, 항공기 5만 5,000대를 생산했습니다. 프랑스는 포탄만 2억 9,000만 발을 찍어냈죠. 독일 크루프 공장은 3교대로 돌아가며 하루에 대포 100문을 생산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은 어땠을까요?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영국은 13만 2,500대의 항공기를 만들었습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영국 여성 노동자만 650만 명이 군수 공장에서 일했습니다. 프랑스는 비록 1940년에 항복했지만, 자유 프랑스군은 아프리카와 중동에서 계속 싸웠고, 레지스탕스는 독일군을 끊임없이 괴롭혔죠. 이게 바로 제국주의 열강의 전투력이었습니다. 단순히 병력만 많은 게 아니라, 전쟁을 '시스템'으로 수행할 수 있는 산업 기반과 국가 동원 능력이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2024년의 유럽을 보십시오. 프랑스군 현역은 20만 3,000명입니다. 1914년의 20분의 1 수준입니다. 영국군은? 8만 2,000명입니다. 2차 대전 말기 영국군이 300만 명이었던 걸 생각하면 97%가 증발한 겁니다. 독일 연방군은 18만 3,000명. 나치 독일 국방군 1,300만 명의 1.4%입니다. 더 충격적인 건 이 숫자마저 제대로 채우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2023년 영국군은 모집 목표의 79%만 달성했습니다. 독일은 71%입니다. 프랑스는 그나마 나은 편이지만, 그것도 아프리카 출신 흑인 이민자들로 간신히 채우는 수준이죠. 상상해보십시오. 연금이 보장되고, 무상 의료가 제공되며, 주당 35시간만 일하면 되는 나라에서 자란 젊은이들에게 "이제 총 들고 전쟁터로 가야 한다"고 말하는 상황을요. 2023년 어느 여론조사 결과는 충격적이었습니다. "당신의 나라가 침략받으면 무기를 들고 싸울 의향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독일 청년의 23%만이 "그렇다"고 답했습니다. 프랑스는 29%, 이탈리아는 14%, 영국은 33%였죠. 참고로 같은 질문에 폴란드 청년들은 45%가, 핀란드 청년들은 74%가 "그렇다"고 답했습니다. 러시아를 이웃에 둔 나라와 그렇지 않은 나라의 차이가 이렇게 극명하게 드러난 겁니다. 1916년 솜 전투에서 영국군은 하루에만 2만 명이 전사했지만 다음 날도 공격을 계속했습니다. 또 수만 명이 희생됐지만 다음 날도 여전히 똑같은 돌격명령이 떨어졌습니다. 베르됭에서 프랑스군은 "On ne passe pas(적은 통과하지 못한다)"를 외치며 10개월간 버텼습니다. 그 시절 유럽인들은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걸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프랑스에서 병역을 거부하면 벌금 1,500유로만 내면 됩니다. 독일은 아예 징병제를 폐지했다가 2024년에야...

[시리즈 연재]민주주의는 정말 '국룰'인가? 그럴리가 없지.

민주주의와 군주정, 그 대척점 아래의 공통된 본능 놀랍게도 민주정의 반대는 공산주의가 아닙니다. 군주정이죠. 지도자를 민중이 직접 선택할 수 있느냐, 아니면 혈통이나 무력에 의해 결정되느냐는 분명 거대한 차이죠. 민주주의는 정책 결정권자를 대중이 선출한다는 점에서 군주제와 명확한 대척점에 서 있습니다. 반면 군주제는 그 자리를 혈통이나 개인의 압도적인 역량으로 쟁취한 자가 지도자가 되는 구조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외형적 차이 너머의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과연 인간 집단의 형태가 그들이 표방하는 제도만큼이나 서로 다른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인간 집단의 근원적 역학은 유인원, 특히 침팬지의 사회적 구조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민주정이든 군주정이든 그 모든 정치적 수식어를 걷어내면, 결국 집단을 이끌고 대표할 '단일한 지도자'를 선택하여 효율을 극대화하려는 본능으로 귀결됩니다. 인류는 민주주의라는 정교한 옷을 입었을 뿐, 그 속살은 여전히 생존을 위해 강한 리더십에 의존하던 수백만 년 전의 본능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1. 침팬지의 제국, 조직화라는 생존의 절대반지 인간과 유전적으로 가장 가까운 침팬지의 사례를 들여다보는 것은 정치의 본질을 이해하는 훌륭한 창이 됩니다. 침팬지는 서식지가 겹치는 포식자인 표범에게 신체적으로는 형편없이 밀립니다. 어두운 밤눈, 가죽이 아닌 피부를 가진 연약한 신체, 순발력 등 모든 면에서 표범은 완벽한 사냥꾼이죠. 하지만 개체의 사냥 성공률을 따져보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표범은 사냥에 실패해 굶는 일이 비일비재하고 종종 이로 인해 사망에 이르기까지 하지만, 침팬지는 무리에서 도태되지 않는 이상 아사하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이 극명한 차이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바로 '사회성'과 '조직화'입니다. 표범에게는 강인한 개별 개체의 실력이 중요했지만, 침팬지에게는 무리와 어울리는 능력이 무엇보다 중요했습니다. 침팬지의 성공에는 조직적 행동이 핵심입니다. 정글의 다른 동물들에게 조직적으로 퇴로를 차단하고 포위 공격을 감행하는 침팬지 무리를 이겨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따라서 침팬지 개개인에게는 무리 내에서 얼마만큼의 입지를 차지하는가, 그리고 무리에서 추방되지 않는가가 가장 중요한 생존과 번식의 조건이 되었습니다. 인간 역시 이 지점에서 침팬지보다 훨씬 더 정교한 사회성을 발달시켰고, 사회적 격리를 겪을 때 물리적 통증에 준하는 스트레스를 받도록 진화했습니다. 그것이 생존에 유리했기 때문입니다. 2. 단일 리더십: 전쟁의 효율을 위한 수직계열화 사회성이 고도로 발달한 집단은 반드시 그 정점에 '알파 메일', 즉 지도자를 두게 됩니다. 유인원 사회에서는 주로 유전적으로 타고난 공격성과 리더십 때문에 남성이 지도자가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는 단일한 지도 체계하에서 사냥과 전쟁을 수행하는 것이 수평적인 관계보다 구조적으로 훨씬 유리하기 때문입니다. 침팬지는 타 무리와의 '패싸움'을 수행하는 경우가 잦으며, 인간은 이를 고도로 정교화한 '전쟁'으로 악명을 떨쳤습니다. 동원되는 개체의 수가 많아질수록 단일 리더십은 그 무엇보다 중요해집니다. 사공이 많은 배가 산으로 가듯, 위기 상황에서의 분산된 권력은 곧 전멸을 의미했습니다. 나폴레옹이 "양이 이끄는 사자 떼는 무섭지 않으나, 사자가 이끄는 양 떼는 훨씬 강하다"라고 통찰한 지점도 바로 이곳입니다. 위대한 승리 뒤에는 언제나 일사불란한 지휘 체계가 있었고, 인류는 무의식적으로 '강한 대장'을 중심으로 모이는 부족 체계를 가장 효율적인 생존 모델로 학습해왔습니다. 3. 지도자의 변질 하지만 단일 리더십의 효율성 뒤에는 치명적인 부작용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역사 이전의 인류에게 싸움과 위기는 일상이었기에 부족장 중심의 체계는 훌륭하게 작동했습니다. 그러나 위기가 상시적이지 않은 평화 시기가 도래하거나 조직이 거대해지면, 결정권을 독점한 리더는 그 빠른 결정 속도만큼이나 권력을 오남용할 가능성도 커졌습니다. 침팬지 무리에서 승리한 대장은 암컷들을 독점하는 하렘을 구축하고 하위 서열 수컷들의 번식 기회를 박탈합니다. 이에 따라 2위 이하 서열의 수컷들은 주기적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대장을 교체합니다. 인간 사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정치 권력을 독점한 리더는 '경비대장'의 역할을 넘어 점차 '부양의 대상'인 왕으로 변모했습니다. 세계 각지에 화려한 궁전과 성이 지어지고, 요리와 예술이 발달하는 등 사치와 향락이 등장한 배경에는 권력의 독점이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이 독점은 세금, 강제 노역, 전쟁, 합법적 살인과 감금 등 폭력적인 양상으로 나타났습니다. 지도자의 자리가 '책임'에서 '특권'으로 변함에 따라, 그 자리는 모든 이들이 선망하는 욕망의 분출구가 되었습니다. 4. 정통성의 등장 누구나 탐내는 자리를 차지한 자는 자신을 시기하는 수많은 경쟁자를 납득시켜야 했습니다. 여기서 '정통성'이라는 개념이 등장합니다. 가장 원초적이고 강력한 정통성은 바로 '혈통'이었습니다. 왕의 아들이 왕이 된다는 논리는 자리에 앉지 못한 사람들을 평화적으로 굴복시키는 장치였습니다. 혈통은 가족의 개념을 국가적 정치 엘리트 수준으로 확장시켰고, 이는 인류 문명에서 가장 오래 지속된 지도자 선출 방식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혈통에 의존한 선발은 치명적인 단점을 노출했습니다. 지도자가 없는 혼란보다는 낫지만, 장기적인 시계열에서 보면 국가의 운명이 지도자 개인의 유전적 운에 맡겨지게 된 것입니다. 군주정 치세에서는 명군의 등장으로 전성기를 맞았다가도, 그 후손의 폭정이나 무능으로 인해 나라가 쇠망하는 사이클이 반복되었습니다. 인간의 국가 공동체는 마치 생명체처럼 성쇠를 반복했고, 그 과정에서 겪는 희생은 오롯이 민중의 몫이었습니다. 전근대 사회에서 이런 폭정을 끊어내는 유일한 방법은 반란이나 혁명을 통한 왕조 교체뿐이었으며, 이는 필연적으로 피비린내 나는 내전을 동반했습니다. 5. 민주주의라는 대체제: 설계된 평화적 쿠데타 민주정은 바로 군주정이 가진 이러한 구조적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대세가 되었습니다. 수십 년마다 내전을 벌여 지도자를 갈아치우는 것보다, 미리 정해진 규칙에 따라 평화적으로 지도자를 선출하고 교체하는 장치를 설계한 것입니다. 즉, 민주주의는 근본적으로 "어떻게 하면 피를 흘리지 않고 무능한 지도자를 축출할 것인가"에 대한 인류의 지성적 답변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점은, 민주주의 역시 근본적으로는 거대해진 인구 집단을 이끌 '단일한 리더십 층'을 구성하는 행위라는 사실입니다. 리더십이 반드시 한 사람의 통치를 의미할 필요는 없습니다. 공산당과 같은 소수 엘리트의 협의 통치든, 황제의 만인지상 통치든, 중앙에서 단일한 목소리를 빠르고 멀리 전달할 수 있다면 사회는 유지됩니다. 반대로 리더십이 부재한 상태는 '아나키'라 불리며 혼란과 멸망의 길로 접어듭니다. 결국 현대 민주주의 국가들도 위기의 순간에는 한 명의 대통령이나 총리에게 권한을 몰아주는 일극 체제의 본능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6. 로마 공화정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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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고
2026.02.07

아태지역 국가들은 앞으로 5년 동안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향후 2~30년이 달라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미주 출장 잘 다녀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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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핑이
2026.02.08

문득 중국 관점에서은 어떨지 궁금해지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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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LEY_FRESHMEN
2026.02.09

저도요!

문득 중국의 주변국들은 왜 중국과 대척하고 있는지, 중국의 발전이 위협이 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더라구요. 마찬가지로 러시아 역시 왜 유럽을 공격하는지도 알고 싶네요.

세계사, 정치 등을 알아야 하는 이유가 있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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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ttoman
작성자
2026.02.21

중국 이야기가 곧 예정되어 있습니다. 핀트가 맞을 지 모르겠으나.. 잘부탁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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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창이
2026.02.08

많이 배우게 되는 글입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출장 잘 다녀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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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
2026.02.08

좋은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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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절글랑
2026.02.08

조심히 잘 다녀오세요~~

그리고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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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리
2026.02.08

중국 미국 사이에서 줄타기를 잘 해야겠네요 ㅠ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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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비
2026.02.08

출장 조심히 잘 다녀오세요. Ottoman님의 글은 항상 몰입하게 만드는 힘이 있는 것 같습니다. 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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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ayoung007
2026.02.09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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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 pacino
2026.02.11

최고입니다! 출장 잘 다녀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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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yru
2026.02.11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현대의 흐름을 지정학적인 맥락에서 살펴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수정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