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하기 어려울, 조금은 재수 없고, 어쩌면 비판 받을 수도 있는 이야기들
Fellow 커뮤니티 글
'기업체 오퍼를 거절하고 오는 고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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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자와 본업의 밸런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https://www.valley.town/community/free/post/676cf31e4cfdcc2e3b37c400
가 불러온 단상(短想)들이 모인 장상(長想)
대학을 입학한 후, 생활비를 위해 외부 장학금들을 알아보며 신청하던 때가 있었다.
당시에는 집안 환경이 어려운 학생들을 대상으로 생활비를 지급하는 단체들이 있었고, 그 당시 면접과정에서 있었던 이야기다.
"근데, oo씨는 왜 이렇게 밝아요?"
'우리집은 어려서부터... 어쩌구 저쩌구'
'교통사고를 당해서 수술을 4번하고 장애가... 블라블라'
'늦은 나이에 대학을 결심하게 된 이유... 솰라솰라'
면접과 평가를 위해 나는 내 이야기를 한껏 풀어 놓았고, 그러고 나서 이어진 저 질문이 나를 몹시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근데, oo씨는 왜 이렇게 밝아요?"
몰려드는 당혹감을 넘기기 위해 멋쩍게 웃으며, 면접관의 의도를 파악하려 애썼다.
그리고 나를 향한, 마치 사기꾼을 바라보는 듯한 눈빛과 기색을 느끼고는 속으로 생각했다.
'아, 이 건은 망했군'
당시 이십대 초반의 나는 경험이 부족해 왜 이런 질문을 받아야 했는지 알 수 없었다.
이후 복지시설 등지에서 봉사활동을 하는 경험들이 쌓이면서, 그 이유를 어렴풋이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그들이 생각하는 불우한(혹은 그것을 주장하는) 아이들의 전형적인 모습과 달랐기 때문에 받았던 질문이 아니었을까.
대학교는 나이로, 이름 순서로, 번호 순으로 짝지어진 인연이 아니라, 처음으로 결이 맞는 사람들이 자연스레 뭉치게 되는 곳이다.
공연이었는지 연습 후의 뒷풀이였는지 기억은 나지 않으나
여느때와 다름 없이 결맞는 사람들과 거나하게 술에 취한 어느날,
그 자리에서 가장 내성적인 한 녀석이, 갑자기 무게를 잡더니 큰 결심을 한듯 조심스레 본인의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사실, 나는 지체 장애가 있는 동생이 있어서...'
순간, 우리는 모두 벙쩌버렸다. 그 이야기가 놀라워서가 아니었다.
이 별거 아닌 이야기를 꺼내는걸 왜 그렇게 어렵게 생각하고 무게를 잡았는가에 대한 벙찜이었다.
그리고 서로가 서로의 눈치를 살피다... 이내 키득키득 웃기 시작했다.
그날, 우리는 왜 서로의 결이 맞닿아 있는지를 알게 되었다.
따스한 햇살 대신 차디찬 그늘 아래에서 자라난 유년의 상처를 감당하며 살아가는 유별난 놈들이 그 자리에 있었다.
그리고 그때 깨달았다.
불우함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무언가를 이뤄낸 사람들—당시엔 대학 입시—은 이렇게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덕분에,
"근데, oo씨는 왜 이렇게 밝아요?"
당시에는 답할 수 없었던, 내 머릿속에 남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할 수 있었다.
'아, 나는 이단아(異端兒)들 사이에서도 이해받을 수 없는 괴물(怪物)이 아니었구나.'
그제야 비로소 나는 외톨이가 아니라는 안도와 함께 편안하게 잠들 수 있었다.
나는 스무살이 되어서야 대학을 가겠다는 결심을 하고, 남들보다 늦게 검정고시와 대입을 준비했다.
국립대가 아닌 사립대를 가게되면 그 비싼 학비를 알아서 감당하라는 집안의 엄포 때문에,
내 선택지는 근처의 지거국과 서울대 밖에 없었다(없는 줄 알았다).
첫 수능에 KY중 한 곳과 근처 지방 의대는 붙었지만, 검정고시의 한계로 S는 최종 논술에서 떨어졌다.
당시 내가 붙은 의대에 대한 아버지란 사람의 말이 가관이었다.
"니 그딴 대학가면, 졸업하고 밖에 나가서 사람 취급은 받을 수 있는 줄 아나?"
대학도 잘 모르고, 의대는 더 모르면서, 본인이 중졸(中卒)이라는 열등감과 피해의식만 가득한 사람이었다. 지금와서 보면.
대학을 입학하고 나서 알았지만,
이공계 장학금이라는 제도 덕분에 나는 어느 대학에서든 학비가 무료였고(정작 대학 생활을 개판으로 해서 3학년 2학기에 짤렸다),
의대를 갔더라도 예과에 입학하는 순간에 1억 한도 마이너스 통장이 뚫리기 때문에 학비 걱정을 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당시에는 본과를 졸업하고 인턴-레지던트 생활을 하면서 받는 월급으로 학비(마통)를 변제하고도 차를 뽑을 수 있었다.
무언가를 선택할 때,
올바른 가이드와 정보가 얼마나 얼마나 중요하고, 또 중요한 것인지를 그 때 절절히 깨달았다.
두번째 수능에서는 원서비 15만원이 아까워서 아예 다군 의대에 지원하지 않았다(15만원이면 치킨이 열마리 였기에...).
그때 수험생 커뮤니티를 보면, 나와 비슷한 성적으로 나와 같은 선택을 한 이들은 손에 꼽았던 것 같다.
당시 나는 의사라는 직업을 무언가를 창조하는 생산적인 일이 아니라, 돈을 많이 버는 단순한 서비스업에 가깝다 여겼다.
대학을 가서도 전공이 전공인 만큼(바이오),
여자 동기들의 상당수는 2학년 때 약학전문대학으로 빠져나가고, 남은 동기들 대부분은 의학전문대학원에 진학했다.
3학년까지도 의대에 큰 관심이 없던 동기들도, 분위기에 휩쓸려서, 학점이 아까워서 원서는 써보던 시절이었다.
동기중에 약전/의전에 진학하지 않은 사람은 열손가락으로 셀 수 있다. 내 학번 위로도, 내 학번 아래로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