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미엄
예측대회
투자분석
아카데미
커뮤니티
로그인Valley AI 시작하기시작하기
Valley Space인기
타인의 생각을 훔치는 방법 (짧게 썼지만 결국 길게 됨)
Suldanessellar철학

타인의 생각을 훔치는 방법 (짧게 썼지만 결국 길게 됨)

avatar
Irenicus
2025.03.30조회수 14회
avatar
Irenicus
구독자 7명구독중 8명






이 논의를 하기 전에

'기술가능성과 태도'라는 글을 읽었음을 전제한다.

그 내용에서 나타나는 '기술가능성'이라는 것을 모르면 이 얘기는 크게 와닿지 않는다.






크게 2가지로 나눠진다.


1. 도려내기

2. 튜닝하기



도려내기는 한 사람의 판단방식을 추출하는 것이다.

이 때에 핵심은 그 사람을 진리체계라는 쪽에서 보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이 사태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순환적인 관점에서 보는 것이다.


사태

직관/사유/판단 (충돌)

발화


이게 글이 나오는 과정이고, 이를 분석하여 갖고 가는 것이 핵심이다. 당신은 진리체계에 관심갖지 말아야 한다.

유일한 검증은 사태에 대한 판단이 어떤 결과와 관계맺고 있는가? 이를 찾아내는 것이다. 나머지는 홍보에 해당한다. 탐스럽게 보이게 만들면 된다.


사태 -> 태도 -> 작용(으로 인한 이후의 사태) -> 태도 -> 반복


이 관계를 습득했다면

그것을 도려낸다.

그 다음에 내 쪽으로 갖고 온다.



박태환이 이런 얘길 한다.

해외에 선수들을 보면, 관찰을 하고 비디오를 찍는다.

그 다음에 유심히 연구를 하고, 그 사람의 테크닉을 내게 적용시켜본다.

되면 쓰고

안되면 버린다.


도려낸다는 건, 이런 걸 하는 것이다.




2. 튜닝하기

여기에 점 하나를 추가시키는 작업,

색을 덧칠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러면

마치 내것처럼 보인다.




한마디로

튜닝하기란

에고의 투덜거림. (반항심)을 진정시키는 작업이다. 제거시킨다고 표현해도 무방하다.




튜닝을 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1. 존경-창피-마조히즘

예컨대 내가 훔쳐가는 것을 권위에 짓눌려서, 존경심에 의해서, (또는 창피함을 느끼면서도)

그 피학성 쾌락을 느끼기 위해서 앵무새가 되겠다고 자발적으로 나서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충실히 복제될 수록, 쾌감을 느낀다.

상대가 그런 나를 좋아할 수록 쾌감을 느낀다. (즉 충실하게 복제된 나를 보면서 쾌감을 느끼는 것을, 이번에 내가 좋아하는 것이다.)


일본의 코스프레를 생각해보자.

이 튜닝방식은 코스프레와 유사하다. 너무 좋아해서 아예 복제되고 싶은 심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그의 스킬이 내 쪽에 이식된다. 이런 것을 말한다. 

즉 나는 이렇게 말하면 된다. "너무 존경해서 그랬다." -> 이런 땡이다.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

세간에 사람들은 "앵무새다" 뭐라뭐라 하겠지만, 너는 한마디만 하면 된다. "난 앵무새도 좋아 ㅎ"


어쨌거나

이식 되었다는 점에서,

학습은 끝난 셈이다.





2. 피를 강조한다.

이게 스티브 잡스 스타일인데

"난 원래 그래" 이러면서 다 훔쳐버려라.


"나도 원래 그랬어."

"내 생각과 다를 게 없어."

"얘가 먼저 선수쳤을 뿐이야. 내가 왜 문제가 되냐?"


우기면 장땡이다.




3. 상대를 다르게 프레이밍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와 개자식을 엮어서, 혼성시킨 다음에,

가치를 폄하시키는 등,

의도적으로 관념을 변형시켜서, 뭔가 접근하기 쉬운 상태로 만들어놓는 것이다.


예컨대

칸트가 독창적이라고 하는데

칸트의 아이디어는 대개 중세에서 이미 논의된 것들이라고 한다.

그러면 칸트도 크게 독창적이진 않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그의 시학이 아주 강력한 이론서이긴 하지만

사실 그건 소포클레스가 없으면 쓰여질 수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도 사실 겸손한 사람에 해당할 뿐이다.


이것의 핵심은 '접근하기 쉬운 상태'로 바꿔놓는 것이다.

그러면 접근이 쉬워진다.


가장 좋은 방법은,

상대를 비하하거나 (가치폄하)

상대의 것이 유일한 게 아니라는 것을 자각하거나 (상대의 역사를 보는 것)

상대의 것에 오류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면

쉬워보인다.


도도한 여자는 차가워 보여서 ...

회원가입만 해도
이 글을 무료로 읽을 수 있어요.

Basic 7일 무료 체험 시작하기
이미 계정이 있으신가요?로그인하기
댓글 0개
아직 작성된 댓글이 없습니다.
철학 카테고리의 다른글

타인의 생각을 훔치는 방법

[기술가능성과 태도] 아래의 글을 읽엇다는 전제 하에 시작한다. 인간의 기호는 어떤 사태에 충돌하여 대처가 있었다는 사건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기호가 발생되었다는 것은, 선택적 행위로 인한 것인데, 그 중에서 기호를 채집하고 선별하여 이어놓은 것에 해당한다. 이 작업을 손수 한 것이 \'발화\'라는 것이다. 따라서 한 사람의 글을 읽을 때는, 이러한 \'행위\'를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이걸 읽지 못하면, 그는 다른 것을 읽게 되는 셈이다. 이걸 알고 모르고에 따라 독해하는 방식은 천차만별이다. 전에도 말했듯이 관점에 의해 글이 나오지만 그 글은 관점에 의해 해독된다. 따라서 관점을 중심에 두지 않는다면, A관점에서 썼지만 B관점에서 읽히는 사태가 발생한다. 이건 관점을 통제하지 못하면 막을 수가 없는 일이다. 예컨대 https://gall.dcinside.com/list.php?id=philosophy&no=108891&page=1&bbs= 이 글을 보자. 이 글에는 마치 자신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것처럼 보이지만 이것역시 사태에 대한 자신의 충돌을 보여주고 있다.  어떤 결정을 하는데, 그 결정의 근거가 뭐냐? 이런 물음을 던지면서 잘 보면 \'한다한다한다\'가 밀집되어있다, 이런 얘기를 하고 있다. 사실 이게 바로 그가 선택한 \'술어\'에 해당하는데, 이 부분이 이 사람의 태도에 해당한다. 즉, 이게 바로 \'결정\'이라는 사태에 대해서, 저 사람이 반응하고 있는 방식이다. 이 때에 저 사람이 선택한 방식이 곧 저 글에 나타난 기호들로서 나타나 있다. 만약에 이런 식으로 글을 읽지 않는다면 저것은 단순한 어떤 진리체계로서 전달될 수도 있다. 누군가가 논증을 했고 나는 근거를 찾아야 되고, 그에 대해 평가해야되는 초보적인 수준의 분석으로 가게 된다. 하지만 행위로서 접근하게 되면 저 사람이 사태에 대해서 어떤 충돌의 형태를 보이는지 보게 되고, 그것을 태도로만 받아들이게 되어, 내가 저 사태와 충돌할 때 살필 수 있는 하나의 유형으로 보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저 사태에 마주할 때, 저런 태도를 로딩할 수도 있고, 아니면 로딩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것은 로직을 한차원 업그레이드한 방식이다.  왜? 타당성은 기본으로 갖고 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건전성을 따지는 일에 몰두하지 않는다. 오히려 실천을 전제하여 실용성을 따진다. (또는 내게 적합한지 나에로의 적합성을 따진다.) 한 사람의 견해는 솔직히 말해서, 그저 견해일 뿐이다. 그것은 진리체계가 아니라, 진리에 대한 증명이 아니라, (한다 하더라도 처음에는 그렇지 않다. 진리증명은 이후에 사후적으로 판단되는 것이다.) \'견해\'에 해당한다. 그냥 내가 보는 바, 그렇다는 것이다. 즉 사태에 대한 일단의 나의 대처방식이다. 일단 이렇게 깔고 들어간다. 이 때에 상대의 이야기는 가치가 폄하되어 있는 상태다. 그는 필시 이렇게 반응할지도 모른다. "니가 이 글에 깔려있는 함의는 알기는 아냐?" 이것은 필시, 그가 상처받았다는 뜻이다. 생각을 훔치는 방법은 크게 2가지로 이뤄진다. 1. 도려내기 2. 튜닝하기 도려내기란, 한 사람의 태도를 도려내어 가져가는 것이다.  앞서 기술가능성과 태도에서 말했듯이,  저 패턴을 머리속에 환기시킨다음에, 해당되는 것을 집중적으로 찾아내서, 각각에 조각칼을 꽂고, 긁어서 파내가면 된다.  이 비유가 와닿길 바란다. 여기서 얻어야 될 것은, 한 사람이 사태에 대해서 어떻게 판단을 내리고 있는가? 그걸 가져가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그것을 내 몸에 이식시킨다. 근데 이 순간 저항이 일어난다. 일단 뉴런의 배열에 맞지 않는 새로운 것이기도 하고, 또한 낯선이의 것이라는 점에서, 에고가 격하게 저항을 보인다. 에고는 나의 것만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에고가 유일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게 있는데 그것이 권력적인 것, 뭔가 동경할 수 있는 것, 매혹적인 것, 허락받은 것,  이런 것들이다. 도려낸 것에 대해서 에고의 저항을 가라앉히는 관념의 작업 이것이 튜닝하는 것이다. 즉 상대의 것이라고 생각되는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그저 하나의 생각에 불과한 그것을) 나의 것으로 또는 괜찮다 괜찮다 ...
철학
2025. 03. 30
0
0
6

기술가능성과 태도에 대해서

밑에 글이 되게 기니까 이거를 보자. 기술가능성이란 무엇이냐? 단순하다. 기술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말한다. 위의 그림을 보고 저게 뭔지 설명해보려고 해보자. 가능한 많이 해보려 해보자. 나는 다음과 같이 해본다 - 타이어 - 자갈돌이 놓인 것 - 건축모형 - 송편 일단 나는 저 그림을 보고 다음의 단어들을 뽑아냈다. 이 '뽑'아내다. 라는 표현이 좀 중요한데, 풀이하는 것일 수도 있고 뽑아내는 것일 수도 있고 규정하는 것일 수도 있는데 어쨌건 뭔가 뽑혀나오는 느낌이 있기는 하다. 역시 이것도 기술가능성이다. 나는 이 과정에 대해서 수많은 표현 가능성 중 '뽑아냈다'란 단어를 선택한 것이다. 밑 글에 언어를 쓴다는 건 '선택적 행위'라고 표현을 했는데 그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리고 지금처럼 어떤 사태에 대해서 이런 기술가능성을 가진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사람마다 이 가능성 중에서 택하는 것이 어느정도로 한정되어 있고 바로 이러한 선택이 곧 그의 태도와 관련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내가 말한 것 중 한 사람에게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이러한 태도에 있다고 말한 것은 기술가능성 중에서의 선택이자 그의 판단기준에 있단 얘기를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뽑아낼 수 있는 더 다른 표현들도 많겠으나 일단은 ...
철학
2025. 03. 28
0
0

한 사람에게서 알 수 있는 것은 태도가 유일하다

몇 가지 용어를 생각해봤는데 태도를 메인 용어로 쓰고 나머지를 유의관계로 끌어넣는 게 편리하겠단 생각을 해봤다. 후보가 되었던 단어는 다음과 같다 판단기준 접근방식 방법론 관점 어제 썼던 단어는 관점이란 표현이었다. 물론 이걸 써도 되는데,  좀 더 대응하는 느낌으로 표현하고자 '태도'란 표현을 썼다. 입장이라고 해도 되는데 이건 너무 이론적인 느낌이 들고 태도라고 해야 앞으로 쓸 내용과 연관되기 때문에, 이렇게 해두는 게 낫겠다고 봤다. 결국 사유를 한다는 건, 의식의 거미줄을 짜놓는 것이다. 그 다음에 그 위에서 노니는 것이다. (인스톨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어제 썼던 글과 연관짓자면 관점이 안에서 나오는 것이고, 이것들을 종합해서 명명한 것이 태도라고 보면 될 것이다. 그렇게 해도 되고 아예 다짜고짜 '어떤 태도로 접근하는가?'라는 식으로 취급해도 무방하다. 말놀이에 가깝다. 언어가 나오는 과정을 보자. 이에 대해서 반박하고 싶으면 반박해도 되는데, 합당한 근거를 제시하지 않으면 무시한다. 나는 언어가 다음의 과정을 밟고 나온다고 간주한다. 1. 사태 2. 직관/사유 3. 발화 직관과 사유가 일어날 때, 관점이라는 것이 부여될 것이고 그에 따라 발화가 연관될 수도 있다. 여기에 전제를 4개 넣는다. 첫째 - 언어발화는 직관/사유의 결과다. 둘째 - 언어발화는 규제적 행위로써 '언어라는 형식'을 선택한 행위다. 셋째 - 이해의 기본은 유추에 있다.  넷째 - 사고는 유형이 있다. 언어와 관련된 사고는 그 중 일부이다. 따라서 사태 자체와, 인간의 인지, 그리고 언어의 형식 이 3가지가 합쳐지는 일이 발생한다. 그리고 이것의 본질은 선택적 행위이고, '형식'에 따라 질서가 잡히는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에 언어의 형식을 따른다면, 언어의 형식이 갖고 있는 기능들을 일부 따라야된다는 얘기가 되기도 한다. 또한 이것은 인지의 문제도 연관이 되는데, 이것은 인지와 언어를 엮은 상태에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인간이 이해하는 방식은 유추에서 찾을 수 있다. 근데 여기에는 논의가 확장되는 걸 줄이고자, 언어는 유추적 사고가 결정적으로 작용한다고 해둔다. 예컨대 어떤 것을 이해한다는 건, 유추를 해서 파악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자. 기저영역에서 목표영역으로 사상되는 것이 유추다. 달리 말해 기저(소스)가 되는 것을 음미하면, 그것이 곧 목표에 해당하는 것이다. 라고 취급하는 게 유추적 사고방식이다. 인생은 마라톤이다. 이 문장은 마라톤의 이모저모를 품으면, 그것이 곧 인생과도 같다는 식의 사고방식을 보여준다. 마라톤(기저)로, 인생(목표에 해당하는)이라는 것을, 음미하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유추로서 이해가 일어나는 방식이다. 왜 언어는 유추적 사고가 결정적인가? 다음의 것을 보자. 의미(기저) - 형태(목표) 달리 말해서, 의미를 덮은 게 형태인데, 그 형태를 이해하려면 의미를 이해하는 게 문제가 된다. 근데 이걸 어떻게 이해하느냐? 그것은 의미 부분에 해당하는 걸 기저로 삼고, 그것을 형태로 사상을 시키면, 자연스럽게 해결이 된다. 어원을 이해하는 것을 생각해보자. '晶은 별을 가지고 만든 것인데, 상형문라고 하는 이것도 지시대상인 별을 기저로 삼고, 이를 토대로 사상을 하면, 晶이 기호가 이해가 된다. 한마디로 晶 자체를 보면 이해가 되지 않지만, 별을 보면 이해가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종범'이라는 단어도, 종범 이라는 기호형태 자체를 보면 이해가 되지 않지만, 이것의 유래를 접하게 되면, 그 유래로 인해서, 이 '종범'이라는 형태가 이해가 된다. 유추적 사고방식이 본질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SP는 결국 유추에 해당한다. S를 P로 풀겠다는 것은 P를 기저로 삼아라는 얘기다. 근데 여기에는 좀 문제가 있다. 우리가 단어를 쓸 때에, 단어를 즉석에서 만들어서 쓰는가? 아니다. 우리는 기존에 있던 단어를 가지고서, 그 순간 필요에 의해 결합한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기억이 개입된다는 것이다. 그 단어를 기억하고 있지 않으면 쓸 수가 없다. 그러면 무엇을 기억하는가? 몇 가지 제안들이 있어왔다. 의미. 용법. 등등. 여기에서는 '기저'를 기억한다고 해둔다. 달리 말해, 이것은 사태에 대한 효과를 기억해두는 것이다. 문장을 만든다고 하는 것도 여러 제안이 있어왔다 결합한다는 입장도 있고 풀이한다는 입장도 있어 왔다. 여기에서는 '사태에 대한 직관과 사유'라는 점에서 접근하며, 또 여기에 기저-목표의 사상과 기억과 인출이라는 점에서 접근한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선택적 행위'라는 점에서 접근한다. 이렇게 접근할 때 언어를 쓴다는 것은 사태에 대한 직관과 사유이자, 형식의 선택이고,  그것은 기억과 기저와 관련된, 선택적 연결이라는 것으로 가게 된다.  또한 형식의 선택인 만큼, 형식의 규칙에 맞게끔 접근할 수 밖에 없다. (좆대로 쓸 수 없단 얘기다.) 가장 대표적인 건 S와 P가 되는데, 형용사와 부사구는 P에 해당한다 착각하면 안되는데 SP가 2개의 슬롯을 가진다고, 부사구가 어떻게 저기 들어가느냐? 물음을 던질 수 있는데 이건 착각이 심한 경우다. 부사구는 P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관계를 쓰다 보면, 부수적으로 필요한 것들이 있다. '간다'라고 표현할 때, 여기에는 '어디에서 어디로?'라고 물음을 던질 수 밖에 없다. 이것도 표현해줘야 된다. 이걸 표현해주면 부사구가 추가되는 것이다. 다른 것은 없다. 그러니 이것도 P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되, 메인이 아닌 것으로 보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도 언어라는 사태에 대한 접근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여기에 또 문제가 추가되는데 의식 관점 태도 입장 이런 ...

푼크툼으로 보느냐? 스탠더드로 보느냐?

모든 문제는 관점에서 환원된다. 내가 무엇을 어떻게 보았는가? 이것으로 환원된다는 얘기다. 어떤 것을 사물로 보는 관점이 있고 사건으로 보는 관점이 있고 체험으로 보는 관점이 있다. 위 3가지가 가장 추상층위에 해당한다면 만만치 않게 문제되는 것이 사회의 관점에서 보느냐? (일반적 기준) 개인의 관점에서 보느냐? (개인적 기준) 이 두 가지가 문제가 된다. 이것을 '스투디움(스탠더드)로 보느냐? 푼크툼(개인의)으로 보느냐? 이 2가지로 접근해보자. 일단 스투디움과 푼크툼이 뭔지 정의부터 내려보자. (다음은 퍼온 것이다.)  "나는 이런 사진들에 대해 때로는 감동적인, 일종의 일반적인 흥미를 느낄 수도 있지만, 그러나 그 감동은 도덕적 . 정치적인 교양이라는 합리적인 중계를 거친다. 내가 이 사진들에 대해 느끼는 것은 거의 길들이기에 가까운 '평균'감정 상태에 속한다... 그것은 스투디움이라는 말인데 무엇에 대한 전념, 누군가에 대한 호의, 즉 일반적인 정신 집중을 의미한다. 여기서 스투디움은 코드화될 수 있는 것을 가리킨다. "두 번째 요소는 스투디움을 깨뜨리기 위해 혹은 스투디움과 박자를 맞추려고 온다. 이번에는 내가 이 요소를 찾지 않고 그것 스스로가 마치 화살처럼 사건의 현장을 떠나 나를 꿰뚫기 위해서 온다. 이 낙인들, 이 상처들은 점이다. 이 요소를 나는 푼크툼이라고 하겠다. 왜냐하면 푼쿠툼은 그 자체가 나를 찌르는, 또한 나를 상처 입히고 주먹으로 때리는 이 우연이다."  "사회는 사진을 길들이려 하고, 사진을 바라보는 사람의 얼굴에서 끊임없이 폭발하는 사진을 예술로 만드는 것인데. 왜냐하면 예술은 결코 광기가 없기 때문이다. 사진을 길들이는 또 다른 방법은 일반화시키고 군생시켜 진부하게 만드는 거인데, 그렇게 함으로써 사진은 스스로를 표지할 수 있게 된다. 광기를 택할 것인가, 분별을 택할 것인가? 사진은 전자도 될 수 있고, 후자도 될 수 있다... 사진의 두 길은 그와 같은 것이다. 그 광경을 완전한 환상의 문명화된 약호에 종속시킬 것인가, 아니면 그것을 통해 완강한 형실성의 깨어남과 마주칠 것인가는 내 자신의 선택에 달린 일이다" 위의 글에서 마지막 문장에 주목하자 결국 이것은 [내 자신의 선택]에 달린 길이다. 무슨 선택인가? 관점의 선택이다. 3가지를 더 추가해서 논의해보자. 그것은 다음과 같다. 사물의 관점 사건의 관점 체험의 관점 철갤에서 어떤 사람들은 글을 쓰는데 '사물의 관점'을 택해서 쓴다. 사실 대개의 사람들은 사물의 관점에서 쓰는데 익숙하다. 그래서 당위론이라던가, 일반론을 주로 하는 경우가 많은데,  우선 이것의 특징부터 보자. 그런 사람들의 글은, 필연적으로 실체-속성으로 나타나게 된다. 마치 어떤 것을 규정하는 것과 같다. 규정적 행위. 그것은 사물의 관점을 택해야 나오는 것이다. 그것은 변화가 있는 곳에, ...
철학
2025. 03. 28
0

스토리란 무엇일까?

http://terms.naver.com/entry.nhn?cid=272&docId=1530367&mobile&categoryId=272 간단한 사전적 정의는 다음과 같다. [이야기(어떤 사물이나 사건, 현상에 대해서 일정한 내용을 가지고 하는 말)] 근데 여기서 [에 대해서] 라고 하는 부분을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는데 이것은 어떤 현상 또는 표상 이라는 덩어리와, 존재가 만나는 지점을 말한다. 라쇼몽이나 라이프 오브 파이로 예를 들면 더 이해가 빠를 것이다. 여기에는 진술자가 들어간다. 진술자의 존재가 없을 수가 없다. 이해관계도 빠질 수가 없다. 라이프 오브 파이가 감동적일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그 영화를 잘 생각해보면 문제가 있다는 걸 쉽게 알 수 있다. 진술자는 파이 밖에 없다. 내용과 구성은 파이에 의해서 잡히는 것이고, 여기에 요리사의 입장은 부재한다. 따라서 라쇼몽식으로 재편집을 하면, 이제는 파이가 범인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가 어떻게 왜곡했는지는 알 수 없기 때문) 이야기 자체도 진술자의 정체에 따라 그 배열 방식이 상당히 달라진다. 그러할진대, 이야기에 대한 이론, 입장,  역시 마찬가지다. 실제로 똑똑하고 못하고를 가리는 건,  보유한 지식 정도가 아니다. 그건 사전으로 기록하면 될 일이지 굳이 머리속에 집어넣고 다닐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필요한 건 정리할 수 있는 능력, 꺼낼 수 있는 능력이다. 한마디로 지식'에 대해' 대처하는 능력이다. 이 '~에 대해'라는 키워드를 중점으로 생각하고 이야기를 들여다보자. 그리고 이것 역시, 하나의, 입장이라는 것을 주목하길 바란다. 이야기에 대한 정의는 많다. 어떤 사건에 대한 진술이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균형을 잃은 사람이 회복하는 것에 대한 은유, 이런 쪽으로 정의내리는 사람도 있고, 어떤 시대를 알게 해주는 창' 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내 입장은 좀 다르다. 들어가기 앞서, '~에 대해'라는 걸 인정하고 들어가야된다는 것인데,  그렇다는 말은, 이미 스토리를 말하기 전부터, 편견(선입관)을 깔고 들어간다는 것을 자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야기에 대한 어떤 정의를 내리기 전에 자신이 어떤 입장을 선제하고 있는지부터 알아야, 그 자신이 계속 지속적으로 관련 증거를 찾아내고 정당화시키려는 행동의 동기를 알게 된다는 것이다 이야기가 카타르시스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미 그 순간부터, 해당되는 증거들을 찾으려고 들어갈 것이고, 또한 이야기 속에서 그걸 구현해내려고 할 것이고, 흄의 말대로, 평가방식대로 습득방식을 권장하게 되는 사태가 생긴다. 이것은 곧 재귀성과 연관되며, 스토리는 계속 그러한 틀을 답습하는 전개를 보이게 된다. 왜? 선례가 그걸 요구하니까 그런갑다 하고 따라가는 것이다. 따라서 강화되고, 세습된다. 인물의 행동 자체를 중점으로 본다면 어떤 입장을 가질 수 있을까? 내 생각에는 '선택'이다. 이것은 한마디로 '의사결정'에 대한 것이다. 스토리를 그 다른 이론을 접목시키지 않고, 행동 자체만을 본다면 이것은 '의사결정'이 주가 되는 것이고, 이후에 여기에 실수나 착오가 달라붙고 억압이 달라붙는 것이다. 하지만 근원은 의사결정이다. 모든 것의 으뜸이 되는 스위치는 '의사결정'이고, 의사결정 때문에 나타나는 문제들이 실수, 착오, 억압, 분출, 같은 것이다. 왜? 내가 선택을 내릴 때에 정보가 잘못 되었을 수도 있고, 그걸 모른채로 판단할 수도 있고, 그래서 뒤늦게 알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당신의 삶에서 이런 일은 얼마나 많은가? 여자친구가 좋아하는 거라고 짐작해서 샀다가 여자친구가 깬다면서 헤어지자고 할 때, 당신은 그 때 하마르티아를 범한 것이다. (그래서 이런 것은 사후적으로 알게 된다. 당신은 작품을 읽을 때 전체를 조망하는 식으로 읽어선 안된다. 오이디푸스가 병신이라서 그렇게 실수를 한 게 아니다. 그 순간에는 정보가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에 판단의 재료가 별로 없는 것이다. 당신의 현재 상황과 다를 게 없다. 이 말에 반박하고 싶으면, 지금 당장 주식을 해봐라.) 여기에 어떤 사회학 이론이나 심리학 이론을 덧붙이지 말자. 그것들은 다 '~에 대해' 연구한 것을 기록해놓은 것이고, 달리 말하면 어떤 경향성이나 방법에 대한 기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이 재귀적으로 다시 적용되는 경우는 있다 하더라도, 앞서 말했지만 나는 지금 그것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근원을 먼저 보자. 모든 것의 최초의 위치에 자리하는 그것을 보자는 것이다. 그럴 때에 우리가 '스토리'라고 말하는 것의 지시부분은, '의사결정'으로 되어있음을 알 수 있다. 액션(쌈질)은 그 의사결정 과정에서 벌어지는 하나의 덤 같은 것이다. 내가 결정을 내렸는데 누군가가 그 결정이 자신에게 방해가 된다고 여겨서 시비를 걸고, 당신은 그 시비에 방해를 느끼고, 두 사람이 타협이 안되는 순간 주먹이 나가는 것, 어떻게 보면 그게 쌈질이다. 이것도 의사결정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스토리 이것을 다른 말로 써도 무방할 것이다. 그런데, 어쩌면, 바로 이 스토리 자체에 해당하는 으뜸을 바로 바탕에 깔고, 하나의 '관'으로 취급해도 무방할거라고 본다 어차피 당신이 지금 이 시점에서 의사결정을 한 것을 가지고 복기를 하게 되면, 그것은 하나의 전 사건이 되고, 그것을 언급하는...
8
기술가능성과 태도에 대해서
철학
2025. 03. 28
1
3
12
0
7
철학
2025. 03. 26
0
0
14